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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의 길은 미(美)와 시의 길이자 수난의 길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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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의 길은 미()와 시의 길이자 수난의 길

(대담 ; 이어령, 장덕순)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성덕왕 때의 향가로 <삼국유사>에 전한다.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던 도중 부인 수로(水路)가 절벽 위의 철쭉꽃을 탐내고 있을 때 소를 몰고 가던 한 노인이 그 꽃을 꺾어 바치며 읊은 노래라 한다. 나중에 부인은 홀연히 용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이렇듯 수로의 미모엔 인간도 동물도 반한다. 쾌락과 도덕이 조화를 이룬 신라인의 미의식이 유감없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 그 나라의 민족성을 알려면 우선 그 나라의 여성을 보라는 말이 있지요. 희랍문화라고 하면 누구나 먼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나 헬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날 미스 유니버스의 선발기준이 되어 있는 팔등신이란 바로 이 아프로디테의 희랍 조상(彫像)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신보다도 겉으로 드러난 육체미의 균형을 숭배한 헬레니즘의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인 예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라고 하면 동정녀 마리아를 연상하게 되지요. 아프로디테와는 달리 성스럽고 정신적인 순결성을 느끼게 됩니다. 육체보다도 영혼을 추구한 헤브라이즘의 상징이지요. 어떨까요. 만약 신라의 문화와 그 사상을 알기 위해서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한 여인상을 찾아본다면.

 

= 문학작품에서 찾아본다면 신라의 향가<노인헌화가>에 나오는 수로부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삼국유사>를 읽다 보면 멋있고 아름다운 신라의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분명 그 여인들은 고려나 조선조의 여인들과는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요. 망부석 설화에 나오는 제상(提上)의 부인처럼 말을 타고 달린다든지 여왕이면서도 미천한 지귀(志鬼)의 짝사랑에 대해서 팔찌를 끌러준 선덕여왕이라든지.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신라인의 영원한 애인이 될 수 있는 미녀를 선발한다면 아마 수로부인을 능가할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 이야기 자체가 그렇습니다. 좁은 안방, 건넌방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수로부인의 미는 동해를 끼고 천리나 뻗쳐 있는 위에서 전개되고 있지요. 남편 순정공이 강릉태수가 되어 수많은 종자(從者)를 데리고 경주를 떠납니다. 집안에만 있던 수로부인이 이들을 따라 밖으로, 그리고 길로 나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미가 표현되고 시가 출현되는 과정이요, 신라인들은 이렇게 미를 가두어두지 않고 밖으로 만인 앞에 끌어냅니다. 움직이게 합니다. 수로부인이 지나간 길, 그것을 우리는 미의 퍼레이드요, 시의 길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 수로부인이 방안에만 있었다면 <노인헌화가>는 생겨나지 않았겠지요. 신라 때 경주에서 강릉까지 해안선을 끼고 뻗쳐 있는 그 길은, 정말 시를 낳은 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전설에도 나오는 삼화랑들이 다니던 길입니다. 비단 이 경우만이 아니고 승려들이 노래를 읊으며 다녔던 길이구요.

 

= 문학과 길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길의 성격을 따져보면 문학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아라비안나이트는 사막의 길에서 생겨난 문학이고 마크트웨인의 문학은 뗏목을 타고 다니는 미시시피강 길의 문학이었지요. 신라의 문학은 수로부인이 지나간 해안의 길입니다. <처용가>를 비롯하여 웬만한 시는 모두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그 경계선인 해안 길의 산물이었지요.

 

= 그러고 보니 <노인헌화가>가 생겨난 장소와 그 시는 뗄 수 없는 연관성이 있는 것 같군요. 순정공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서 점심자리를 벌입니다. 바닷가 병풍처럼 깎아지른 바위 위에는 철쭉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그러한 충동이 생겼기 때문에 소에 풀을 뜯기던 노인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시의 무대를 이해해야만 수로부인의 행동에 납득이 갈 것입니다.

 

= 꽃병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꽃의 아름다움이 결정되는 것처럼 수로부인의 미는 강릉으로 가는 동해안 길의 배경에서 참되게 발휘됩니다. 수로부인은 파란 바다와 붉은 바위 사이에 있습니다. 수로부인은 파란 바다와 붉은 바위 사이에 있습니다. 때는 늦은 봄이고 점심을 먹는 환한 대낮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수로부인의 손에 철쭉꽃만 있으면 미는 완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노인이 문제입니다. 학생들에게 <노인헌화가>를 가르치면 예외없이 <노인>이라 맥이 풀린다는 게지요.(웃음) 멋있는 청년이라야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친다는 것이 낭만적이 아니냐는 거예요. 그리고 감히 아무도 오를 수 없어 수로부인의 청을 듣지 못하고 있을 때 용감하게 석벽을 기어오를 사람이라면 힘센 청년이라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나를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는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다는 시의 내용을 보더라도 상대방이 노인이라면 이치에 안 맞는다는 거구요. 노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 여기에서 노인이라 한 것은 생리적인 연령을 뜻한 게 아니라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지자(知者), 현자(賢者)를 노인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지금도 노형(老兄)이라고 하면 반드시 늙었다는 말이 아니라 지적으로 높다는 존칭이 되니까요. 그리고 내가 잡은 암소를 놓아두고라는 말을 볼 때 소는 불도(佛道)의 상징이니까, 그 노인은 도자(道者), 즉 불도를 닦고 있는 도승을 뜻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김종우씨는 그래서 이 노인이 <삼국유사>를 쓴 승() 일연 자신일 거라고 주장했어요(웃음). 그렇게 본다면 잡고 있는 소를 놓는다는 그 시의 의미는 도를 닦는 것을 그만두고,심하게 만하면 파계(破戒)하고라도의 뜻이 될 것입니다. 소가 불도의 상징이라는 것은 지금 절간에 가보면 승려들이 공부하는 심우당(尋牛堂)이라는 게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어요.

 

= 석가모니를 고타마(Gotama)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이 가장 좋은 소라는 뜻인 것을 봐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반드시 소를 불도라고 보지 않아도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사회의 농경민에게 있어 는 물질적, 정신적 양면에서 생활 자체의 상징물이었으니까요. 曲禮에 보면 제후라 할지라도 아무 연고 없이 소를 죽이지 못한다고 되어 있고 천지 사이에 소는 무엇보다도 쓸모가 있고 그 공은 땅의 도()에 합()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전국시대에는 소를 살찌게 기를 줄 안 백리해(百里奚)가 그 때문에 진무공(秦繆公)의 신망을 얻어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국사를 도모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를 잘 기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능히 국사를 맡아 백성을 살찌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목민(牧民)이란 말이 그래서 생겼구요. 그러니까 소에 풀을 뜯기던 노인이 그 소를 버려두고 꽃을 꺾어 바치겠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중시해 오던 생업이나 혹은 도를 닦던 것보다도 수로부인의 미를 더 존중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 수로부인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런 현자(賢者), 은자(隱者), 도사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을까? 결국 희랍사람처럼 신라인들의 마음에는 육체미 사상, 고려나 조선조 때처럼 관능의 세계를 천시하지 않고 고리어 그것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화(源花)나 화랑을 뽑는 데 있어서도 첫째 조건이 외모의 아름다움이었지요.

 

= 조선조를 상징하는 문학작품의 여인상은 춘향입니다마는 수로부인은 아주 다릅니다. 춘향의 미에는 정절(貞節)이라는 윤리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습니다마는 수로부인이나 신라의 여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선 수로부인의 행실에 덕이 있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고 오히려 자세히 읽어보면 품행이 좀 수상쩍게 되어있습니다(웃음). 남자를 보고 꽃을 꺾어달라는 것부터가.

 

= 그런 일이 있은 후 다시 길을 가다가 수로부인은 바다의 용에게 납치를 당하지요. 다시 살아나오기는 했지만 용에게 정절을 빼앗긴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조선조 때의 이야기라면 수로부인은 자결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유사(遺事)를 보면 바다 세계가 어떻더냐는 남편의 물음에 아주 황홀했다고 대답을 합니다. 용궁의 음식이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다고(웃음).

 

= 더욱 괴상한 것은 바다속에서 나온 수로부인이 온몸에서 향내를 풍기고 더욱 예뻐진 것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지요. 타의(他意)라 해도 유부녀가 다른 자와 밀통(密通)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 수로부인이 너무 아름다워 강릉까지 가는 사이에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습니다. 옛날 설화에 이니 신물(神物)이니 하는 것은 다 정체불명의 남자를 그렇게 부른 것이니까 합리적으로 풀이한다면 다른 남성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육체미를 존중한 희랍사람들의 경우 아프로디테 역시 다른 신과 간통을 합니다. 워낙 아프로디테의 남편인 헤파이스토스신이 추물이고 불구자이기는 하지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신화나 문학 작품에서 미녀의 남편은 모두 추물이나 바보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마는.

 

=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수(太守)이기는 하지만 천하의 바보입니다. 용에게 아내가 납치되었을 때에도 허둥지둥 발을 구르며 야단만치고 있어요(웃음). 이때 도와준 것도 노인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뭇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동네 사람들을 모아 해룡(海龍)을 규탄하면 부인을 돌려줄 것이라는 방안을 가르쳐 준 것이지요.

= 신라인들이 세인(世人)의 여론을 중요시했다는 것이 그 설화에 나타나 있지요. 미녀 헬렌 역시 약탈을 당하는데 희랍인들은 무력으로 그녀를 찾아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어드>에 나오는 트로이전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력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여론으로 용의 폭력을 이기고 미녀를 되찾았습니다. 우리 쪽이 박력은 없지만 훨씬 문화적이 아닙니까(웃음).

 

= 그때 바다를 향해서 부른 노래가 그 유명한 <구지가>이지요.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부녀 빼어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사로잡아 구워먹고 말 테다라고요. 그런데 이 노래는 수로왕의 설화에도나오는 것으로 예부터 불러온 주술가(呪術歌)인 것 같습니다.

 

=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요. 용이 잡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난데없이 거북이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구지가>는 그때 만든 것이 아니라 주문(呪文)처럼 남을 위협할 때 쓰던 노래로 풀이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화인류학에서는 거북이나 용이나 그것을 모두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 것으로 보고 있지요.

 

= 특히 이 경우가 그렇지요. 수로부인을 범한 남자, 그것도 성기를 욕하는 직접적인 의미가 잠재되어 있지요.

 

= 고대의 시가는 수수께끼처럼 성상징(性象徵)을 내포한 것이 많습니다. 양수(羊水) 때문에 여자는 물로 상징됩니다. 수로부인이 바다와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아프로디테도 바다의 물거품에서 생겨납니다. 수로부인이 용궁에 갔다가 다시 나왔듯이 심청이도 바다에 빠졌다가 재생합니다. 물은 재생의 원형을 가지고 신화나 설화, 그리고 고전작품에 되풀이되어 나타납니다.

 

= 어쨌든 <노인헌화가>도 사실적인 시라기보다 신화(설화)의 유형으로 봐야겠지요. 보통 경우라면 바닷물에 들어간 여인이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신라의 향가는 시사적(詩史的)인 입장에서 볼 때 주술적 효과와 미적 효과가 서로 섞여 있던 때이고 설화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시라는 데 그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수로부인이 걸어간 길은 시의 길이요, 미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수난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 그러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헬레니즘의 상징인 아프로디테와 헤브라이즘을 나타내는 마리아의 이미지, 수로부인은 그중 어디에 속한다고 보시는지요.

 

= 미녀를 놓고 분류한다는 것은 멋없는 일이긴 하지만 수로부인은 아프로디테에 가까운 외모(육체)에 미가 있는 여인이지만, 그러면서도 남편을 따라 끝까지 강릉에 간 것으로 보아, 정절이 아주 없는 여인도 아닙니다(웃음).

 

= 신물(神物)까지 반해서 납치를 했고 도를 닦는 성자까지 마음을 뒤엎어놓은 것을 보면 아프로디테와 같은 미의 여신이라 해도 좋지요. 역시 신라인들의 석굴암에서 엿볼 수 있는 그런 심미의식(審美意識)의 결정체로 수로부인을 보아야겠지요.

 

= 그러나 희랍하고는 다릅니다. 아프로디테에는 도덕적인 면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이 여신은 창녀의 신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굳이 그 특성을 찾아본다면 아프로디테와 마리아의 중간적인 여인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와 정신을 다같이 갖춘. 앞에서 말한 대로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에 수로가 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여인이고 마리아는 땅의 여인이지요. 이 사이에 수로부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라적인 것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 수로부인은 얼굴만 예뻤던 것이 아니라 마음도 미를 아는 여인이었던 것 같아요.

 

= 우선 철쭉꽃을 보고 그것을 갖고 싶어했으니까요. <오주연문(五洲衍文)>사람이 아름다운 꽃을 사랑하는 것은 풍류의 하나다. 청복(淸福)이 있는 사람이라야 능히 꽃을 사랑할 수 있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 노인을 대응시킨 것을 보더라도 그렇구요. 외모만 아름다웠더라면 아마 소치는 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석벽(石壁)의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겠지요. 미가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도와 같은 세계가 되니까요.

 

= 어느 나라나 미의 여신들의 족보를 캐올라가면 애초에는 죽음의 여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공포를 미로 승화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공포의 죽음을 나타내는 여신이 미의 여신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아프로디테 역시 그랬다는 것입니다. 수로부인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꽃을 꺾어바치겠다는 노인은 죽음을 미로 승화시킨 익명(匿名)의 시인이요 도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인의 마음은 바로 신라인의 마음이구요.

 

수로부인이 꽃을 꺾어 달라고 할 때 남편은 물론 그 많은 종자(從者)들은 감히 그 가파른 벼랑을 기어올라 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미를 아는 자만이 벼랑의 철쭉을 따기 위해 를 버릴 줄 알지요.

 

= 그리고 신라인들에게 있어 미는 화랑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외형의 아름다움과 정신의 아름다움이 다같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구요. 그래서 신라인들은 극단적인 영혼의 세계, 도덕적인 세계로만 흐르지 않았고, 또 육체의 세계, 쾌락에만 젖지 않는 이상적인 문화를 만든 것 같습니다.

 

= 그러한 미의 세계가 아름다운 동해를 끼고 굽이굽이 천리로 뻗쳐 있는 수로부인의 길에서 재현된 것이구요. 바다가 있고 꽃이 있고 바위가 있고 미인이 있습니다. 그 미는 비단 인간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용까지도, 온 산천초목까지도 감동하는 우주의 길로 통해 있습니다. 이것이 <노인헌화가>를 읽는 기쁨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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