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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 공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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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느냐?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을 교묘하게 하며 얼굴빛을 좋게 하는 자는 어지 사람이 드물다."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날마다 세 가지로 나 자신을 살피는데, 사람을 위하여 꾀함이 충성치 못하였는가? 벗과 사귀는 데 믿음이 없었는가?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였는가? 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란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공손하며, 삼가고 미덥게 하며, 널리 무리를 사랑하되 어진이를 친히 할 것이니, 이것을 행하고 남은 틈이 있거든 글을 매울 것이다.

 

자하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미색(美色)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며,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그 몸을 버리며, 친구와 사귀되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할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먹는 데 배부르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하는 데 편안한 것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 민첩하고 말을 삼가며,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바르게 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치 말고, 내가 날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 '시경' 삼백 편의 뜻을 한 말고 다한다면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에 뜻을 세우고 마흔에 모든 사리에 의혹하지 아니하고 쉰에는 천명을 알고, 예순에는 모든 일을 들어 저절로 알게 되고, 칠십 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것을 연역하여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견식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학문이 확고하지 못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도(道)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가한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을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을 생각하게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위가 없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설 곳을 근심하며,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기를 힘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니라."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옳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시거늘, 문인이 묻기를 "무엇을 이르신 것이냐?"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의 도는 충성과 용서일 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욕에 밝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모가 계시거늘 멀리 놀지 아니하며, 놀되 반드시 있는 곳을 밝혀야 할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는 것은, 몸소 실행함이 말에 미치지 못할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말을 더듬으나 행하는 데에는 민첩하고자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질구나 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심으로 누항에서 사는 것을 사람이 그 고생을 견디지 못하거늘, 회가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다, 회여!"

 

자공이 말하기를 "만일에 백성에게 널리 은덕을 베풀어서 능히 무리를 구제한다면 어떠합니까? 어짐이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인에 그치리오. 반드시 성인일 것이니, 요순도 오히려 어렵게 여기셨다. 어진 자는 자기가 서고자 하여 사람을 세우며, 자기가 달하고자 하여 사람을 달하게 한다. 능히 가까운 데서 터득하여 미루어가는 것을 인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자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의가 아닌 부귀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세 사람이 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는 것이니, 그 착한 것을 가려서 좇고, 그 착하지 아니한 것을 보고 나의 허물을 고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되 미쳐 가지 못하는 것같이 하며, 오히려 잃을까 두려워하라."

이해와 감상

 

"이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공자보다 더한 인물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우리 선생님을 살펴본 것으로는 그분은 요임금과 순임금보다 훨씬 더 훌륭하시다." 이것은 '맹자' '공손추장' 호연지기장(浩然之氣章)에 인용된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과 재아(宰我)의 말이다. 이렇게 공자를 극도로 숭앙하는 관념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전해 내려오는 공자의 언행과 업적을 살펴볼 때 공자는 과연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절대적인 숭앙을 받을 만한 인물이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공자는 현실적인 인간문제에 사고를 집중시켜 개인적인 인격 정립과 그러한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한 요리(要理)를 찾아내어 그것을 자신이 실천하기에 힘쓰고, 당시의 국군과 위정자들을 비롯한 영향력이 강한 지도층에게 기회 있는 대로 일깨워주고, 또 그를 사사하는 문인들에게 간곡하게 가르쳐 주었다. 공자는, 인(仁),을 윤리관에 있어서의 최고의 이념으로 내세웠고 그것을 사람답게 사는 데 요구되는 온순. 친절. 선량. 자애 등을 비롯하여 진정한 용기와 자발적인 겸양 등등을 포괄한 모든 덕성의 결성으로 제시하였다. 개인의 인격 정립과 사회의 원만한 운영은 개개인이 인(仁)을 절실하게 터득하여 그것을 실천하는 데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인격의 정립을 위해 열성을 다해 배우고 원만한 사회의 실현을 위해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효제(孝悌)라는 인(仁)의 기본되는 덕성부터 실천에 옮기고 그 정신을 확대시켜 충신(忠信)의 실천으로 벋어나가게 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였다. 그리고 공자는 충신의 실천에 있어서는 특히 의(義)를 강조했다. 의는 사회 전체의 복지를 기준으로 한 행위의 방향이라는 뜻으로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인의를 바탕으로 한 인격의 정립 여부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고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여러 모로 밝혔다.

사회의 원활한 운영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정치는 막강한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공자는 또 정치에 관해서도 절실한 관심을 가지고 깊이 파고들어 검토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방법 내지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현실정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정치에 종사하기를 희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공자는 전래의 문화를 정리하여 그것을 재평가하는 실로 획기적인 사업을 완수했다. 중국 고전은 공자에 의해 정착되고, 고전의 의의도 공자에 의해 부여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일이 공자 한 사람의 힘으로 정해졌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대성이 칭송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주희도 '중용 장구서'에서 이 점을 특히 탄미했다. "우리 공부자 같은 분은 비록 합당한 지위를 얻지 못하였기는 하나, 과거의 성인을 계승하고 미래에 배울 사람들을 계발하였으니, 그의 공로는 도리어 요순의 그것보다 훌륭한 것이 있다." 공자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힘을 기울여 중국의 교육과 학문의 전통을 확립했다. 이렇듯 공자는 윤리·도덕·사회·정치·역사·문화·학문·교육 등에 걸쳐 확고한 주견과 신념을 가지고 그 모든 일에 탁월한 업적을 쌓아올려 장례의 방향을 뚜렷하게 잡아 놓았던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주로 하고 그의 문도들의 그것도 다소 곁들인 책이다. 공자의 언행은 '논어' 이외의 전적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논어'는 공자의 제자 내지 재전제자(再傳弟子), 즉 공자를 받드는 전통파에서 정리를 가해서 엮어낸 것이어서 공자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기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논어'는 오경(五經)의 관건이고 육예(六藝)의 본령이다." 조기(趙技)가 그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한 말이다. 공자가 수립한 유학은 그 기본정신을 오경에서 도출하였고 육예를 그 수련과목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오경과 육예를 어떻게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와 연결시켜 그 의의를 부여하였는가 하는 것은 공자의 언행이 기록된 '논어'를 통해야 비로소 생생하게 터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조기의 그러한 말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하겠다. 반고(班固) 그의 '한서예문지서(漢書藝文志序)'에서 "중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분의 미언(微言)은 끊어지고 칠십 제자가 죽자 그분의 가르침의 대의가 어그러지게 되었다"고 했다. 미언(微言)은 깊은 뜻을 지녀 배우는 사람들이 쉽사리는 터득하기 어려운 말을 의미하는 것이고, 대의는 테두리가 되는 주요한 취지로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공문의 후학들에 의해 정리된 것이므로 거기에는 공자의 미언과 대의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논어'에는 '시경'에 관한 기사가 십여 장이나 되고 예교(禮敎)에 관한 것은 사십여 장이나 된다. 이렇듯 공문에서는 시와 예를 특히 중요시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논어'를 통독해 보면 육경(六經)전체에 걸친 의의와 정신이 공자를 통해 어느 정도 천명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논어' 이 십편을 통관(通觀)하면 대체로 앞의 십편은 설리적(設理的)인 내용의 것이 많고 뒤의 십 편은 기사적 내용의 것이 많다. 설리적인 것은 대체로 요점만을 따서 말한 것이므로 말이 간결하다. 기사적인 것은 자연 말이 길어지게 마련이다. '논어'를 편성할 때 간략한 기사는 뒤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내용이 비교적 조잡한 것이나 혼란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쉬운 것들은 역시 끝부분으로 돌린 것이다. '논어'는 말하자면 공자의 언행을 적은 진위가 뒤섞인 잡기 중에서 순수하고 틀림없는 것을 추려내서 편찬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 둘 어색한 것이 끼어 들어있다 해서 그것을 큰 결점으로 돌리 수는 없다. 그리고 정현 등의 정본작업도 대체로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논어'에는 공자의 탁월한 면모가 약여하게 나타나 있고 군색한 구석이 없다.

참고 자료

공자(孔子)(BC552 - BC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謖邑:지금의 山東省 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니는 안씨(顔氏)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徵在)이다. 아버지는 제(齊)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으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鯉)와,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六藝:禮 ·樂 ·射 ·御 ·書 ·數)에 통한 문인(門人)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敎人不倦’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

춘추 말기,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공자는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

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孟子)였으며, 또 전국(戰國) 말기에 순자(荀子)가 이파(異派)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漢)나라의 무제(武帝)가 유교를 국교(國敎)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鼻祖)로서 청조(淸朝)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吳虞]와 루쉰[魯迅]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陋習)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19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보조 자료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서 479년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시대는 중국역사에서 늘 말하고 있는 춘추시대의 말기, 곧 하(夏), 은(殷), 주(周)나라의 순서로 이어온 세 왕조의 마지막 주왕실이 전혀 그 권위를 잃어, 열두 제후가 패권을 다투었다. 거기에 그 제후마저도 내부적으로 부패되어 내란이 자주 일어나 거의 무정부적 혼란 상태를 빚고 있었던 시대이다.

주왕조의 정치 조직은 제후를 그 밑에 두고 따르게 했던 봉건제도였다. 그러나 유력한 제후의 대부분은 주왕실과 동족이어서 같은 종묘에다 제사를 함께 지내는 종족 관계로서 주왕실에 달려 있었다. 거기에 씨족을 달리하는 제후국 이하와의 사이에도 사직을 받들어 모시는 일로 연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봉건국가라기 보다는 오히려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종족국가라고 하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천자, 제후, 경(卿), 대부(大夫), 사(士), 백성이란 순서로 엄격하게 신분이 정해 있었다. 제사나 예법과 같은 것도 그 신분에 따라서 각각 그 규정이 있었으며 이를 문란케 하는 일은 국가의 질서나 도의를 어지럽히는 최대의 악덕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주공(周公)의 자손이 사는 나라로, 그 종묘에는 주공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주왕실의 중심 지역으로 정치와 도의의 수호신과 같은 성역으로 여기던 곳이었다. 공자는 이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주왕실의 모든 제도에 대하여 의혹을 품기는커녕, 이를 지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연구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춘추말기의 제후, 경, 대부의 하극상(下剋上)이나, 참언이나, 권력 다툼이나, 이기주의나 무력 항쟁 등에 대하여 깊은 우려와 노여움을 품고 있었으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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