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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 러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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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간

행복한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열의(熱意)가 어떠한 것인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이 식탁을 대할 때의 행동을 생각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르다. 식사 같은 것은 숫제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음식 맛이 아무리 좋아도 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은 지금까지 갖가지 맛 좋은 음식을 먹어왔다. 따라서 그들은 배가 고파 미칠 지경으로 아무것도"먹지 못한다는 것이 고통이 어떠한 것인가를 모르고 있다. 그뿐인가, 그들은 식사를 사교계의 유행에 의하여 지탱되어 온 하나의 관습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식사는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겐 하찮은 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식사를 가지고 투정을 부릴 생각은 그들에겐 추호도 없다. 또 사람 가운데는 일종의 의무감에서 식사를 하는 병자(病者)도 있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는 지시를 의사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세상에는 식도락가도 있다. 그들은 큰 희망을 걸고 식탁을 대하게 마련인데 막상 먹어 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맛있는 요리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대식가가 있다. 그들은 비상한 탐욕을 가지고 마음껏 음식을 섭취하고는 코를 골며 자버린다. 마지막으로 또 여기 한 가지 건강한 식욕을 가지고 식사에 임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기쁨을 가지고 식탁에 앉아 양껏 먹고 나서는 미련없이 식탁을 떠나버린다. 인생이란 향연 앞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생이 제공하는 가지각색의 향응에 대하여 이와 꼭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이란 마지막에 든 식사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식물(음식)에 대해 가지는 열의(熱意)는 그들이 인생에 대해 가지는 열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식사에 대해 열의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바이런적인 불행으로 번민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의무감에서 식사를 하는 환자는 일종의 금욕주의자와 비슷하고, 대식가는 방탕자와 비슷하다. 미식가(美食家)는 인생의 즐거움은 조금도 미적(美的)인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지나치게 따지는 까다로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대식가는 별개라 하겠지만 이 모든 타입은 건강한 식욕의 소지자를 경멸하고 자신이 보다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눈에는 제군들이 배를 채우기 위해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또 인생이 온갖 흥미 깊은 것을 보여 주며 놀랄 만한 경험을 제공하는 까닭에 인생을 즐긴다는 것을 천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서 잇는 환멸이한 높은 세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단순한 인간이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와 같은 견해에 동감을 표시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환멸이란 일종의 질병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서 있는 환멸이란 높은 세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단순한 인간이라고 경멸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와 같은 견해에 동감을 표시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환멸이란 일종의 질병인 것이다. 하긴 어떤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역시 이러한 환멸은 그것이 발생하는 족족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치료를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보다 고상한 지혜의 형식이라 간주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가령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를 상정(想定)해 보라. 어떤 점에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있는가? 딸기가 좋다거나 아니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어떠한 추상적인 또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되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 될 뿐이다. 하지만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딸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쾌락을 하나 더 간직하고 있다. 그 점에서 그 사람의 인생은 그만큼 더 즐거운 것이며,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 그 사람은 그만큼 더 잘 적응하고 있다는 셈이다.

열의(熱意)의 형식은 무수하다. 샬록 홈즈가 거리에 동댕이쳐져 있는 모자를 주워 본다는 줄거리의 소설이 있다. 잠시 그 모자를 바라보고 나서는 이렇게 중얼거린다.――이 모자의 임자는 술주정뱅이일거야. 저런 사람이라면 아내로부터 사랑받기는 글렀겠군.

이렇듯 우연한 일에서도 이토록 풍부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인생이란 결코 지루한 것은 아닌 것이다. 시골길를 산책하고 있을 때 흥미를 끄는 갖가지 사물들을 상상해 보라. 어떤 사람은 하찮은 작은 새에게도 흥미를 느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밭에 자라고 있는 야채를, 또 어떤 사람은 그 고장의 지질(地質)에 대해서, 또 어떤 이는 농사 일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할 것이다. 만일 제군 그 중의 어느 하나에 흥미를 느꼈다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한결 이 세상의 생활에 적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같이 생활에 대해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혀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보다도 한결 이득을 보는 수가 많다. 이러한 사람들은 심지어 그것이 불쾌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선용할 것이다.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배의 난파, 바람, 화재, 지진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종류의 불유쾌한 경험을 맛보고 싶어한다.

가령, 지진을 만났을 때 그들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지진이란 이런 것인가?'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지식이 이 새로운 문제로 말미암아 또 하나 늘어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행복이란 분명히 일부는 외적인 사정에 관계가 있고, 일부는 자기 자신에 달려 있다. 이 책에서는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부분에 관한한 행복해지기 위한 비결은 사실 단순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에 도달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다소간에 종교적인 신조(信條)없이는 행복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불행해진 많은 사람은, 자기들의 슬픔은 복잡하고 고도(高度)의 지적인 원인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건 불행하건, 그러한 것들이 참된 원인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징후(徵候)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불행한 사람은 대체로 불행한 신조를 선택하며,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신조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그 행복이나 불행을 그 신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원인이란 전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행복해지는 데 있어서, 극히 간단한 것으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즉, 식물과 주거(住居)·건강·사랑·사업의 성공·동료들로부터의 존경 등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버이다운 것이 또한 필수 조건이 된다. 이런 것들이 결핍된 채로 행복되는 사람은 극히 예외적인 사람밖에 없다. 이러한 것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한 노력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데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심리적인 고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만일, 그것이 대단히 중증(重症)일 경우에는 정신병과 의사에게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라면 환자 자신이 치료할 수 있다.―처방이 그릇되지 아니한 한도내에서.

 

외적인 사정이 결정적인 불행의 요인이 아닐 경우에는 행복을 성취시킬 수 있다. 정열과 관심을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외부의 세계에 적응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행복한 사람이란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랑을 갖고,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관심과 사랑을 통하여, 그리고 또한 그 관심과 사랑이 이번에는 거꾸로 자기 자신을, 다른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자기의 행복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행복의 유력한 원인이다. 그러나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 주는 방법으로 계산에 넣은 사랑을 주려고 하는 것은 틀린 일이다. 왜냐하면, 계산된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며, 또 그 사랑을 받는 사람도 참된 사랑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훌륭한 인생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지금까지 전문적 도덕가들은 자기 부정이라는 것에 지나치게 중점을 두고 있었다. 더욱이 자기 부정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을 그릇된 것이었다. 의식적인 자기 부정은 오히려 사람을 자기몰입적으로 만들며, 이전에 자기가 희생했던 일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자기 부정은 그 직접적인 목적인 극기(克己) 그 자체에 대해 실패하는 일이 가끔 있으며, '반드시'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 궁극의 목적으로부터 빗나가 버린다.

필요한 것은 자기 부정 그 자체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덕(德)의 추구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이 의식적인 자기 부정의 방법으로 가까스로 해나갈 수 있는 그것과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외계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을 한 개의 히드니스트(쾌락주의자)로서, 결국 행복을 선(善)으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써 왔으나 히드니스트의 입장에서 권장하는 행위는, 전체로서는 보통 도덕가가 권장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도덕가는, 대체로 정신상태보다도 행위 쪽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의 행위가 그 행위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그때의 정신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예컨대, 만일 지금 물에 빠진 어린애를 보고 구조해 주고 싶다는 직접적인 충동의 결과로서 어린애를 건졌다면 도덕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구제를 바라고 있는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덕이다. 나는 도덕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때문에 이 아이를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중얼거렸다면, 그러한 것을 중얼거리기 전보다도 말한 뒤의 편이 보다 나쁜 인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이다. 이와 똑같은 일이 이처럼 분명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권장해 온 인생 태도와 전통적인 도덕가들이 권장하고 있는 인생 태도 사이에는 위에서 진술한 것 외에도 조금 미묘한 데가 있지만, 또 하나의 상위점이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도덕가들은 사랑이란 비이기적(非利己的)이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즉, 사랑이란 정도 이상으로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랑을 성취시킴으로써 그 사람 자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야만 한다.

만일, 어떤 남자가 어느 부인에 대하여 그가 열렬히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이유로써 결혼할 것을 요구하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그에게 이상적인 자기 희생의 기회를 안겨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녀가 그것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할는지 의심스럽다.

확실히 우리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의 행복과 대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실, 자기 자신과 자기 이외의 세계와의 대립은, 우리들이 우리들 이외의 사람이나 물건에 대해 참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순간에 스러져 버린다. 이와 같은 관심을 통하여, 사람은 생명의 흐름의 일부인 자기 자신을 느끼게끔 된다. 당구(撞球) 공과 같이 하나 하나가 단단하게 개별적인 존재이어선 안 된다. 당구 공과 같은 존재라면 충돌 이외에는 자기와 같은 다른 존재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불행이란 그 어떤 분열, 즉 통합의 결핍에 의한 것이다. 의식하고 있는 마음과 의식하지 않는 마음과의 사이의 협동의 결핍에 의하여 자기 내부의 분열이 생기게 된다. 자기와 사회에 있어서 객관적인 흥미와 애정의 힘으로써 결합되지 않으면 양자 사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이란, 이와 같은 통합의 실패가 조금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 퍼스널리티(人格) 그 자체가 분열되는 일이 없고, 또 이 세계와 대립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으로 느끼며, 우주가 보여 주는 경관(景觀)을 자유롭게 즐기며, 우주가 안겨다 주는 기쁨을 자유로이 향수한다. 자기 뒤에 오는 자손과 자기 자신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관한 일을 생각해도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생명의 흐름과의, 그와 같이 깊은 본능적인 결합에 있어서만이 최대의 환희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

 

'행복의 정복'은 러셀이 58세때인 1930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 만큼 그의 풍부한 생활의 경험과 고도로 단련된 지성의 원숙기에 나온 것이다. 그는 묻는다, 불행의 원인을. 즉, 현대인은 행복할 수 없는가, 행복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라고. 동시에 그는 행복의 원인을 묻는다. 즉, 현대인이 현대인으로서 최대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러한 문제들을 러셀 특유의 논리로 규명한다. 현대인의 행복의 감각은 어떠한 내용이어야 하는가를 해명한다. 그는 문제의 정곡을 붙들어 그 독창적인 사상을 정확하고도 설득력 있게 전개해 나간다. 그의 행복론은 결코 고답적인 형이상학의 전개가 아니고, 실로 평범한 사람을 위한 실천적인 슬기의 향연이다.

러셀은 이 행복론에 '행복의 정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남자나 여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 병과 심리적 갈등, 투쟁과 가난의 악의로 가득찬 세계 안에서, 각 개인에게 맹공을 퍼붓는 불행의 무수한 원인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이 책의 기본적인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행복은 내세의 '약속된 땅'도 아니면, 어떤 요행으로 주어지는 '운명'도 아니다. 우연히 행복이 주머니 속으로 굴러 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다. 행복은 오직 쟁취하는 것이다. 행복은 정복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러셀의 행복론의 핵심이다.

인생과 세계는 불행과 비극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것이 러셀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이다. 그는 이 세계가 신이 창조한 최선의 세계라거나 또는 내세라는 완벽한 세계가 있다거나 하는 낙천주의적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부조리하며 비극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려고 한다. 비극이나 불행을 직시하고, 그것에서 도피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용기와 신념을 갖고 살아가라, 그러면 반드시 행복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활 철학을 가르치려는 것이 그의 행복론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의 제1부에서 불행의 원인을 규정한다. 현대에 있어서 중요하고 일반적인 불행의 원인은, 어두운 인생관이나 세계관, 경쟁, 피로, 권태, 질투, 부질없는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의 횡포 등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요소가 있다든가, 불행은 구원을 받기 위한 시련이라든가 하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그의 행복론은, 그가 60년 가까이 살면서,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 경험하고 관찰한 것에서 확인한 행복의 처방, 또 이 처방에서 따라서 행동했을 경우 언제나 자기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켜준 것들을 총괄하는 경험적인 삶의 합리적 진술이다. 그러므로 그는 불행의 원인도 현대 사회라는 우리의 생활의 현장에서 찾는다.

불행의 원인을 규명한 다음, 러셀은 이 책 제2부에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점을 제시한다. 인생에서 대하여 방관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흥미와 열의를 갖고, 따뜻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원만한 가정과 헌신할 수 있는 사업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외적인 관심의 폭을 넓혀서 가능하면 자기 자신의 운명이나 불행에 집착하는 비좁고 옹졸한 태도를 갖지 말라고 권한다. 무한히 다양한 세계에는 우리의 조그만한 불행, 보잘 것 없는 번민을 잊게 할 무수한 관심사가 있다. 이러한 대외적 관심으로 우리의 경험을 풍부하게 해 놓으면 우리는 어떠한 불행이 닥쳐도 능히 그 불행을 초극할 수 있다. 적절한 노력과 적절한 체념에 의해서.

결국 인생은 살 만한 보람이 있다는 신념, 우리 자신의 내면 세계보다는 광활한 세계야말로 우리의 행복의 무진장한 보고라는 생활태도, 어떠한 불행도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용기, 밝고 명랑한 인생관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할 수 있고, 이러한 것은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로 평범한 행복론이나, 진부하지 않고, 만인이 생활 주변에서 느끼는 일을 명쾌하게 제시함으로써 누구나 공감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그러나 러셀은 이 책 마지막 장에서 '행복의 일부는 외부적 환경에, 일부는 자기 자신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기 자신에 달려있는 부분을 고찰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 정복되는 것만은 아니고, 이에 상응하는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사회의 실현이 행복의 정복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의 결합이 행복의 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경해가 나오게 된다. 일반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신조를 택할 것이며, 반면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신조를 택할 것이다. 즉 행복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이나 각기 그의 행복 또는 불행을 그 개인의 신념의 탓으로 돌리기 쉽지만, 그러나 진정한 인과관계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외부적 환경이 결정적으로 불행하기 않는 한, 사람은 그의 정열이나 관심이 내부가 아니고 외부로 지향한다면 마땅히 행복을 성취한다는 신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육이나 우리들 자신을 세계에 적응시키려는 시도에 있어서 노력해야 할 점은, 자기 본위의 관심을 버리고, 우리의 사고가 영구히 우리들 자신에게 묶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랑과 관심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이며 자유로운 사랑과 광범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고, 이러한 사랑과 관심을 통해, 그리고 그의 사랑과 관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사람이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도 계산을 한 끝에 사랑을 주려고 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말한다. 계산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직접적 무의식적 충동에 의해 행한 덕행은, 유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의식적으로 행한 덕행보다 더욱 선하다. 문제는 자기 본위, 자애, 자아몰입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아와 사회가 객관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결합'될 때, '자신이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며 자유롭게 우주가 주는 장관, 우주가 주는 환희를 즐길'때, '생명의 흐름과……깊은 본능적 합일을 이룰 때'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행복의 정복 ; The Conquest of Happiness 에서

 

참고 자료

러셀(1872~1970)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영국의 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 ·사회사상가.

몬머스셔 트렐렉 출생. 명문 귀족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한때 동대학 강사로 근무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반전운동(反戰運動)이 화근이 되어 대학에서 쫓겨났고, 1918년에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었다. 그 후 유럽 각국과 러시아 ·미국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대학의 강의도 맡았으나, 주로 저술에 주력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을 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며,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논리학자로서의 러셀은 G.프레게의 업적을 계승, G.페아노, 쿠츨러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J.W.R.데데킨트, G.칸토르 등의 현대수학의 성과를 근거로, 19세기 전반에서 비롯된 기호논리학의 전사(前史)를 집대성하였다. A.N.화이트헤드와 공저(共著)인 《수학원리》(3권, 1910∼1913)는 바로 이의 성과이다. 그는 논리의 개념이나 연산(演算)을 기본으로 하여 전체 수학을 그것으로부터 도출(導出)했으며, 나아가 수학적 대상을 실재라고 간주하는 논리주의의 구상을 밝혔다. 그는 이 시도를 실수(實數)의 도출에까지 성공시켰으며 그 외에도 집합론 역리(逆理)의 발견, 그리고 그것의 해결을 꾀하는 계형이론(階型理論), 환원의 공리(公理), 기술이론(記述理論) 등 다양한 창의에 의한 공헌을 하였다. 논리주의의 구상이나 위의 여러 이론은 그 후 K.괴델 및 다른 학자에 의해 부정 또는 수정되었지만, 이 분야에 남긴 그의 업적의 의의는 현재도 상실된 것은 아니다.

철학자 러셀의 성과는 특히 이론철학에서 현저하다. G.E.무어, L.비트겐슈타인 등과 함께 케임브리지학파의 일원으로, 19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도 유력한 학설이었던 관념론에 대해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다만 그의 입장에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게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한때지만 그는 영국 헤겔학파의 영향 밑에 있었으며, 마이농류(流)인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의 경향도 보였다. 이것에 관한 저서로는 《철학의 제문제》(1912)가 있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 ·존재론의 일반적 경향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논리를 소재(素材) 방법으로 삼았으며, 다른 면에서는 영국 고유의 경험론의 전통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논리적 원자론의 이름에서도 명백한 바와 같이 실재의 이론적 단위를 설정하여, 그것에의 환원이나 분석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한 점도 명백하다. 그의 사상은 빈학파나 훗날의 영국 철학의 발전을 위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윤리학에서는 처음에 무어와 거의 같은 입장을 취하였으나, 후에 논리실증주의자의 정서설(情緖說)에 가까운 입장으로 옮겼다. 사회사상가로서의 러셀은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직후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교우하여 마르크스주의에 공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를 방문, 혁명지도자와 혁명 후의 실정에 접하게 된 그는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의 경향은 서구적 자유를 근간(根幹)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로서, 정치이론도 과학이론과 같이 이데올로기나 광신적 독단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실천가로서의 러셀은 1907년 하원의원으로 입후보하여 낙선했고, 1920년대는 일반대중을 위한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며, BBC 방송 출연 등으로 유명해졌으나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1960년 ‘100인 위원회’를 구성, 핵무장 반대 연좌농성을 이끌어 네 번째 부인과 함께 금고형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적 경력은 길고 또 그 다룬 주제가 다양할 뿐 아니라 그 입장도 다양한 변천을 보인다. 기호논리학의 수법으로 철학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그의 영향은 20세기 철학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저서로는 위에서 소개한 것 외에도 《외계의 지식》(1914) 《수리철학 서설》(1919) 《정신의 분석》(1921) 《물질의 분석》(1927) 《의미와 진실의 탐구》(1940) 《서양 철학사》(1945) 《자서전》(3권, 1969) 등이 있다.

보조 자료

 

러셀(1872~1970)은 영국 귀족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두 살 때 어머니를,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모 존 러셀경 부부 밑에서 자랐으나, 조부도 수년 후에 사망하였으므로, 주로 조모의 훈도를 받았다. 어린 시절에 러셀은 엄격한 귀족 가정에서 가정교사를 통해 교육을 받았고, 18세에 케임브리지에 입학하여 수학을 공부했으나 4학년 때부터 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당시의 풍조에 따라 헤겔주의자였다. 1900년, 파리의 국제 철학회의에 참석했을 때 만난 이탈리아의 수학자요 논리학자인 페아노에게서 자극을 받아, ‘수학의 원리들’(1903)을 썼고, 그후 1910년서부터 1913년에 걸쳐 ‘수학 원리’ 3권을 화이트헤드와 함께 저술・간행하였다. 1912년에 ‘철학의 문제들’, 그리고 1921년에 ‘마음의 분석’을 출판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수학자요 철학자였다. 이같이 그는 학문적 저술에 전념하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가가 되려는 희망은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 희망을 그는 저술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1954년에 간행된 ‘윤리와 정치에 있어서의 인간 사회’에서 정치에 관한 부분이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의 강연이다. 이 책에서 그는 타인의 감정, 욕망과 공존한다는 것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의 행복록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는 다양한 생애와 다채로운 관심 속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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