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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과 상대성 이론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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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과 상대성 이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광파는 과연 에테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일까?

현대 물리학의 분야 중에서 상대성 이론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물리학의 근본적 원리가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처음으로 인식된 것은 바로 이 상대성 이론에서부터였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에 의해서 야기된 문제점 그리고 그것에 의해 해결된 문제들을 논의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의 철학적 의미를 다루는 데 필수적이다. 상대성 이론은 양자론과는 달리 문제가 제기된 초기에서부터 이론 완성까지의 시간이 매우 짧게 소요되었다. 1904년 몰리와 밀러는 마이컬슨의 실험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광학적 방법으로는 지구의 공전 운동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최초로 증명하였다. 동시에 2 년도 채 안 되어서 그 증명을 다시 확인하는 아인슈타인의 결정적 논문이 발표되었다.

 

몰리와 밀러의 실험과 아인슈타인의 초기 논문은 상대성 이론이 발전하게 되는 시초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의 이론은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전기 역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확실히 '움직이는 물체에 관한 전기 역학'은 물리학에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기 모터가 만들어진 이후 공학에서도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광파에 관한 전자기의 성질이 맥스웰에 의해서 발견됨으로써 이 분야에 심각한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전자기파는 음파와 같은 일반적인 파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선 전자기파는 매질(媒質)이 없는 빈 공간에서도 전파가 가능하다. 진공 상태의 용기 속에서 종소리를 내면 그 소리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나 빛은 진공 중에서도 전달되며, 유리와 같이 투명한 물질을 쉽게 통과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기나 물과는 다른, 보이지도 않고는 껴지지도 않는 아주 가벼운 에테르라는 매질을 설정하고, 광파는 이 매질을 통과하는 탄성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875년 로렌츠가 밝힌 바에 의하면 빛은 횡파이며, 이 점으로 보아 광파는 고체와 같이 견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물체들의 운동에 어떠한 저항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전자기파가 그 자체로서 어떤 물질과 독립된 실체라는 생각은 아직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런데 에테르와 같은 가상적 물질이 다른 물질 속으로 투과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 물질이 운동을 투과한다면 어떻게 광파가 운동하는 에테르 속으로 전파되는가?

이 문제와 관련된 실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다루기가 무척 곤란하다. 즉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는 광속과 비교해서 너무 느리다. 따라서 이런 물체의 운동은 광속에 대한 물체의 속도비 정도의 아주 작은 효과만을 낳게 된다. 윌슨, 로우란드, 뢴트겐, 아이헨발트, 피조 등에 의해 행해진 몇 차례의 실험을 통해서 이 비에 해당하는 정확한 값의 효과를 측정할 수 있었다. 1895년 로렌츠에 의해 발견된 전자 이론은 이 효과를 아주 만족스러울 정도로 기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마이컬슨, 몰리, 밀러의 실험은 새로운 상황을 낳았다.

이 실험은 좀더 상세히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다. 좀더 큰 효과를 얻고 따라서 좀더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아주 빠른 속도를 갖는 물체에 대해서 실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초속 30km의 속도로 공전 운동한다. 만약 에테르가 태양에 대해서 정지해 있고 따라서 지구와 더불어 움직이지 않는다면, 지구에 관한 에테르의 속도는 지구의 운동에 따른 광속의 변화만큼이나 클 것이다. 이 속도는 빛의 방향이 에테르의 운동방향과 평행인지 아니면 수직인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에테르가 부분적으로 지구와 같이 움직인다 하여도 에테르 폭풍에 의한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은 확실하며, 그 효과의 크기는 시험이 행해지는 곳의 해발 고도에 좌우될 것이다. 그 효과의 크기는 광속에 대한 지구 속도비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에 그 값은 매우 작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구의 운동 방향에 대하여 평행인 빛과 수직인 빛 사이의 간섭 효과에 대해 주의 깊은 실험을 해야만 한다. 이런 종류의 첫 번째 실험이 1881년 마이컬슨에 의해 실행되었으나 그 결과는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 후 반복되는 실험을 통해서도 세밀한 측정은 불가능하였다. 특히 1904년 몰리와 밀러의 실험은 큰 값을 갖는 예상 효과가 있을 수 없음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였다.

뉴턴의 '상대성 원리'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뉴턴 역학에서의 '상대성 원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만약 어떤 기준계(system of reference)에서든지 역학 법칙이 동등하게 작용된다면, 한 좌표계에서 성립되는 등속 직선 운동은 기준 좌표계애서도 성립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달리 말해서, 한 좌표계 속에서의 등속 직선 운동은 새로운 역학적 효과를 전혀 산출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런 효과를 관찰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고전적 상대성 원리는 광학이나 전기 역학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한좌표계가 에테르에 대해 정지해 있다면 다른 좌표계들은 정지 상태가 아니며 따라서 에테르에 대한 다른 좌표계들의 운동은 마이컬슨에 의해 예측되었던 효과가 나타나야만 한다. 1904년 몰리와 밀러에 의해 실시된 위에 실험에 대한 부정적인 결과는 그와 같은 상대성 원리가 뉴턴 역학에서와 같이 전기 역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부활시켰다.

한편 상대성 원리와는 모순된 결과를 낳는 실험이 1851년 피조에 의해 실시되었다. 피조는 움직이는 액체 속에서 광속을 측정하였다. 만약 고전적 상대성 원리가 옳다면 움직이는 액체에서의 실제 광속은 액체의 속도와 정지 액체 사이에서의 광속을 합한 값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피조의 실험은 실제 속도가 약간 더 느리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에테르에 대한' 실험의 부정적 결과는 이론 물리학자와 수학자로 하여금 빛의 진행에 관한 파동 방정식과 상대성 원리를 조화시킨 새로운 수학적 해석을 유도하게 하였다. 1904년, 로렌츠는 이 같은 요구를 충족시킨 수학적 변환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운동하는 물체가 그 물체의 속도에 의존하는 변수에 의해서 그 운동 방향으로 축소되고, 또한 시간의 길이도 변하며, '실제' 시간과 '외간상' 시간 간의 차이가 생긴다는 가설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그는 상대성 원리와 비슷한 이론을 제시하였다. 빛의 '외간상' 속도는 모든 좌표계에 대하여 동일하다. 이와 유사한 생각은 뽀앵가레와 핏제랄드 그리고 다른 물리학자들도 논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환점은 1905년 아인슈타인의 논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로레츠의 '실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폐기하고 그 대신 로렌츠 변환식에 의한 '외간상' 시간을 설정하였다. 이것은 물리학에서 근본적인 변화였다. 이 변화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며 매우 급진적인 것이였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젊은 용기와 혁신적인 천재성을 요구하였다. 자연에 대한 수학적 변환에 있어서 로렌츠 변환식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로렌츠 변환식을 새롭게 재해석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구조는 변화를 가져 왔으며, 물리학의 많은 문제들의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상대성 이론의 조명 아래 구축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구조는 물리학의 다른 분야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운동하는 물체에 대한 전기 역학은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은 전기 역학이나 일만 역학뿐만 아니라 다른 유의 법칙까지도 포용하는 매우 일반적인 자연 법칙이다. 법칙은 등속 직선 운동에 의해서만 서로 다를 뿐, 모든 기준 좌표계에 대해서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로렌츠 변환식에 대해서도 불변이다.

질량과 에너지 등가 원리

아마도 상대성 이론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론은 에너지와 관성, 즉 질량과 에너지가 동등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광속은 물질적 경험의 속도를 훨씬 넘어서 있는 속도이기 때문에, 정지 상태의 물체를 가속시키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물체를 가속시키는 일이 더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관성은 운동 에너지와 더불어 증가한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에너지의 모든 종류는 관성, 즉 질량과 항상 연관되어 나타난다. 주어진 에너지에 해당하는 질량은 에너지를 광속의 제곱으로 나눈 값과 같다. 결국 모든 에너지는 질량을 수반한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에너지일지라도 그것은 아주 적은 질량으로 환산된다. 이로써 질량과 에너지 사이의 관계가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질량 보존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그 각각의 독립적인 적용 범위에서 벗어나 에너지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단일한 법칙으로 통합되었다. 상대성 이론이 처음 등장할 무렵, 질량과 에너지가 등가를 이룬다는 가설은 물리학에서 아주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가설에 관한 실험적 증명이 이루어진 것이 별로 없었다. 오늘날 소립자가 운동 에너지로부터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리고 그런 입자가 붕괴하여 방출되는 과정은 어떠한지에 대해 많은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 이제는 에너지가 질량으로,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되는 일이 쉽게 이루어 지고 있다. 원자탄 폭발시의 가공할 만한 에너지 방출은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타당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증거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역사적 관점에 주목해 보자.

원자탄 폭발시의 가공할 만한 에너지는 질량이 에너지로 직접 변환되기 때문이라고 말해져 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에너지 양을 예측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상대성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오해를 일으키기 수비다. 원자핵으로부터의 엄청난 에너지 방출은 베크렐, 퀴리 그리고 러더퍼드의 방사선 붕괴에 관한 실험을 통해서 처음 알려진 것이다. 라듐과 같은 원자는 붕괴할 때 같은 질량을 갖고 있는 일반 원소의 화학 반응에서 나오는 열량에 비해 백만 배 이상의 열을 방출한다. 우라늄의 분열 과정 속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근원은 라듐의 α붕괴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근원과 같다. 즉 핵이 두 부분으로 분열할 때 분열된 두 부분 사이의 정전기적 반발력이 바로 에너지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원자탄 폭발시의 에너지는 단순하게 질량이 에너지로 변했다기보다는, 앞서 말한 정전기적 반발력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방출된다고 설명된다. 일정한 정지 질량을 갖고 있는 소립자의 수는 폭발 도중 감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원자핵에서의 결합 에너지를 통해서 입자의 질량이 증가한다. 에너지 방출은 원자핵의 질량 변화에 관계되는 이 같은 간접적 방식에 의한다.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 원리는 물리학적 중요성 이외에 전통적인 철학적 질문에 관한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실체 또는 전자는 더 이상 분할되거나 붕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과거 오랫동안 여러 철학 분야에서 다루어온 주제였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는 양성자는 중성자 같은 소립자들이 붕괴되기도 하고 빛으로 변환되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실험이 행해졌다. 그렇다면 현대 물리학의 등장이 과거 철학 체계에 대한 반증을 의미하며 또한 그것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고대 혹은 중세 철학에서의 '실체'와 '물질'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현대 물리학에서의 '질량'이라는 용어와 동일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에, 위와 같은 단언은 확실히 성급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결론이다. 만약 오늘날의 결과를 과거 철학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한 '실체'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라고 생각될 수 있다. 따라서 실체 개념의 불변성(비파괴성)을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 지식을 과거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과거의 철학 체계는 그 당시의 지식으로부터 또한 그러한 지식을 근거로 한 사상 체계로부터 형성되었다. 확실히 수백 년 전의 철학자들에게서 현대 물리학이나 상대성 이론의 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과거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지성적인 탐구 과정을 통해 이루어 놓은 개념들을 갖고서 우리 시대의 첨예한 실험에 의해서만 관찰될 수 있는 많은 현상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

탐구를 위한 학문이 태어난 이래 인간 정신은 계속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공간이 무한한가 아니면 유한한가? 시간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그러면 그 시작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시간의 끝이 있는가? 그러면 그 끝 후에는 무슨 일이 있겠는가? 아니면 시작도 끝도 없는가?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각기 다른 철학 사상, 그리고 각기 다른 종교에 의해서 서로 다르게 추구되어 왔다. 예를 들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살펴보자. 우주의 시간은 무한히 분할되지만 그 총체적 시간은 유한하다. 공간은 물체의 외연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항상 물체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물체가 없는 공간이란 있을 수 없다. 우주는 지구와 해 그리고 별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즉 물체들의 유한한 집합체이다. 그래서 별이 모여 있는 천체 저 너머에 공간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우주의 공간은 유한하다.

칸트의 철학에서도 이 질문은 그의 '이율 배반'의 문제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로 다른 두 개의 논증이 대립적인 두 결론을 낳기 때문에 위의 질문들은 결코 해명될 수 없다고 한다. 공간이 유한하다면, 즉 공간에 끝이 없다면 그 끝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그 끝 너머로도 갈 수 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간은 유한할 수 없다. 동시에 공간('공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이며, 또한 무한 공간을 생각해 볼 수 없기 때문에 공간은 무한할 수 없다. 칸트의 두 번째 논증 방식은 언어적으로 직접 재현되지 않는다. '우주가 무한하다'는 표현은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 즉 우리는 공간의 끝에 도달할 수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 그 표현은 공간의 무한성이 실제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언어로 재현시키기에는 힘들지만 공간의 무한성은 '존재'한다. 결국, 총체적 우주가 인간의 경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공간이 무한한가 또는 유한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성적인 답변 또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시간의 무한성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신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신은 지옥을 준비하느라고 바빴다."라는 농담을 던질 수도 있었으나, 그는 위의 문제에 대해 이성적인 분석을 좀더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흐름은 우리와 같이 하며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시간은 미래로서 우리들에게 기대되며, 현재로서 순간을 느끼며, 과거로서 기억된다. 그러나 신은 시간 속에 있지 않다. 신에게 있어서 천 년은 하루와 같을 수 있고, 하루가 천 년일 수도 있다. 시간은 이 세계와 더불어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에게 있어서 우주의 전과정은 동시적으로 주어진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창조'라는 말은 매우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보통 이해되듯이, 이 말은 전에 없었던 무엇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창조라는 말은 시간의 개념을 전제한다. 결국 '시간이 창조되었다.'라는 문제에 의해 의미되는 바를 이성적인 용어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대 물리학에 대해서 다루어 왔던 논의를 다시 상기시킨다. 확실히 모든 용어나 개념들은 그 적용의 폭이 몹시 제한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도 공간과 시간의 무한성에 관한 이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런 질문에 대해 경험에 바탕을 둔 답변이 이루어져 왔다. 시간과 공간을 엮는 4차원 기하학과 우주의 질량 분포 사이의 관계가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라 올바르게 해석된다면, 공간 속에서의 항성 분포에 관한 천문학적 관찰은 우리들에게 우주 전체를 다루는 기하학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경험적 사실과 비교될 수 있는 우주론적 '모형'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경험적 사실과 비교될 수 있는 우주론적 '모형'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천문학 지식으로 미루어 보건대, 몇 가지의 가능한 모형들 사이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충만된 공간이 유한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위치에 가면 우주의 끝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단지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한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면 결국 출발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이 상황은 지구 표면에 관한 2차원적 기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지구 위의 한 지점에서 동쪽 방향으로만 계속 가면 결국은 그 자리에 되돌아온다는 경험적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시간에 관한 한, 그 시작점이 있는 듯하다. 많은 측정 실험을 통해서 볼 때, 우주의 기원은 대략 100~200억 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에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지금보다 훨씬 작은 공간 속에 몰려 있었고, 그 이후 우주는 계속 팽창되었다고 본다. 100~200억 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다양한 실험 방법에 의해서 확인된다. 우주의 기원에 관한 지금까지의 해석 방법 이외에 더 특별하게 본질적 차이를 보여 주는 이론은 없는 것 같다. 만약 획기적인 새로운 방법이 등장한다면 시간의 기원 문제는 본질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오늘날까지의 천문학적 관찰로 미루어 보건대, 거시 세계의 시공 기하학에 관한 질문들이 아직은 확실하게 답하여지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이 언젠가는 경험적 기반 위에서 답해질 것이라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여간 당분간은 일반 상대성 이론이 그 경험적 기반이 약한 편이어서 로렌츠 변환식으로 표현되는 특수 상대성 이론보다 확실성의 정도가 약하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어찌됐든, 상대성 이론이 시간과 공간의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켜 놓았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이 변화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면은 아마도 그 변화의 성격이 아니라 변화가 가능했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뉴턴이 자연에 대하여 수학적 표현을 함으로써 정의해 놓은 시간과 공간의 구조는 단순성과 무모순성을 지니며 또한 이상 생활 속에서 경험되는 시간, 공간과 매우 밀접한 대응성을 지니고 있다. 경험 세계와 매우 밀접하게 대응되었기 때문에 뉴턴의 정의 방식은 일반 개념을 엄밀한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다.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기 전, 뉴턴 역학에서는 공간과 시간이 서로 독립된 변수였다. 광속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느린 실제적 경험의 속도에서는 그 사실이 인정되었다. 상대성 이론에서, 사건의 순서가 사건이 일어나는 위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으나, 당시에는 그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기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칸트 철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취하는 관계 속에 내재된다고 보았다. 즉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자연 그 자체에 속하는 성질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의 세계를 기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시공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 '선험적이므로 경험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지, 경험의 결과는 아니다. 그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선험적이어서 외적 경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가 없었다. 상대성 이론이 가져온 변화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또한, 칸트 철학에서 벗어난 이와 같은 전환은 일상 생활의 개념들을 현대 실험 과학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가를 보여 준 최초의 계기가 된다. 뉴턴 역학의 수학적 언어 속에서 나타나는 시공 개념에 대한 엄밀하고도 무모순적인 공식이나 칸트 철학에서 나타나는 시공 개념에 대한 조심스러운 분석도 결국은 자연 세계에 대해서 예리하고도 정확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반성은 후일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통해서 재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의 등장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일상 생활의 경험 세계에서, 즉 고전 물리학에서 취하여 온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경종을 울린 셈이다.

상대성 이론의 재음미

상대성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한 개설서들은 매우 많다. 그러나 이 정도의 논의로써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아인슈타인이 처음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을 때, 심지어는 물리학자들까지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으니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만 여러분들은 상대성 이론이 어떤 과학적인 맥락에서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과학 또는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상대성 이론은 고전 역학의 수정이 아니라 고전 역학에서 사용한 논리나 자연을 보는 안목에 커다란 개혁을 일으켰다. 과학의 발달은 점진적이고 누진적인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고 방식 자체를 개혁함으로써 이룩된다는 토마스 쿤의 주장은 이 상대성 이론의 내용을 보아서도 옳은 것 같다.

뉴턴의 명성은 2세기를 넘게 우리 인간의 사고를 지배해 왔다. 이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매우 힘든 일이었음을 역사가 말해 준다. 호이겐스가 빛은 파동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뉴턴의 권위에 눌려서 그 주장은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 후 토마스 영이 빛을 파동이라고 입증했지만 그의 논문을 보면 뉴턴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조심하였는가를 느낄 수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요구한다. 갈릴레이는 자기의 새로운 아이디어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지 않았던가? 아인슈타인의 위대함이란 그의 명석한 두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는 사고의 자율성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제시해 준 사고의 유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하고,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고전 역학의 테두리 안에서는 나올 수 없는 생각인 것이다. 고전 역학에서 수백 년 동안 당연시 되어 오던 기본 가정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함으로써 위대한 새로운 이론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위대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또 지금의 우리 세대가 그 권위에 눌려서 참다운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스럽다. 기존 이론에 대한 계속적인 도전 없이는 발전 또한 없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자연 과학뿐 아니라 인간이 일하고 있는 모든 분야에 다 적용되는 원리라고 생각된다. 기존의 생각에 구속되지 않고 사물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는 힘,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이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있지만 그것을 보는 인간의 사각은 갖가지이고, 그 각각은 제각기 다 다소간의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것이다. 뉴턴도 아인슈타인도 일면의 진리를 말하고 있지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인류 문화의 꽃을 피우는 원동력이다.

'상대성 이론의 재음미'는 권재술 교수님이 하이젠베르크의 글 뒷부분에 따로 덧붙인 것입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독일태생으로 오늘날 양자 역학의 근원이 되는 매트릭스 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창시했고, 1932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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