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의사도 필요없다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나이 탓일까. 요즘 들어 지나간 시간들이 자주 떠오른다. 나에게 지나간 시간이란 학교에서의 세월을 가리킨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세월이란 결국 내가 가르친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인격적으로 참 훌륭한 아이들도 많았다. 환경심사를 준비한다며 일요일에 혼자 나와 교실벽을 흰 페인트로 칠했던 아이가 떠오른다. 그 아이는 실장도 미화부장도 아니었다. 이른 새벽에 등교해 교무실 선생님들의 모든 책상을 걸레질하던 아이도 떠오른다. 키가 작고 웃음이 많던, 그리고 볼에 주근깨가 귀엽던 아이였다. 그 아이 역시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했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수돗가에 가 더러운 쓰레기통을 깨끗이 씻어오던 아이도 있었다. 추운 겨울, 대입 원서를 쓰느라 어지러워진 교실을 혼자서 빗질하던 아이도 떠오른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원서를 쓰지 않고 종이 원서를 썼기 때문에 교실에는 사진 자른 종이며 풀, 가위 등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일 년 동안 야자가 끝나는 시간까지 남아 단 하루 빠지지 않고 문단속을 하고 갔던 아이도 있다. 이 일 역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모든 사례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고마운 아이들

 

 

고마운 아이들도 참 많았다. 부임 초기, 현실과의 불화 때문에 힘들어하던 나를 위해 아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위로를 주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많은 편지와 쪽지들이 떠오른다. 매일 아침 책상에는 몇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퇴근하기 위해 신발을 신으려 하면 신발에도 쪽지가 들어 있었다. 퇴근하려고 차를 타면 와이퍼에도 손잡이에도 편지가 꽂혀 있었다. 

 

집에 가면 편지함에 또 편지가 들어 있었다. 잠깐 판서하는 사이, 누군가 교탁에 쪽지를 올려놓기도 하였다. 쪽지에는 <쑥국 끓이는 법>이라 제목 아래 간단한 레시피가 적혀 있었다. 혼자 사는 선생님이 밥이나 제대로 해 먹는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선풍기조차 없던 시절, 여름 보충수업 시간에 매일 아침 얼음물을 책상 위에 놓고 갔던, 이름 모를 아이들. 나의 생일이라고 밤새 부침개를 부쳐왔던 아이들, 늘 목캔디를 챙기던 아이들, 이른 아침 꽃집의 문을 두드려 프리지아며 장미, 안개꽃으로 꽃병을 채웠던 아이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마다 쟁반과 주전자, 컵을 정성스레 씻어왔던 아이들. 등교하려고 나오면 새벽에 세차를 해놓고 간 아이도 있었다. 

 

 

 

안티프라민과 파스를 사가지고

 

 

어쩌다 우리 반 아이들 전체의 손바닥을 때릴 때가 있었다(지금은 어림도 없는 짓이지만). 그런 날이면 팔이 올라가지 않아 저녁밥 먹기가 불편했다. 그날 저녁 아이들이 안티프라민과 파스를 사가지고 집에 찾아왔던, 소설 같던 기억도 떠오른다. 머리 빠지는 데 좋다며 검은깨를 한 봉지 가져왔던 아이, 소풍날 말없이 알밤 서 너개를 쥐어주고 부끄럽게 돌아서던 아이들,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왔던 아이...... 그 당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고마운 아이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말 한마디 전하지 못했다. 고마웠다. 아이들아. 너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선척적인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상처 입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다. 늘 안절부절 자리에 앉아있지 못하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결석도 잦았고 연락도 종종 끊겼다. 나중에야 그 아이가 아빠의 새 애인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또 그 애인의 딸아이와 함께 아빠 차를 타고 등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방황하던 손녀를 위해 학교를 들락거렸던 그 아이 할머니의 굽은 허리가 떠오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업계 담임을 맡았을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 반 아이들의 절반은 부모와 살고 있지 않았다. 그땐 순창이나 부안, 고창 등 인근지역에서 진학한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은 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많이 했는데, 아이들은 가난하고 춥고 배고팠다. 빨래도 제대로 하지 않아 추운 겨울에 맨발로 학교에 오는 아이도 있었다. 자취집에 모여 밤늦게까지 놀다가 아침이면 지각하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을 데리러 자취집을 찾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혼한 아빠가 객지로 떠도는 바람에 아침에 스스로 깨지 못해 학교에 오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란다에서 담배부터 피우는 아이였다. 지각하는 버릇을 고쳐보겠다고 거실 전등 스위치 위에 그 녀석의 이름을 써놓고 매일같이 전화를 했었다. 그래도 지각과 결석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말하기 시간

 

말하기 시간, 자신이 한때는 큰 이모부였다가 지금은 아빠가 된 사람의 딸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고백했던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엄마는 형부와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상처를 여러 아이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은 이미 그 상처를 극복한 것이라고 나 스스로 위로했었지만, 그 아이가 평생 짊어지고 살 삶이 안타까워 마음 아팠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아빠의 애인에게 심부름을 가야했던 사실 때문에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이, 남자 아이처럼 숏커트에 바지교복을 입고 다니던 아이가 졸업 후 결국 커밍아웃을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새 아빠와의 불화로 중간고사 등굣길에 술을 마시고 늦은 아이도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로 인해 분노했던, 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절망했던 아이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사실 나는 어떤 뚜렷한 신념이나 철학이 없이 교단에 서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만 이런 아이들을 만나면서 내가 한 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관용과 용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아팠다. 단지 빛깔과 크기가 조금씩 달랐을 뿐. 필요 이상 어둡거나 냉소적인, 그리고 방어적인 표정들, 지나치게 적은 말수, 정도를 넘는 뒷담화, 거친 언동, 반복되는 거짓말, 습관적인 위선, 까닭 없이 계속되는 질병 등등.

 

아이들을 대하는 하나의 방식​

내가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너그러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이면에는 타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어떤 사연들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조리했으며 아이들 역시 미숙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적당한 일탈과 납득할 수 없는 언행에 나는 한쪽 눈을 조금씩 감으려고 노력했다. 이곳은 육군훈련소가 아니고 학교이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 의사는 필요 없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성숙한 아이들에게 더 이상 교사는 필요 없다고 주문을 외우면서.

 

 

사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에 대해 나는 어떠한 확신도 없다. 하지만 추상적 진리와 보편성, 원칙을 추구하는 철학보다는, 구체적 상황에서 개별적인 아픔을 고민하는 문학의 편에 서는 일, 그것이 내가 아이들을 대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채석장에서 돌을 깼을 뿐이다. 그 돌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를 지켜보더라도 인간에겐 많은 용서와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