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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나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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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하나

제법 번화한 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은 눈으로 뒤덮였고 조무래기들은 쏟아져 나와 눈과 하나로 어울렸다. 눈싸움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고 썰매를 타는 녀석들도 있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일상과 권태에 찌든 보통 사람에게 눈은 분명 잠시의 축복이다.

그런데 길 한 켠 눈밭에 한 녀석이 넘어져 있었다. 너 댓 살이나 되었을까. 옷차림으로 보아 사내녀석임이 분명한데, 뽀얀 얼굴이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리고 아주 깔끔하게 말린 파머머리까지,  마치 설국의 공주처럼 예쁘게 생긴 꼬마였다.

녀석은 눈밭에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얼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귀하게 자란 성장 이력 탓일 거라고 단정지어버렸다. 고생 없이 자란 아이들의 의타적 기질 탓이라고 얼른 결론지었다. 그 어여쁜 외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른 일어나야지......응, 어서.”


하지만 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다그치듯 말했다.
“자, 어서 일어섯! 울면 바보! 새 나라의 어린이는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 돼.”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아이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끼워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너무 오래 충고하기에는 갈 길이 바빴다.

그리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그 아이는 심한 소아마비였던 것이다.

그 날의 그 사건은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꼭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 날 이후로 타인에게 함부로 충고하지 않으려 한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설사 그것이 위로나 격려, 자극의 말일지라도. 그 넘어진 꼬마에게 나의 충고나 격려는 오히려 상처였을 것이다. 보이는 것으로 진실을 다 알 수는 없다.

 



일화 둘

잊을 만하면 한번씩 이메일로 안부를 물어오는 녀석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녀석의 모습이 생생하다. 유난히 부끄러움을 잘 타서 얼굴이 잘 붉어지곤 하던 아이였다. 눈은 크고 깊어서 금세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연약해 보였고, 치아는 시원하고 입모양은 단정해서 말 한마디 크게 내뱉을 것 같지 않았다. 몸동작도 작고 걸음걸이도 얌전해 그저 어리숙한 시골 소녀처럼 보이기만 했다.

그 녀석은 공부도 썩 잘 하지 못했다. 그렇게 공부에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미친 듯이 공부를 해대는 녀석도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했다. 평범한 대학이었다. 아니,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많이 미치지 못하는 대학일 수도 있겠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뜬금없이  녀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육군 하사관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꽤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과 군복은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에, 그 녀석이 군인이라니!

그런데 며칠 전 녀석에게서 편지가 왔다. 부사관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전남 보성의 보병학교에서 장교 훈련을 받고 있노라고. 이제 내년 2월이면 5만촉광의 다이아몬드를 달게 된다고. 이제 그 녀석은 대한민국의 육군 보병장교가 되는 것이다.

에필로그.

언젠가부터 대상에 대해 선입견을 갖지 않으려 한다. 대상에 대한 나의 평가나 선입견은 어긋난 적이 많았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예측이나 평가능력이 엄청난 것처럼 말하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수많은 오류와 실수의 사례는 잊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물질이 아닌 인간임에랴.

타인에게 말을 걸거나 그에 대하여 평가할 때 우리는 한없이 신중해야 한다. 물론 신중하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무한한 판단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타인은 내가 아니므로.

사실 신이 아닌 우리들은 그 사람에 대해 아주 적은 부분만을 알 수 있으며, 추론과 상상을 동원해도 그것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이다. 그래야 우리는 겸허해지고, 그로 인해 우리 모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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