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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칼 힐티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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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도 '신의 선물'이다

 

잠 못 이루는 밤 -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건강한 사람이나 병자나 모두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은 규칙적인 수면이 자기 건강을 유지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병자에게는 수면이 심신을 진정시키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지 않는다면, 길고도 어두운 밤을 지새우는 번뇌와 고통이 몇 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가지 근심이나 슬픔이 겹치게 되면, 특히 육체가 쇠약하고 정신이 흩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장래에 대한 공포가 '무장한 병사'처럼 엄습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막아내기 힘들고 달아날 수도 없다. 그런 경우, 그것이 일시적인 불면증이든 혹은 지속적인 것이든, 적당한 치료법은 다음의 두 가지 밖에 없다. 즉, 그것에 대한 유효 적절한 수단을 쓰든가, 그렇지 않으면 도리 수 있는 대로 불면증 그 자체를 활용하든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법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결합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도 구제책을 강구하지 않고 막연히 탄식만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며,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가중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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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다. 대개 불면증은 병이라든가 걱정거리 또는 불안감 때문에 생긴다. 또한 지나친 휴식, 나태한 생활태도, 여러 가지 무절제나 불규칙적인 수면으로 생기는 수도 있다. 그 실례를 한가지 들어보겠다. 여든 살이 넘은 노부인이 오랫동안 우의를 지켜온 친구에게 '이 나이가 되었어도 나는 소녀시절의 안락한 수면을 취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원인을 잠이 오지 않으면 절대로 취침하지 않는다는 습관에 돌리고 있는 동시에, '모세의 율법과 같이 결코 어겨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로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어서 나에게 마치 살아 있는 모티브처럼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칸트 철학의 모든 원리에 힘입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대부분의 불면은 사실 여성의 경우에는 불필요하게 자주 눕는다든가 혹은 과로함으로써 생긴다. 대개의 여성은 자기의 체력보다 일하는 분량이 과다하거나 아니면 적은데, 그 어느 족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요컨대 우리는 수면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애 대해서 사실 우리는 불필요한 연구나 논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우리가 경험으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뿐이다. 즉,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 특히 신경 계통의 질환에는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는 것, 게다가 또 수면은 밤에, 그것도 한밤중 전부터 6시간 내지 8시간 동안 계속해서 잠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 그리고 인공적인 수면제는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물론 수면 시간은 나이나 신체 조건에 따라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해로운 일에도 익숙해지기 쉬운 법이다. 지나친 수면은 도리어 건강을 헤친다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은 훈련이 충분하지 않으면 약해지고, 그 자체의 활동과 영양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지나친 수면상태 등)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불면은 언제나 고통이므로 가능한 한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불면이 예외로 굉장히 기쁜 일로 생겼을 경우(이 경우 불면 오히려 인생 최대의 기쁨의 하나가 된다.)와, 평상시에 자기 반성의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얻기 위해 갖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 불면은 내면생활의 최대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인생 최상의 보물을 얻기 위해 가벼이할 수 없는 중요한 기회이다.

잠 못 이루는 밤에 자기 생애의 결정적인 통찰이라든가 결단을 내린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한 견지에서 볼 때 불면의 문제를 신중하게 고찰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카히나이의 아들 랍비 카니나 는 이렇게 말했다.

 

"밤에 깨어나 있을 때라든가 홀로 산책하고 있을 때 그 마음을 안일한 생각으로 이끄는 자는 자신의 영혼에 죄를 범하는 자이다"라고. 즉, 이러한 사람은 정신적인 커다란 이익을 얻도록 되어있는, 좀처럼 쉽게 맞이하기 어려운 최상의 기회를 놓치게 될 뿐만 아니라 무익한 사념이 따르기 쉬운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오히려‘신의 선물'로 여기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그것은 선용되어야지, 이유 없이 무작정 거역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불면에도 무엇인가 목적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런 때일수록 보통 때보다 명확히 들리는 그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외의 갖가지 사념은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어찌하여 나에게 잠 못 이루는 밤이 오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축복에 대해서는 욥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축복에 대해서는 욥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불면의 이와 같은 목적을 발견함과 동시에 불면 그 자체도 제거할 수 있다. 즉, 그것에 의해서 영혼이 안정을 되찾게 되고, 나아가 육체적 기관, 특히 신경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욥기 33장 15∼30절과, 다니엘 2장 19∼30절을 참조하여 보라. 또 H. 로름의 다소 비관적이긴 하지만 극히 아름다운 시구가 이와 같은 사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오직 고동으로 가슴 울리는

말해진 적이 없는 말로

깨어난 꿈의 힘으로

밤은 마법의 안경으로

잠을 잃어버린

어둡고 조용한 밤은,

살아 있는 그대로

이 험난한 삶에서 우리들을 구해주려 한다.

 

이때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에 신경 써야 한다.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오로지 자기 생각에만 몰두해서, 즉 자기라는 조그만 배 한 척을 상념의 물결이 흐르는 대로 맡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상념이 어디로 갈 것인가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해서 명령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상대로 해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불안을 배가시켜 주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언제나 확고한 평온을 주시는 신과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또는 만약에 그런 사람이 그곳에 있다면, 당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라.

 

그중에서도 충실한 아내와의 대화가 가장 좋다. 아내의 말과 손길은 때때로 깊은 위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경우에는 좋은 책을 한 구절 읽어도 좋다.

그것은 사고방식에 자극을 주며, 정신을 다른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탈피시켜 깊은 위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경우에는 좋은 책을 한 구절 읽어도 좋다.

그것은 사고방식에 자극을 주며, 정신을 다른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탈피시켜 올바른 위안의 샘으로 인도해준다.

그런 뜻에서 가장 좋은 것은 구약의 시편, 욥기, 신약 속의 그리스도의 말씀, 신교 교회의 찬송가이다. 이러한 찬송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그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동포교단의 찬송가집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좋은 사상은 언제나 자기가 꼭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과 접촉할 기회와 좋은 자극을 주는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잠 못 이루는 밤에 적합한 사상, 그리고 대개 그 모두가 잠 못 이루는 밤에 생긴 사상만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택해서 그것을 평온한 마음으로 사색해 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에 가장 적합하다. 그러나 그런 사상에 아무리 자극하는 힘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 진실성과 진지성을 입증할 수 없는 그러한 공상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어서는 안된다. 유감스럽게도 사실 그러한 종류의 책은 매우 적다. 어느 정도 그 대신으로 추천할 수 있는 유명한 기도문마저도 반드시 그 경우의 요구에 적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주기도문' 까지도 온갖 고난에 직면했을 때, 그밖의 기도문처럼 직접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러한 다른 기도방식이 적합하고 때때로 보다 더 큰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7절, 12장 27절, 15장 7절, 마태복음 7장 11절, 18장 19절, 마가복음 10장 48절, 누가복음 18장 7절, 마태복음 14장 30-31절, 15장 25-28절, 시편 34편 4-8절, 138편 3절, 사무엘상 12장 20-21절.

물론 이러한 모든 것은 환자를 간호하는 사람이라든가, 환자와 함께 지내는 사람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임무가 있는 사람들도 때때로 자신의 임무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들은 잠 못 이루는 환자를 그들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과거의 불필요한 추억이나 미래에 대한 고통스러운 근심에서 끌어내어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그들의 정신을 도와서 위대하고 기쁜 이념으로 비약할 수 있게 인도해 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거워하는 마음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탁월한 사람들마저도 즐거워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그 진정한 이유를 솔직히 지적해 주는 것이 매우 곤란한데,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언제나 언짢게 받아들이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기쁜 마음을 방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기애(自己愛)와 고집, 또는 고상하거나 시사한 종류의 태만이다. 신에 대한 완전한 순종만이 기쁨을 얻는 조건이 된다. 특히 이 기뻐하는 마음은 신에의 순종을 의미하는 거짓없는 표시로서 그 누구라도 입증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의 성가시인(聖歌詩人)이 시편(84편 2-3절, 119편 45절)에서 노래한 바이며, 예레미야 31장, 시편 37편에도 언급되어 있다.

신의 은총과 더불어 신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을 때의 기쁨은, 병고에 시달리며 불면증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도 갑자기, 더구나 갑자기 강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통, 특히 어떠한 불면증도 신경쓰지 않게 되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오랫동안의 투병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혀 다른 생명력을 자신에게서 느낀다. 아직 한번도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실제로 믿기 어렵겠지만, 그 일을 증명할 만한 생존하는 증인이 얼마든지 있다. 미래의 의학도 언젠가는 치료목적을 위해서 그 기쁜 감정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또한 병에 대한 '심리적 요소' 에 대해서도 오로지 인간의 육체적인 면만을 고려한 기계적인 치료수단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치료효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주목할 만한 말이 시편 41편 1~3절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어떤 치료법보다 훌륭한 것으로 많은 사람을 도와줄 것이다.

 

이미 현대의학은 신체를 건강하게 해서 그 생명력을 높이는 것이 질병에 침식된 개개의 기관, 즉 폐 따위의 회복을 도모하는 전제조건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학은 내적 인간의 강화라는 것에도 도움을 구하게 되고,다시 어떤 현대의 의사가 '은총의 효과' 라 고 이름붙인 것, 다시 말해서 병의 회복에 보다 고도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의 가능성마저도 믿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의학이라는 귀중한 기술은 반세기 전부터 의술에 대한 신뢰감을 수많은 환자로부터 차츰 앗아갔던, 인간의 정신을 죽이는 유물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2

 

이상의 것에서 보면,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불면은 물론이고, 불면을 초래하는 일반적인 원인인 질병마저도 반드시 불행만은 아니라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실을 우선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불멸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도 그래도 규명해야 된다. 독일의 시인의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윈칙적으로는 또 평상시에는 그야말로 올바르고도 의연한 판단이라 하겠다.

"밤은 천국이며, 신적 기적이다. 잠으로 지내는 밤이야말로 가장 아름답다." 이와 같은 숙면의 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자극적이고 불안한 사념에서 떠나 가능한 잔잔하고 선량한 사념 속에,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써 밤의 휴식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여러 가지 안면법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지는가? 부담 없는 일로써, 친밀한 대화로써, 아니면 양서로써 이루어지는가? 그러나 이것도 신문이나 읽은 것보다야 다소간의 알맹이가 있어야겠는데, 그러한 것은 개성에 따라 갖가지라도 무방하다. 오로지 확실한 하 가지는, 상당한 사색을 필요로 하는 매우 진지한 일, 무엇이든 밤 늦도록까지 하는일, 혹은 어떤 생각 많은 노작, 특히 계산이나 이에 준하는 일 등은 잠들기 직전에 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수면에 좋지 못한 것으로서는, 다음. 과식, 또 대부분은 부질없고 다변이 따르게 마련인 교제라든지 연극관람 따위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두뇌가 지나친 흥분을 초래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수면제는 그 양이 많듣 적든지간에 모두가 예외없이 해롭다. 그러므로, 불가피할 경우에 하하여서만 의사와 의논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알코올류를 포함한 음료도 이에 준한다. 이와는 반대로, 지나친 포식뿐만 아니라 지나친 공부 또한 불면의 씨앗이 되는 수가 곧잘 있다. 아무리 해도 잠 못 이룰 경우에는 불을 켜고 잠시 일어나서, 가능하면 소화가 잘 되는 음식물을 섭취하고, 기분이 다소 가라앉은 후에 다시 눕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안면에는 잦은 착한 행위, 명백히 훌륭한 의도, 고백, 뉘우침, 타인과의 화해, 앞날에 대한 확실한 결의 등이 최선이다.

이것들은 신경을 가장 잘 가라앉히고,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 증오. 질투. 근심 등의 갖가지 생각보다는 목적에 걸맞는다. 이러한 갖가지 생각들은 대체로 아무 쓸모가 없다. '인간의 벗이 아니다' 라고 정당하게 일컬어지는 밤의 암흑 속에서 생각될 경우에는 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암흑의 밤에서는 온갖 육중한, 어두운 것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힘으로서 시작되는 이튿날 아침의 태양 속에서는 갖가지 그러한 사념들도 맑게 갠다.

두 말할 것 없이 위의 것은 우선 그 까닭이 지금 앓고 있는 질병이 아닌 경우의 불면에 해당된다. 그러나 질병의 경우에도,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갖가지 치료마저 정신을 북돋움으로써 아주 용이하게 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이에 대하여 이전보다 많이 고뇌해야 된다는 이 명백한 진리로서 앞날에는 입증될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도움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환자 스스로의 치유력이 외적인 의술적 도움을 받아들이게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힘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권유나 격려에 의하여 '응집하여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이것은 평소의 경험이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철학이나 교양이 안겨다 주는 것도 아니다. 철학이나 교양은, 오히려 교양있는 자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온전한 무기력을 스스로 내부에 느끼게 되면 곧바로 아주 쓸모없게 되는 것이 고작이다.

이 힘은 실로 무한히 존재하며, 어떤 순간에라도 손에 넣을 수 있고, 우리 외부의 어떤 힘에의 자유로운 접근과 확고한 신뢰에 의하여 응집돼 오는 것이다. 우리의 외적인 힘이야말로 '무기력한 자에게 충분한 힘을 제공하고', 인간의 정신에다, 육체적 결함을 정복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 결함을 줄일 수 있는 타당성과 더 나아가서는 희열의 정마저 제공할 수가 있다. 이러한 육체적 결함은, 곧잘 그러하듯이 정신적 도덕적 영역에 속하는 질환의 결과인 경우에는 그야말로 합당하다. 특히, 신경질환같이 다각적이고도 매우 애매모호한 부문에 있어서는 최소한 우리가 보는 바로는, 치료의 과제가 육체적 결과면에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정신적 원인면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계속 행하여지고 있고, 기만 혹은 자기기만이라 하여 소홀히 여겨 배척할 수 없는 이른바 '기적적'인 수많은 치료를 설명하는 것도 또한 이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강인해지고, 정신이 육체를 완전히 다스리며, 도덕적인 부정을 육체적 불건전, 꺼려 해야 될 감정, 신경의 결함과 느낌, 이와는 반대로 선과 진을 힘, 활기, 두뇌의 명석, 차링착한 심장의 고통이라고 느낀다면, 이것은 대체로 올바른 인생행로에 있어서 대단한 구원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대체로 올바른 인생행로에 있어서 대단한 구원이라고 할 만하다. 이때에 육체는 정신의 훌륭한 종이 되고 담당자가 되어, 정신이 활동할 때에 도왔으면 도왔지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갖가지 질병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되며, 그 치료를 올바른 길에서 구해야 된다.

 

이와는 반대로, 그 질병에 내포되어 있는 경고와 격려를 외적인 방법에 의해 제거하려 한다면, 이것은 그 질환에 있어서의 고상한 의도를 아주 곡해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관념은 이른바 '기도치료소'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러나 그 실시법에는 명백히 부당한 것이 제법 있다 그것을 실시 하는데에는 대체로 어떤 특정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집에서든 실시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어느 집에서든 신은 존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성안에서 살 듯이 항상 신의 가운데에서, 무릇 눈을 뜨고 있는 한 쉬지 않고 낮에 무엇이든 착한 일을 하고, 무엇이든 의로운 일을 하고, 인생의 온갖 경우에 있어서 굳세게 신을 믿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환경에의, 그리고 동시에 건강에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다. 이 길을 젊었을 적부터 똑바로 당당하게 걷는 인간은 보다 단시일 내에 크나큰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탈리아의 성녀인 카타리나는 그 길을 그렇게 걸었기 때문에 33세가 되자 이미 그 인생행로를 다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로 수많은 인간들은, 그토록 빨리는 이 '참의 지혜'로 인도하는 단호한 갖가지 것을 거부할 의지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또 오늘날, 이에 이르는 올바른 지도를 받는 일도 드물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 오늘날, 이에 이르는 올바른 지도를 받는 일도 드물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이 올바른 구원의 사잇길로 되돌아가지만, 그때에도 보다 더 많은 갈림길이 교차된다.

3

 

인간처럼 복잡한 조직체의 건강이라는 것은 갖가지의 악영향에 대해 일부는 육체적인, 또 일부는 정신적인 저항에, 반격에 그 기초를 두는데, 이러한 악영향은 어떠한 예방법으로도 완전히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온갖 것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여 강하게 한다는 것, 아니 이 투쟁을 견뎌내면서도 상처입지 않고 오히려 저항력을 북돋워 증진시켜 나가는 것이다.가장 훌륭하고도 간단한 건강법은 신의 명에 좇아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늙어서도 쇠약하지 않는 강인한 생활력이 예로부터의 약속을 그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건강에 제일 나쁜 것은, 단순한 향락만을 추구하는 생활이다. 이것이 그저 사념의 세계에 머무르는 경우일지라도, 그래도 향락만을 그리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 특히 그것이 어떤 일정한 방향에 한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틀림없이 정신과 육체에 어떠한 저주를 안겨다 줄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현대사회는, 애석하게도 이 진리를 스스로의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마땅한 일이지만-하등의 의학적인 구제의 길이 없다. 그리고 도 일반적으로 있을 수 있듯이, 삶의 불행한 외적처지 혹은 부질없이 지나치게 꼼꼼히 캐드는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무사 안일함이 이것에 덧붙어 다를 경우에는 시인. 예술. 철학자 등 실로 타고난 재질 있는 인물들에게도 무릇 이러한 도덕적 원인 없이는 싹트지 않는 우울증 내지 정신착란증 마저도 일어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훌륭한 생활 법이나 도덕적 세계질서에 대한 굳건한 신앙이 있다면, 이러한 신앙의 유전적 소질에 대해서도 잘 저항할 수가 있다.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고 있는 이른바 부락 항력 적인 '유전적 소질'에 대한 두려움은 유물론적 정신의 필연적인 결과이자 징벌이어서, 이에 대해 의술력 수단만으로써는 충분한 효과를 도저히 기대할 수가 없다.

 

환자이든 피로. 쇠약한 자에게든 휴양과 원기회복이 필요한 자에게 특히 중요한 데에도 너무 소흘이 취급되는 문제는 사교이다. 어떤 종류든 좋지 못한 사교는, 예컨대 요양소 등에서 항상 일과처럼 되어 있는 일상적인 알맹이 없는 대화라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탁한 공기와도 같아서 인간의 몸과 마음에 해로운 작용을 한다. 이와는 반대로, 훌륭한, 특히 평화로운 사교는 그들의 쾌유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된다.

'평화'라는 것은 분명히 무엇이든 실재하는 것, 인간의 진정한 성품 혹은 힘이어서, 많은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분위기로서 이것을 스스로 몸에 띠고 곳곳으로 운반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타고 난 재주가 많고, 부도덕적인 면도 없으며, 때로는 경건하기까지 한 이러한 자들이 들어오면, 방이야 어떻든 간에 그 속을 불안. 불쾌하게 만드는 수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사람들이 금방 눈치채는 것인데, 어린이나 동물은 이것을 직감하는 본능마저 지니고 있다. 성인은 오히려 반성이라든지 습성 때문에 그것을 상실하고 있지만, 환자에게는 이 본능이 재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특히 간호하는 자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문병객도 유념해 두어야 될 일이다.

그리고 외적인 경건-예컨대, 크리스트교의 집사나 여전도사-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에 덧붙여서 순수하게 스스로의 사명에 살고 있는 실로 동정심 깊고 봉사심 많은 상냥한 마음씨와 진정한 신앙의 결과인 즐거운 기분이 있어야 된다. 이러한 시중을 드는 편이 자기 주장이라든지, 가혹한 판단이라든지, 싫으면서도 시중을 드는 눈치라든지 는, 그것이 매우 조금이라도 행동이나 때로는 태도나 음성에 드러나기만 하면 환자에게 압박감을 주어서 그 치유를 어렵게 하고., 그 위안의 샘을 마르게 한다.

이러한 얘기를 해야 된다는 것이 실로 애석하지만, 실제로 일부 의사들의 순전한 유물주의와, 또 간호자의 일부에서 볼 수 있는 참된 내적 사명 및 내적 유능함의 결핍이 오늘날 의학의 기술적 진보를 가로막는 커다란 힘이 되어 있다.

요컨대, 일종의 가설일 따름이고 또한 '입법자'없이는 그 존립이 불가능한 이른바 '자연법칙'이라는 것의 뒤안길에는 항상 어떠한 윤리적 세계질서가 도사라고 있어서, 이것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아마 오늘날의 자연과학자도 재인식할 필요가 있으리라.

윤리적으로 뒤틀린 생활 법에서는 건강이 싹틀 리가 절대로 없다. 윤리적인 치유력과 그 작용이 결여되어 있으면, 단순한 외적수단으로써는- 설령 이것이 최고의 것일지라도-결코 건강을 지탱하고 또 회복할 수가 없다. 우리는 누구든 모두가 '유전적으로 병적으로 병적 소질을 이어받고' 있지만, 누구든지 올바른 방법만 채택한다면 치유될 수가 있다. 아마 이 경우에는 완치불능 환자라 하더라도 최소한 병고는 많이 줄일 수 있으리라.

각 신체기관의 많은 질환도, 요컨대 오늘날 '신경과민' 혹은 '신경쇠약'이라 불리고 있는 일반적인 병약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질병의 뿌리만 제거되면 그들 질환도 스스로 사라진다. 그러나, 이 질병의 뿌리 자체는 오로지 육체적 수단만으로써 제거되지 않는다. 이것은 항상 정신적 요인의 공동을 필요로 한다.

끝으로, 위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특별한 치료능력이 개인적인 힘으로서 과연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성서는 이 점을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긍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최대 능력은 아니다. 또 그 스스로 독자적으로 간주되는 또 존재하는 독립된 힘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의 치료는 완전히 건강한 정신에 의한 병든 정신에의 강력한 자극에 의해서가 아니면, 즉 설명될 수는 없지만 확실히 감지될 수 있는 두 정신의 결합에서 싹트는 내적인 자극에 의해서가 아니면 성공하지는 못하리라.

어찌되었든, 이런 종류의 치료는 순전히 병자의 '내적인 인간'에 하소연하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생명에 도달하기까지 깨우쳐지고, 또는 이 내적 생명의 현재의 장애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치료술은 미국의 한 신학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지혜와 충분한 성실로서 여겨지지 않으면 상실할 우려가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이것에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 이 힘을 신뢰하는 스스로의 굳건한 신앙이 필요하다. 이 신앙이 병자에게 미쳐 그 일부가 실제로 그의 내부에 이전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러한 비전문적 치료가에게 때때로 잠재해 있는 명예욕이나 자만심에서 완전히 초연돼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성질은 설령 그 자취가 매우 희미하다 할지라도, 끝내는 그들의 불신을 초래하는 분명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치료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어떤 타인의 힘으로써 치료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의 타인은 인간들처럼 그리 쉽게 속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믿음이 적고,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수많은 방법으로 지나칠 만큼 열렬히 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능력은 어떠한 직능에 의해서 짊어지는 것도 결코 아니고, 유별난 가전적인 것도 결코 아니다.0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 신의 은총인 선물이며, 특수한 치료소나 이른바 '신이 사는 나라' 따위와는 손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설비는, 만일 그것이 신앙의 완전한 순수성을 상실하고 혹은 모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의 초탈을 상실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미신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신도 바로 이 테두리에서 항상 신앙과 자리를 바꾸려고 만반의 태세를 취하고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능력은 대체로― 설령 애당초에는 좋았더라도― 빠른 템포로 퇴보한다. 이러한 실례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있는 것이고, 또 멀지 않은 앞날에는 보다 더 이것이 잦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학. 의학, 특히 정신병학 및 신경치료법의 장족의 발전시기에 처해 있기때문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한 사상은 그 모두가 이러한 관점에서 싹튼 것이다. 1년을 365일로 분류하여 씌인 것은 아주 우연적인 것이며, 서로간에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자연적인 한계를 짓기 위함과, 또 한 번에 너무 많이 서술, 전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 따름이다.

 

이 책에는 나 스스로의 사색과 내 생활체험에 뿌리를 두지 않은 사상은 어느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잠 못 이루는 밤이나 또는 적어도 유별나게 고뇌를 씹는 날에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이 사상들은 그것에 가장 걸맞기 때문이다.

우선 땅을 파야 된다.

탑을 세우기 전에.

땅에다 씨를 뿌려야 된다.

수확의 날은 그보다 빨리 오지는 않으리.

우리는 세월과 더불어 배워서 아나니,

묻는 자에게 우리가 말하는 시온의 희망을. - 친첸도르프

……내 님없이

스스로움 탓에 흐려진 양심은

틀림없이 그대 말에 신맛을 느끼리라.

그러나, 그러함에도 온갖 위선을 떨쳐버려라.

온갖 그대의 환상을 털어 놓아라.

그리고, 딱지 있는 곳을 오로지 긁게 하라.

비록 그대 목소리가 한 입에 당기지 않는 것일지라도

차차로 샛길 때에 이르면

생명을 안겨 주는 영양이 되리니.

-단테의 (신곡) '천국편' 제 17곡 124∼132행

 

이해와 감상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잠 안 오는 밤을 번민 속에서 새우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제1부는 저 칼 힐티가 제 손으로 1901년에 발표했으며, 제2부는 그의 딸이 부친의 사후에 유고를 모아 세상에 내어 놓았다(1919년). 그러나 이 값진 인생의 서(書)는 잠을 못 이루는 괴로운 영혼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동시에 안일과 태만 속에 잠들어버린 사람들을 부드럽게 불러 깨워서 진정한 삶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이중의 효과를 갖다 주는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는 그의 경험과 독서와 인격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곳은 신이다. 그러나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내세적 구원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의 종교는 현세에 있어서의 실천윤리이며, 인생을 성실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거의 소박하기까지 한 낙관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신은 우리의 구체적 경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결코 교리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힐티가 철학자의 체계적 사고방식을 배척하고 또 기성 교회에 불만을 느껴 '그리스도의 그리스도교'를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비실천적인 이상주의가 아니다. 반대로 이것만이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유효라고 실행할 수 있는 이상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유효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이상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의의이다.' 라고 그가 이 책의 제1부에서 쓴 것을 보아도 실천 철학으로서의 기독교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신에게서 자아의 중심을 찾는 동시에 애써서 일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그는 모든 인류의 지도자와 의견을 같이한다.'인생의 행복은 곤란이 적거나 혹은 없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훌륭히 극복하는 데 있다. 힘은 약점을 극복하는 연습에서 생기는 것이다. ' 사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는 신에 대한 사랑과 곤란의 극복이라는 두 기둥 위에 서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잠을 못 이루는 것은 인간이 신을 버리고 자기의 좁은 영역에서 몸부림을 치고 곤란을 헤쳐 나가려는 용기를 잃고 공포에 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잠을 못 이루는 것 자체가 신의 은총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들 속에 무슨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불면(不眠)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제 마음에 묻고 여느 때보다도 더욱 조용한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다른 일체의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 상책' 이라고 힐티는 권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의 품에 안기고 완성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불리한 환경이 교육자가 된다. 아니, 역경에 처할수록 그 인간은 진가를 발휘한다. 힐티 자신이 말하듯이 '위대한 사상은 고통이 깊이 파놓은 마음의 바탕에서만 싹트는 것이다. ' 만일 전인격을 바쳐서 스스로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들 용기를 잃고, 다만 두뇌의 유희를 통해서만 인생을 알려고 할 때는 한낱 궤변론자가 될 뿐이며, 불행한 세상에 더 큰 불행의 씨를 뿌릴 뿐이다.

이 책은 결코 우리의 전존재를 뒤집어엎고 갑작스러운 계시를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악을 쓰고 너무도 찬란한 빛을 던지다가는 평화로운 수면으로 이끄는 효과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것은 부드러운 손길로 서서히 우리의 구려진 영혼의 주름살을 펴주고 아픔을 달래려고 한다. '엄마 손은 약손이다' 하면서 우리의 배를 문질러 주던 어머니와 같이……. 이 명저는 우리가 짜증을 부리고 절망에 잠길 때에 구원을 갖다 준다. 우리의 자기반성을 은근히 요구하지만 그 것은 우리들 속에 깃들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지내온 위대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이다.

힐티/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Carl Hilty;Fur schlaflose Nachte에서

참고 자료

힐티(1833 ∼ 1909)

 

스위스의 사상가 ·법률가.

 

베르덴베르크 출생. 독일의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학과 철학강의를 들었다. 1855년 고향인 쿨로 돌아가 18년간 변호사로 활약하였고, 1873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강의하였으며, 1892년 이후는 육군재판장직을 맡았다. 한편 1890년에는 고향의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또 1909년에는 국제법의 대가로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정치적 저서로는 1886년 이후에 그가 혼자 편집한 《스위스 연방 정치연감》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이상가》 등이 있으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종교적 ·윤리적 저작에 의해서였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으로는 《행복론》(3권, 1891∼1999)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2권, 1901∼1919) 등이 있는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의 기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주의적 사회개량주의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생활 자체와 일치되는 것이었다.

보조 자료

 

힐티는(1833 ∼ 1909)는 스위스 장크트 칼렌주에서 태어나,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는 법률을 전공하는 한편 철학과 역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고, 1855년부터 18년간 변호사로서 활동했는데, 법의 올바른 적용은 인간과 도덕에 대한 깊은 이해를 선결조건으로 한다고 믿어 사회인이 된 후에도 독서와 연구에 촌가를 아꼈다. 1873년 '베른'대학 교수르 hchcjd되어 국제법을 강의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전문적 cprp적 지식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고, 문화 전반의 정신적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사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의 어느 구절을 보아도, 힐티는 자기의 이론 속에 독자를 가두려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반대로 독자의 심령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겠다는 겸허하고 유연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1890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909년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 국제재판소의 스위스위원에 임명되었는데, 제도와 조약으로 인간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그는 다음과 같은 뜻깊은 말을 하고 있다. '영독간의 상업주의며 미일간의 야심이며 세력의식의 상이와 같은 깊은 간격은 어떠한 평화회의로써도 결코 제거될 수 없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사랑하고 또 평화롭게 될 수 있는 다수의 개인 사이에서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GO 가을 힐티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책상 위에는 성서와 마지막 논문 '영원한 평화'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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