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 법칙과 이론적 법칙
by 처사21경험적 법칙과 이론적 법칙
루돌프․카르납 ( 독일, 철학 )
윤 용 택 옮김
과학의 법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구분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에 대한 용어는 없다) 경험적 법칙과 이론적 법칙 사이의 구분이다. 경험적 법칙이란 경험적 관찰에 의해서 직접 확증될 수 있는 법칙을 말한다. “관찰될 수 있는” 이라는 용어는 흔히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서 쓰이며, 따라서 경험적 법칙은 관찰할 수 있는 것에 관한 법칙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될 것이 있다.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관찰한 수 있는” 이라는 용어와 “관찰할 수 없는” 이라는 용어를 서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관찰할 수 있는” 이라는 말을 매우 좁은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그 말을 “파란”, “단단한”, “뜨거운”과 같은 속성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그러한 것들은 감각에 의해서 직접 지각될 수 있는 속성들이다. 물리학자들에 있어서 그 말은 좀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비교적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는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들까지를 포함한다. 어떤 철학자는 80℃의 온도, 또는 42.5Kg의 무게 등을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러한 물리량들은 감각을 통해서 직접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물리량들은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무게는 저울에 올려 놓으면 잴 수 있고, 온도는 온도계로 측정하면 된다. 물리학자는 전자나 분자의 질량도 관찰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것들을 측정하는 절차가 훨씬 복잡하고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적 간단한 절차에 의해서 확증되는 물리량들 -자로 잴 수 있는 길이,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 또는 분광기로 측정할 수 있는 빛의 진동수 등- 은 이른바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철학자는 전류의 세기가 실제로 관찰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대할지도 모른다. 단지 전류계 바늘의 위치만이 관찰된다. 전류계가 회로에 연결되어 있고 그 바늘은 5.3이라 표시된 눈금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분명히 전류의 세기는 관찰되지 않았다. 전류의 세기는 관찰된 것으로부터 추론되었다.
물리학자는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추론은 그다지 복잡하기 않다고 대답한다. 그 측정 절차는 매우 간단하고 잘 입증된 것이라서, 전류계로 전류의 세기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른바 관찰될 수 있는 것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관찰할 수 있는” 이라는 용어를 올바르고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감각을 통한 직접 관찰에서부터 시작해서 상당히 복잡하고 간접적인 관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이 연속된 것을 어디까지는 관찰할 수 있고 어디까지는 관찰할 수 없다고 명확히 나눌 수 있는 선은 분명히 없다. 그러한 구분은 단지 정도의 문제이다. 어떤 철학자는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아내의 목소리를 관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가 전화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 보자. 과연 그녀의 전화 목소리는 관찰할 수 있는 것일까, 관찰할 수 없는 것일까? 어떤 물리학자는 보통 현미경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볼 때, 자신은 그것을 직접 관찰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만일 그가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경우에도 그럴 수 있을까? 만일 그 물리학자가 어떤 소립자가 거품 상자 속에서 그리는 궤도를 보는 경우에, 그는 소립자의 진로를 관찰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관찰할 수 있는” 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쓰고, 이에 비해서 물리학자들은 그 말을 상당히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관찰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는 선은 지극히 임의적이다. 철학자나 과학자가 쓴 책을 볼 때는 언제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저자마다 자신관점에 따라 자신이 가장 편리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그 선을 그을 것이고, 그들이 그러한 특권을 누려서는 안 될 이유도 없다.
나의 용어로, 경험적 법칙이란 감각에 의해서 직접 관찰할 수 있거나 비교적 간단한 기술로 측정될 수 있는 용어들이 들어 있는 법칙이다. 가끔 그러한 법칙들은 관찰과 측정에 의해서 발견된 결과들을 통해서 얻어졌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말로서 경험의 일반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들은 “모든 까마귀는 검다.”와 같은 성질과 관련된 법칙들뿐만 아니라 간단한 측정의 결과로서 생겨난 정량 법칙들도 포함한다. 기체의 압력, 부피, 온도 등과 관련된 법칙들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전압, 저항, 전류와 관련된 오옴의 법칙은 우리와 친숙한 또 다른 예이다. 과학자는 측정을 여러 번 반복해서 어떤 특정한 규칙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법칙으로 표현한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그것들은 이미 관찰한 사실들을 설명하고 미래에 관찰할 수 있는 사건들을 예측하는 데 사용된다.
내가 이론적 법칙이라 부른 두 번째 종류의 법칙에 해당하는,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용어는 없다. 가끔 그것들은 추상적 법칙 또는 가설적 법칙이라 불리기도 한다. “가설적” 이라는 말이 부적절할 수도 있는 이유는, 그것은 두 종류의 법칙들 사이의 구분은 그 법칙을 확증하는 정도에 근거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경험적 법칙이 있는데 그것이 낮은 정도로만 확증되는 잠정적인 가설이라고 한다면, 그 법칙은 가설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경험적 법칙인 것이다. 이론적 법칙은 그것이 잘 입증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서 경험적 법칙과 구분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은 다른 종류의 용어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경험적 법칙과 구분되어야 한다. 물리학자들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을 넓은 의미로 채택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이론적 법칙의 용어들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분자, 원자, 전자, 양성자, 전자기장, 그리고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관찰될 수 없는 여러 가지 다른 것들과 관련된 법칙들이다.
만일 시점(또는 지점)에 따라 변하지 않는 거대한 크기의 어떤 영역이 있다면,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간단한 기구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 영역이 공간적으로 매우 짧은 거리에서 변하거나 시간적으로 대단히 빨리, 예를 들어 매초마다 수십억 번 변한다면, 그것은 간단한 기술로는 직접 측정될 수 없다. 물리학자들은 그런 영역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물리학자들은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관찰할 수 없는 것 사이를 이런 식으로 구분한다. 만일 어떤 물리량이 공간적 거리 또는 시간적 간격이 충분히 크더라도 동일하게 남아 있다면, 그 물리량을 측정하는 데 기구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거시 사건이라 부른다. 만일 그 물리량이 공간과 시간적으로 지극히 짧은 간격에서도 변하기 때문에 간단한 기구로는 측정될 수 없을 때, 그것은 미시 사건이라 불린다. (이전에는 “미시적인”과 “거시적인”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오늘날에는 흔히 그것들을 “미시” 와 “거시”라는 용어로 줄여서 쓴다.)
미시 과정이란 극도로 작은 공간과 시간 간격들을 포함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가시 광선의 전자기파의 진동은 미시 과정이다. 어떤 도구로도 그것의 세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직접 관찰할 수는 없다. 가끔 “거시”와 “미시” 라는 개념이 “관찰할 수 있는”과 “관찰할 수 없는”이라는 개념과 대등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똑같지는 않고, 대략적으로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이론적 법칙들은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고, 거의 대부분 이것들은 미시 과정들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 법칙들은 때때로 미시 법칙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나는 “이론적 법칙”이라는 용어를 그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즉 나는 이론적 법칙이라는 말을, 그것이 미시냐 거시냐에 상관없이 관찰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는 법칙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관찰할 수 있는” 것과 “관찰할 수 없는” 것은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그 두 개념을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 차이가 일반적으로 매우 크기 때문에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모든 물리학자들은 기체의 압력, 부피, 온도 등과 관련된 법칙은 경험적 법칙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때 측정되어야 하는 물리량의 크기가 직접적이고 간단한 측정을 통해서도 법칙으로 일반화될 수 있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간단히 측정하기에 충분한 공간(부피)과 시간(기간)보다 더 크게,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기체의 양은 그것들을 직접 간단히 측정해서 법칙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물리학자들은 개별적인 분자들의 운동에 관한 법칙은 이론적인 법칙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런 법칙들은 직접적이고 간단한 측정에 토대를 둘 수 없는 일반화와 관련된 미시 과정에 대해서 다룬다.
물론 이론적 법칙들은 경험적 법칙들보다 더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론적 법칙들은 단순히 경험적 법칙들을 취해서, 그보다 약간 더 일반화시킨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학자는 경험적 법칙을 어떻게 도출해 낼까? 물리학자는 자연에서 어떤 사건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는 어떤 규칙을 알아 낸다. 그는 그 규칙을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서 기술한다. 그는 여러 경험적 법칙들을 한데 모아서 몇 가지 패턴을 관찰하고, 좀더 넓은 귀납적 일반화를 통해서 하나의 이론적 법칙을 도출했다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도출된 법칙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법칙이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떤 쇠막대가 가열되면 팽창하는 것을 관찰했다고 해 보자. 그 실험을 여러 번 했는데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면 그 규칙을 일반화시켜 이 쇠막대는 가열되면 팽창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은 좁은 영역을 가져서 하나의 특정한 쇠막대에만 적용되기는 하지만, 하나의 경험적 법칙이 기술된 것이다. 그리고 쇠로 된 특정한 물체는 가열될 때마다 팽창한다는 것이 잇따라 발견됨에 따라, 다른 쇠로 된 대상들에 대해서 더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쇠로 된 물체들은 가열될 때마다 팽창한다는 좀더 일반적인 법칙이 가능하게 된다. 비슷한 식으로 “모든 금속들은…”이라는 좀더 일반적인 법칙으로 발전하게 되고, 더 나아가 “모든 고체들은…”이라는 법칙이 생겨난다. 이것들을 모두가 앞의 것들보다 약간 더 일반적인, 간단한 일반화들이지만, 모두가 경험적 법칙들이다. 왜 그럴까? 그것들은 모두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들(철, 구리, 금속, 고체들)을 다루고 있고, 온도와 길이가 증가하는 것은 간단하고 직접적인 기술에 의해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러한 과정과 관련한 이론적 법칙으로서 쇠막대 속의 분자들의 운동에 대해서 언급하는 법칙이 있을 수 있다. 쇠막대를 가열했을 때 쇠막대의 팽창과 관련해서 분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운동할까? 우리는 앞에서 관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이론 -물질에 대한 원자 이론- 을 도입해야 하고, 지금까지 사용했던 개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들이 포함된 원자의 법칙들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한 이론적 개념들은 어느 정도 직접․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길이와 온도의 개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그 개념들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것들로 이루어지는 두 법칙들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론적 법칙들과 경험적 법칙들과의 관계는 경험적 법칙들과 단일 사실들과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경험적 법칙은 이미 관찰한 사실을 설명하고 아직 관찰되지 않은 사실을 예측하도록 도와 준다. 비슷한 식으로 이론적 법칙은 이미 구성된 경험적 법칙을 설명하고 새로운 경험적 법칙을 유도해 낼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개별적이고 분리된 사실들이 경험적 법칙으로 일반화되었을 때 하나의 질서화된 패턴에 부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이고 분리된 경험적 법칙들은 이론적 법칙의 질서화된 패턴에 잘 부합된다. 이것은 과학의 방법론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제기한다. 이론적 법칙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경험적 법칙은 단일한 사실들을 관찰함으로써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적 법칙에서 언급되는 대상들은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론적 법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와 비교되는 관찰들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앞에서 언급했던 “사실”이라는 단어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맥락에서는 그 말의 용법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학자들, 특히 과학자들은 내가 경험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명제들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실” 내지는 “경험적 사실”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물리학자들은 구리의 비열이 .090이라는 “사실”을 언급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부르지 않고 법칙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완전한 공식으로 된 하나의 보편적 조건 진술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x와 모든 시간 t에 대해서, 만일 x가 구리로 된 고체라면, t라는 시간에 x의 비열은 .090이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열팽창의 법칙과 오옴의 법칙들까지도 사실들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그러고 나서 그들은 이론적 법칙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경험적 법칙들은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나의 말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여기서 “사실”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나는 그 단어를 시공간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사실들에 제한하여 사용한다. 내가 사실이란 용어를 쓸 때는 일반적인 열팽창의 경우가 아니라, 오늘 아침 10시에 쇠막대를 가열했을 때 관찰했던 이 쇠막대가 팽창한 경우이다. 내가 사실들이라는 단어를 제한된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만일 “사실”이라는 단어를 애매한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경험적 법칙과 이론적 법칙이 설명하는 방식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 매우 모호해질 것이다.
이론적 법칙들은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 “자료들을 더욱더 많이 수집해서, 경험적 법칙을 넘어서서 이론적 법칙에 도달할 때까지 일반화시키도록 하자.” 어떠한 이론적 법칙도 그런 식으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돌, 나무, 꽃들을 관찰해서 다양한 규칙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경험적 법칙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아무리 오랫동안 주의깊게 관찰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의 문자를 관찰할 수는 없다. “분자”라는 용어는 관찰에 의해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관찰로부터 무한히 많은 일반화를 한다 하더라도 분자적 과정들의 이론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러한 이론은 다른 방식을 통해서 생겨나야 한다. 그것은 사실들의 일반화로 진술되지 않고 가설로 진술된다. 그렇게 진술된 가설들은 경험적 법칙들을 시험하는 방식과 유사한 방법으로 시험된다. 그러한 가설로부터 특정한 경험적 법칙들이 파생되고, 그렇게 파생된 경험적 법칙들은 다시 사실들을 관찰함으로써 시험된다. 경험적 법칙들은 이미 알려지고 잘 확증된 이론들로부터 파생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경험적 법칙들이 이론적 법칙들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파생된 경험적 법칙들이 알려지고 확증되느냐에 상관없이, 혹은 그것들이 새로운 관찰들에 의해서 확증된 새로운 관찰들에 의해서 확증된 새로운 법칙들이냐에 상관없이, 그와 같이 파생된 법칙들에 대한 확증은 그 이론적 법칙에 대한 간접적인 확증이 된다.
다음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어떤 과학자는 경험적 법칙(예를 들어 기체에 있어서 보일의 법칙)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 법칙이 파생될 수 있는 분자 이론을 탐구한다. 그 과학자는 여러 가지 경험적 법칙들이 파생될 수 있는 훨씬더 일반적인 이론을 구성하려고 한다. 이론에서 파생되는 경험적 법칙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들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리고 서로간에 관련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더 설득력이 있게 될 것이다. 이론으로부터 파생된 이러한 법칙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이미 알려진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이론은 새로운 시험들에 의해서 확증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적 법칙들을 유도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론은 새로운 경험적 법칙들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측은 가설적인 방식으로 이해된다. 만일 그 이론이 성립한다면, 특정한 경험적 법칙들 역시 성립할 것이다, 그 예측된 경험적 법칙은 관찰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따라서 그 경험적 법칙이 성립하는지 안하는지는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만일 그 경험적 법칙이 확증된다면, 그것은 그 이론에 대한 간접적 확증을 해주는 셈이 된다. 물론 경험적 법칙이든 이론적 법칙이든, 법칙에 대한 어떠한 확증도 단지 부분적 확증일 뿐 결코 완전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경험적 법칙들인 경우에는 좀더 직접적인 확증이 된다. 이론적인 법칙에 대한 확증은 간접적이다. 왜냐 하면 이론적 법칙에 대한 확증은 그 이론으로부터 파생된 경험적 법칙들에 대한 확증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론의 궁극적인 가치는 새로운 경험적 법칙을 예측하는 힘에 있다. 새로운 이론은 이미 알려진 법칙들을 설명하는 데도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가치이다. 만일 어떤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적 체계를 제안했는데, 거기서 아무런 새로운 법칙도 유도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알려진 모든 경험적 법칙들의 집합과 논리적으로 동치이다. 그 이론은 다소 정밀한 것일 수도 있고, 이미 알려진 모든 법칙들을 본질적으로 단순화시켰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단순화시킨 것일 수도 있다. 이와는 달리 물리학에서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던 새로운 이론들은 새로운 경험적 법칙들을 유도해 낼 수 있었던 이론들이었다. 만일 아인슈타인이 그의 상대성 이론을 제안했던 목적이 단지 이미 알려진 어떤 법칙들을 포괄하는 -어느 정도 그 법칙들을 단순화시키는- 정밀한 새로운 이론을 제안하는 것뿐이었다면, 그의 상대성 이론은 그처럼 혁명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상대성 이론은 처음으로 수성의 근일점의 운동과 관성이 태양 근처에서 휘어지는 것과 같은 현상들을 설명하는 새로운 경험적 법칙들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한 예측들은 상대성 이론이 오래된 법칙들을 새롭게 표현하는 방식 이상의 것임을 보여 주었다. 사실 상대성 이론은 놀랄 만한 예측력을 가진 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결과들은 결코 고갈될 수 없다. 이것들은 그 이전의 이론들로부터는 파생될 수 없었던 결과들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힘을 지닌 이론은 정밀하면서 이미 알려진 법칙들을 하나로 통일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법칙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보다 더 간단하다. 그러나 그 이론이 얼마나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은 경험적 수단을 통해서 확증될 수 있는 새로운 법칙들을 제안하는 힘이 얼마나 크냐에 달려 있다.
< 과학 철학 입문, 1993, 서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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