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문의 논리적 기준
by 처사21논술문의 논리적 기준
소 홍 렬
논술문과 논거
논술문이란 어떤 종류의 글을 말하는가? 논술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논술한다는 것은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남의 주장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그 논거를 제시하면서 글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논거를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논거'라고 하는 것은 '논의의 근거'를 말할 수도 있으며, 좀더 좁혀서 말하 자면 '논의의 논리적 근거'를 말할 수도 있다. 논의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므로 역시 중요한 것은 논리적 근거라는 뜻에서 논거를 제시하는 일이다.
논리적 근거의 제시가 중요하다는 뜻은 논리적 근거가 아닌 다른 종류의 근거를, 이를테면 감정에 호소하는 근거나 위협적인 효과를 노리는 근거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기의 주장을 세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논리적 근거를 가진 주장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데도 논리적으로 타당한 이유를 밝힐 수 있다. 이유가 있는 주장, 이유가 있는 거부, 또는 이유가 있는 수긍들은 모두 논거를 필요로 하는 생각들이다. 논술문은 이러한 종류의 생각들을 전개해 가는 글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논거의 종류를 말하자면 무한히 많다. 예컨대,인생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해 온 사람들의 논거들을 모아 본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논거를 생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할 충분한 동기만 준다면 누구나 새로운 논거를 생각해 낼 수 있을 만큼 창조적이라는 뜻이다. 사형을 받아야 할 죄수에게 만일 자기가 사형 면제를 받아서 마땅하다는 논거를 하나만 제시하면 사형 집행을 면제해 준다고 한다면 그런 논거를 제시하지 못할 사형수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주장에 대하여 독창적인 논거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다. 문제는 그 능력이 얼마나 잘 계발되어 있느냐에 있으며, 어떤 문제 상황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되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문제 상황에서는 개인에 따라서 논거를 제시하는 능력에 차이가 날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논술문을 어렵게 느끼는 것도 필요한 논거를 적절하게 제시하는 일이 능력의 개발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 종류의 근거가 아니라 논리적 근거이어야 하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논거는 자기 주장에 대한 논리적 근거이기 때문에 그것의 논리적 힘 또는 무게를 측정하는 평가가 가능하다. 어떤 논거는 논리적으로 정당하지만 어떤 것은 부당할 수 있다. 어떤 논거는 주장하는 바를 강하게 뒷받침해 주지만 어떤 것은 약하게 뒷받침해 준다. 어떤 논거는 유효하지만 어떤 것은 스스로 무효화해 버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논거로 제시된 내용에 자체 모순적인 것이 있다면 논리적 근거로서 아무런 효과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무한히 많은 종류의 논거들이 제시될 수 있지만 논거로서의 논리적 성질을 말한다면 두 가지 종류로 크게 나누어질 수 있다. 연역적 논거와 귀납적 논거가 그 두 가지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이 귀납 논리적 기준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점들이 연역 논리적 기준이 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1. 귀납 논리의 기준
(1) 귀납적 본질성
귀납적 논거는 대부분 일반적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감정적이라든지, 철학자들은 합리적인 것을 좋아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일반적 주장을 하는 데는 귀납적 논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개인에 대한 주장을 하고자 할 때도 그것을 연역적으로 지지하는 데는 일반적 주장을 하는 전제가 필요하므로 귀납적 논거는 간접적으로 그런 특수 사실의 주장에 이용되기도 한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합리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특수 사실을 주장하려면 아래와 같은 삼단 논법을 제시할 수 있다.
철학자들은 합리적인 것을 좋아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합리적인 것을 좋아한다.
위의 삼단 논법에서 중요한 전제의 역할을 하는 일반적 사실, 즉 철학자들은 합리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귀납적 논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삼단 논법은 연역 논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그것이 필요로 하는 일반적 사실의 전제만 확보되면 언제나 특수 사실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귀납적 논거로써 일반적 주장을 하는 데는 문제가 개입될 수 있다. 우선, 귀납적 논거에 의한 일반화는 경험적 사실들을 그 바탕으로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남자이다'라든지 '삼각형에는 세 각이 있다'라는 따위의 일반 명제는 경험적 사실에 근거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것은 분석적 명제라고 한다. 개념의 의미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일반적 진리라는 뜻이다. 경험적 사실에 근거한 일반화는 개념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은 속성인데도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한 개체는 여러 가지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 속성들 중 어떤 것은 그 개체가 속하는 집단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일부 개체들에만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한 집단의 개체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속성은 그 집단에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런 것이 소위 본질적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귀납적 논거에 의한 일반화에는 언제나 어떤 집단에 보편적인 속성, 그러면서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일반화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본질'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단순한 우연적 일반화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고래는 포유 동물이다'라든지,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또는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라는 따위의 일반화는 본질적 속성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본질적 속성이란 필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의 의미에 그 뜻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포유 동물이라는 것이 고래의 본질적 속성이라면 '고래는 포유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분석적 명제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본질'이란 말은 강한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일반화는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경험적 사실에 의거해서 그 일반화가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개념의 의미상으로 고정된 명제는 경험적 사실의 발견으로 부정될 수 없다.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백조'라는 이름에 '희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분석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조'는 '흰 새'라는 뜻이 아니다. 백조라는 종류의 새는 모두 흰 것으로 경험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지었을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검은 색의 백조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백조는 희다'라는 말이 일반화된 명제로서 부정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흰색은 백조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된 것이다.
귀납적 논거를 제시하는 데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본질적 속성인 것처럼 일반화해 버리는 속단이다. 어떤 일반적 주장을 하고자 하는 동기나, 간접적으로 어떤 특수 사실을 주장하고자 하는 동기가 주어진 후에 그것을 뒷받침할 귀납적 논거를 구하는 것이 논술문을 쓰는 상황이므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수가 많다. 여성의 본성을 말하는 것, 부르주아적 근성을 말하는 것, 아프리카 흑인의 흑인성을 말하는 것, 우리 민족의 민족성이나 민족의 근성을 말하는 것 등은 모두 잘못된 귀납적 논거에 의존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귀납적 논거에 잘못이 생기는 까닭은 여론의 힘이나 권위의 힘, 또는 관습의 힘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여론이나 권위나 관습을 아주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것은 그런 것이 어느 정도의 귀납적 근거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항상 귀납적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관습의 힘이 얼마나 믿을 바가 못 되는가를 말해 주는 러셀의 이야기가 있다. 매일 아침 모이를 주는 주인을 믿게 되는 닭의 마음은 관습의 힘에 의존한다. 그러나 어느 날 태산같이 믿어 온 주인에게서 모이를 기대하며 쫓아 나간 닭은 하루아침에 도살자로 바뀐 주인을 이해할 수 없이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단골집을 다니는 심정을 정당화하려는 논거도 귀납적 개연성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좀더 강한 개연성이 될 수도 있으나 항상 더 약한 개연성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약한 귀납적 논거로써 강한 일반적 주장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다.
(2) 귀납적 인과성
귀납적 일반화의 대상이 되는 또 한 가지 현상은 반복되는 사건들의 관계이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다른 한 가지 사건이 뒤따라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때 그 관계를 일반화하여 인과 관계를 주장할 수 있다. 본질적 속성처럼 인과 관계도 일종의 필연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인과적 일반 명제도 연역 논법의 전제가 될 수 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설명을 하려면 인과 관계를 말하는 일반 명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인과 관계가 설립되는 일반적 현상은 또한 자연 법칙적 현상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자연 법칙이기 때문에 필연성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현상 중에도 보편성이 결여된 것이 있다. 항상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만 그 관계가 지켜지는 수가 있다. 분명히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따라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확률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확률적이든 보편적이든 인과 관계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므로 그런 인과적 일반화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흄이 보여 주었듯이 우리 인간은 인과 관계의 필연성을 체험할 수 없다. 귀납적 논거의 자료가 되는 경험적 사실에는 인과적 필연성의 체험이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경험적 자료에 한하여 말한다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하는 우연적인 사건의 관계와 '태풍이 불자 배 떨어졌다'고 하는 인과적인 사건의 관계를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흄의 회의주의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우연적 사건 관계와 인과적 사건 관계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인과적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실제로 우리는 그런 구별에 상당히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상 그런 인과 관계의 지식이 없이는 우리의 일상 생활이 하루라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물을 사용하는 데나 불을 사용하는 데, 또는 간단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데는 모두 그런 인과 관계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우리 몸의 각 부분도 인과 관계의 법칙을 따르고 있으므로 의식적으로 하는 우리의 행동에는 모두 인과적인 지식이 필수 조건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과 관계는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 속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 속에 주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만큼 자신 만만하게 인과 관계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 때문에도 인과 관계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속단이 되어 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가 어떤 사건의 원인을 설명해야 하는 문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그것을 설명해 줄 인과 관계, 즉 자연 법칙을 구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제시하는 상식적인 원인 설명에는 옳은 것도 있고 옳지 못한 것도 있게 마련이다.
상식적인 수준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 원인 설명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은 과학적 방법에 의한 판단에 의존하는 길이 있다. 과학적 탐구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자연 법칙을 발견해 가는 것이다. 자연 과학의 성공은 바로 이런 면에서도 우리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상식적 원인 설명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학의 판단을 받아서 인정이 될 경우, 과학적 설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부정이 될 경우 미신적인 설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의 모든 인과적 판단을 과학에 의뢰해서 검토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판단들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적 판단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므로 잘못된 판단일지라도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판단이다. 인과 관계를 말하고자 하지만 귀납적 논거로서의 충분한 자료가 없다든지, 심지어는 인과 관계를 뒤집어서 말하는 그런 따위의 오류를 문제삼자는 것이다. 인과 관계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문제삼지 않고 귀납 논리적 근거를 문제삼아야 할 것들을 말한다.
이를테면 범죄의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의 범죄 행위를 입증할 만한 충분한 증거 자료가 없을 때 상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수가 있다. 그가 범죄를 할만한 충분한 상황적 조건이 성립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귀납적 논거이기 때문에 강한 개연성을 가질 수도 있고 약한 개연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럴 때 흔히 이용되는 말은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혐의를 받는 사람이 그런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범행을 했으리라는 개연성을 높이고자 하는 방법이다.
범죄를 유발하는 충분한 상황적 조건이란 것이 있는가? 상황적 조건은 귀납적 논거이므로 필연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개연적이면서 충분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적 조건이 아무리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범인으로 단정하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할 수 있다. 귀납적 논거에서는 논거와 주장 사이의 상대적 비중이 문제시되어야 한다. 주장이 너무 강하면 어떠한 귀납적 논거도 충분할 수 없는 것이다. 범인으로 단정하는 주장은 귀납적 논거로 지지하기에는 너무 강한 주장이다. 상황적 증거는 범죄 혐의를 높여 주는 귀납적 논거로서만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주장에든 일리가 있다고 한다. 어떤 주장에든 귀납적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라고 하면 다 말이 되느냐?'고 반박을 받게 되기도 한다. 인과 관계를 뒤집어 말하는 것이 그런 예가 된다. 가해자인 사람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말할 때가 있다. 책임 적가를 하듯이 원인 전가를 할 때가 있다. 성적이 나빠서 꾸중을 듣게 된 것이 아니라,꾸중을 들었기 때문에 성적이 나빠졌다고 변명하는 학생이라든가, 국민들이 정부를 불신하기 때문에 권력형 부정 부패가 생긴다고 변명하는 정부 대변인은 원인 전가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인과 관계를 뒤집어 말해도 귀납적 논거를 제시할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하니만 그것은 귀납적 논거로서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과 관계를 바르게 말하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귀납적 논거는 상대적으로 훨씬 강할 수 있으므로 그런 원인 전가는 일종의 귀납 논리적 오류로 판정이 되는 것이다.
(3) 귀납적 유추성
귀납적 논거의 또 한가지 유형은 논법이다. 이것은 두 개의 대상이 갖는 상호 유사점들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일반화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배우자를 선택하는 처녀가 자기 아버지와 닮은 총각이므로 좋아한다고 할 때 유추 논법을 쓸 수 있다. 생긴 모습도 비슷하고, 혈액형도 같고, 전공 분야도 같고, 취미도 같고, 음성까지도 닮았고, 술을 좋아하는 것까지도 닮았다면, 자기 아버지가 가정적이고 애처가인 것처럼 그 총각도 결혼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서로 유사한 속성들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앞으로 비교해 볼 속성들도 유사하리라고 판단하는 것이 유추 논법이다.
유추 논법은 생각해 내기가 비교적 쉽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아주 많이 쓰이는 귀납적 논거이다. 그러나 이것도 귀납적인 것이므로 논거로서는 무의미할 만큼 약한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다. 만일 비교해 보지 못한 속성들 중에서 서로 다른 점이 너무 많이 나타난다면 전체적으로 보아 유추 논법이 성립될 수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비교될 수 있는 속성은 무수히 많지만 미리 어떤 주장을 지지하는 유추 논법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되면 유사한 속성들만 먼저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바만 보게 되는 경향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처녀의 유추 논법에서도 만일 결혼 후에 그 배우자가 가정적이지도 못하고 애처가도 아닌 사람으로 되어 버렸다면 분명히 결혼 전의 그 유추 논법에 어떤 잘못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령, 나중에 더 알아본 결과 자기 친정 할아버지는 가정적이고 애처가였는 데 시집의 할아버지는 그렇지 못했으며, 시아버지도 그런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왜 그때의 유추 논법이 잘못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귀납적 논거로서의 유추 논법은 유사점과 상이점을 얼마나 충실하게 비교해 보느냐에 따라서 강하게 될 수도 있고 약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공정성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예컨데, 월남의 사이공 정부가 무너지고 월남 전역이 공산화되자 우리는 우리 나라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월남과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것은 이미 유사점들이 지적되고 있었기 때문데 월남과 한국 사이에 유추 논법이 적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생각이었다. 우리도 월남의 사이공 정부처럼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유추 논법적으로 지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유추 논법을 약화시킬 상이점들을 들추어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필리핀과 한국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이것은 바로 귀납적 논거에 제시된 자료의 무게와 타당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중요하고 민감하고 흥미 있는 것이므로 여기에 관한 한 전문가의 주장과 논거를 제시하고 음미해 보았으면 한다.
미국의 국방 차관보인 리처드 아미티지가 1986년 3월 27일 워싱턴 외신 기자 센터에서 배경 설명으로 한 말의 내용이다. '한국과 필리핀 : 유사점은 별로 없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자료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논거가 있다.
한국과 필리핀 사이의 유사점을 지적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나는 오히려 두 나라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음을 강조해 두고자 한다.
그 첫째 차이점으로는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 1988년에 평화적으로 하야하겠다는 뜻을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강조해서 밝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둘째 차이점은, 한국은 필리핀과는 달리,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와 관련을 갖지 못했다. 오랫동안 미국의 식민지이기도 했던 필리핀은 근 100년 동안 민주주의와 관련을 가져 왔고, 그에 익숙해졌으며, 그 방향으 로 나가고 있었다. 한국은 20세기 초까지도 봉건 왕국이었고, 36년 동안 외세의 강점하에 있었으며, 이어 독립을 되찾았으나 곧 전쟁이 일어나, 국토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정전 후 30여 년 동안 매우 불안정한 상황 아래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한국인들은 비단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해 왔다.
한국의 사정은 필리핀의 그것과는 다르다. 필리핀에서는 엘리트층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자기들이 마르코스 정권하에서 어제보다 오늘 더 잘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한국에는 필리핀에서와 같은 정치 탄압 수단과 살인 행위 같은 일은 없다. 정치적 살인 행위는 최근에 있은 선거에 앞선 여러 해 동안 필리핀의 정치 선거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사실이 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치적 살인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의 야당은 그들의 의사를 어느 정도 멱혀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근래에 있었던 선거들이 그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야당은 국 회에서 그들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고, 또 사실 그렇게 하고 있다.
(주한 미국 공보원, 『시평』, 1986년 7월호, pp.39-40)
먼저 위의 논거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를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런 후에 그 내용의 한 조목, 한 조목씩 그 타당성과 중요성을 검토해 볼 수 있다. 다시, 한국과 필리핀의 차이점들 중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제시해 보고, 유사점들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들부터 정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전문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귀납적 논거에 있어서 좋은 자료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좋은 자료의 발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게 해줄 것이다. 또한 위에 제시된 반론보다 더 강한 긍정적 유추 논법을 한국과 필리핀의 관계에서 제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새로운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유추 논법을 쓰는 귀납적 논거는 언제나 더 강한 논거가 되게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비판하는 반론도 그만큼 더 강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유추 논법의 자료가 거의 무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역사는 반복된다는 주장과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끝없이 논쟁을 해갈 수 있는 것도 거기에 동원될 수 있는 귀납적 논거, 특히 유추 논법적 논거가 무한히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추 논법은 효과적이면서도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만큼 쉽게 비판받을 수 있다는 약점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귀납적 논거의 약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연역적 논거에 의존하려는 생각도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연역 논리의 기준
(1) 논리적 비약성
논리적 비약은 연역적 논거에 해당되는 오류이다. 귀납적 논거에는 논리적 비약이 일어날 수 없다. 귀납적 논거는 여러 개의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건축물에 비유될 수 있다. 여러 기둥들이 함께 그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으나 그들 중 어느 하나가 빠진다고 해서 전체 구조가 무너지지는 않을 수 있다. 어느 한 기둥도 이런 뜻에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기둥이 하나씩 빠짐으로써 전체 구조물은 그만큼씩 약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무너져 버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귀납적 논거는 그 하나하나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더해짐으로써 좀더 강한 논거가 되고, 그것이 빠짐으로써 그만큼 약해지는 논거가 되게 하는 것이다.
연역적 논거는 석가탑 같은 탑의 구조에 비유될 수 있다. 여기서는 한 층 한 층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한 층이라도 빠지면 그 위의 구조는 무너져 버린다. 연역적 논거가 뒷받침하고자 하는 주장은 탑으로 말하자면 마지막으로 제일 위쪽에 놓여지는 부분에 해당하므로 연역적 논거 하나하나가 필수적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연역적 논거에서 논리적 비약이라고 하는 것은 탑의 한 부분이 빠져버리는 것과 같으므로 전체 논거로서도 치명적인 결과가 되게 한다. 논리적 비약을 범하는 연역적 논거는 논거로서의 힘을 상실하고 만다. 다시 말하자면, 연역적 논법에서의 전제와 결론의 관계는 논리적 필연성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논리적 비약이 생긴다는 것은 그런 논리적 필연의 관계가 부정되게 한다는 것이다.
왜 논리적 비약이 생기는가? 왜 논리적 필연성이 성립되지 않는 연역적 논거가 가능한가?
첫째로 연역 논리에서의 전제와 결론의 필연적 관계는 그 논법의 정당성에 의존한다. 논법이 정당할 경우에만 논리적 필연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논법이 부당한 것이면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삼단 논법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위선자는 자기 변명을 잘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변명을 잘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위선자이다.
이것은 흔히 사용하는 잘못된 논법이다. 왜 잘못된 논법인가는 논리학의 전문 용어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아래와 같은 논법이 당치도 않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이들 논법은 모두 논법 형식상으로 잘못된 것임을 보일 수도 있다.
고양이는 유한한 존재이다.
소크라테스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고양이이다.
이퇴계는 조선조 유학자이다.
이율곡은 조선조 유학자이다.
그러므로 이율곡은 이퇴계이다.
또 한 가지 유형의 논리적 비약은 논법상 필요한 전제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필요한 전제가 너무나 당연한 것일 때는 생략해 버리는 수가 있으나, 마치 생략인 것처럼 제시된 논거이지만 실제로는 마땅한 전제를 구할 수 없는 경우에 논리적 비약이 일어난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는 얼핏 보기에 전제와 결론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가 '나는 존재한다'를 연역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연역적 관계로 보려면 또하나의 전제를 더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존재하는 사람이다'라는 전제를 더하면 '나는 존재한다' 를 연역 논법의 결론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면 왜 데카르트는 이 전제를 말하지 않았을까? 데카르트는 무엇이든 의심의 여지가 있으면 다 의심해 보는 방법론적 회의를 실험하는 단계에 있었으므로 위의 세 명제도 그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즉,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존재한다는 말은 의심의 여지를 준다. 그렇게 되면 '순수하게 정신적인 존재는 어떻게 인정해야 할지' 도 문제가 된다. 수학적 진리까지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한 데카르트로서는 그러한 명제를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은 연역 논리적 명제로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데카르트는 논리적 비약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전제와 결론의 관계를 나타내는 뜻 외에 다른 뜻으로 쓰일 수 있으므로, 데카르트는 그것의 비논리적 의미를 밝혀야만 했던 것이다.
숨은 전제를 들추어내었을 때 그것의 타당성이 문제가 되면 논리적 비약의 가능성이 생긴다. 아래와 같은 논법을 보자.
무신론은 입증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신론은 옳다.
이 논법에서 숨은 전제는 '무신론이 옳거나 유신론이 옳다. 그 두 가지 모두가 틀릴 수도 없고, 옳을 수도 없다.' 라는 배타적, 양분법적 명제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흑백 논리적 전제라고도 한다. 모든 것은 흑이 아니면 백이라는 식으로 나누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위의 논법에서 숨은 전제가 흑백 논리적 명제임을 밝혀 내면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논리적 비약이 되고 만다.
논리적 비약의 오류를 범하는 것은 부주의의 탓도 있으나 의도적인 것도 있다. 연역적 논거의 제시를 포기하고 비논리적 방법으로 자기 주장을 설득하고자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런 경우도 귀납적 논거로 대신하고자 하는 것은 타당한 방법이다. 그러나 아예 비논리적 방법을 택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을 범한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예컨대, 하나님의 존재를 연역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마지막 한 단계에 가서 논리적 비약을 불가피하게 한다. 믿음으로써 체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다고 하므로 이것은 논리적 전제가 아니라 심리적 조건이 되고 만다. 문제는 이 심리적 조건을 귀납적 논거로 간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은 없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논리적 비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연역적 논거를 정당하게 제시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을 범하게 되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감정에 호소하거나 상대방의 신분을 들추어 인신 공격을 하는 수가 있다. 이를테면 임신 중절 문제에 대하여 어머니의 권리를 주장하는 논거를 반박하면서 그 논거를 편 사람이 어머니가 되어 보지도 못한 미혼자라는 것을 들추어낸다면 이것은 인신 공격을 하는 논리적 비약이다.
(2) 논리적 모순성
'모순'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의견이나 주장이나 믿음이 모순된다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판단 기준이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역할이나 기능이 서로 모순된다고 할 수도 있고, 상태가 서로 모순될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이 모순된다고 할 수 있으며,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신앙이 서로 모순될 수 있다. 주인과 노예라는 역할이 서로 모순된다고 할 수도 있으며 남성과 여성이 모순된다고 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모순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모순' 이라고 할 때는 훨씬 좁은 의미를 갖는다. 진리를 긍정하는 명제들의 관계에 한하여 논리적 모순을 말할 수 있으며, 그것도 한 명제의 부정이 다른 명제의 긍정이 되고, 한 명제의 긍정이 다른 명제의 부정이 되는 그런 관계의 두 명제들에 한하여 모순된다고 한다. 이것은 모순 관계를 반대 관계와 구별함으로써 분명해진다. 반대 관계에 있는 두 명제들은 다 함께 진리가 될 수 없으므로 하나가 긍정되면 다른 하나는 부정된다. 그러나 하나가 부정될 때는 반드시 다른 하나가 긍정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 관계의 두 명제들은 다 함께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순 관계의 명제들은 다 함께 거짓이 될 수도 없다.
'모순' 이란 말과 상대적으로 쓰이는 말은 '일관성' 이다. '일관성' 도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변함이 없는 것이면 무엇이나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가 불가피할 때는 변화를 하되 그 기준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일관성 있는 변화를 말할 수 있다. 또한 어떤 궤도나 방향을 따르는 운동이나 발전적 변화를 말할 때는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일관성 있는 운동이 된다.
여기서도 '논리적 일관성' 은 좁은 의미를 갖는데, 말하자면, 연역 논리적인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역 논리적 궤도란 하나의 체계를 말하며 그 논리적 체계가 일관성을 갖는다는 것은 거기에 서로 모순되는 명제들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논리적 일관성은 논리적 무모순성을 뜻하는 것이다.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적 견해는 논리적 모순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대학 졸업 후 10년 만에 모교를 찾아갔는데, 학교 앞에서 구두 수선을 하는 아저씨가 10년 전 그때와 꼭 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다시 10년이 지난 후 모교를 찾아갔을 때도 여전히 그 아저씨는 비슷한 모습으로 구두 수선 일을 하고 있었다. 별로 더 늙지 않은 아저씨의 모습이 놀라워서 나이를 물어 보았더니 10년 전에 말했던 나이를 그대로 대는 것이었다. 어째서 10년전 나이와 같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말에 그 아저씨는 '그래야만 일관성이 있지 않느냐!' 고 대답했다.
무조건 변하지 않는 것도 넓은 의미로는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는 한 해에 한 살씩 더해 가는 것이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다. 한 해 두 살이 많아지기도 하고 세 살이 많아지기도 한다면 일관성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연역적 논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무모순성이란 뜻에서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 하면, 연역 논법의 전제와 같은 연역적 논거가 일관성을 결여하게 된다면 논거로서의 힘을 잃어 버리기 때문이다. 전제들 간에 논리적 모순이 있으면 형식 논리적 규칙에 따라서 어떠한 결론이든 마음대로 이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제들이 그 모든 결론들을 필연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형식 논리적 규칙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연역 논리적 필연성을 보장해 주는 추리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순된 전제들은 연역 논리적 근거로서의 힘을 상실하므로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연역적 논거에서는 논거 자체 내의 무모순성 또는 일관성이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자체 내에 모순된 논거, 즉 자가 당착적인 논거를 지적받음으로써 연역적 논거는 무효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적 모순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역설적 주장이 있다. 논리적 일관성의 기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모순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자기 주장의 논거로 한다는 것이다. 더욱 심한 경우에는 논리적 모순성 때문에 오히려 자기 주장이 옳다는 식의 역설을 말하는 수도 있다. 종교적 신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역설적이기 때문에 믿는다' 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설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형식 논리적 모순성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또는 그렇게 때문에 자기 주장을 세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형식 논리적 제한을 벗어나겠다는 뜻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형식 논리적으로 규정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그처럼 강한 논리 체계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형식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과 현대의 기호 논리학적 논법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형식 논리를 적용하려면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라고 분명히 구별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라든지,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것은 허용이 될 수 없다. 또한 이것은 항상 이것으로 남아 있어야지, 이것이었다가 저것이 되는 변화를 가져 온다면 형식 논리로써 다룰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형식 논리의 이러한 요구 조건은 앞서 논의한 흑백 논리를 생각하게 한다. 형식 논리는 분명 흑백 논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흑백 논리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물인지 얼음인지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있다.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게 하는 구조물도 있다. 빛은 입자로 볼 수도 있고 파동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입자이면서 또한 파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도 한다. 사람과 하나님은 구별되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사람이면서 또한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정신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를 동일시하는 것만큼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 논리를 적용하는 연역적 논거에서는 모순이 허용될 수 없다. 역설적 주장을 하고자 할 때는 형식 논리의 한계를 벗어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야 한다.형식 논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변증법적 논리를 택하는 것이다. 형식 논리적으로는 모순 관계가 허용되지 않지만 넓은 의미의 모순 관계, 즉 대립 관계는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상태를 형식 논리적 모순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대립 관계라는 뜻의 모순 관계로 보면서 그 대립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해 가는 과정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역설적 주장과도 다르다. 그러나 형식 논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이 있다. 변증법적 모순이나 역설은 연역 논리적 오류로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연역적 논거로 제시될 수도 없는 것이다.
(3) 논리적 순환성
논리적 순환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주장을 위한 논거로 제시된 것이 다시 본래의 주장을 그것의 논거로 삼는 것이 논리적 순환이다. 자기 자신을 들어 올린다고 하면서 자기 구두끈을 힘껏 위로 잡아당기는 행동과 같은 것이 논리적 순환이다. 손으로 구두끈을 잡아당기기 위해서는 발로 바닥을 그만큼 강하게 밀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런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다. 구두끈이 끊어질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들어 오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 순환을 명백하게 설명해 주는 예는 세 명의 도둑이 훔친 진주 일곱 개를 나누어 갖는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다른 두 사람에게 진주를 둘씩 나누어 주고는 자기가 셋을 차지했다. "너는 왜 셋을 갖느냐?"고 두 사람이 항의했다. "나는 두목이니까!"라고 답했다. "어째서 네가 두목이냐?" 고 다시 반문했다. "나는 진주를 너희들보다 한 개 더 많이 가졌으니까!"라고 답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수긍했을 리 없다. 순환논법을 범하는 논거이기 때문에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논리적 순환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개념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에도 순환의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과적 필연성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문제는 지금도 철학의 관심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순환적 정의를 불가피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인과적 필연성이란 무엇인가?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 형상들의 관계를 말한다.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설명해 주게 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 법칙은 원인 설명의 힘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원인 설명이 설명으로서의 힘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원인으로서의 사건과 결과로서의 사건이 인과적 필연성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두 사건이 인과적 필연성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처음 시작한 물음이다. 순환적 정의가 되고 만 것이다.
또 한 가지 종류의 순환은 인과적 순환, 혹은 발생적 순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남에게 한 일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꼭 같은 일을 자기가 당하게 되는 것이 그런 순환이다. '인과 응보'라는 말도 이런 인과적 순환을 말하며, '부메랑 효과'라는 말도 그런 뜻을 갖는다. 이것은 일종의 자연 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순화 논법이나 순환적 정의와 같은 문제를 지니지 않는다. 논리적 순환은 논거를 제시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인과적 순환은 그것이 순환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만을 말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세상에는 순환적으로 발생하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환적 운동이지만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향으로 이동하게 하는 나선형 순환 운동이 있다. 생명체가 태어났다가 죽는 순환적 변화라든지, 사계절이 바뀌는 순환 또는 생태계에서의 여러 가지 순화적 변화는 모두 방향성이 있는 순환이다. 역사를 남기는 변화인 것이다.
발생적 순환이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할 때 여기에 가치 기준이 들어올 수 있으며 발전적 방향이라든지 퇴보적 방향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악순환이라고 하는 것은 퇴보적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발생적 순환을 뜻한다. 이것은 인과적 악순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우리 나라의 대학 입학 시험 지옥은 인과적 악순환의 예가 된다. 교육열이 높은 것은 대학 입학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며, 대학 입학 경쟁이 심한 것은 대학 지원자 수가 많기 때문이다. 대학 지원자 수 가 많은 것은 교육열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입시 준비의 과정은 더욱 지옥처럼 되어 갔으며 이상적인 교육의 목표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고등 학교 교육이 되어 버렸다.
불안하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먹고, 많이 먹기 때문에 비대해지고, 비대해지기 때문에 더 불안해지는 것도 인과적 악순환의 예이다. 또한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도 바람직하지 못한 인과적 순환의 예가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순환 논법이나 순환적 정의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순환적 정의는 단순히 의미가 같은 다른 개념들을 말해 주는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그 개념의 뜻을 설명해 주거나 규정해 주고자 할 때 문제가 된다. 설명적 의미나 규정적 의미는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개념이 규정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하며, 그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히 이해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설명적 기능이나 규정적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순환적 정의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순환 논법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말할 것 없이 논거로서의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환 논법의 오류는 논법 형식상의 오류가 아니라, 자가 당착적 전제가 부당한 논법 형식이 되게 하지는 않으나 논거로서는 무력한 것이 되는 것처럼, 순환 논법은 논거로서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다음, 순환 논법과는 다르지만 역시 논리적 순환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논점을 회피하는 오류이다. 이것은 논거를 제시하는 일을 표면적으로는 포기하려고 하기 때문에 논리적 순환은 범하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예를 보자.
무신론은 유신론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없다. 왜냐 하면, 무신론은 이미 신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신의 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의 쟁점이 되는 문제를 마치 합의되고 해결된 것인 양 처리해 버림으로써 논리적 순환을 범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성질의 것이지만 아래의 예를 보자.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 논쟁은 필요 없다. 왜냐 하면, 자본주의자들도 평등의 가치를 인정하며 특히 평등한 자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으므로 사회주의와 대립 관계가 될 수 없다.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논점을 회피하기 위해서 논쟁의 초점이 되는 개념의 구별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우선 문제가 된다. 이것은 흑백 논리의 오류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갖는 문제이다.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의 주장에 유리하도록 개념의 의미를 고쳐서 사용해 버리는 데 있다. 분별이 되어야 할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펴 나가려는 것이다. 어째서 개념을 그처럼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어 보면 순환적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논점 회피의 오류는 표면적으로 논쟁을 피하면서 이면적으로 자기의 주장을 세우고자 하는 데서 생긴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논리적 순환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순환 논법이 왜 문제가 되는가?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 주장에 대한 논거를 제시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고의적으로 순환 논법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 논리적 오류를 무시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이것은 처음에 소개한 도둑과 진주의 예를 변용한 것이다.
세 사람의 도둑이 권총을 하나 훔쳤다.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그 권총을 만져 보기로 했다. 세 번째로 그것을 만져 보게 된 사람이 자기 것으로 하겠다고 서로 주장했다. 세 사람 간에 언쟁이 생겼다.
"왜 네가 그 권총을 갖느냐?"
"나는 두목이니까."
"그건 순환 논법이다."
"그건 논리적 오류이다."
"그렇다. 그러나 내가 지금 권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내가 두목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이야기이지, 논리적 설득력의 문제가 아니다."
이로써 그들 간의 언쟁은 끝나고 새로운 질서가 지배하게 되었다.
연역적 논거든 귀납적 논거든 논리의 힘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만 그것을 문제시할 수 있다. 논리를 무시하는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합리적 설득보다 힘에 의한 위협이 더 효과적이므로 논리를 따지는 교육이 중요시될 수 없다. 교육의 내용은 그 사회의 지배적 풍토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적극적 기능은 세대를 다르게 하면서라도 그 사회의 문화 풍토를 개선해 가려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 세대는 힘의 지배를 중요시하더라도 다음 세대는 합리적 합의에 의한 결정을 중요시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소홍렬/미국 알마 대학교를 졸업. 미시건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 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논리와 사고』, 『철학하는 방법』등이 있다.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