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문화의 전통과 계승
by 처사21민족 문화의 전통과 계승
이 기 백(李基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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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서양식(西洋式)으로 꾸미고 있다. “목은 잘라도 머리털은 못 자른다.”고 하던 구한말(舊韓末)의 비분 강개(悲憤慷慨)를 잊은 지 오래다. 외양(外樣)뿐 아니라, 우리가 신봉(信奉)하는 종교(宗敎), 우리가 따르는 사상(思想), 우리가 즐기는 예술(藝術), 이 모든 것이 대체로 서양적(西洋的)인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는 학문(學問) 또한 예외가 아니다. 피와 뼈와 상을 조상(祖上)에게서 물려받았을 뿐, 문화(文化)라고 일컬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서양(西洋)에서 받아들인 것들인 듯싶다. 이러한 현실(現實)을 앞에 놓고서 민족 문화(民族文化)의 전통(傳統)을 찾고 이를 계승(繼承)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편협(偏狹)한 배타주의(排他主義)나 국수주의(國粹主義)로 오인(誤認)되기에 알맞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러면 민족 문화의 전통을 말하는 것은 반드시 보수적(保守的)이라는 멍에를 메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문제(問題)에 대한 올바른 해답(解答)을 얻기 위해서는, 전통이란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은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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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너무도 유명한 영․정조 시대(英正祖時代) 북학파(北學派)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나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소설이, 몰락하는 양반 사회(兩班社會)에 대한 신랄(辛辣)한 풍자(諷刺)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문장(文章)이 또한 기발(奇拔)하여, 그는 당대(當代)의 허다한 문사(文士)들 중에서도 최고봉(最高峰)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추앙(推仰)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문학(文學)은 패관 기서(稗官 奇書)를 따르고 고문(古文)을 본받지 않았다 하여, 하마터면 ‘열하일기’가 촛불의 재로 화할 뻔한 아슬아슬한 장면이 있었다. 말하자면, 연암은 고문파(古文派)에 대한 반항(反抗)을 통하여 그의 문학을 건설(建設)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민족 문화의 전통을 연암에게서 찾으려고는 할지언정, 고문파에서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민족문화의 전통에 관한 해명(解明)의 열쇠를 제시(提示)하여 주는 것은 아닐까?
전통은 물론 과거로부터 이어 온 것을 말한다. 이 전통은 대체로 그 사회 및 그 사회의 구성원(構成員)인 개인(個人)의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전통은 우리의 현실에 작용(作用)하는 경우(境遇)가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 이어 온 것을 무턱대고 모두 전통이라고 한다면, 인습(因襲)이라는 것과의 구별(區別)이 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습을 버려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계승(繼承)해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에서 이어 온 것을 객관화(客觀化)하고, 이를 비판(批判)하는 입장에 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 비판을 통해서 현재(現在)의 문화 창조(文化創造)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우리의 전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같이, 전통은 인습과 구별될 뿐더러, 또 단순한 유물(遺物)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현재에 있어서의 문화 창조와 관계가 없는 것을 우리는 문화적 전통이라고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고정 불변(固定不變)의 신비(神秘)로운 전통이라는 것이 존재(存在)한다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이 전통을 찾아 내고 창조(創造)한다고도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과거에는 훌륭한 문화적 전통의 소산(所産)으로 생각되던 것이, 후대(後代)에는 버림을 받게 되는 예도 허다하다. 한편, 과거에는 돌보아지지 않던 것이 후대에 높이 평가(評價)되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암의 문학은 바로 그러한 예인 것이다. 비단, 연암의 문학만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민족 문화의 전통과 명맥(命脈)을 이어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의 모두가 그러한 것이다. 신라(新羅)의 향가(鄕歌), 고려(高麗)의 가요(歌謠), 조선 시대(朝鮮時代)의 사설시조(辭說時調), 백자(白磁), 풍속화(風俗畵) 같은 것이 다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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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가 계승(繼承)해야 할 민족 문화의 전통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연암의 예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과거의 인습을 타파(打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努力)의 결정(結晶)이었다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사실이다.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과정(創製過程)에서 이 점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만일, 뜻을 굽혔던들, 우리 민족 문화의 최대 걸작품(最大傑作品)이 햇빛을 못 보고 말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원효(元曉)의 불교 신앙(佛敎信仰)이 또한 그러하다. 원효는 당시의 유행(流行)인 서학(西學, 당나라 유학)을 하지 않았다. 그의 ‘화엄경소(華嚴經疏)’가 중국(中國) 화엄종(華嚴宗)의 제3조(第三祖) 현수(賢首)가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의 본이 되었다. 원효는 여러 종파(宗派)의 분립(分立)이라는 불교계(佛敎界)의 인습에 항거(抗拒)하고, 여러 종파의 교리(敎理)를 통일(統一)하여 해동종(海東宗)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승려(僧侶)들이 귀족(貴族) 중심의 불교(佛敎)로 만족할 때에, 스스로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배움 없는 사람들에게 전도(傳道)하기를 꺼리지 않은, 민중 불교(民衆佛敎)의 창시자(創始者)였다. 이러한 원효의 정신은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귀중한 재산(財産)이 아닐까?
겸재(謙齋) 정선(鄭敾)이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혹은 혜원(惠園) 신윤복(申潤福)의 그림에서도 이런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화보 모방주의(畵報模倣主意)의 인습에 반기(反旗)를 들고, 우리 나라의 정취(情趣)가 넘치는 자연(自然)을 묘사(描寫)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산수화(山水畵)나 인물화(人物畵)에 말라붙은 조선 시대의 화풍(和風)에 항거(抗拒)하여, ‘밭 가는 농부(農夫)’, ‘대장간 풍경(風景)’, ‘서당(書堂)의 모습’, ‘씨름하는 광경(光景)’, ‘그네 뛰는 아낙네’ 등 현실 생활(現實生活)에서 제재(題材)를 취한 풍속화(風俗畵)를 대담(大膽)하게 그렸다. 이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혁명(革命)과도 같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들의 그림이 민족 문화의 훌륭한 유산(遺産)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민족 문화의 전통은 부단(不斷)한 창조 활동(創造活動) 속에서 이어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계승(繼承)해야 할 민족 문화의 전통은 형상화(形象化)된 물건(物件)에서 받은 것도 있지만, 한편 창조적(創造的) 정신 그 자체(自體)에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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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무시(無視)한다는 것은 지나친 자기 확대(自己虐待)에서 나오는 편견(偏見)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첫머리에서 제기(提起)한 것과 같이,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자는 것이 국수주의(國粹主義)나 배타주의(排他主義)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왕성(旺盛)한 창조적 정신은 선진 문화(先進文化) 섭취(攝取)에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새로운 민족 문화의 창조(創造가 단순한 과거의 묵수(墨守)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또 단순한 외래 문화(外來文化)의 모방(模倣)도 아닐 것임은 스스로 명백한 일이다, 외래 문화도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이바지함으로써 뜻이 있는 것이고, 그러함으로써 비로소 민족 문화의 전통을 더욱 빛낼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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