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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道德經) / 노자(老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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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道德經) / 노자(老子)

무위자연(無爲自然)

 

제1장

① 말로 표상(表象)해 낼 수 있는 도(道)는 항구불변한 본연의 도가 아니고,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재의 이름이 아니다.

 

② 무(無)는 천지의 시초이고, 유(有)는 만물의 근원이다.

 

③ 그러므로 항상 무(無)에서 오묘한 도의 본체를 관조해야 하고, 또 한 유(有)에서 광대무변한 도의운용을 살펴야 한다.

 

④ 무(無)와 유(有)는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고 오직 이름만이 다르다. 이들 둘은 다같이 유현(幽玄)하다. 이들은 유현하고 또 유현하며 모든 도리(道理)나 일체의 변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제2장

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미(美)를 아름답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추악(醜惡)의 관념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또 선(善)을 착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불선(不善)의 관념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② 그런고로 유와 무는 상대적으로 나타나고, 어려움과 쉬움도 상대적으로 이루어지고, 길고 짧은 것도 상대적으로 형성되고, 높고 낮음도 상대적으로 대비되고, 음과 소리도 상대적으로 어울리고, 앞과 뒤도 상대적으로 있게 마련이다.

 

③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무위(無爲)의 태도로써 세상사를 처리하고 말 없는 교화를 실행한다.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자리에 버려두고 인위적인 간섭을 가하지 않으며, 만물이 자라도 자기의 소유로 삼지 않고, 만물을 생육화성(生育化成) 하고도 자기의 자랑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공업(功業)을 성취하고도 높은 자리에 처하지 않는다.

오직 유공자로써 높은 자리에 처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공적이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는다.

 

제3장

① 위정자가 현자(賢者)를 숭상하지 않아야 인민들이 다투지 않게 할 수 있고, 위정자가 얻기 어려운 재화를 진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인민들이 훔치기 않게 할 수 있고, 위정자가 명리(名利)를 좇는 탐욕을 보이지 않아야 인민들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할 수가 있다.

 

② 그러므로 도를 체득한 성인이 다스리면 인민의 마음을 허정하게 만들고, 인민의 배를 실하게 채워주고, 인민의 욕심을 약하게 하고, 인민의 기골을 강하게 한다.

 

③ 항상 인민들을 무지(無知) ?무욕(無慾)한 원상태(原狀態)에 있게 하고, 지자(智者)로 하여금 감히 수작을 부릴 수 없게 한다.

 

④ 도를 따라 무위를 행하기 때문에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제4장

① 도의 본체(本體)는 공허하다. 그러나 그 작용은 항상 무궁무진하다.

 

② 도는 심오하여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만물을 생육화성하여' 마치 만물의 근본인 종주 같다.

도는 만물의 예리한 끝을 꺾고, 만물의 분쟁을 풀고, 만물의 지나친 빛을 부드럽게 고르고, 만물의 더러움에 동화한다.

도는 소리없이 깊이 숨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을 생육화성함으로써 태고 때부터' 영원히 있는 것 같다.

 

제5장

① 천지는 무정한 존재이다. '인간적인 사랑도 하지 않고' 모든 인물을 추구(芻拘)같이 담담하게 여긴다. '만물이 자연의 도리를 따라 제물로 있고 제물로 자라게 내버려 둔다.' 도를 터득한 성인도 무정하고 무자비하다. 백성들을 추구같이 여긴다. 백성들에게 사사로운 인정이나 사랑같은 것도 베풀지 않고 스스로 무의자연의 도를 따르게 내버려 둔다.

 

②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다고는 할까! 텅 비었는데도 원기(元氣)가 끝없이 일어나고 그의 활동으로 생육화성이 더욱 잘 나타난다.

 

③말이 많으면 이내 막히고 만다. 허정한 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

 

제6장

①골짜기의 여신(女神)은 영원히 죽지 않고 만물을 창조해 낸다. 이를 현빈(玄牝)이라 한다.

 

②유현하고 신비스러운 여신의 문이 바로 천지 만물의 근원이다.

 

③곡신(谷呻)은 보이지 않고 없는 듯하면서 있고,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다.

 

제7장

①천지는 영원무궁하다.

천지가 영원무궁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살 수가 있다.

 

②그런고로 도를 체득한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로 돌림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남보다 앞에 나서게 되고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영원히 있게 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

 

제8장

①최고의 선덕(善德)은 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좋게 베풀고 이롭게 해주지만, 자신을 위해 '고명'을 다투지 않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비천한 곳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물의 특성은 도에 가깝다.

 

②물의 특성을 닮은 성인은 몸을 최선의 땅, 즉 '비천한 곳'에 두고, 마음을 최선의 못, 즉 '허정'에 두고, 최선의 인을 베풀고, 최선의 실천적인 말을 하고, 최선의 다스림으로 바로잡고, 최선의 효능으로 일하며, 언제나 최선의 때를 따라 움직인다.

 

③오직 '물이나 성인은'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느니라!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에서

 

 

이해와 감상

 

동양과 서양의 많은 차이 중의 하나로 자연에 대하는 태도를 들 수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에 묻혀 조화를 이루는 속에서 안주를 찾고자 하는 데 비해, 서양에서는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하고 잘 살고자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서양식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판을 치고 있다. 바야흐로 인류는 만세를 부르고 과학의 승리를 능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과연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가?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은 과연 자연을 정복한 결과이냐, 아니면 자연을 활용한 것이냐? 또 영원과 전체를 망각하고 일시적이고 나만을 위한 부분적인 물질문명의 발달이 과연 인류에게 행복을 줄 것이냐?

 

인간소외, 인간상실, 정신과 신의 상실, 자원고갈과 대기오염, 무력위주의 분열 등등 위기에 처한 인류는 위의 물음에 무어라 대답할까?

기원전의 중국, 즉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마치 오늘의 세계와 같았으며, 많은 사상가가 나타났다. 그 중 한 사람이 노자였으며, 그는 오늘과 같은 인류 사회의 꼴을 보고 통탄한 나머지 오천자의 '도덕경'을 저술하여 절망에 허덕이는 인류에게 구제의 예지를 부여했던 것이다. 노자의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자연은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른바 신이 만든 것 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되고, 그렇게 존재하고,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다" 그것이 바로 진리이자 원리이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적 성과를 거두어도 그것은 바로 자연의 도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나 만물은 도밖에 있을 수도 없고 도 밖에서 행동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온갖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영원과 전체의 삻을 파괴하고 있다.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의적으로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인위적인 정치와 전쟁이다. 따라서 노자의 화살은 이 두 가지에 집중되었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원리이고, 덕은 원리이고, 덕은 원리에 입각한 행동이다. '노자'는 팔일장으로 되었으며 전반을 '도경', 후반을 '덕경'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총 팔일장으로 상·하편으로 나누고, 상편은 '도경', 하편은 '덕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엄격하게 내용이 분류된 것은 아니지만, 상편 '도경'에는 주로 도 즉, 형이상적 원리를 풀었고, 하편 '덕경'에서는 도에 입각한 덕 즉, 행동적인 것을 풀었다.

 

도는 형이상적 실체이며 만물의 근원이자 우주 운행의 원리이다. '노자' 제25장에 '그 무엇인지 엉킨 것이 천지보다 먼저 나왔으며'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름은 알 수 없고 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지어대라 하겠다'고 하였다.

도는 무형의 실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형적 실재이며, 인식할 수도 없고 이름지어 부를 수도 없는 게 도 다. 도는 무어라 말할 수 없어 무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에서 만물이 저마다 있고 자라고 변화한다. 이렇게 인식할 수 없는 무형의 도에서 만물이 저마다 스스로 있는 현상계로 나타나고 있으니, 있는 현상계의 모습을 가지고 볼 때 도는 바로 '스스로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 노자가 강조하는 '무위자연'의 본뜻이 있다.

 

도는 원래가 하나의 혼돈한 실재이므로 선·악이나 강·약의 분별도 있을 수가 없다. 즉 이름이 없다.

선·악이나 강·약 같은 대립은 인간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 관념이지 본래의 도에서 그러한 상대적 대립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구분하고 차별하고 분별하려고 한다. 나와 남을 가르고, 삶과 죽음을 나누고, 선과 악을 차별짓는다. 그리고 인간들은 오직 나와, 삶과 선(善)만을 좋아하고, 남과 죽음의 악을 미워한다.

그러나 나와 남, 삶과 죽음, 선과 악은 바로 하나이며, 위치를 바꿔 볼 때는 내가 남이고, 남이 나인 것이다. 사람은 이러한 도를 모르고 하나만 고집하고 한쪽으로만 나가려 하기 때문에 많은 미망(迷妄)이 생기고 결국은 멸망하고 만다. 자연의 도를 따르면 살고, 거역하면 죽게 마련이다. 도는 만물을 조화 속에 언제까지나 생성화육하는 것이다.

 

천지간 만물 중에서 가장 도를 잘 따르는 것은 물이다. 노자는 제8장에서 ‘최고의 선을 물 같다’ 고 하고 이어 ‘물은 민물을 이롭게 해줄 뿐일체 다투지 않고, 남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해 있으므로 거의 도와 가까운 존재다’ 라고 설명했다.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둥근 그릇에 넣으면 둥글고 모진 데 넣으면 모진다. 많이 모아도 물이요, 작게 갈라 놓아도 물이다. 뜨겁게 끓여 증발해도 물이고, 얼어도 물이다. 다시 말해서 물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를 잃지 않는다.

 

또 물은 언제나 아래로 처진다.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은 서로 모여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한 방울의 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강물이나 바다는 위력이 있고 크다. 한 방울의 물은 가장 약하지만 노도(怒濤)는 무섭다. 즉 가장 유약한 것이 가장 강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언제난 강하기만을 바란다. 강하면 꺾이고 굳으면 부숴지게 마련이다. 제 42장에서 노자는 ‘강하고 포악한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36장에서는 ‘유약이 강강을 이긴다’고 하였다.

 

무위자연의 도를 따라 자기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고집하려고 함으로써 자기 이외의 세계를 잃게 된다. 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유한한 존재다. 나만을 고집하고 남과 전체를 무시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한한 세계를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순간적인 나를 버리고 영원히 대자연과 더불어 생성화육하는 것이 바로 무위자연의 도에 복귀하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요, 유교에서 말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극기복례(克己復禮)인 것이다.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하였다. 자연이란 스스로 있는 순박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도 순박하게 자연과 더불어 생성화육해야 한다. 되도록 인간적인 욕심과 작위를 버려야 한다. 우선 사람은 먹어야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다음으로 남녀가 짝을 지어야 종족이 단절되지 않고 번성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즉 ‘식(食)과 색(色)’ 은 인간이나 동물의 기본적 욕구다. 그런데 인간은 동물과 달리 집단생활을 문화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게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번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비극의 씨가 도사리고 있다. 즉 노자의 말대로 ‘복속에 화가 숨어 있었다’ (제58장). 문화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인류를 타락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노자는 다시 도로 복귀하기를 주장하였다. 이것도 도의 법칙이다. 도는 원심력을 가지고 있어 뻗어 나가지만 동시에 구심력에 의해 되돌리기도 한다. 나가기만 하면 도에서 벗어나고 별똥별같이 없어지고 만다.

문화는 결국 인간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 했다.

 

다음에는 일체의 사치스런 재물욕, 관능적 향락 등을 배제했다. 제12장에 ‘여러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음악소리는 귀를 멀게 하고, 요리는 입맛을 버리게 한다. 사냥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귀중한 재물은 인간의 행동을 사악하게 만든다. 그러기 때문에 성인은 배를 채우거나 눈을 위하지 않으며, 헛된 사치나 관능・허식을 버리고 근원적 실속을 차린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제3장에서 ‘인민의 마음을 허정(虛靜)하게 만들고, 인민의 배를 실하게 채워준다’고 했듯이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실속 있게 배를 채우라고 했다.

 

다음으로 노자는, 인간은 지식이나 학문을 버리라고 했다. 지식이나 학문이 결국은 간교하게 악용되어 자연스럽게 생육화성할 백성들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식을 가지고 제 멋대로 남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또 감정적으로도 남을 괴롭힌다. 사랑하면 좋아하고 미워하면 헤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만큼 믿을 수 없다. 만물을 키우는 도는 감정적 편애를 하지 말아야 한다. 즉 공평무사(公平無私)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남하고 다투지도 않는다. 싸우고 다투는 것은 자기의 욕심,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서로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다투기 마련이다. 노자는 다투지 않는 자가 이긴다고 했다.

이것은 바로 물갈이 유약하고 처하(處下)하라는 뜻에 통한다. 삶의 길은 유약이고, 죽음의 길은 강건이다.

결국 인간은 욕심·지혜·농간·조작을 버리고 허정한 자연, 순박한 자연의 품에 안겨야 모든 사람이 다같이 조화를 이루고 저마다 스스로의 생성화육을 이룩 할 수가 있다. 이것을 하나로 돌아간다. 또는 하나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노자의 포일(抱一)과 복귀(復歸)의 뜻을 우리는 현대적 위기와 더불어 깊이 음미해야 하겠다.

참고 자료

노자(?-?)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道家)의 창시자.

성명 이이(李耳). 자 담(聃).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초(楚)나라 고현(苦縣:허난성[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周)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 노자는 도(道)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無)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有)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 ·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 ·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有)가 있으면 무(無)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柔)를 지키면 강(剛)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漢)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보조 자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보면 노자는 초나라 사람으로,성은 이(李)요,이름은 이(耳),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주 나라의 사관(史官)을 지냈으며, 그때 공자가 찾아와 예(禮)에 관해서 물으니 노자는 "그대가 옛 성현이라고 숭배하는 이들은 이미 그 육체와 뼈가 썩어버리고 남은 것은 공허한 말뿐이다. 또한 군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때를 만나면 영화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뿐이다. 참된 군자는 덕이 있으나 외모는 마치 어리석은 것 같다. 그대는 교만과 욕심,그리고 꾸미는 빛과 잡념을 버리라.

 

이런 것은 그대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공자가 자기의 처소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달리는 놈은 덫을 놓아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놈은 주살로 쏘아 잡을 수 있다.그러나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며, 변화막측(變化莫測)하여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오늘 노자를 만나보니 그는 용과 같은 사람이더라" 고 말하였다 한다.

노자는 무위(無爲)의 도(道)에 힘써 이름을 숨기고 지내다가 주나라를 떠나 은둔하려고 하였는데, 노자의 덕망을 알고 있던 관지기 윤희가 간절하게 가르침을 청하니, 도덕에 관한 5천여 자의 문장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는데 그의 최후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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