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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 / 간디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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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자서전

도둑질과 속죄(贖罪)

 

내가 육식을 하던 시기, 혹은 그 조금 전에 저지른 나의 실수에 관해서 좀더 말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 결혼 직전 혹은 직후에 시작된다.

내 친척 한 사람과 나는 담배를 피우게 됐다. 담배 피우는 것이 무슨 좋은 점이 있다거나, 혹은 담배 냄새가 좋아서 한 짓이 아니었다. 단지 입으로 연기를 푹푹 내뿜는 것이 재미있는 듯해서 한 짓이었다. 우리 아저씨가 그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우리도 그대로 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없었다. 그래 아저씨가 버린 꽁초를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꽁초를 늘 얻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는 연기가 많이 뿜어지지 않았다. 그래 우리는 인도 궐련을 사기 위해 머슴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담배를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였다, 물론 우리는 어른들 앞에서는 피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훔친 돈을 가지고 몇 주일은 그럭저럭 피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어떤 식물의 줄기가 구멍이 많아 담배와 같이 피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것을 구해서 피워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자립을 못하는 것이 몹시 원통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완전히 정이 떨어져 우리는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까? 어디서 그 독약을 구할 수 있을까? 다투라(Dhatura)의 씨가 독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 우리는 정글 속을 찾아다녀서 그것을 얻었다. 저녁때가 적당하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케다르지 만디르로 가서 절간 등(燈)에 기름을 치고 다르샨을 한 후 조용한 구석을 찾았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내 죽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또 죽어서 좋을 것이 무엇이냐? 차라리 자립을 못하더라도 참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두서너 알을 삼켰는데 더 삼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둘이 다 죽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람지 만디르로 가서 마음을 고쳐 먹고 자살할 생각을 씻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자살이란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다음부터 언제나 누가 자살한다고 위협하는 것을 들어도 거의 혹은 전혀 겁내지 않는다.

자살하려던 생각 때문에 결국 우리 둘은 담배 꽁초를 피우는 습관과 담배 피울 목적으로 머슴의 돈을 훔쳐내던 습관은 끝을 내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나이든 후에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았고, 담배를 피우는 습관은 야만적이고 더럽고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전세계를 통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왜 그렇게 성행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이 가득 들어앉아 담배를 피워대는 찻간에서 여행을 하기란 참 힘드는 일이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심한 도둑질은 좀더 후에 내가 저지른 것이었다. 내가 동전을 훔친 것은 열두 세 살 아니면 그보다 어린 때 일이었다. 그 다음 도둑질은 내가 열 다섯에 저지른 것이다. 이번에는 육식하던 형의 팔찌에서 금 한 조각을 훔쳐냈다. 그 형님은 약 25루피의 빛을 지고 있었는데 팔에 순금 팔찌를 끼고 있었다. 거기서 한 조각을 떼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도둑질을 했고, 그 빛은 청산이 됐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자백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때릴까봐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니, 아버지가 언제 우리에게 매질을 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당할 고통이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깨끗한 자백없이 결백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침내 자백서를 써서 그것을 내 손으로 아버지께 바쳤다. 이 글 속에서 나는 내 잘못을 자백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 대하여 적당한 벌을 달라고 했고, 내 죄 때문에 아버지 자신을 벌하지는 말아 달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는 또 앞으로는 절대로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버지께 자백서를 바칠 때에 나는 벌벌 떨었다. 그때 아버지는 누관을 앓고 계셨으므로 침대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침대는 편편한 나무판자였다. 나는 종이 조각을 드리고 판자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가 그것을 다 읽었을 때 구슬 같은 눈물이 두 뺨을 흘러 떨어져 종이를 적시었다. 잠시동안 눈을 감고 생각한 다음 종이를 찢어 버렸다. 그는 읽기 위해 일어나 앉았던 몸을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나도 울었다. 나는 아버지가 고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만일 화가라면 오늘이라고 그 광경을 그대로 그릴 수 있겠다. 내 마음속에 아직껏 그렇듯 생생하다.

그 사랑의 구슬방울들이 내 양심을 정화시켰고, 내 죄를 씻어 버렸다. 그러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찬송가에 있는 대로,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만이 그 힘을 안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아힘사'의 실물교육이었다. 그 당시는 나는 거기서 한 아버지의 사랑을 볼 뿐이었지만, 오늘날 나는 그것이 순수한 '아힘사'임을 안다. 그러한 '아힘사'가 모든 것을 쓸어 안게 될 때 그에게 닿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숭고한 용서는 우리 아버지에게 보통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노해서 몹시 나무라며 자기 이마를 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놀랍게도 평화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나의 깨끗한 자백 때문이라고 믿는다. 죄를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들어있는 순결한 고백은 그것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 앞에 바쳐졌을 때 가장 순수한 타입의 회개가 된다. 나는 내 고백이 아버지로 하여금 내게 대하여 절대로 안심하게 하였고, 내게 대한 사랑을 무한히 더하게 했다는 것을 안다.

Darshan : 어떤 위대한 것을 대함으로써 얻는 감격.

간디 자서전에서

 

 

 

이해와 감상

 

'진리와 함께 한 나의 실험'을 서술하고 있는 간디의 이 '자서전'은 제1차 불복종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1923년으로 끝맺고 있다. 비폭력운동이라는 특이한 투쟁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간디의 나머지 생애는 적어도 인도인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간디의 구체적인 실천운동은 잘 모르는, 특히 외국인들에게는 그의 후반생에 관한 서술이 없는 것은 아쉬운 감을 갖게 하지만, 그러나 간디의 기본사상과 실천방법은 그의 전반생에 이미 확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탁월한 영도력을 가진 빈틈없는 현실 정치가인 동시에 자기탐구를 민족독립만큼 중요시하던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간디의 기본사상, 실천방법은 무엇인가?

200만의 병력과 3억 파운드의 군사비를 제공하여 1차대전 수행에 적극 협력한 인동에 대한 전후 영국의 보답은 무엇이었나? '빵'이 아니라 '돌'이었다. 자치 부여의 공약이행이 아니라 민족운동에 대한 새로운 탄압, 즉 로울래트법(法)과 아므리차르 대학살이었다.

어긋난 기대 속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도 민중의 가슴속에서 북받쳐 오르고, 쓰디쓴 굴욕감이 납덩어리처럼 인도 민중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능(全能)의 괴물한테 사로잡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듯이 보였다. 수족은 마비되고 정신은 무감동이었다."고 네루는 그의 '인도의 발견'에서 당시를 기막힌 심정으로 회고하고 있다. 사실 오랜 세월에 걸친 가치 없는 착취로 인하여 민중의 빈곤은 날로 더해갔고, 민중의 활력은 갈수록 메말라들고 있었다. 몇 세대에 걸쳐 '피와 고생과 눈물과 땀'을 몽땅 바쳐버렸기 때문에, 인도의 몸과 마음은 병들대로 병들었고 민중의 연대 생활은 해독을 입지 않은 면이 없었다. 농민과 노동자는 가난과 기아 속에서 비굴감과 공포심의 포로로 되었고, 주산계급이나 인텔리는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빈곤과 패배주의! 일거에 결판을 내리는 모험주의로는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너무나 깊

은 구렁텅이요, 기만적인 엉터리 요법으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뿌리깊은 질환이었다.

간디가 인도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는 마치 일진(一陣)의 양풍(凉風)에다 비길 만하여, 우리는 가슴을 펴고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어둠에 비쳐드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이 우리의 눈에 낀 안개를 닦아 냈다. 그는 또한 선풍처럼 많은 것을 뒤집어 엎었지만, 특히 민중의 마음가짐을 일변시켰다.'라고 네루는 당시의 감격을 말하고 있다.

흥분과 희망의 갑작스런 물결이 인도 민중의 마음속에서 일어나 이때부터 인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지니게 되었다. 고원(高遠)한 이상과 현실적인 실천과를 하나로 결부시킨 간디의 영도하에 인텔리는 물론이요, 농민도 동원되어 이제는 일반대중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의 민족운동이 성난 물결처럼 인도의 지평을 휩쓸게 되었다.

침체와 무기력, 절망감과 허탈의식 속에서 헤매던 인도민중을 이토록 각성시켜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전진하도록 발동을 건 간디, 그는 과연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사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사상은 어떻게 실천에 옮겨졌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아함사(Ahimsa:사랑 내지 비폭력)'의 교의(敎義)에 입각하는 '샤타그리하(Satyagraha:진리파지(眞理把持)'운동을 통해서였다. 간디가 그의 '아함사'라는 교의를 가져온 이래로 그것은 줄곧 전인도를 지배해 왔다고 논한 후, 네루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인도의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에 커다란 역할을 다하고, 또한 널리 세계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교의 그 자체는 물론 인간의 사상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중적인 규모로 정치 및 사회운동에 적용한 이는 아마도 간디가 최초의 사람일 것이다. 당초에는 그것은 개인에 관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간디는 이 개인적인 이상을 사회적인 이상으로 높이려고 애썼다. 그것으로 정치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을 변경하려고 하였다."라고.

간디는 철두철미 실천의 인간이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인도인의 복지향상을 위해 그는 한시라도 실천활동을 그만 둔 일이 없었다. 그와 같은 실천활동은 간디가 '사탸(Satya:진리)' 또는 '아힘사'의 법이라고 부르던 도덕률에 일관해서 의지하였고, 그런 도덕률은 그의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간디에 있어서는 종교와 도덕은 서로 방편을 달리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그의 실천활동을 밑받침해 주고 있었다.

간디는 이러듯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인간이 인간이었다. 그의 인생철학은 주로 자기가 개인적인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재발견하고 재평가한 인도의 종교심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인도의 종교심을 재평가 하는데에 있어서의 주요 특징은 그가 '아힘사'를 '사탸'의 실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아힘사'에 대해서 '사탸'에 대해서와 거의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데 있다.

 

간디에 의하면, 온 우주에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감지 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이 미만하고 있는데, 이 힘이야말로 변전무상(變轉無常)한 이 세계에 있어서 영구불변하는 유일한 실재라고 한다. 그리고 이 힘의 작용을 관찰한 결과 그 힘은 선(善)을 위하는 힘이지, 악(惡)을 위하는 힘은 아니라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간디가 '사탸' 또는 신(神)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힘을 말하는데, 그는 이 힘을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법, 즉 생명의 법, 자연의 법, 도덕률이라고 생각한다.

 

간디는 이와 같이 구극적 실재를 하나의 신비롭고 선한 힘이라 생각하고, 우주 속에서 질서와 조화 및 도덕률의 지배를 보며 이 도덕률이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의 지도원리라고 간주한다. 즉 간디에 있어서는 그런 도덕률은 인류를 지배하며 인간의 본성 속에 스며들어 있는 항구불변의 인생 법칙이다. 그는 그러한 도덕률을 '진리의 법'이라 부르고, 때로는 진리 또는 '사탸'라고만 하기도 한다.

 

이 '사탸'는 경우에 따라 진실이라고도, 진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실은 '사탸'라는 말은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 진실과 진리 이외에도 선량(善良), 정의, 구극적 실재와 신, 이런 모든 속성들의 참된 실체도 아울러 의미한다.

그리고 간디 철학에서 이 '사탸'에 다음 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아힘사'도 '사타'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존립 그 자체가 의거해 있는 보편적인 제1원인이다. 증오와 전쟁으로 인한 과거 속에서도 인류생활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그런 파괴의 법보다 더 고차적인 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간디는 생각하는데, 그 법이 다름 아닌 '아힘사의 법'이지만 그것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애정·동정·자비·관용·봉사·자기희생 등의 적극적인 의미와 아울러 비폭력, 불상해(不傷害)와 같은 소극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간디는 그 적극적인 측면을 '사랑의 법' 내지 '사랑'이라 부르고, 그 소극적인 측면을 '비폭력의 법' 내지 '비폭력'이라 불렀다. '아힘사'의 적극적인 면은, 인간이 가까운 관계를 가지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품고 있는 사랑을 적(敵)까지 포함하는 온 인류에게 확대시키는 일이요, 소극적인 면은 사리(私利)를 더욱 추구하거나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고의로 어떤 생물을 죽이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삼가는 일이다.

그런데 간디철학에 있어서 이 '아힘사'와 '사탸'의 관계는 마치 꼬인 새끼와도 같아서 나누기는 어렵지만, '아힘사'는 수단이고 '사탸'는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간디는 '아힘사'를 통하는 않고는 '사탸'는 발견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육신을 가지는 인간은 자연 감정과 욕망에 사로잡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되기 쉬우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자기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하고 자신을 점차로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어떤 힘이 필요한데, 이 힘을 간디는 '아힘사'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아힘사'에 관해서 간디는 소년시절부터 뼈저린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즉 15세 때, 형한테 빌린 돈을 갚으려고 그 형의 팔찌에서 금(金)을 조금 떼어 팔았던 '도둑질'이야기가 그것이다.

참고 자료

간디(1869-1948)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사상가.

서부의 포르반다르 출생.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1887년 18세 때 런던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南)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 동안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였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아힝사(ahi涵s嚆: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를 중심으로 하는 간디주의를 형성하였다. 간디 자신이 전개한 인종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사티아그라하:satyagraha) 및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의 도야와 수양(修養)의 노력은 어느 것이나 훗날 간디가 인도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모형이 되었고, 또한 아슈라마(嚆飽rama:修道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도인의 정신개조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을 제정한 트란스발주(州)에서 일어났다.

이 투쟁은 그로부터 약 8년 동안 인두세(人頭稅)를 비롯한 여러 차별법에 반대하기 위하여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나갔다. 특히 1913년에 44세가 된 간디가 선두에 서서 행진한 나탈주(州)에서 트란스발주까지의 ‘사티아그라하 행진’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간디를 비롯한 행진 참가자 4,000명은 남아프리카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악법을 반대하는 주장은 세계적 여론의 동정을 모아 당국을 굴복시켰다. 결국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되어 인도인에 대한 차별법은 모두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명을 다한 간디는 1915년에 귀국하였는데, 정치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토지분쟁의 해결 등에 노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의 롤라트 법안(Rowlatt Act)과 같은 반란진압조령(條令)의 시행 때문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手紡:charkha)운동을 장려하였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반영 ·비협력 운동이 선언되고 외국제 직물의 불매운동은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인도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수방운동으로써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으며, 1931년 석방 후, 어윈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어윈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反英)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다. 간디어윈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독립의 약속을 얻어 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상반된 이해관계로 타결을 보지 못하고, 1942년의 봄베이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영국세력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여 공전의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 후에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전화(戰禍)와 굶주림으로 거칠어진 인심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힌두 ·이슬람의 화해에 따른 인도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주권을 넘겨줌에 있어서 인도의 대정당인 국민회의파와 전인도(全印度) 이슬람 연맹이 인도를 둘로 분할 독립할 것을 협정한 결과 오히려 격렬한 힌두 ·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7월 인도가 이러한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으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가장 격화되어 있던 벵갈에서 힌두 ·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듬해인 1948년 l월, 이 활동의 행선지를 뉴델리로 연장, 뉴델리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1월 30일 반(反)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타고르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 있어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디의 주저 《인도의 자치(自治)》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서구사상(反西歐思想)은 그의 단편적인 편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평화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특히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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