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벨트와 움벨트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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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 바라보기>(주디스 콜, 허버트 콜 지음, 사계절출판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그런데도 그 책에서 보았던 ‘움벨트(Umwelt)’라는 개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에스토니아 출신의 생리학자 야곱 폰 웩스쿨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적 환경(Welt)' 이라는 개념으로는 다양한 동물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움벨트라는 개념을 고안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획일적으로 공유하는 경험이 아니라 개개 생명체가 갖고 있는 고유의 환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개미와 벌과 인간의 움벨트는 서로 다르다. 개미 세계에서, 활짝 핀 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어쩌면 먹이를 구하는데 피해 다녀야 할 장애물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벌의 세계는 다르다. 벌은 개미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꽃에서 먹이를 구한다. 벌은 꽃가루가 풍부한 꽃을 찾아 들판을 헤매며 본능적으로 꿀사냥을 한다. 인간의 세계는 또 다르다. 인간에게 꽃은 장애물이나 먹이가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다. 인간들은 꽃의 모양이나 현란한 색깔에서 미적 만족감을 느낀다. 이렇듯 우리는 그동안 당연히 인간의 입장에서 꽃을 보아 왔지만 그것이 동식물의 세계에서 꼭 당연한 것은 아니다. 생물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다른 세계가 움벨트다.

 

"인간의 세계는수많은 세계 중 하나일 뿐"

 

나무 한 그루에도 수많은 움벨트가 존대한다. 부엉이의 움벨트, 까마귀의 움벨트, 딱따구리의 움벨트, 여우의 움벨트, 딱정벌레의 움벨트 등등. 까마귀 울음 소리에 딱정벌레는 놀라지 않으며 부엉이의 커다란 눈에 여우는 별 경계의 대상이 아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아무리 시끄럽게 쪼아대도 그 밑을 기어 다니는 개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일을 한다. 그 움벨트가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의 신비다.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획일화된 환경(Welt)에서 산다면 그들은 아마도 신경성 질환으로 생명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들이 매일같이 개미의 발자국 소리나 파리의 하품 소리를 듣는다면 어떻게 삶을 견뎌낼 것인가. 우리의 감각은 일찍이 소진되고 고갈될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땅속에서 굼벵이로 15년을 살다가 밖으로 나온 매미가, 채 한 달을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에 의아심을 품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1-2년을 물 속에서 살다가 성충이 된 후, 채 이 삼일을 살지 못하고 죽는 하루살이는 또 어떤가. 하지만 이들의 시계는 인간의 시계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움벨트에 살고 있으므로 인간의 눈으로 그들의 시간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수백 년된 느티나무가 바라보는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하찮을 것인가.

움벨트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보면, 인간들의 움벨트 즉 시공간이 꼭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들은 받아들이기 싫겠지만, 인간의 세계는 수많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며 또 그리 큰 영역이 아닌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간의 세계가 위협받고 있다. 바이러스는 유사 이래로 늘 인간들과 함께 살아왔으나 근래 그 발흥이 빈번해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학자들은 인간들의 생태계 파괴를 주된 원인으로 지목한다. 인간들은 야생동물의 움벨트에서 돈을 벌기 위해 도시를 개발하고 숲을 해체한다. 먹이가 줄어든 동물들이 인간들과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병원체는 인간들에게 들어와 빠르게 증식한다. 치사율 높은 돌연변이라도 만들어지는 날에는 전쟁보다 많은 사망자를 만들어내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다.

 

"다른 생물들의 움벨트에 대한 존중이 시작될 때"

 

우리는 로마의 아우렐리우스 황제, 영국의 여왕 메리 2세,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 러시아의 황제 표트르 2세, 청나라의 순치 황제 등 유수의 통치자들이 천연두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을 알고 있다. 남아메리카의 아즈텍인들은 정복자인 스페인군과의 첫 전투에서 이겼지만 천연두 바이러스 때문에 인구의 4분의 1을 잃고 결국은 대륙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1918년과 1919년 사이에는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강타해 당시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죽었으며 1957년에는 아시아 독감으로 100만명이, 1968년에는 홍콩 독감으로 70만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지구의 시공간이 오직 인간만의 것인 듯 모든 생태계를 재편하려는 인간의 오만은 과감히 멈춰져야 한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자본가들의 명분 즉 발전이나 건설 같은 구실에 더 이상 속아서도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서로 다른 움벨트에 대한 이해이며 협력이다. 다른 동물들의 움벨트에 대한 존중이 시작될 때 비로소 인간의 움벨트도 안전하게 유지될 것이다. 이는 지구 생태계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 생존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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