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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록정신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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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록정신

원 종 우

 

 

* 이 글은 문예마당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REVIEW' 가을호에 기고한 것이다.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심도깊게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단행본 한권이상의 분량이 필요한지라, 어쩔 수 없이 상당부분을 축약하게 되었다. 따라서 제시된 각종 관점들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특히 서구 의 록 정신에 대한 제 2 장 부분은 한국의 실정과 대비하기 위해 도입한 것 으로서 극히 개괄적으로만 언급되었다. 이와 관련되어 미리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글에서 이야기되는 '록정신신' 은 아직 서구에서도 구체적으로 정립되지는 못한 개념이므로 이를 록 음악의 특수성과 연관지어 명료하게 제시하는 작업은 필자로서는 곤란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를 록이라는 형태를 가진 창조적 대중예술이 가져야 할 기초적인 마인드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 정도로 다소간 애매모호하게 사용하고 있다. 정리된 록 정신의 실체 가 없는 상태에서 '한국에서의 록 정신' 에 대해 논하였다는는 점에서 본말이 전도된 뉘앙스가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는 리뷰의 지면을 통해 이 글을 읽게 될 대중들의 수위와 관점, 그리고 일차적인 당면 과제로서 한국 록이 보여주고 있는 각종 문제점들에 대한 지적을 위해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한국에서의' 록 정신이라는 청탁받 은 주제의 한계와 필자의 부족함으로 인해 록 정신 자체에 대 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질수 없었던 점 아쉬우며, 이 부분은 추후 계속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것으로 안다.

 

1.

지난 30년간 록 음악은 나름대로 면면히 생명력을 유지해 왔지만 최근 몇 년과 같이 대중들에게 있어서 일상적으로 주변에 존재하는 쟝르로서 인식된 적은 없었다. 과거와는 달리 근래의 자칭 '록커 (rocker)' 들은 TV 등의 비디오형 전파매체속에서 각광받으며 준수한 외모로 연예잡지나 주간지의 표지 모델이 되고, 때로는 CF 등에도 얼굴을 내밈으로서 대중들을 즐겁게 한다. 이들은 인기가요 차트의 상위권을 차지함으로서 음악성과 대중성의 양면에서 성공한 자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한다. 록음악의 득세는 특히 드라마나 영화의 주제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몇년간 젊은 층을 대상으로 히트한 티비의 드라마나 미니시리즈에는 거의 예외없이 '록 음악' 이 사용되었으며 이 곡들은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하여 차트의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비단 이러한 대중매체들 속에서 뿐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이제 록 음악을 하는 사람을 찾아 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출퇴근시의 버스나 전철속에서도 긴 머 리와 가죽바지를 입고 일렉트릭 기타를 둘러 맨 청년들을 쉽게 볼수 있으며 기성세대들도 그들을 별달리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젊은 층들이 많이 모이는 대학교 앞, 대학로, 압구정, 신촌, 돈암동 등의 거리에서는 소규모 록 콘서트의 포스터들을 언제든 접할 수 있다. 서울 뿐 아니라 중소 도시에서까지 무명 밴드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단지 일렉트릭 기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특이하게 비춰지던 10여년전의 상황에 비한다면 이런 근래의 모습은 참으로 괄목할만한 변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외형적인 발전의 모습들을 한꺼풀만 들여다보면, 열악한 대중음악계 속에서의 우리나라 록 음악이 봉착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과 문제점들을 접하게 된다. 한국 록 음악의 주변을 둘러싼채 조악한 유사 록을 양산하고 있는 온갖 구조적 문제점들, 그 난잡함과 혼돈스러움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록 정신(Rock Spirit) 의 문제이다.

 

2.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에 있어서 록 음악의 발전사는 세계에 대한 고정화된 인식과 그 제도및 현실에의 반항의 역사 라고 규정해 볼수 있다.

 

'세계에 대한 고정화된 인식' 은 기존의 인습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굳어진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뜻한다. 제도는 그 인식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현실은 그 결과로서 존재한다.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서구 문명은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심점은 두번의 세계대전을 치루는 과정에서 크게 손상되었고, 40년대와 50년대를 통한 재건사업 이후 정신적 지표를 잃어버린 서구인들의 삶은 자연스럽게 물질적인 풍요, 부의 획득이라는 목표를 향하게 되었다.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온 반대급부로서 정신적인 황폐함과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득세하였으며, 이데올로기는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의 질서와 개인의 사고를 지배하였고, 이는 또한 베트남전과 같은 비극을 잉태하게 되었던 것이다. 록 음악은 바로 이런 토양을 바탕으로 하여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록 음악은 기성세대와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속에서의 인식및 제도에 대한 반항의 정신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과거에 비해 보다 강렬하고 빠른 리듬과 거친 사 운드,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가사에 의한 표현 방법이 요구되었다. 대중음악이 가진 확산력을 통해 록 음악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세계에 전파되었고,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스스로 만들어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우려와 탄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속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간의 대치구조는 보다 본격화되어, 록 음악은 젊은 세대의 이상과 반항정신을 대변하는 음악으로서의 위치를 보다 확고하게 누리게 되었다.

 

50년대에 버디 홀리, 엘비스 프레슬리를 중심으로 발원한 록큰롤 (Rock'n 'Roll) 의 반항성은 애초에는 단순히 강요된 젊잖음에 대한 젊은이들의 단순한 반발에 가까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간 대중 음악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랭크 시나트라류의 스탠다드한 미국 청 년의 모습 - 이는 또한 당시 기성세대가 요구하고 있던 모습이기도 하다 - 에 대한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들에게 강렬한 음악과 노골적인 가사, 섹시한 표정과 몸동작들을 통한 록큰롤의 유혹은 거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록큰롤 스타들은 더 이상 '감미로운 목소리 를 가진 옆집 청년'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떨어져 내려온 듯한 신비로운 느낌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은 아직 여가선용, 스트레스 해소 의 일환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가지지는 못했던 시기가 또한 이때이다. 댄스뮤직에 가까왔던 50년대의 록큰롤은 이후 록 음악(Rock Music) 이라는 보다 큰 범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음악적인 변화와 중량감과 함께 가사의 주제나 소재에서도 매우 큰 변화가 나타났다. 50년대의 '이유없는 반항' 류를 탈피하여 자기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인식에서 기초한 곡들이 등장한 것이다. 비틀즈 (The Beatles)의 세련된 소박함과 롤링스톤즈 (Rolli ng Stones) 의 부르짖음은 그 스타일은 달라도 동일한 정신적 기저하에 있었다.

 

산뜻한 음악과 외적 이미지를 가진 비틀즈에 비해 롤링 스톤즈는 전술한 록의 기본적 정신에 더 충실한 밴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외모와 음악을 시종일관 유지해 왔으며, 이러한 스타일은 이후 많은 록 아티스트들의 원형이 되었다.

 

비틀즈가 귀여운 천재들이라고 한다면 롤링 스톤즈는 타락하고 소외된 젊은이들일 뿐이었지만, 창조적 타락이라고 규정해볼수 있는 록의 성격에 누구보다도 투철했다. 그들의 작품들이 가진 우울함은 주로 블루스에서의 음악적, 정서적 영향이었며 밴드의 주축인 믹 재거와 키쓰 리처드의 만남부터가 미국의 흑인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머디 워터스의 레코드를 계기로 했다는 점이 또한 이를 증거하고 있다.

 

비틀즈의 She's leaving home 과 롤링 스톤즈의 Paint it black 더후의 My generation 은 비록 음악적 스타일에서 판이할 망정 내면적 정서 자체는 동일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소박함과 우울함, 선언이라는 표현 형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과 주변을 둘러싼 세계의 한계성에 대한 인식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50년대 록큰롤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남녀간의 사랑은 곡의 소재로서 언제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왔지만, 60년대에 이르러서 그 신화는 크게 손상되었다. 이제 더 이상 대중음악의 소재로서 부적절한 것은 없었다. 당시 크게 지지받은 쟝르인 포크에서 의 영향도 무시할수 없는 것으로서, 정치 사회등 전반에 걸친 문제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 과정 속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록 정신(Rock Spirit) 이 과거의 여가선용및 스트레스 해소용이 아닌 보다 진지한 '삶 전체의 가치관'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50년대 록큰롤시대를 그 백그라운드로 한 60년대의 젊은 세대, 이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매스미디어의 본격적인 융성속에서 록의 반항정신을 자신들의 생활 전반에 까지 투영하려 했던 진정한 이상주의적 신세대였다.

 

60년대 전체에 걸쳐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커다란 세력을 형성했던 히피는 '평화' 의 기치하에 반문명적 세계관을 생활속에서 실천했다. 이들은 대게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공동소유와 정신적인 교류를 중요시하였으며, 마약류를 통한 환각의 체험으로 보다 높은 정신적 경지를 추구하기도 했다. 히피운동의 중심에는 나름대로의 이론적 토대를 갖춘 학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히피운동은 60년대 말 우드스탁 페스티발을 계기로 절정을 이루었지만, 결국 이때 나타난 많은 한계들을 통해 스스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대한 시행착오인 히피즘은 록 음악의 정신적 토대이자 그 실험적 발현이었고,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나 동양적 사고에 대한 접근 등 간접적으로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록 음악에서의 '반항'은 정치와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풍자를 통한 참여의 성격 (포크의 경우)보다는 무의식적이고 암묵적인, 3의 방향을 향한 형태가 많았다. 권태, 섹스, 폭력, 우울함, 모호함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정서들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역설과 위트, 유우머를 통해 담겨져왔다. 록 음악의 이 러한 모습은 기성세대가 지배하고 있는 불합리한 사회질서와 현실에 대해 대안을 제시해주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존재 자체로서 견제의 역할을 상당부분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중 상당수는 록의 정신으로 대변되는 이상주의적 가치관속에서 이를 생활 속에서 전면 실현하기 위한 실험을 행하기도 했다. 이들을 일컬어 히피 (Hippy) 라고 부른다. 60년대말에 극단적 융성을 이룬 히피운동의 한계는 록 정신과 같은 예술적 이상주의가 현실에 성 급히 적용되었을때 구체적인 대안이나 움직임으로 조직화되지 못 하고 현실도피적 경향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은 세계를 변화시키 는 '거름'이 될 수 있을 망정 직접적 도구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 다. 그들은 히피로서의 집단 생활이나 마약을 사용한 환각 실험등 을 통해 스스로의 정신적 영역의 확장을 시도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근간에는 세계에 대한 염증과 감정적 대안으로서의 도피성향이 자리하고 있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동시에 록 뮤지션들과 정신적인 일체감을 가짐으로서 구원받고자 하는 제의적 성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록 콘서트는 필연적으로 제의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록 콘서트를 통해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아티스트와 관객의 일체감이다. 관객을 대리한 아티스트가 무대 위에서 록 음악을 주문으로 한 제사 의식을 행하는 셈이다. 이때 제물은 바로 자신들의 젊음(My Generation) 이라고도 말 할수 있다. 이러한 제사의식적 성격은 전술한 바와 같이 종교적 절대권 위의 실추와 현실 사회의 모순점등에서 비롯된 정신적 지표의 부재하에서 자연스럽게 발현한 것으로서 제사를 바치는 대상이 특정하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본질상 종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로 이런 성격은 보다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Judas Preist 같은 밴드명이나 Ozzy Osbourne, Alice Cooper 등의 무대매너에서 나타난 다소간의 악마성은 그 극단적인 예이다. 일부 록 음악에서의 악마성은 - 악마 '주의' 라고 말할만큼 거창한 것은 결코 아니다 - 서구사회의 오랜 기독교 도그마의 붕괴에 이은 반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는 일종의 상업적 전략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앨리스 쿠퍼의 중기 이후의 모습을 기억해보자) 60년대에 절정을 이룬 이러한 성격은 70년대 중반이 지나면서 점차 타성에 의한 쇼(show)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은 오래가지 않아 자체모순속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구체적 대안이 정립되지 않은 속에서 이상주의의 실현을 추구하던 60년대의 흐름은 존 F 케네디 - 그는 서구 사회 속에서 제도권내의 60년대 정신을 상징한다 - 의 피살과 히피운동의 실패등을 계기로 몰락하게 되며, 이후 록 정신은 보다 은근한 형태로 변하여 록 음악 자체에 녹아내리게 된다.

 

서구에 있어서의 록 정신 (Rock Spirit)은 이렇듯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반항으로서 개인의 삶과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고, 많은 시행착오와 반성끝에 창조적 예술정신의 한 측면으로 자리매김하였다.

 

3.

전술한 바와 같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사회현상으로서의 록 정신 은 70년 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대중음악 내부의 성격으로서 자리 매김하게 된다. 또 한 그 표현방식도 매우 다변화되어 극단적인 형태로서의 70, 80년대 헤비메틀이나 펑크를 비롯하여 많은 갈래의 분화 발전이 있어왔다. 최근의 얼터 너티브/모던 록에 이르기 까지 그 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어오고 있으며 록 뿐만이 아니라 여타 다른 장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록 음악이나 록 정신이 서구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고, 추종되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속에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보편성은 바로 언제나 문명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던, 고답적 구질서에 대한 반항과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한 이상의 발현이라는 당위속에서 획득된다. 따라서 록 음악이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신이 내재되어 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록의 외면적 형태를 빌린 다른 무엇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예술은 그 본질상 정치나 학문, 종교에 비해 실천적 참여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다. 예술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모호하고 추상적이라 하더라도 '느낌'을 통해 전달된다는 점에 그 장점이 있다. 상황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혹은 집행하는 역할은 정치, 종교, 학문등의 영역이다. 물론 예술적 활동을 통해서도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예술의 목적을 단지 그런 식으로 규정해 버리는 일부 참 여론자의 견해는 명백한 오류임을 지적하고 싶다. 예술은 당대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동시에 창조적, 발전적으로 반영함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바로 그점에 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록 음악에 있어서 그 정신의 발현은 가사의 소재나 주제뿐 아니라 여타의 음악적인 부분들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록 음악도 결국 음을 가장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나라의 록 음악은 어떤가?

서구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록 음악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질수 있는 토대가 제공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과 뒤이은 극심한 빈곤속에서 예술적 창조성이 광범위하게 발현된다는 것은 애시 당초 무리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를 통해 한국 대중들에게 뿌리 박힌 이른바 '뽕짝' 은 일부에서나마 시도된 창조적 음악활동 자체를 봉쇄해온 것이다. 설사 외국의 새로운 형식을 도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뽕짝과의 타협속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협소한 시장과 대중의 무관심속에서 미군부대에서의 활동으로 시작되고 유지되어 온 것이 한국 록 음악의 초창기이다. 록 음악이 서구에서는 최고의 융성기를 맞았던 60년대의 우리나라는 록 음악 의 불모지에 다름아니었으며, 신중현씨를 위시로 한 몇몇 특정 음악인만이 간간히 대중에게 알려졌을 뿐이다. 그런 속에서 서구 에서와 같은 진지하고 폭 넓은 창조적 록 정신의 발현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데뷔 이후로 흔들림없이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록 음악인은 신중현, 김창완, 김수철씨를 필두로 한 몇몇의 소수 에 불과하다.

 

70년대 후반 대학가요제를 계기로 대중적 지지도를 얻은 록 그룹 들의 참신함과 인기의 바탕은 아마추어리즘이었다. 흥행사업화 되어 있던 기존의 뽕짝가요들과는 차별화되는 순수성을 내세운 이들은 한때 젊은 층을 사이로 돌풍을 불러 일으켰으나, 한국적 현실에 따른 정신적 바탕의 부재와 프로의식의 결여속에서 오래지않아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들중 크게 성공한 일부는 전업 뮤지션의 길을 걸었으나 쇼비니지스 구조에 흡수되어 버렸고, 대부분의 캠퍼스 록 밴드들은 아직도 교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음악적인면에 있어서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바탕의 부재하에서 우리나라의 록은 극소수 창조적 아티스트를 제외하면 외국곡을 카피하여 밤무대등지에서 연주하거나 록의 형태를 빌려 와서 기존의 가요의 뼈대위에 살짝 입혀놓은 엉성한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국내 대중가요 시장의 한계속에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관행이 일종의 타성이 되어 지금 이시점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글 첫머리에서 필자는 한국 록의 현상태를 크게 두가지의 측면에서 제시한 바 있다.

 

그중 하나는 한국적 현실속에서의 오버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을,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한(TV 나 연예잡지등) 기존의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여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음악의 경우이며, 또 하나는 언더그라운드로 구분해 봄직한 비교적 소규모의 공연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밴드 중심의 음악의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처럼 대중매체를 통해, 즉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 특유의 전형적인 대중음악 산업 구조 - 우리나라는 특히 TV 등 공중파 방송에의 의존도가 높다 - 를 통해 선보여지는 음악속에서도 두 가지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TV 드라마나 미니 시리즈등을 통해 우리 귀에 익숙해지고 이어 다른 음악 쟝르 (댄스뮤직이나 발 라드등) 에 종사하던 음악인들까지 가세하게 된 - 김원준은 그 좋은 예이다 - 철저한 대중지향의 스타일이 그중 하나이다. 예외 없이 전형적인 록 8 비트의 단순한 리듬속에서 오버드라이브된 기타 사운드와 강렬한 드럼, 강조된 베이스, 그리고 고음역의 보컬을 특징으로 하는 이런 음악들은 일견 외면적으로 록이 가진 음악적 특성를 어설프나마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곡들의 뼈대 로서의 가사나 멜로디는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이른 바 '가요'의 그것과 차별화될 소지가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곡에서 흔히 다루어지는 치기어린 승부, 숙명적 사랑따위의 소재는 10대나 20대 초중반의 젊은 대중들을 자극시키기 위한 지극히 상업적인 전략에 기초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런 곡들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자신들도 이 곡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어떠한 신념이나 음악적 정열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유사 록 음악이 사용된 드라마들은 주로 10대나 20대 초중반의 젊은 층을 겨냥하여 제작되었다. 주로 미니시리즈의 형식으로 방영되는 이런 드라마들에는 예외없이 당대에 가장 인기가 높은 남녀 스타들이 주연급으로 출연하게 마련이다.

이런 곡들은 흔히 밴드의 모습이 아닌 솔로 싱어의 모습으로 발표되며, 이들 싱어들은 본인 스스로가 별다른 작사나 작곡등의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싱어는 단지 흥행사업의 측면에서 '고용된 가수' 일 뿐, 아티스트의 정신을 기대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일부 경우처럼 자신이 직접 가사와 멜로디를 만드는 경우라 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요의 멜로디에 록의 외양만을 살짝 입힌 경우가 대부분이며 - 그나 마 록적인 기타 리프나 리듬등의 요소는 편곡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짐 - 본격적인 록 음악을 만들어 발표하기에는 대중음악계의 시장적 여건이 충족되지 않을뿐 아니라 가수 자신들도 록의 정신을 갖추지 못한 만큼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두번째 경우는 그간 언더그라운드신에서 헤비메틀 밴드의 싱어등으로 활동하던 음악인들이 그 스타일을 변형시켜 가요계로 진출한 경우이다. 부활의 이승철, 시나위의 김종서, 크라티아의 최민수등 유명밴드 출신을 비롯하여 알려지지 않은 신인들까지 포함한다면 이들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과거 록계의 선배 들과 마찬가지로 대중음악 시장의 현실과 타협을 모색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은 음반을 발표하지 않은 상태에서 클럽등 소규모의 공간을 통해 소수정예의 관객들과의 음악적 교류를 주 활동으로 하는 음악을 뜻한다. 구미의 경우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생적으로 성장한 대중음악의 풍토에 따라 록 음악뿐 아니라 각 쟝르에 걸쳐 전문적인 라이브 클럽이 무수히 존재하며 이들 클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함께 일종의 신(Sce ne) 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언더그라운드 신에는 그 구조상 거대한 쇼비지니스의 자본등이 간여할 여지가 적다. 서구 대중 음악의 저력은 이 언더그라운드 신의 바탕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근래의 얼터너티브/모던 록의 경우가 좋은 예라고 할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서구적 의미에서의 언더그라운드 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극히 미약한 입지만을 가질 뿐이다.

 

이 두 경우, 대중들로 하여금 록의 스타일에 친숙해지도록 하여 이후 본격적인 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척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어찌보면 장점일 수 있으나, 본질상 '호도된 록 음악의 전파' 라는 측면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다. 록의 정신(Rock Spirit)이 아예 없거나 현실과 타협하여 성공한 경우라면 그것이 록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본류의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들은 자칫하면 록의 발생과 발전속에서 내재되어 있는 정신적 바탕을 도외시한채 단지 '가요장르로서의 록'이라는 이미지를 대중들 속에 구축할 가능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없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밴드를 중신으로 한 록 뮤지션들의 경우는 이러한 세태에 대부분 심정적으로 크게 반발하고 있으며, 쇼비지니스와 영합하지 않은채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를 원하고 있다. 음반을 발표하고 매체를 활용하는 경우에도 이들의 활동 양상은 앞서의 경우와는 판이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 간섭받기를 거부하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만둔다는 식이다. 그러나 주로 헤비메틀 밴드를 중심으로한 언더그라운드 록 신은 그 활동에 비해 별다른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필자도 가끔씩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공연장을 찾곤 하지만 몇몇 유명 밴드의 공연을 제외하면 관객의 수나 호응도면에서도 무척 빈약한 실정이다. 단위 공연의 관객 수로 따진다면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양적 팽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보인다. 적정한 관객의 수는 이들 록 음악인들의 음악 활동의 지속및 생존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어려움들이 계속될 경우에는 많은 록 음악인들이 결국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아 록계를 이탈하게 될 것이며, 이는 또 다시 언더그라운드 록 신의 침체를 연장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인들에게서도 록 정신(Rock Spirit)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치렁치청하게 기른 머리카락, 가죽 바지나 찢어진 청바지, 굽높은 구두와 도전적인 표정따위는 록 정신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하나의 표현수단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것이 기성의 유니폼화 되거나 패션의 한 형태로 자리한다면 이는 록 정신의 근간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이런 자세는 자칫하면 서구 록 음악이 국내에 전파되어 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모방과 타성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이다. 음악 자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자작곡의 열악함이 언제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카피 밴드로서 외국의 유명곡들을 무난 하게 소화해내는 밴드들조차 자신들의 자작곡에서는 감각과 실력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주체적인 노력과 타성을 극복해 나가는 창조자로서의 록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카피를 잘한다 한들 자작곡이 부실하다면 예술가로서의 가치는 전무한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신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록 밴드들의 경우, 그 음악활동 시작의 배경이 80년대의 헤비메틀 밴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80년대에 10대였던 이들 세대는 당대에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밴드들의 영향하에 놓일 수 밖에 없다. 가죽패션이 크게 유행했던 것도 이 시기이다. 우리나라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인들의 과제중 하나는 이 시기에 주입된 타성을 극복하고 보다 본질적인 록 본연의 정신을 찾는 일일 것이다. 그 정신적 바탕이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는 서구와는 달리 우리의 경우는 타성에 의한 매너리즘의 극복을 위해 언제나 깨어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기성화된 반항'은 기실 반항이 아니라 답습일 뿐이다.

 

4.

한국 록 음악은 아직 과도기에 있다. 어찌보면 수십년을 지속해온 과도기이다. 어려운 여건하에 나름대로의 록 음악을 추구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서구의 자생적인 바탕에 비한다면 우리 나라의 록의 그간의 과정은 수입, 모방, 타협과 변질에 의한 기형적 구조속에서 진정한 창조성이 피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른 모든 문화, 예술 방면도 그렇지만 특히나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은 진지함과 창조성이 결여된채 엄청나게 커진 시장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 우리나라의 음반 시장은 물량에서 세계 4 , 매출액면에서 세계 11위권이다 - 내적으로는 소비문화의 주변을 겉돌고 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입지는 아직도 서구의 4-50년대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흘러나오는 음악, 듣는 그 순간만을 위한 음악,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그 어떤 삶에의 메세지도 전달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 대중음악이라는 인식이 무의식중에 대중들 속에 뿌리 박혀 있다. 그러한 인식은 창조적 음악활동을 추구하는 음악인들의 행보를 가로 막는다. 이제라도 이런 잘못된 대중음악에 대한 인식을 극복하고, 보다 창조적인 음악 활동을 위한 터전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 노력의 성과를 보다 값진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록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내면적 개혁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 개혁은 바로 록 음악이 발생기부터 지난 수십년간 가지고 왔던 정신적 바탕으로의 록 정신을 이해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그러한 정신적 무장 만이 자신의 음악을 훌륭하게 만들수 있는 힘이 될 뿐아니라, 불 합리한 현실 구조의 개선 또한 가능케하는 진정한 밑바탕이 될 것으로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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