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여섯 가지의 고정관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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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가지의 고정관념

 

 

이 만 갑(수필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를 옳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자신을 옳게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는 자신을 옳게 가꿀 수 없을 뿐더러 자신을 옳게 표현할 수도 없으며 또 자칫 잘못하면 실패를 하고 삶의 바탕까지 잃을 위험조차 없지 않다.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두고 남이 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이 말하는 것 속에도 잘못된 앎이 적지 않은 듯하다. 물론 자신이 속해 있는 한 사회와 문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꽤 정확히 안다고 해도 거기에는 얼마쯤의 부풀리거나 빗나가거나 모자라는 점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의 견해에도 얼마든지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잘못된 앎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너무 뿌리깊게 박혀 있으면 매우 곤란하다.

 

한국 사회와 문화의 인식에도 그런 잘못된 것이 적지 않은 듯하다. 그 중요한 까닭의 하나는 이제까지 사회의 표면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사람들, 곧 조선왕조 시대에 사회의 무대에서 활개치고 행동하던 양반과 같이 권세 있고 부유한 사람들의 어떤 두드러진 행동의 특성을 보고 그것을 한국인 모두가 갖는 행동의 유형으로 잘라말해 내려온 데에 있다. 이런 버릇은 한국을 지배하던 식민지 통치자나 외국인이 외곬으로 겉만 관찰을 한데에 있으며 또 어떤 다른 목적으로 일부러 나쁘게 말한 데에 있다.

 

전통 시대의 한국의 가족 제도가 대가족 제도였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예전에는 참으로 많았다. 지금에는 도대체 그런 판단에 관심을 가지고,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는 듯하다. 중국에서도 대가족 제도가 보편 형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마리온 레비는 중국의 가족제도를 연구해보고 그렇지 않음을 증명했다. 한편으로 시카라 히로시라는 일본 학자는 조선 시대의 호적을 조사하여 가족 수가 다섯 사람을 넘지 않았음을 밝혀냈다.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양반들은 가족이 많은 것을 좋아했고 또 많은 가족을 거느렸음도 사실이다. 집안의 모든 힘을 한 손에 쥔 가장은 조상의 벼슬과 업적을 숭상하여 가문을 자랑하려고 하였으며 자식들이 성인이 되어도 자기 곁에 두고 자기의 권위를 과시하며 집안의 번영을 자랑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민중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경제 능력이 없었다. 많은 가족을 유지하려면 가장의 힘이 강해야 하는데 일반 민중은 양반의 상전에 매여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처자식을 통제할 만큼 경제의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가난하면 잘 먹고 잘 살지 못하므로 젖먹이의 사망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일을 시킬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잘사는 집의 심부름꾼이나 머슴으로 끌려가기 쉬우므로 많은 가족을 거느릴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예부터 남자를 높이 치고 여자를 낮추어 보는 관념이 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해서 크게 틀릴 것은 없을 것 같다. 여자는 완전히 가정에 파묻혀 있었으며 따라서 이름도 집안에서 부를 것만 있으면 충분했고 사회에서 쓰일 이름은 기생과 같이 특수한 일을 하는 여자 말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보통 여자들은 집 울타리 바깥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들이 여자를 무턱대고 깔보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유교 가치관이 실천되던 양반 사회에서도 자식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것이, 또 손아래 남자동생은 손위 누이를 깍듯이 존대하는 것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혼례 뒤에는 꽤 오랫동안 처가에서 사는 풍습이 성행했던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자가 천시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유교의 가치관이 강하게 요구되지 않았던 서민층에서나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도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존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누르며 살지는 않는다. 북녘 지방에서 사람들이 부부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북쪽의 여자는 남쪽의 여자보다도 훨씬 강하다. 힘으로는 남자에게 당할 도리가 없을 때에도 강하게 맞서는 경우가 많다. 또 남자와 여자의 내외 풍습도 심하지 않다. 남편의 친구가 찾아오면 서슴지 않고 나서서 인사를 하고 같이 한자리에서 얘기를 하는 것도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북녘 지방만이 아니고 경상도 지방에서도 명절에 여자들이 술을 마시고 들이나 길에서 춤을 추고 자유롭게 노는 것을 보면 여자가 남자에게 매여 가정을 떠나서 활동하는 것이 억제되었다는 생각은 일부 양반 집안에나 적용되는 것이지 민중 사이에는 생각하기보다 훨씬 덜한 것같이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여자들의 씩씩한 사회 활동이 쉽게 설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오늘의 한국 여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사회 활동을 하게 된 원인으로는 그 동안의 학교 교육의 향상, 기독교의 전파, 전쟁과 혼란 속에서 벌어진 생활의 변화, 민주주의 가치관의 받아들임 및 그밖의 여러 가지 근대 제도의 영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과 함께 어떤 지역 또는 어떤 계층의 여성들에게는 그들의 사회 활동을 억제하는 관념이 강하지 않았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한국인은 게으르기 때문에 잘 못산다는 얘기가 있다. 이 얘기는 특히 일제시대에 자주 들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렇다고 느껴질지 모른다. 조선말에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 루스벨트의 친구인 조지 케넌이라는 사람이 우리 나라를 다녀간 일이 있다. 그는 한국을 돌아본 뒤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서울 거리에는 할일없이 길가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입과 코와 눈에 파리가 잔뜩 붙어 있어도 쫓으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이 제 나라라고 한들 나라를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일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고 한다. 읽은 지 오래되어 꼭 내 기억이 맞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그런 뜻으로 말했던 것이다.

 

케넌의 이 얘기는 꽤 충격을 준다. 그의 말에 잘못이 있고 부풀린 점이 있으며 또 그릇된 의도가 작용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오죽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도 어렸을 때에 그런 광경을 본 일이 있다. 그만큼 일제시대에는 할일이 없어서 길가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한국인 모두가 게으른 천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할 수는 없다. 농촌사람들이 겨울에 남의 사랑방에서 잡담을 하거나 술타령을 하고 또 노름을 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그것을 보고 뜻있는 사람들은 그동안에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치면 생활에 보탬이 될 터인데 한심한 일이라고 한탄하였다. 물론 그 말은 옳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루내내 애를 써서 그런 일을 한다고 해도 쉽게 제 값을 주고 사들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농민들도 요사이에는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부지런해야 한다고 정부에서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느 때의 정부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은 일은 없었다. 오늘날에 농민이 부지런해진 까닭은 부지런하도록 만드는 자극이 있고 부지런하면 당장에 뚜렷한 이득이 나타나는 데에 있다. 어떻게 하면 잘살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을 교육을 통해서 안다. 또 신문이나 잡지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잘만 교육시키면 아이들이 훌륭하게 될 수 있는 것도 안다. 학비를 대주려면 그만큼 돈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제는 곡식을 거두면 제 값으로 팔리게 되니 생산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생산을 더욱 더 늘리려고 온 힘을 쏟게 된다.

 

한국인이 게으르다는 얘기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이 일부러 부풀려 한 소리인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의 수탈 때문에 한국인이 못살게 된 것을 한국인의 게으름 때문에 못살게 되었다고 둘러대어 풀이했다.

 

일본인 하나하나의 능력은 별것이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면 단결해 서 굉장한 힘을 떨친다. 한국인은 개인의 능력은 대단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면 싸움을 하게 되어 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얘기도 자주 듣는 말이다. 한국인의 자질에 관한 말에는 두 개의 잘못된 앎이 깔려 있다. 하나는 한국인 개인의 능력은 대단하여 일본인 개인과 경쟁하면 이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인은 천성으로 뭉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몸으로 보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뒤떨어진 점은 없는 것 같다. 다른 것을 따지더라도 일본인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중에는 아직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일본인보다 뒤떨어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떤 한국인 여자 직공이, 일본인 감독자는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를 단박 알기 때문에 조금만 손대어도 고칠 수 있으나, 한국인 감독자는 그렇게 숙련된 사람이 드물어서 아주 큰 수리를 할 때까지 기계에 고장이 난 줄을 모른다고 했다. 또 그 여자는, 일본인 여자 직공은 한국인 여자 직공보다 움직임이 재빨라 더 많은 기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도 했다.

 

꽤 발전한 방직 공업에서조차도 아직 한국인의 숙련도는 일본인의 그것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물며 한국인이 많은 경험을 쌓지 못한 분야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물론 한국인이 더 힘을 쓰면 일본인을 따라갈 수 있는 충분한 소질을 가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곧장 한국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과 경쟁했을 때에 모든 면에서 낫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대체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편으로 한국인은 천성으로 뭉치지 못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피비린내나는 당쟁에 골몰하였고 최근에까지도 한국인이 서로 힘을 모아서 잘 뭉치지 못하는 면을 내보인 것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 모두가 잘 뭉치지 못하는 타고난 결함을 지닌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 당쟁이 심했던 까닭은 벼슬의 자리는 매우 제한되어 있는데 벼슬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는 양반들의 수가 늘어났던 데에 있다고 한다. 특히 벼슬을 해야만이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벼슬을 둘러싼 경쟁은 돈을 벌든지 생산량을 증가시키든지 또는 학교 성적을 올리든지 하는 것과 관련된 경쟁과는 그 바탕부터가 다르다. 돈을 버는 경쟁에서는 남이 백만원을 번다고 해도 나는 이백만 원을 벌 수 있다. 그 경쟁의 문은 열려 있다. 그러나 벼슬 경쟁에서는 상대편이 벼슬을 차지하면 나는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 벼슬 경쟁의 문은 닫혀 있다. 그러므로 그런 경쟁에서는 분열이 생기기가 쉽다. 양반 벼슬아치가 당쟁을 일삼고 단결을 잘못한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신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러한 양반 체질 때문에 한국인은 집단에서 공동 목표를 위해서 뭉치기보다 감투를 둘러싸고 패싸움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 해방이 된 뒤에는 ‘11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정당의 분열이 심했다. 분열의 경향은 정치 권력을 쫓는 정당뿐만이 아니라 종교 단체나 문학 단체나 학교 재단과 같은 지성의 성격이 꽤 강한 단체에서도 흔히 보인다.

 

한국인이 잘 뭉치지 못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또하나의 중요한 까닭은 민중이 뭉칠 수 있는 형편 속에서 산 일이 별로 없었던 데에 있다고도 생각된다. 관청과 양반의 압박을 받고 수탈을 당하는 민중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뭉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런 형편 속에서도 그들은 두레나 품앗이 같은 협동 노동의 형태를 발전시켰으며 관혼상제나 그밖의 행사를 위해서 여러 가지 계를 조직하였다. 일제 시대에는 더욱이 뭉치기가 어려웠다. 한국을 통치했던 후진 자본주의 국가 일본은 세계 식민지 통치 역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포악하게 식민지 정책을 펴서 한국인이 자유롭게 뭉치는 것을 훼방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근대에도 어떤 목적을 겨냥하여 뭉쳐 조직 생활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천성으로 뭉치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해방된 뒤에도 한참 동안 혼란으로 말미암아 단체 활동을 발전시키기가 어려웠다. 뭉친 조직 생활을 하려면 공통의 생활 이념, 같은 문화 기반 , 적절한 지위의 배정과 구실의 규정, 그리고 집단 속에 있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지도력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 기반이 약하고 근대화의 초기에 일본으로부터 자주권을 빼앗겨서 자기가 원하는 사회 체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세우지 못한 한국인으로서 쉽게 조직생활을 발전시키는 능력이 키워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인의 조직 생활의 능력은 크게 다져졌다. 천성으로 한국인이 뭉칠 줄 모르는 민중이라면 이처럼 재빨리 혼란이 수습되고 세계에서도 유례를 보기 어려운 빠른 성장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한국인이 다른 민족보다도 똘똘 뭉치는 힘이 뛰어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뭉치는 힘이 약한 것으로 보였던 것은 모든 한국인이 아니라 양반 지배계층이었고, 어느 한국인은 근대 생활 속에서 뭉칠 기회와 경험을 별로 갖지 못했음을 지적하려고 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보태면, 한국인은 앞으로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질 때에는 다른 어떤 민족에 못지 않는 뭉치는 힘을 떨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대주의라는 말도 한국인의 성격을 헐뜯어 말할 때에 자주 나오는 말인 것 같다. 한국인은 중국 대륙에 붙어 동북아시아에 자리잡은 작은 반도로서 일본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고 중국과 일본을 빼놓고는 가까운 나라가 없다 한국인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았고 그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을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국인이 중국의 눈치를 보고 섬기는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성싶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도 한국은 완전히 중국에 정복되어 오랫동안 중국에 점령당함으로써 완전히 중국문화에 동화되어버려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사대주의 경향이 있었다고 규탄할 것까지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인이 흔히 말해지는 것처럼 모두가 그렇게 사대주의에 젖어 왔을까 하는 데에 있다. 이 말은 결코 한국인에게 사대주의 경향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뜻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대주의 경향은 양반 통치자에게 강했던 것이며 민중 사이에서는 훨씬 덜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민중은 정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대주의 생각을 가질 필요조차 없었다.

 

한국인은 사대주의적이다.’하는 말은 조선 말기에 개화파와 수구파가 서로 권력을 잡으려고 싸울 때에 개화파가 여전히 중국에 빌붙어서 낡아빠진 체제를 그대로 지키려는 수구파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에 흔히 사용했기 때문에 마치 거의 한국인이 모두 사대주의 성격을 강하게 지녔던 것같이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조정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중국을 충실히 섬긴다는 성의를 밖으로 늘 보여왔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 모두가 언제나 마음속 깊이 중국을 우러러보고 중국의 돌봄이 없으면 살아갈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여 왔을까? 더욱이 중국이나 그밖의 다른 나라에 한국인은 사대주의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크고 강한 나라면 아무런 저항 없이 언제나 엎드리고 그에 따르려고만 하는 것일까? 양반 통치 계급에 사대주의 경향이 강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짐작이므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온통 중국에만 기대려고 했는지도 좀더 연구해서 따져 봐야만 할 것 같다.

 

한국인이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은 고대 사회에서부터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였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받들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유교 요소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하나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우선 먹는 음식을 보면 거기에는 유교 요소가 전혀 없으며 유교는 커녕 중국의 그것과 비슷한 것조차 없다. 음식만이 아니고 보통 때에 입는 옷, 나날이 사는 집에서도 유교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당연한 논리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교 집단 생활을 하는 데에는 영향을 미쳤겠으나 입을거리와 먹을거리를 포함한 살림살이나 그 내용과는 서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유교가 우리의 사는 모습에 아주 깊은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 지켜 온 사람들의 사는 모습엔 유교의 것이 많이 들어 있으며 먹고 입고 사는 일에도 중국의 것이 적지 않게 스며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흔히 동아시아의 세 나라는 같은 문화권에 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자와 유교를 비롯한 중국의 제도와 문화가 한국과 일본에 꽤 번진 것을 겉으로만 보고 하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인이 사는 살림살이의 양식과 내용이 중국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면 그 같은 문화권이라는 말이 꽤 헛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림살이는 문화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생활 양식은 오히려 한국엔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 살림살이뿐만 아니라 언어나 예술을 보더라도 여느 민중에게는 이렇다 할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다.

 

유교란 중국의 문화가 한국에 영향을 준 것은 통치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기술과 제도, 그리고 그에 관련되는 윤리와 그밖의 관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이 거의 중국에 기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치 계급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일반 민중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유교는 다스리는 사람의 이념이며 생활철학이다. 그러므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그런 거룩한관념들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또 그 관념들은 어려운 한자로 되어 있어서 민중은 여간해서 알 수도 없었다.

 

서민들이 유교의 가르침에 따랐다면 그 이치를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상전들이 하는 것을 본뜨거나 거기에서 암시를 받고 따랐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일반 민중은 양반에 비겨서 훨씬 덜 유교적이었을 뿐 아니라 형편에 따라 쉽게 다른 관념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민중이 조선 말기에 기독교나 동학에 쉽게 영향을 받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는 위에 든 것들, 곧 내가 그릇된 앎이라고 지적한 것들을 모두 근거 없는 것들이라고 한꺼번에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은 수의 한국인만이 어떤 때에 가졌던 어떤 특성을 마치 한국인이 모두 지금도 굉장히 강하게 가지고 있는 듯이 말하고 또 그렇게 믿기 때문에, 새로운 사태에 대비해서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면서도 공연히 자신을 잃거나 자기를 부정하게 하는 일이 때때로 있어서 이것이 걱정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본질 요소는 조선 시대의 양반 통치자들이 받아들인 것 또는 형성한 것이라기 보다 삼국 시대나 고려시대의 민중 사이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일 듯하다. 오늘의 시골의 농민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거기에는 양반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요소들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역사는 너무나 궁중과 양반과 또는 큰 군사 사건과 정치 사건을 중심으로 삼아 씌어졌다. 그리고 너무나 기록에만 기대고 있다. 그 기록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로 되어 있으며 양반 자신의 손으로 또는 양반의 명령을 받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거기에는 양반들에게 유리한 자료가 선택되어 실리기 마련이었고 일반 민중에게 유리한 내용은 알게 모르게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디 모습을 찾으려면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깊이 파헤침과 함께 오늘의 시골 사람들의 생활을 깊이 관찰하는 것이 긴요하다.

우리의 참모습을 아는 것은 여간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우리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더 훌륭한 민족문화를 창조하여 복된 앞날을 설계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가 가진 모든 요소들을 햇빛 아래로 끌어내어서 살핀 뒤에 냉정하게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다.

<한국수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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