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에밀 / 루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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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돌아가라

조물주가 처음에 만물을 창조할 때는 모든 것이 선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서 모든 것이 타락한다. 인간은 어느 한 땅에 다른 땅의 산물을 키우려 하고, 어느 한 나무에 다른 나무의 과실을 맺게 하려고 애쓴다. 인간은 풍토와 생활환경과 계절을 섞어서 뒤죽박죽이 되게 하며 자기의 개와 말의 노예를 불구로 만든다. 인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구로 만들며, 기형과 괴물을 좋아한다. 인간은 무엇이든 자연 그대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 자신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마치 훈련이 잘 된 말처럼 자기 기호에 맞게 길들여져야 하고 또 자신의 정원에 있는 나무처럼 자기 방식대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만 방치된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더욱 심한 불구의 인간이 될 것이다. 온갖 편견, 권위, 필요, 부지중에 빠져드는 모든 사회제도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자연적인 속성을 없애버리고, 그 대신 다른 무엇으로도 우리를 메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길 한가운데 돋아난 나무와 같은 것으로서, 행인들의 발에 마구 짓밟히고 꺾여서 이내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애롭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어머니여! 한길에서 몸을 피하여 갓 자라난 나무를 인간의 여러 가지 편견의 피해로부터 지켜주는 어머니! 그 어린 나무가 죽기 전에 물을 주고 가꾸시오. 그 결과 어느 날 갑자기 어린 나무는 당신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재빨리 당신 아이의 영혼 주위에 울타리를 만드시오. 그것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지만, 오로지 당신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은 식물을 재배하여 키워내고, 인간은 교육에 의해 완성된다. 가령 사람이 크고 강하게 태어났다고 해도, 그의 키와 힘을 쓰는 법을 배울 때까지는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려는 생각을 저해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는 해로울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 내버려진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알기도 전에 곤궁에 빠져 이내 죽고 마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이러한 상태를 싫어한다. 하지만 만약 사림이 어린아이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면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우리는 약하게 태어났으므로 힘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태어났으므로 도움을 필요로 하며, 또한 우리는 어리석게 태어났으므로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 지니지 못한, 그러나 자라면서 필요로 하는 이 모든 것은 교육에 의해서 얻게 된다.

이러한 교육은 자연이나 사람이나 사물에서 얻어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지닌 능력과 기관(器官)의 내적인 발전은 자연이 주는 교육이다. 이 발달을 이용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인간에 의한 교육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갖가지 사물에 대해 우리들 자신의 경험에 의해 얻게 되는 것은 사물들로부터 오는 교육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자연·인간·사물, 이 세 스승에 의해서 교육된다. 이 세 가지의 각각 다른 가르침이 서로 모순된다면 제자는 그릇된 교육을 받을 것이며, 그리하여 그 제자는 결코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세 교육이 모두 일치되어 같은 목표를 지향할 때, 그 학생은 자기 목표를 향해 정진할 수 있고 그 결과 원만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다른 교육 중에서도 자연의 교육은 우리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교육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힘으로 좌우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 힘으로 좌우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교육만이 우리의 의도대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가정에 의한 이론일 뿐이다. 왜냐하면 한 어린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언행을 완전히 그러므로 교육을 그저 하나의 기술이라 단정해버리면 그 교육의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교육의 성공에 필요한 세 가지 협력이란 것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나마 이룩할 수 있는 일이란 어느 정도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뿐이며,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행운일 따름이다.

그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이미 증명한 그것이다. 교육의 완성을 위해서는 세 가지 교육의 합력이 필요 불가결하다. 그러므로 나머지 두 가지의 교육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자연의 교육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 자연이란 말의 의미가 너무 광범위한 듯하므로 그 뜻을 여기서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자연은 습관이 불가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강제적으로 익혀야만 몸에 배는, 그러면서도 절대로 자연을 억눌러 없애지 않은 그런 습성들은 없을까? 이를테면 수직 방향으로 뻗으려는 데 방해 당하고 있는 식물의 습성이 그것이다. 자유롭게 되어도 식물은 강제로 돌려진 방향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수액(樹液)은 그렇다고 해서 최초의 성장의 방향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실물이 성장이 계속하면 그 자란 부분은 역시 전처럼 곧게 자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인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상태에 머물러있는 한인간에서 생긴 부자연스러운 성향을 그대로 지니게 된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는 순간 그 습성은 곧 그치고 다시 자연성이 되돌아온다. 이와 같이 교육이란 확실히 습관에 불과하다.

우리는 출생하면서부터 감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또한 출생하자마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감각을 의식하자마자 그 감각을 만들어낸 사물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피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우선 그 감각이 유쾌한가 불쾌한가, 다음에는 사물과 우리 사이에 적합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성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 혹은 안정성이라는 개념에 비추어 우리가 어떠한 판단을 내리느냐 하는 기준이 된다. 이러한 성향은 우리의 감성이 잘 다듬어지고 이성이 발달함에 따라 그 폭이 넓어지고 확고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들의 좋지 못한 습관에 묶이고, 우리의 편견에 의해서 어느 정도 변질된다. 그 변질 이전의 성향들을 나는 우리들 속에 있는 자연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 본래의 성향으로 되돌려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세 가지 교육이 서로 다르기만 할 뿐이라면 이 일도 가능하겠지만, 그 교육들이 서로 모순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인간이 그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교육하려 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때는 세 가지 교육의 일치란 불가능하다. 자연이나 사회제도와 싸우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한 인간을 만들어내든지 아니면 한 시민을 만들어내든지 어느 한 쪽을 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양자를 한꺼번에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분적인 모든 사회는, 그것이 긴밀하게 밀착되어 단결이 잘될 경우에 큰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애국자는 외국인에 대해서 냉혹하다. 외국인이란 애국자의 눈으로 볼 때 한낱 사람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함은 불가피한 것이나 대수로운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이웃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이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외국인에게는 야심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불공평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벽 안에는 무사무욕(無私無慾)과 공정과 화합이 지배하고 있었다. 세계주의자를 신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경시하고, 책 속에서만 의무를 구하려고 한다.

자연인은 자신에 대하여 그 자신이 전부이다. 그는 단위이며 절대적인 정수(整數)로서 사회인 자기 자신이나 자기와 닮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갖는다. 수(數)의 분모와 관계하는 분자에 불과하며, 그 가치는 사회라는 전체와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좋은 사회제도란 인간에게서 자연성을 빼앗아 그 절대적 존재를 박탈하고, 그 대신 상대적 존재를 부여함과 동시에 '자아'를 사회라는 단일 공동체 속에 옮겨버리는 제도를 말한다. 그런 까닭에 각 개인은 자신을 하나의 인간[개체]으로 생각하지 않고 통일체의 일부분인 것으로 밖에 느끼지 못하게 된다.

스파르타 사람 파다레트는 3백 명으로 구성된 의회의 의원이 되고자 했으나 선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스파르타에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이 300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기꺼이 돌아섰다. 이것이 곧 시민이다. 다섯 아들을 군대에 보낸 스파르타의 한 부인이 전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무렵 한 노예가 도착했다. 부인은 초조해서 전쟁의 소식을 물었다. "아드님 다섯 분은 전사했습니다." 그때 여인은 "바보 같은 녀석아, 그걸 묻는 것이 아니다." "우리 편이 승리했습니다."하는 말에 어머니는 신전으로 달려가 신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것이 바로 여자 시민의 태도이다.

사회 질서 속에서 자연감정의 우위를 계속 고수하려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모순되며 항상 자신의 취향과 의무 사이를 방황하며 인간도 시민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무엇인가 되기 위하여, 즉 자기 자신이 되고 한 사람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항상 자기가 취해야 항 태도를 확실히 결정하여 언제나 일관성있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 나는 누군가가 비범한 일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이나 시민, 혹은 동시에 양자가 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고 싶어서이다.

이 필연적으로 상반되는 목적으로 인해 반대되는 두 개의 교육형태가 나온다. 즉, 공적인 공공교육과 개인적인 가정교육이 그것이다. 공공교육의 개념을 알고자 한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보라. 이 책은 정치에 대한 저술이 아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쓰여진 교육론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다.

이상국가를 논함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국가제도를 들 수 있다. 만일 리쿠르구스가 그의 제도를 글로만 써두었다면 나는 그 쪽이 훨씬 더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킨 반면 리쿠르구스는 인간의 자연성을 변질시킨 것이다. 공공교육은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또 존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국가가 없다면 시민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조국과 시민이라는 두 단어는 현대어에서 삭제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유를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나의 주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학교'라고 부르는 제도를 사회교육기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의 어떠한 교육에도 나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 교육들은 상반된 두 개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양자를 모두 놓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은 항상 모든 이익을 타인에게 주려는 것 같지만, 자신의 이익밖에는 생각지 않는 이중인간을 만들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선은 공통적인 것이므로 아무도 속이지 못한다.

우리들이 끊임없이 내부에서 겪는 갈등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 양쪽에 의해 상반되는 길로 이끌리고, 그리하여 여러 다른 충격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모순이 드러나서 그 어느 목표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일생 동안 시달리고 방황하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룰 수도 없고, 또 자신이나 남들을 위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데 사회생활을 거침으로서 타락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태어날 때의 인간의 모습과 사회생활(또는 역시)을 경험하고 난 인간의 모습은 판이하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하며 자존심이 강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태어난 인간이 노예와도 같이 온갖 형태의 쇠사슬에 얽매인 존재로 타락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타인에 의해 지배당하거나 자신이 만들지 않은 법에 의해 구속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불평등 관계-즉, 부유한 자와 가난한자, 귀족과 평민, 그리고 주인과 노예-에 의해 시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존적이고 허위적 생각에 차 있으며 그의 내적 경향요구와 의무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자연인은 비록 야생적이기는 했지만 착하고 행복했던 데 비해, 능력과 지능의 개발에 의해 문명화된 현대인은 부도덕하며 불행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역사'와의 긴장상태 -말하자면 자연 대 문명, 자유 대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에밀'이다 즉, 칸트가 말한 바와 같이, '에밀'은 자연과 역사를, 인간의 이기적 속성과 시민사회의 요구를, 그리고 인간의 자기위주의 상황과 의무를 조화시킴으로써 인간의 본질적인 자아를 회복시키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은 이상적인 가정교사가 한 고아를, 그 탄생에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와 애정을 기울이며 사회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자연인'으로 교육시켜 가는 '인간본성'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교육 소설이다.

제1편은 교육의 총론과 1세부터 5세까지의 유아기 교육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의 주안점은 유아기는 감각도, 감정도 그리고 이성도 발달하지 않는 시기이므로 일체의 지적 교육을 피하고 신체적인 발달에만 치중하되 인위적으로 그들의 자연적인 활동 발육을 저해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아동을 친모가 아닌 유모에게 맡기는 것은 자연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위적 환경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자연에 따른 감각교육, 사물의 교육을 제창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연에의 신뢰가, 당시 사회에서 무시되어 온 '아동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제2편은 아동이 말할 수 있는 6세부터 12세까지의 아동기의 교육으로서, 주로 언어의 습득과 시·청·촉각 등 오관의 연습 즉, 감각의 훈련이 이 시기 교육의 주목표이다. 또 이성이 아직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도덕적 훈련이나 사회적 관계를 교육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명령이나 복종 그리고 의무 등의 말은 아동의 사전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좋으며, 상벌 같은 것도 자연에 일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제3편은 13세부터 15세까지의 소년기의 교육으로서, 주로 물리, 천문등 자연과학 이외에 모든 직업에 필요한 지식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아동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스스로가 탐구심을 발전시키도록 하는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4편은 16세부터 20세까지의 청년기의 교육으로서, 주로 도덕교육과 종교교육의 시기이다. 여기에서 루소는 그이 핵심적인 종교사상인 '자연종교'론을 피력하고 있다.

'나란 나의 마음'이라는 루소에게 있어서 그 맘의 중심이 되는 것은 이성과는 독립된 직관적인 명증(明證)으로서의 '양심'이며, 그것은 오직 자연의 질서만을 따른다. 그것은 때로는 감정에, 이성에, 또는 그 쌍방에 결부된다 양심의 소리는 '이성에 의해서 비추어진 혼'의 '참된 감정' '신적인 직관' 이며, 그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제5편은 에밀의 장차의 처가 될 소피의 교육을 담고 있다. 제 4편까지는 교육을 통하여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 성숙된 에밀은 이성에 눈을 뜨고 또 배우자를 구하게 되는바, 드디어 25세에 이르러 이상적으로 교육된 소피와 결혼하게 된다.

루소 자신이 그의 작품중 최고의 것으로 내세운 바 있는 이 ‘에밀’에 대하여 칸트는 이 책의 출판을 마치 프랑스혁명과도 같은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비유할 만하다고 격찬한 바 있다. 칸트는 이 책에 심취한 나머지 매일 오후 일정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거닐던 산책길에 나서는 것을 잊는 바람에, 그가 나타나는 시간에 맞추어 저녁준비를 하곤 하던 동네부인들이 그가 나타날 때를 기다리다가 저녁준비가 늦어졌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한다.

이 책은 인간의 저속화를 방지하고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자유로운 인간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대표적 근대 사상가라 할 수 있는 홉즈와 로크는 어느 의미에서 비정치적 내지 반정치적 철학자인데 반해, 루소는 ‘정치’를 인간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정치가 도덕을 틀짓는다는 것이다. 그의 경우 인간의 내면생활에 국한된 의미에서의 도덕개념이나 정치와 무관한 혹은 정치 이전의-즉 정치를 통하지 않는-도덕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윤리 도덕적 삶의 유일한, 그리고 최상의 지표는 연민의 정과 일반의지 등에 의해 영위되는 도시공동체(civil community)였던 것이다.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인간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근간은 홉즈나 로크가 주장하듯이 이기심이나 계산능력을 뜻하는 의미에서의 이성보다는 느낌(feeling, sentiment)아니 연민의 정(pity, compassion)이 인간행위의 기준 또는 결집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약하고 유한한 인간이 공동운명을 타고난 같은 인간에 대해 느끼는 ‘연민의 정’이야말로 인간의 주정(主情)이며, 따라서 이것이 공동생활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가 오늘날 참여 민주주의 이론의 주창자가 된 가장 큰 이유이다. 인간의 저속화를 막고(또는 부르주아 인간상을 극복하고) 참다운 인간의 모급을 회복하는 일은 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에밀’에서 루소가 목적한 바는 한 단계 승화된 인간상-곧, 자연적이고 문명화되었으며 동시에 스스로 부과한 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의 구현이다. 그런 점에서 ‘에밀’은 칸트의 이상주의와 쉴러의 낭만주의를 낳은 모체이기도 하다.

 

참고 자료

에밀

프랑스의 작가이며 사상가인 J.J.루소(1712~1778)의 교육론으로 주제는 교육이지만, 동시에 루소의 인간론이며 종교론이기도 하다. 특히,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적 자질이 풍부한 루소의 천분(天分)에 의해 풍부한 문학성을 보여준다. 부제(副題)는 <교육에 대해서>(1762)이다. 전편을 5부로 나누어, 에밀이라는 고아가 요람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가정교사의 용의주도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는 과정이 적절히 묘사되면서 논술되어, 문학적인 매력과 교양 소설의 흥미를 갖추고 있다. “조물주의 손에서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선(善)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넘어오면 모든 것이 악(惡)해진다”라고 하는 유명한 서두(序頭)의 한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주안점은 외적 환경(사회 ·가족)이나 습관 ·편견의 나쁜 영향에서 어린이를 보호해서, 그의 이른바 ‘자연’의 싹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유롭고 크게 뻗어나가게 하자는 데 있다.

이러한 취지는 영 ·유아(拏幼兒)에게 포대기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고, 아기에게는 어머니의 젖을 먹이도록 권하며, 어린이를 어린이로서 처우하라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또한, 유아에게는 감각훈련, 소년에게는 육체의 수련을 주로 하여, 적극적인 도덕관념이나 진리를 가르치지 말고 이성(理性)에의 준비를 행하는데 그치도록 권하였으며, 이것을 소극(消極)교육이라고 불러, 가장 중요한 교육단계로 간주하였다. 서적이나 언어에 의한 교육을 피하고 어디까지나 경험을 존중해서, 소년기의 지적(知的) 교육 분야에서도 실물교육을 주로 하고, 감정육성 ·직업적 기술 ·수공업 기능의 수득(修得)을 주장하였다. 특히, 제4부의 16∼18세에 이르는 청년기 도덕교육을 위해서 쓴 독자(獨自)의 자연종교(自然宗敎) 이론 ‘사보와인 부사제(副司祭)의 신앙고백’은 그의 합리성 ·비종문성(非宗門性)·정열 ·관용성 때문에 민중의 마음에 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루소가 주장한 것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자연(自然)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즉 당시 보편적으로 행하여졌던 주입식의 지육에 편중된 교육에 반대하고, 전인교육(이를테면 체육 ·품성 등의 교육)을 중시하며, 인간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자연성을 간직하고 있는 어린이에게 그 본래의 자연과 자유를 되돌려 줄 것을 주장한 것이다. 요컨대 《에밀》은 J.로크나 E.B.콩디악의 영향 아래, M.E.몽테뉴, F.라블레 등의 르네상스 자연주의적 ·자유주의적 교육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당시의 봉건적인 귀족사회를 위한 교육, 스콜라 철학적인 서적편중의 형식적 교육에 대해서 근대적인 인간교육의 이념을 제공한 것이었다. 《에밀》은 I.칸트, J.H.페스탈로치 등을 통해서, 교육사상사 ·철학사상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루소 (Rousseau, Jean-Jacques) [1712.6.28~1778.7.2]

 

 

프랑스의 사상가 ·소설가.

 

본관

본명

별칭

국적 : 프랑스

활동분야 : 사상가, 소설

출생지 : 스위스 제네바

주요수상

주요저서 : 《신 엘로이즈》(1761) 《고백록》 《에밀》(1762)

주요작품

스위스 제네바 출생.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17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暴galit暴 parmi les hommes》(1755) 《정치 경제론 De l’暴conomie

politique》(1755) 《언어기원론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re 姬 d’Alembert》(17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新) 엘로이즈 Nouvelle H暴lo晞se》(17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民約論) Du Contrat social》(17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 平mile》(17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 ·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 Les Confessions》을 집필하였다.

1768년 17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Les R泂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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