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내 삶은 내 삶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가만히 되돌아보면, 일찍이 어떤 직업에 대해 열렬한 욕구를 가졌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시절, 과학자나 장군이 되고 싶다는 그 흔한 꿈조차 꾸지 못했다.

좀 치기스럽긴 하지만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꽤나 뜨거운 마음으로 직업의 욕망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은행장과 대통령이었다. 은행장은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소박한 신앙심에서 출발한 꿈이었는데, 은행장을 부자가 되는 직업이라고 여겼던 짧은 판단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꿈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용기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쑥스러울 뿐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은 당연히 객기였다. 꼬마 아이들이나 입에 올림직한 엉뚱한 대답을 통해 좌중의 엄숙함을 깨트리고 싶은, 청소년 시기 특유의 치기였을 것이다.



내가 비로소 가장 현실적인 직업을 꿈꾸게 된 것은 대학교 때다. 나는 무슨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아주 지독한 시골 학교의 교사를 꿈꾸었다. 땅거미 지는 텅 빈 교무실에서, 운동장 옆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서, 동터오는 숙직실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꿈을 꾸었다. 다행히도 이런 하찮은 꿈에 경쟁자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대학생활은 행복했다. 경쟁이 없으면 인생도 살만 하다. 부담 없이 책을 읽었고 목청 높여 세상을 불평했다. 내 머리 속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전복과 혁명의 유토피아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어둠을 욕하며 어둠을 닮다

하지만 지금의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은 그렇지 못한 듯하다.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아 대학 입시 원서를 쓰면서, 아이들이 미래(의 직업)에 대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불안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거기엔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전도된 가치의식들이 그대로 응축돼 있었다.

대학 선택은 오로지 실용성과 명예라는 두 단어로 분류되었고, 그로 인해 어떤 대학은 곧 성공이었고 어떤 대학은 곧 실패였으며, 어떤 학과는 선이고 어떤 학과는 악이었다. 그나마 성적이 뒷받침되는 아이들은 이미 '성공한' 대학에 원서라도 제출할 수 있었고, 성적이 안 되는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실패한' 대학이나 학과에 열등감 섞인 마음으로 원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곳에 삶의 다양한 가치나 방법, 혹은 '성공이나 실패의 잣대'에 대한 고민은 끼어 들 자리가 없었다. 삶의 여지가 무궁무진함에도 사회가 앞장서 아이들의 패배를 인정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사회가 대학과 학과를 수 백 개로 서열화하는 동안 아이들의 미래도 서열화됐다. 전국의 고3 교사들은 앵무새처럼 똑같이(신기하다!) 서열화된 대학과 학과를 순서대로 열거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은 불안과 공포에 직면해야 했다. 전국의 대학은 대형 사설학원들이 만들어 놓은 배치표라는 것에 의해 순위가 매겨져 있었고 교사와 학생들은 그것에 따랐다. 사회와 학부모와 교사와 학생 모두가 그 배치표의 권위 앞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런 서열이 수 십년 동안 거의 불변의 진리로 전해 내려온다는 사실이 참 신기할 뿐이다.



어둠을 욕하면서 어둠을 닮아간다고 말한 것은 니체였던가. 우리는 앉기만 하면 우리 교육의 문제를 늘어놓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 그 '문제'들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내딛으려 하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양보와 희생, 고민, 해결 방안에는 무심했다. 남의 아들은 슈바이처 같이 '고생하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지만 내 아들은 강남에서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의 사회적 현실을 욕하면서 한편으로 그것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나를 평가할 수 없다

유독 서열 만들기를 좋아하고 최고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사실 열등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전 혼수(婚需) 보고 놀라지 않은 양반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양반의 지위를 얻지 못한 하급관리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화려한 혼수뿐인 것이다.

주류(主流)에 도달하기 위해 평생 무모한 에너지를 허비하기보다, 내 주변을 주류로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그 주류의 창조란 대학이나 학과, 직업과 무관하다고 나는 확신한다. 문제는 오히려 대학과 학과와 직업을 지나친 편견으로 바라보는 (열등감에 빠진) 우리들의 눈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자신이 없거나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기 싫은 것이다. 애플을 창업했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 게이츠, 페이스북으로 세계를 장악한 마크 저커버그 모두 대학 중퇴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들처럼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런 삶을 사는 데 대학이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실 인정론’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

현실이 그러므로 어쩔 수 없다는 ‘현실 인정론’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진리라면 히틀러도 스탈린도 전두환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들은 당대의 성공 기준을 다 갖춘 최고 통치자들이었다. 누군가 성공했다면 그가 좋은 대학을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고, 성공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질들, 즉 성실성이나 능력, 지구력, 용기, 친화력, 추진력 등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즐겨 하는 말이 있다. 어느 대학의 간호과에 갈 것인가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어떻게 하면 좋은 간호사가 될 것인지 고민하라. 어느 의대에 갈 것인지 너무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좋은 의사가 될 것을 고민하라.



이제 인생의 황혼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꿈꾸는 직업은 아마추어 농부다. 좀 배부른 소리이긴 하지만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짓는 농사가 아니라 그저 이웃과 나눠먹을 수 있는 만큼의 농사를 짓고 싶다. 언젠가부터 흙 묻은 손으로 바람과 태양, 땀, 노동, 물과 함께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내 삶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글쎄, 미래의 이 꿈이 잘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물론 이 꿈의 성취 여부는 순전히 나한테 달려있다. 출신대학이나 학과에 달려 있지 않고 그냥 ‘나’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나의 이 꿈에 대해 그 누구도 평가할 자격은 없다. 설사 평가한다 해도 내가 평가받을 의무는 없다. 자유보다 더 좋은 명예나 부는 없다. 평생을 대학 이름이나 학과에 기대야 하는, 자폐적이고 누추한 명예나 부는 갖고 싶지 않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