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문제의 딜레마
by 처사21환경문제의 딜레마
이 정 전(서울대 환경대학원)
1 종합과학성 대 분업화‧전문화
흔히 환경문제는 종합과학적 문제라고 한다. 이 말은 환경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로 여러 분야에 걸친 지식을 매우 광범위하게 필요로 함을 뜻한다. 우선 표면적으로는 환경문제의 제1차적 원인은 경제활동이다. 환경문제가 경제활동의 결과로 배출되는 환경오염물질들 때문이라고 한다면, 환경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종 경제활동으로 인하여 어떤 오염물질들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배출되는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보면 생산을 많이 했다는 것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면 각종 환경오염물질의 배출량도 매우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또한 환경오염이 그만큼 더 심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좁은 국토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온 경우에는 환경이 크게 오염될 가능성이 그만큼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선진국들이 1백여 년에 걸쳐 이룬 경제성장을 우리는 불과 2, 30년 사이에 달성했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다른 나라들이 1백여 년에 걸쳐 배출한 환경오염물질을 우리나라는 불과 2, 30년에 집중적으로 좁은 땅덩어리에 쏟아부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과거 2, 30년 사이의 고도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리의 환경이 급속도로 오염되어온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비록 똑같은 양의 환경오염물질이 배출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배출되느냐에 따라 실제로 환경이 오염되는 정도에 큰 차이가 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양의 하수도물을 강에 버리더라도 강물이 많이 불었을 때에 버리느냐 또는 가뭄이 들어서 강물의 유량이 매우 적어졌을 때 버리느냐에 따라 강이 오염되는 정도에 큰 차이가 날 것이며, 똑같은 양의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하더라도 바람이 잘 불고 건조할 때 배출하느냐 또는 그렇지 않을 때 배출하느냐에 따라 대기가 오염되는 정도에 큰 차이가 난다. 오염물질이 배출되는 장소도 문제가 된다. 예를 들면 똑같은 양의 구정물을 배출하더라도 강 상류에 배출하느냐 중류에 배출하느냐 또는 하류에 배출하느냐에 따라 강이 오염되는 정도나 또는 수질오염으로 인한 피해의 정도에 큰 차이가 날 수가 있다.
경제 전체적으로 볼 때도 똑같은 얘기를 할 수가 있다. 즉 단순히 생산을 많이 한 결과 경제성장률이 높았다고 해서 오염물질의 배출량이 비례해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생산을 했느냐에 따라서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비교적 깨끗하게 유지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경제성장률은 매우 낮으면서 환경은 지독하게 오염될 수도 있다.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경우 환경오염이 경제성장률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의 많은 선진국들이 그랬고 또 우리나라가 그랬다. 예를 들면 1965~79년 사이에 우리 경제의 총에너지 생산은 3배 정도 증가했음에 반해 대표적 대기오염물질인 황산화물 배출은 9배나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증가를 고려하더라도, 이 기간 동안에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2.5배 정도 증가했음에 반해 1인당 황산화물 배출량은 거의 7배 증가한 것으로 계산된다.
어떤 환경오염물질들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배출되느냐는 어떤 경제활동이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영위되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환경오염물질의 배출규모와 배출양태는 경제활동의 규모와 양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환경문제를 파악하는 데는 경제학의 지식이 가장 많이 필요하고 또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경제학은 환경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부터 이 방면에 많은 연구를 수행해왔으며 따라서 많은 분석도구들을 장만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의 지식만으로 이 첫번째 단계의 인과관계가 완전히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경제활동 규모 및 양태가 환경오염물질 배출 규모 및 양태를 결정한다고 하지만 경제활동 규모 및 양태 그 자체는 또한 다른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인 요인들의 영향을 받게 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경문제를 보다 근원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원천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려면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문화적 요인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따라서 철학이나 사회과학 여러 분야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경제의 움직임과 환경오염물질의 배출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환경문제의 전모가 밝혀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환경오염물질들의 배출을 문제 삼는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들이 환경에 버려지면 물과 공기 그리고 토양 등을 더럽혀 결국 우리 환경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통상 말하는 환경의 질이란 매우 포괄적이면서 다차원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수질을 의미할 수도 있고 대기의 질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경관의 질 또는 환경을 구성하는 다른 어떤 것의 질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떻든 환경오염물질의 배출과 환경의 질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환경의 질을 측정하고 표시하는 어떤 객관적인 지표가 정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수질의 경우 물속에 녹아 있는 산소의 양이라든지, 물속에 포함된 유지물질의 양, 투명성을 나타내는 탁도, 염도, 경도, 물속에 포함된 대장균의 양, 서식하는 특정 물고기의 수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지표가 거론된다. 대기의 질의 경우에도 대기에 포함된 아황산가스나 이산화탄소‧질소산화물 등의 농도, 먼지의 양 또는 대기의 온도 등 여러 가지 지표가 있다. 이런 지표들이 정해지면 다음에는 이 지표로 요약되는 환경의 질에 영향을 주는 이른바 오염물질들이 판별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이 지표들 그리고 관련 오염물질의 양 사이의 인과관계가 밝혀져야 한다.
환경에 버려진 환경오염물질들은 대기중에 확산되거나, 물속에서의 운반 또는 분해‧희석 등의 매우 복잡한 자연적 과정을 거쳐서 환경의 질에 영향을 주게 된다.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은 우리 인간이 버린 각종 쓰레기와 오염물질들을 받아서 보관하고 나아가서 이들을 우리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형태 또는 유용한 형태로 전환시키는 자연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대자연의 기능을 흔히 자연의 동화능력 또는 자정능력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가정하수나 공장폐수가 웬만큼만 강으로 방출되더라도 침전이나 확산‧희석 등의 물리적 과정 또는 분해나 합성 등의 생물‧화학적 과정을 거쳐 강물이 다시 깨끗한 상태로 돌아갈 수가 있다. 대기중의 기류는 대기오염물질이 집중됨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를 소산시켜준다. 비는 대기중의 오염물질들을 씻어 주는 기능을 한다. 때로는 대기오염물질이 화학적 반응을 거쳐 덜 해로운 물질로 변형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일산화탄소는 대기중에서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로 바뀐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자연의 이러한 자정능력은 하나의 유용한 자원이 된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자정능력을 초과해서 지나치게 많은 오염물질이 자연에 버려지면 환경의 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환경문제란 자연의 자정능력을 초과해서 환경오염물질이 배출됨으로 인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버릴 일은 아니지만, 어떻든 환경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환경에 배출된 각종 오염물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느 정도로 환경의 질에 영향을 주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래서 환경오염물질의 배출과 환경의 질 사이의 인과관계의 규명이 환경문제를 파악하기 위한 두번째 관문이 될 것이다.
이 두번째 단계에 관련되는 분야는 생물학‧생태학‧화학‧지질학‧해양학‧공학 등 주로 자연과학 분야이다. 환경오염물질의 배출과 환경의 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오래 전부터 매우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환경오염물질의 배출과 환경의 질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이론들이 개발되어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환경문제라고 하면 으레 자연과학 분야의 문제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환경처 산하의 국립환경연구원이 우리나라에서 수행된 환경관련 연구들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도 환경문제에 대한 연구는 그 대부분이 이 두번째 인과관계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의 지식에 의거해서 이 두번째 인과관계만 알아서는 환경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환경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 그 자체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환경은 앞에서 얘기한 자정능력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여러 가지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우리가 환경의 질에 대해서 우려하는 이유는 이것이 떨어지면 우리 인간이 환경을 이용하는 데에 많은 지장이 생겨서 결국 각종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강은 서울 시민에게 식수를 공급하는데, 한강이 더러워지면 한강을 식수원으로 이용하는 데 많은 지장이 발생한다. 공장의 매연이나 자동차 배기가스로 서울의 공기가 더러워지면 서울 시민은 종전과 같이 깨끗한 공기를 호흡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환경오염으로 인한 각종 지장들은 우리의 환경이용 양태와 밀접히 관련된다.
그러므로 환경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자면, 세번째 단계로 환경의 질의 변화와 우리의 환경이용 양태 사이의 인과관계가 규명되어야 한다. 이 세번째 단계 역시 여러 분야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면 대기오염이 농업 양태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생물학이나 생태학‧농학 등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한강의 오염은 서울 시민의 여가행태 그리고 한강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이해는 비단 자연과학의 지식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의 지식도 광범위하게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방면의 연구는 가장 미진한 상태에 있기도 하다. 아마도 우리의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아직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환경의 질이 변함으로 인해서 환경이용에 어떤 지장이 발생하고 그리고 우리의 환경이용 양태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잘 알았다고 해서 환경문제를 완전히 파악하였다고 말하기는 아직도 미흡한 데가 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복지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무리 환경의 질이 떨어져서 우리의 환경이용 양태가 크게 변한들 그것이 우리의 사회복지 수준에 별 변화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런 환경의 질의 저하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경오염은 많은 피해를 발생시킴으로써 사회복지를 현저하게 떨어뜨리게 되고 또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의 질이 변함으로 인한 환경이용 양태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사회복지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변화시키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인과관계를 알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환경정책의 수립 및 시행과 관련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환경문제만이 유일한 사회문제가 아니다. 환경문제를 포함해서 치안문제‧교육문제‧교통문제‧주택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가 산적해 있음이 현실이다. 이 사회문제들 모두 사회복지와 직결된 문제들이다. 이에 반해서 이런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재원은 극히 한정되어 있음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한정된 재원을 각 사회문제에 합리적으로 쪼개어 배당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합리적으로 쪼개어 배당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회복지가 극대화되도록 할당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환경문제를 포함해서 각각의 사회문제가 우리의 사회복지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환경이용 양태의 변화들과 사회복지 수준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게 된다. 이 네번째 단계에 있어서도 여러 분야의 지식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환경이용 양태나 사회복지 수준 모두 경제적인 변수인 만큼 특히 경제학의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제학에서는 이른바 가치화문제라는 주제 아래 이 방면에 이용될 수 있는 이론들이 오래 전부터 많이 개발되어 왔다. 최근에 와서는 그런 이론들을 환경문제에 응용하는 연구들이 미국이나 유럽의 경제학계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네 단계에 걸친 인과관계가 밝혀져야 비로소 환경문제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효과적인 환경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일단 수립된 환경정책의 시행은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환경의 질과 우리의 사회복지 수준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결과에 입각해서 기존의 환경정책은 다시 평가되고 그리고 필요하면 수정이 가해지거나 또는 새로운 환경정책이 수립된다. 이 정책의 수립 및 평가단계에서 행정학‧정치학‧법학‧경제학 등 또 여러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경제학이 다루는 내용은 크게 경제활동과 환경오염물질 배출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 그리고 환경이용 양태의 변화와 사회복지 수준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 그리고 환경정책의 수립 및 평가에 관한 것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활동에서부터 환경의 질의 변화 그리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사회복지상의 영향에 이르기까지의 전 단계에 걸친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과 더불어 또한 경제학을 비롯한 여러 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을 총망라한, 실로 광범위한 전문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환경문제에 대한 연구는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 의해서 어느 특정 측면 ―환경오염물질이 환경의 질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되어왔고, 이에 따라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그러한 측면에 고착되어 왔다. 이와 같이 어느 특정 전문 분야나 학문 분야의 측면에서만 환경문제를 보는 것은 마치 장님 코끼리 보기식으로 환경문제의 극히 일부분만 보게 됨으로써 우리의 환경문제에 대한 이해는 극히 단편적이요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는 효과적인 해결책도 기대할 수가 없다.
최근 들어 전세계적으로 논쟁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지구온난화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이 대기중으로 배출된 결과 지구의 온도가 올라간다고 하는데, 특정 분야의 자연과학자들이 대기로 방출된 이산화탄소가 이른바 온실효과를 통해서 지구의 온도를 상승시키는 자연적 과정을 소상히 밝혀냈다고 가정해보자. 이 자연적 과정만 알아서는 지구온난화 문제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그 자연적 과정만 본다면야 대기중으로 이미 방출된 이산화탄소를 처리해 없애는 것이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일단 대기중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는 쉽지도 않거니와 비용 또한 엄청날 것이다. 이보다는 이산화탄소의 배출량 그 자체를 줄이는 것이 훨씬 더 값싸고 수월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것인가의 문제가 당연히 제기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경제활동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사이의 관계를 알지 않고는 효과적으로 풀 수가 없다.
이번에는 경제활동과 이산화탄소 배출량 사이의 관계가 훤하게 밝혀졌다고 하자. 그러나 경제활동의 결과로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구의 온도를 얼마나 상승시키는지를 모른다면 역시 난감해진다. 사실 지금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해서 세계 모든 나라가 합심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연 이산화탄소 때문에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는지, 올라간다면 얼마나 올라가는지가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경제활동과 이산화탄소 배출 그리고 지구의 온도, 이 세 가지 사이의 관계가 확실하게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설명한 세번째 단계와 네번째 단계의 인과관계, 즉 지구온난화로 인한 우리 환경의 변화 내지는 우리 인간의 환경이용 양태의 변화 그리고 이에 이은 구체적인 패해 등을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밝혀내지 않고서는 뾰족한 대책을 세우기가 막연하다. 바로 지구온난화의 그런 영향들을 놓고서 전문가들 사이에도 큰 견해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구온난화의 결과 바다의 높이가 30센티미터 정도 올라간다는 주장부터 8미터 정도 올라간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한 지구온난화는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주장에서부터 심지어 지구온난화로 인류는 잃는 것보다도 얻는 것이 더 많으리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역시 학설이 분분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환경문제는 그 이해에서부터 정책수립에 이르기까지 실로 여러 분야의 지식이 종합적으로 필요하며 따라서 여러 분야갸 긴밀히 어우러지는 종합과학적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더 분업화‧전문화되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좁은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한다. 요즘은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않고는 취업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어떤 한 좁은 분야에 대해서만 몰두하다 보니 자연히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고 따라서 잘 모르게 된다. 그래서 예를 들면 같은 생물학 안에서도 식물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동물에 대해서는 잘 모를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으며, 미생물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동물의 행태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동물을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곤충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포유류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따로 노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환경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 생물학이 핵심 분야라는 사실을 생물학 전공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이를 인정한다.
전문화‧분업화가 지나치게 진전되다 보면, 다른 분야를 잘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 분야의 주장만 내세우고 다른 분야의 주장을 묵살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런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각 개인의 경우를 보자.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극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산다. 아침에 깨서부터 밤에 잘 때까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코에 와닿는 것 등 오감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자극과 정보들이 홍수를 이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많은 자극과 정보를 모두 다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많은 자극과 정보들 중에서 일부는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차단해버린다. 예를 들어 요리사나 미식가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먹었던 모든 음식들의 맛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어떤 자극과 정보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의 결정에 있어서는 중요함과 중요하지 않음 또는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을 가르는 기준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사진찍듯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막연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어떤 틀을 가지고 있어서 이 틀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차단해버리거나 마음에 드는 형태로 변형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들은 모두 짐승이라고 생각하는 독신녀는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할 만한 남성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남성관에 전혀 맞지 않는 남성의 태도, 예컨대 전혀 짐승같지 않은 남성의 태도에 봉착하게 되면, 그런 태도를 별 의미 없는 것 또는 극히 예외적인 것으로 묵살하거나 또는 자신의 남성관에 맞게 각색해서 받아들인다.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각 학문 분야는 나름대로 세상을 보고 설명하는 틀을 가지고 있다. 이 틀에 맞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면 그런 현상은 아주 이상한 현상 또는 별 의미가 없는 현상으로 간주하고 묵살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이 매우 의미있게 생각하는 현상을 생태학자들은 보지 못하며, 반대로 생태학자들이 매우 의미있게 생각하는 현상을 경제학자들은 지나쳐버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경제학자들은 생태학자들의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고 반대로 생태학자들은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령 어떤 전문가가 이런 학문적 틀을 극복해서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져도 문제이다. 어떤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다루는 내용을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집적거리면 강력한 반발을 사기 일쑤이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백제의 역사를 논하면 욕 얻어먹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상관을 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런 식의 전문화‧분업화가 종합과학적 접근을 점점 더 어렵게 하고 그럼으로써 환경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효과적 해결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 이제 환경문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종합과학적 접근방법과 여러 분야들 사이의 공동보조가 더욱 더 아쉬워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분업화‧전문화의 큰 흐름으로 그것이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으니, 이것이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 당면하는 딜레마의 하나이다.
2. 공익과 사익의 상충
흔히 자본주의 사회는 각 개인이 나라의 주인이요, 각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고 한다. 어떤 사회이든 그 사회가 제대로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위에 대해서는 정당한 보상이 부여되며, 반대로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서는 응분의 징벌이 가해지는 상벌체계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시장기구란 상벌체계의 일종이다. 즉 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고객의 기호에 잘 맞는 상품을 값싸고 질 좋게 생산하는 데 성공하는 기업은 높은 이윤으로 상을 받게 되며,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산이라는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값싸고 질 좋으며 고객의 마음에 드는 상품을 생산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는다. 바로 그러한 동기가 자본주의 체제가 이루어온 고도 경제성장의 밑거름이다.
이와 같이 상품의 생산에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시장기구가 환경문제의 경우에는 이상한 방향으로 각 개인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즉 환경을 오염시키는 방향으로는 각 개인은 강력한 동기를 가지게 되는 반면, 환경을 깨끗하게 하는 방향으로는 아무도 자발적인 동기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환경에 관해서는 각 개인의 행위는 모순된 동기의 지배를 받는다. 예를 들면 각 개인은 담배나 껌을 길거리에 버리고 싶은 강력한 욕구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개인은 길거리의 담배꽁초나 껌을 수거해서 쓰레기통에 버리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봐야 아무것도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환경을 더럽히는 것은 돈벌이가 되지만 환경을 깨끗이 하는 것은 돈을 버리는 일이 된다. 따라서 자연자원이나 환경을 돈벌이에 이용하는 데에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지식이나 기술은 매우 발달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서는 강력한 경제적 동기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환경파괴의 방지나 환경개선에 필요한 지식‧기술의 개발은 상대적으로 극히 부진한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강력한 경제적 동기가 잘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환경파괴적 동기 및 경향을 환경우호적으로 바꾸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구체적으로, 그러면 왜 각 개인은 자발적으로 환경을 깨끗하게 하려는 동기를 갖지 않게 되는가? 그것은 환경의 특성과 관련된다. 환경이 깨끗해지면 모두에게 이롭다. 예를 들어 서울의 대기가 설악산의 공기처럼 깨끗해지면 서울 시민은 누구나 그 깨끗해진 공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시민들 중에서 어떤 특정인들만 즐길 수 있는 선별적으로 서울의 대기를 깨끗하게 할 수도 없다. 이러한 특성을 전문용어로는 ‘비배제성’이라고 한다. 더욱이 일단 서울의 대기가 깨끗해지면 어떤 특정인이 얼마나 즐겼느냐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즐길 것인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깨끗해진 서울의 공기를 더 많이 즐겼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즐기는 데에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즉 깨끗한 대기를 놓고 시민들이 다툴 필요가 없다. 이러한 특성을 전문용어로는 ‘비경합성’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환경은 다른 보통 상품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예컨대 라면은 일단 일정량이 생산된 다음에는 어떤 특정인이 일부를 소비하면 그가 소비한 만큼 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양이 감소한다. 어떤 사람이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들의 몫은 그만큼 감소한다. 따라서 한정된 라면을 놓고 소비자들은 경합관계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 경합관계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내고 물건을 사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라면을 하나 샀다고 하면 분명히 누군가가 나 때문에 라면을 못 사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 제3자에 대한 피해를 예방하는 방법은 라면장사한테 라면값을 지불함으로써 라면이 1개 더 생산되게 하는 것이다. 일단 생산된 라면은 어떤 특정인들, 예컨대 충분한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또한 실제로도 그러하다.
요컨대 라면은 소비에서 경합성과 배제성을 가진다는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을 가진 재화를 흔히 공공재라고 한다. 일기예보‧국방‧치안 등의 혜택은 이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진다고 해서 이들은 대표적인 공공재로 경제학 교과서에 자주 등장한다. 이런 공공재들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재화임에도 불구하고 돈벌이 대상이 되지 않는 탓으로 아무도 이들을 자발적으로 공급하려는 강한 경제적 동기를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개인이 일기예보만으로 돈벌이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대기의 정화를 비롯하여 환경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생기는 편익 역시 대부분의 경우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가지기 때문에 전형적인 공공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일기예보를 포함해서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아름다운 경치 등과 같은 공공재가 지나치게 적게 공급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 환경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과는 반대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가? 만일 정부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각종 공해업자들이 마음껏 오염물질을 배출하면서 판을 치고 그런 가운데 우리의 환경은 지독하게 오염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 것이다. 이런 걱정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공해업체의 행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공해업체는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오염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돈벌이에만 신경을 쓴다.
다른 보통의 경제활동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예를 들면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과 정력을 뺏는 엄청난 실례를 범하는 일이지만, 그런 실례에 대해서는 임금이란 보상이 지불된다. 어떤 사람이 라면을 50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라면의 양을 50개만큼 감소시킴으로써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이다. 라면을 살 때에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바로 이 피해에 보상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이다. 그런 응분의 가격을 지불해야만 우리의 한정된 자원이 효율적으로 이용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환경오염 피해에 대해서는 보통 응분의 보상이 지불되지 않는다. 그 동안 서울의 대기가 너무 오염되어서 많은 시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고, 불과 25년 전만 하더라고 서울 시민 누구나 수영하면서 즐길 수 있었던 한강이 악취가 나도록 더러워져서 수영은 고사하고 식수도 사먹어야하는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민들은 누구 한 사람 이러한 고통들 하나 하나에 대해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보상을 받을 생각조차 못하는 실정이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피해보상의 책임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자제되지 않고 자연히 성행하게 되며, 따라서 환경오염이 만연하게 됨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응분의 대가를 지불함이 없이 직접적으로 제3자에게 입힌 피해를 외부효과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직접적 영향’이란 예를 들면 매연을 내뿜는 공장이 근처의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불쾌감이나 건강피해를 입힌다든지 혹은 상류의 피혁공장이 폐수를 대량 방출하여 강물을 오염시킨 결과 하류에서 농업에 쓸 물을 망치는 것 같은 이른바 다른 사람들의 생산이나 복지에 직접적으로 가해진 영향을 의미한다.
그러면 직접적 영향이 아닌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예를 들어서 어떤 대기업이 앞으로 공장을 지으려고 어느 지역의 땅을 대규모로 매입한 결과 그 주변의 땅값과 임대료도 덩달아 크게 올랐다고 하자. 이렇게 되면 주변의 땅을 사려는 사람들이나 임대하려는 사람들은 갑자기 종전보다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한다. 이때 이 대기업은 이 영향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다. 이 경우 제3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디까지나 땅값이나 임대료라는 가격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미치는 효과라는 점에서 앞에서 예를 든 피혁공장이나 매연가스를 방출하는 공장 주변에 끼치는 영향과 성격을 달리한다. 보통 말하는 외부효과란 간접적으로 제3자에게 미친 영향이 아니다. 그래서 외부효과를 ‘가격을 통하지 아니한 효과’ 혹은 ‘시장을 통하지 아니한 효과’로 정의하기도 한다.
외부효과가 왜 문제가 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긴요한 것은 ‘외부’라는 접두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외부라는 접두어는 경제적 수지계산의 ‘밖’이라는 의미에서의 외부이며, 따라서 무시된다는 의미의 외부이다. 다시 말해서 외부효과란 수지계산 밖의 효과요 따라서 무시된 효과이다. 앞에서 든 피혁공장과 농부의 예에서 피혁공장의 주인은 오직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갈 비용과 호주머니에 들어올 수입만을 고려해서 모든 경제적 결정을 내릴 뿐, 폐수 방출로 인해서 농부가 입게 되는 피해는 그의 손익계산 밖에 있는 사항이므로 무시해버린다. 매연가스를 뿜어내서 주변의 주민들에게 각종 피해를 입히는 공해업체의 입장에서는 이들 주민들이 당하는 피해는 그의 경제적 손익계산 밖에 있으며 따라서 공해업체가 무시하는 효과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농부가 받는 피해나 공해업체 인근 주민들이 당하는 매연피해도 엄연히 사회적 손실임에 틀림없으며 따라서 무시해서는 안되는 손실이다. 이를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예컨대 피혁공장의 젊은 주인이 피해자인 농부의 무남독녀 외동딸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렇게 되면 피혁공장의 주인은 폐수방출로 인한 농부의 피해를 더 이상 모른 체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이 피해를 그의 경제적 수지계산에 충분히 고려하게 될 것이다. 피혁공장 주인은 피혁생산으로 인한 이익과 농부의 이익을 비교해보면서 피혁공장의 이윤과 농부의 이윤을 합친 총이윤이 최대가 되도록 생산량을 조정할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피혁공장 주인이 피혁생산을 적절히 줄임으로써 폐수방출량을 줄이는 대신 농부의 생산은 증가시켰다고 하자. 이와 같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종전의 외부효과가 더 이상 무시되지 않고 경제적 계산 속에 충실히 고려되는 상황을 보고 외부효과가 내부화 되었다고 말한다. 피혁공장과 농부의 예에서는 사랑이라는 사건이 외부효과가 내부화되는 계기를 형성한 셈이다.
그러면 농부에 미치는 수질오염이라는 외부효과가 내부화된 후 피혁생산량이 이전에 비해 감소하는 반면 농부의 생산은 증가하였다는 것은 결국 외부효과가 내부화되기 전에는 피혁제품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준보다 더 많이 생산되었고 반대로 농부의 생산은 더 적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그 외부효과가 내부화되기 전에는 피혁제품 생산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들(예컨대 노동‧자본‧토지 등)이 투입되었고 반대로 농업에는 지나치게 적은 자원이 투입되는 방향으로 국민경제 전체의 한정된 자원이 잘못 이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외부효과는 국민경제의 한정된 자원이 잘못 이용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외부효과는 자원이용의 왜곡을 초래한다고 말한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 인간의 일상 사회생활에서 사람들은 좋든 싫든 늘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어 있다. 영향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유형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을 터인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영향은 많게 하고 그렇지 못한 영향은 적게 하는 것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일 것이다. 그러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응분의 벌을 가함으로써 자제하게 하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응분의 상을 줌으로써 장려하는 상벌체계의 확립이 긴요하다. 자제되는 행위는 줄어들고 권장되는 행위가 성행하게 됨은 자연스런 이치이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보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입혔으면 응분의 피해보상을 해야 하고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었으면 응분의 보답을 받게 됨이 관례이다.
시장기구는 환경을 개선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푸대접하는 반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관대한 파행적 징벌체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자유방임의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환경오염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시장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현상,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유도하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서 흔히 ‘시장의 실패’라는 말을 쓴다.
요컨대 환경개선은 절실한 사회적 요구이자 사회 전체가 누리는 공동이익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각 개인은 환경개선을 위해서 노력할 강력한 동기를 갖지 못하는 반면, 오히려 각 개인으로 하여금 환경을 오염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하니 이것이 환경문제의 두번째 딜레마이다. 또한 이것이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이기도 하다.
3. 기하급수적 환경오염 대 산술급수적 환경개선
환경오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매우 심각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시장경제 체제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다른 어떤 경제체제보다도 더 환경 파괴적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장경제 체제를 택하고 있는 사회는 이 시장의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업이 강력한 경제적 동기를 바탕으로 분업화‧전문화‧기계화를 통해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산의 면에는 구조적으로 능률적일 수밖에 없다. 시장경제 체제는 최소한 상품의 생산에 관한 한 이제까지 알려진 다른 어떤 대안적 경제체제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생산적임은 잘 알려져 있고, 또 이는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라고 말한다. 시장경제 체제의 높은 생산성은 엄청난 물량의 자원동원 그리고 각종 상품의 대량생산으로 구체화된다.
생산활동이나 소비활동은 그 자체가 동시에 환경오염 행위이기도 하다. 오염물질들이 배출되는 규모가 대체로 생산량 및 소비량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하면, 시장경제 체제가 상품의 대량생산 체계라는 것은 동시에 오염물질의 대량배출 체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경제 체제가 생산에 관한 한 엄청나게 생산적이라는 것은 또한 환경에 관한 한 엄청나게 파괴적임을 뜻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경제 체제가 다른 어떤 생산체제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시장경제 체제가 다른 어떤 생산체제보다도 훨씬 더 환경파괴적임을 뜻한다.
환경을 시장기구에 맡기면 철저하게 오염되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사실 시장의 실패라는 말이 나오면 정부가 시장의 기능을 대신하거나 또는 보완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으례 대두된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기구가 환경을 오염시키는 데 있어서는 엄청나게 능률적임에 비해, 이에 대응해야 할 정부부문은 구조적으로 비능률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보면 환경문제와 같이 복잡하고 다양성을 띤 문제에 대하여 정부부문은 특히 비능률적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회문제이든 이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많은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환경문제는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구조적으로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앞에서 강조한 바이다. 시장경제 체제가 효율적인 중요한 이유는 우선, 시장기구는 방대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탁월한 장치라는 데 있다. 시장이 처리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정보의 한 가지는 무한히 많은 재화의 수요와 공급을 균형시키는 데 필요한 정보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재화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시장은 곧 그 재화의 가격을 올림으로써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신호를 발송하며, 이 새로운 정보에 접하여 기업들은 생산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소비자는 소비를 감소하는 방향으로 각각 반응한다. 반대로 어떤 재화가 과잉생산되고 있으면, 시장은 곧 그 재화의 가격을 떨어뜨려줌을써 각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공급과잉이 해소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흘린다. 기업·중간상·도매상·소매상·소비자 등 관련자들이 직접 만나서 수요와 공급의 상황을 일일이 점검하고 조정할 필요가 없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환경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보는 환경오염물질의 배출량을 감소시키는 경우 얼마만큼의 비용을 치러야 하며, 반대로 배출량을 감소시키지 않는 경우에는 얼마만큼의 피해가 발생하는가에 관계되는 정보이다. 배출량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희생이 따르는가는 참으로 알기 어려운데, 아무래도 이에 대하여 가장 잘, 그리고 많이 알고 있을 사람들은 배출량을 감소시켜야 하는 공해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 자신일 것이다. 설령 그렇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싶어하거나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들일 것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도 가장 잘,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아마도 피해자 자신들일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서 가장 절실히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역시 피해자 당사자들일 것이다. 만일 정부가 시장기구를 대신해서 환경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정부는 대한민국의 모든 환경오염 원인자와 환경오염 피해자 각각에 관해서 그런 비용과 피해에 대한 정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은 획일적이고 주먹구구식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정부부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정부부문을 포함한 서비스부문은 제조업부문에 비해서 비능률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시장경제 체제가 경제성장을 능률적으로 이루어온 중요한 이유는 강력한 경제적 동기와 치열한 경쟁 그리고 이로 인한 눈부신 기술진보 때문이다. 제조업부문은 대체로 양산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기술진보가 쉽게 잘 이루어지는 부문임에 반해 정부부문을 포함한 서비스부문은 그 성격상 기술진보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부문이다. 서비스란 규격화해서 양산하기 어려운 성격의 것이며 노동집약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 경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로 서비스의 상대적 고가화 현상 그리고 서비스부문의 이상비대화 현상은 바로 서비스부문의 상대적 비능률을 반영한 현상으로 풀이되고 있다.
정부부문의 비능률을 조장하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서 민간부문에서 볼 수 있는 강력한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도 자주 지적된다. 그러한 동기가 없기 때문에 생산성·능률성을 높이려는 의지도 별로 없게 된다.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무사안일에 흐르기 쉽고 일이 터지면 땜질이나 하는 풍토가 자연스레 조성된다는 것이다. 정부의 부정·부패도 그런 비능률의 일부이다.
이와 같이 정보의 부족, 동기의 결여, 기술진보의 미흡 등 여러 가지 요인 탓으로 정부가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유도하지 못하는 현상을 시장의 실패와 대비시켜서 흔히 ‘정부의 실패’라고 한다. 환경오염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와 관계 없다고 주장할 때 흔히 제시되는 사례가 옛날 공산주의 사회, 예컨데 옛날 동구권 국가에서의 심한 환경오염사건들이다. 이런 나라들은 정부에 의해서 모든 것이 계획되는 나라였던 만큼 그렇다면 그런 나라들의 극심한 환경오염은 정부의 실패를 반증하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많은 경우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환경파괴를 가속시키는 원인이 된다. 예를 들면 세계 각국의 낮은 에너지 자격 정책은 범지구적으로는 에너지자원의 고갈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므로 시장의 실패를 빌미로 정부가 개입할 때는 첫째, 시장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심각할 정도로 발생한다는 것이 확인되어야 하고, 둘째, 정부 개입에 의한 사회적 이익이 정부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손실보다 충분히 크다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
요컨대 시장기구에 의한 환경오염은 시장기구 특유의 능률성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심각해짐에 반해 정부부문에 의한 환경개선은 정부부문 특유의 비능률성 때문에 산술급수보다도 더 느리게 이루어진다는 점도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나의 큰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녹색경제학>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