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사상
by 처사21비트겐슈타인의 생애와 사상
빌헤름 바이쉐덜
천재의 완벽한 전형
성인들의 전기를 보면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이야기가 가끔 나온다. 철학자들에게는 이런 일이 아주 드물지만 그 일을 멋지게 실천한 사람이 있다.
1889년, 빈에서 실업강의 아들로 태어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상속받은 수억의 재산을 전부 선물해 버린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부금을 희사 받은 릴케나 트라클 같은 예술가를 가난한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몫의 재산을 그렇지 않아도 이미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자기 형제 자매들에게 주어 버린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소유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마도 그에게 그처럼 보기 드문 일을 하도록 부추긴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있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진정 철학자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유년 시절을 평탄하게 보냈다. 그는 아버지의 시골 영지와 도시의 별장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는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23세 때, 그는 지난 9년 동안 끔찍한 고독 속에서, 거의 자살하고픈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일을 끝내기도 전에 머리가 돌아 버리거나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사람들은 늘상 비틀거리다가는 쓰러지고 또 비틀거리다가는 쓰러지곤 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계속 걸어가려고 애쓸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내 일생 동안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비트겐슈타인의 집에는 교양 있는 분위기가 넘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음악이 각광을 받았다. 클라라, 슈만, 말러, 브람스 등은 낯익은 손님들이었다.
비트겐슈타인도 상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클라리넷을 곧잘 연주했고 얼마 동안은 지휘자가 될 꿈을 간직했을 정도이다. 물론 훗날 그의 음악적 재능은 친구들에게 교향곡이나 협주곡의 전 악장을 휘파람으로 불어 들려주는 정도에 한정되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고등학교를 마친 후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에 있는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기술도 애착을 느끼는 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소년 시절에 최신형의 재봉틀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맨체스터로 옮겨서 학업을 계속하고 그곳에서 당시 막 대두되기 시작한 항공학으로 방향을 돌린다.
이때 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눈을 뜨게 된다. 그는 러셀에게 배우기 위하여 케임브리지로 간다. 러셀과는 그후 돈독한 우정을 맺는다. 러셀 자신도 이렇게 말한다. "비트슈타인을 알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정신적 체험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비트슈타인을 '천재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불렀다.
나는 바보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 대학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제 1차 세게 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전 해 노르웨이의 어느 한적한 농장에서 지내다가 1914 군에 입대하지만 병 때문에 군복무에서 제외된다. 나중에 자원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지원하고, 장교가 되어 동부 전선과 납부 전선의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마침내 이탈리아에서 전쟁 포로가 된다. 그는 이 시기에 최초의 유명한 저서 『논리 철학 논고』를 완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끝난 후 심한 정신적 위기에 빠진다. 그는 한 시골 책방에서 복음서에 대한 톨스토이의 책을 접하는 에, 이 책이 그의 마음을 깊숙이 뒤흔들어 놓는다. 그는 앞으로 검소한 생활을 꾸려 나가기로 결심하고 남부 오스트리아에서 시골 선생이 된다. 시골 생활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쓴 작가 중 한 사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수줍음을 타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몹시 남루한 차림새였으며, 가장 허름한 집을 골라 살았다. 마치 승려의 독방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아주 작고 가구가 없는 방을 고르거나, 어떤 집에서든 작은 방만을 골라서 세 들어 살았다. 언젠가는 세 들어 있던 여관이 댄스 음악으로 소란스럽지 얼마 동안 학교 부엌에서 잠을 잔 적도 있다. 그 후 그는 다시 한 마을 사람이 쓰다 내버려 둔 작은 세면장에서 기거했다." 어쨌거나 그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의 기술 공학 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시골 공장에 잇는 고장난 증기 기관을 수리해 주기도 하고 주부들의 재봉틀을 손봐주기도 했다. 학교에서 임무도 아주 진지하게 수행해서 새로운 학습방법을 실험하기도 했다. 단지 동료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몇 년 후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직을 포기한다. 새롭게 우울증에 사로잡힌다 잠시 수도원에 들어갈까 궁리해 보다가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가 되는데, 연장을 보관하는 헛간을 잠자리로 썼다. 그 후 그는 건축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되어 누이를 위해 당시로는 초현대식 건축 방식을 도입한 집을 설계하기도 한다. 마침내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그곳에서 학위를 받고 특별 연구원으로 강의하는데, 그의 강의에는 동료 교수도 몇몇 참석한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은 강의 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실 한가운데 있는 수수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그은 자신의 사상과 피나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자기가 명확하게 생각하지 못했음을 알아채고는 자주 이와 같은 말들을 했다. '나는 바보다', '자네들은 멍청이 선생을 두었다', '나는 오늘 정말로 멍청하다.' 그는 강의를 계속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의구심을 표명했지만, 7시이전에 강의를 마치는 적은 좀처럼 없었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모임을 강의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강의'라고 하기에는 알맞지 않은 자리였다. 첫째로 그는 이 모임에서조차도 계속 탐구를 진행해 나간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혼자 있을 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두 번 째로 이 모임은 거의 대부분 대화로 이루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보통 청강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대답에 응했다. 때때로 생각을 이끌어 내려고 애쓸 때는 단호한 손짓으로 모든 물음과 대답을 금지시켰다. 자주 긴 침묵의 시간들이 찾아들곤 했다. 가끔 비트겐슈타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면서 긴장 속에서 기다렸다. 이 침묵의 시간동안 비트슈겐타인은 극도로 긴장해서 생각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시선은 집중되고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두 손은 매혹적으로 움직이고 표정은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극도의 진지함, 극도로 긴장된 집중, 그리고 아주 강력한 정신적 압박을 대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면,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탈진해서부랴부랴 극장으로 달려갔다. 아무 영화나 한편 보면서, 그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철학을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동안에도 비트겐슈타인은 검소한 생활 방식을 계속해서 유지한다. 방에는 안락 의자도 독서용 전등도 없고 사방의 벽은 그림 한 점 없이 황량했다. 옷차림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예의 범절 준수 사항으로 엄격하게 정하고 있는 것과 엄청나게 어긋났다. 회색 플란넬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목이 트인 셔츠와 털로 짠 조끼나 가죽 점퍼를 입었다.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거나 모자를 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 "식사도 지극히 간단하게 해서 단지 콘 플레이트만 먹고살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약간 과장된 말일 것이다."-이것은 전기 작가들의 말이다. 오랫동안 그는 빵과 치즈만으로 시사를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엇을 먹든지 개의치 않았다. 항상 똑같은 것을 먹는다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케임브리지 시절-노르웨이에 체류하기 위해 1년간 떠나 있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두 번째 중요한 책<철학적 탐구>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출간된다. 그 사이 그는 철학교수가 된다.그러나 곧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그는 다시 자발적으로지 원해서 처음에는 병원에서 환자 수송요원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의학연구소의 실험실 조수가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케임브리지로 돌아오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철학 교수직을 포기한다. '철학교수라는 허무 맹랑한 자리' 가 '일종의 생매장된 존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제 그는 오로지 연구에만 헌신한다. 그는 처음에는 아일랜드의 한적한 농장에서 지내다가 만년에는 더블린 의한 호텔에서 기거하는데, 온갖 질병에 시달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암으로 고생하다가 1951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나는 아주 멋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 주시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두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논리 철학 논고>(이하<논고>로 줄임)로 대변된다. 이책은 영어 사용권 나라들을 휩쓸었던 사상적 물결인 논리 실증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두 번째 단계는<철학적 탐구>로 대변된다. 이책도 연구가 미국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최근까지도 유럽대륙에서 언어학에 여러 가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논고>는 몹시 어려운 책이다.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정열적이며 근원적인 사유를 아주 냉담하게, 거의 수학적인 형태 속에 숨긴 채 있음(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정직한 철학의 과제라고 여겼다. 그런데 '있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사실들'이라고 대답한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 따라서 세계는 전통적 의미에서처럼 사물들의 총체로써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로써 이해해야 한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책상은 사물이다. 그러나 책상이 갈색이라거나 책상이 방에 놓여 있다는 것 등은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대신에 '사태의 존립'이라고도 말한다.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 이며, '세계의 실체를 형성하고 있다'. 세계 안에는 복합적인 사태가 있다. 복합적인 사태는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단순한 사태로 소급될 수 있다. 단순한 사태에 근원적인 실재가 귀속한다.
사태들은 명제(命題,판단)들의 대상이, 그리고 단순한 사태들은 단순한 명제들 또는 요소 명제들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때문에 명제들의 분석을 통해 사태들이 일어나는 세계의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여기에서도 또한 복잡한 명제들은 단순한 명제들은 '직접적인 연결관계에 놓여 잇는 이름들로 구성' 되어있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확실성의 원천은 요소 명제들과 단순한 사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점을 비트겐슈타인은 더 이상 증명하지 않고 가설로 남겨 둔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든 참된 요소 명제들에 대한 언명은 세계를 완전하게 묘사한다." 왜냐하면, 요소 명제들로부터 모든 참된 명제들을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개념을 끌어들여 명제들과 사태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기술한다. "우리는 사실들에 대한 그림을 만든다." , "명제는 실제의 그림이다".이것은 물론 사진과 같은 복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제는 단지 사태의 논리적 구조를 반복할 뿐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형식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명제들에도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명제는 실재의 논리적 형식을 보여준다."
이로써 철학의 분야는 극단적으로 제한된다. "철학의 목적은 사고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다." 이에 상응하여 비트겐트슈타인은 다음과같이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명확하게 사유될수 있다. 진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분명하게 진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원리는 궁극적으로 단지 자연 과학에만 들어맞을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단호히 말한다.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전체 자연과학이다." 그러나 "철학은 자연 과학의 한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이를 벗어나는 모든 철학적인 주장, 특히 형이상학적 주장이부정된다. 그것으 명확하게 사유될 수도 분명하게 말해질 수도 없다. "철학적 문제를 기술하였던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거짓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대답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물음도 배척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뜻으로 『논고』의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이 책에서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며 ----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 이 문제들의 제기는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다." 여기에 그 유명한 『논고』의 마지막 문장이 적용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요약하면 이런 뜻이다. "올바른 철학의 방법은 본래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연 과학의 명제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철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여전히 어떤 형이상학적 문제를 말하려고 한다면, 그에게 그 자신이 제시한 명제 중에서 어떤 기호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일러주어야 한다. 이런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만스럽게 여겨지겠지만 ----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 그 것만이 유일하고 엄밀하게 정당한 방법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물론 자연 과학적으로 명료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다. "우리가 과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물음에 대답했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문제가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삶의 문제는 물론 엄밀한 척도에 따라 사유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이 문제에 손을 댄다. "철학은 생각할 수 잇는 것의 한계를 정하고 그림으로써 생각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정하려고 한다. 철학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생각할 수 없는 것에 정의를 내리려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있기는 하지만 생각할 수 없는 이러한 것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부른다. "물론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내보인다. 그것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것에는 독특하게 드러나는 방식이나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냄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도 암시할 수 있다."
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신비로운 것에 속하는 것으로는 첫째, 윤리적인 것이 있다. 윤리적인 것은 '사태'가 아니지만 그래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삶은 신비스러운 어떤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공간과 시간 안에 있는 생명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셋째, 자아가 신비의 영역에 있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이다." 그렇지만 주체의 실존 ---- 비록 신비스럽다고 하더라도 ----은 논란이 되지 않는다. "자아, 자아는 깊이 숨겨진 비밀이다." 넷째, 전체로서 세계가 그 '있음'에서 신비스럽다. "신비적인 것은 세계가 어떻게 있는 것이냐가 아니라 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이것은 세계의 의미에도 적용된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있어야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의미를 지칭하기 위해 '신'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의 사실들로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을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신비스러운 "신은 세계 안에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세계의 세계 외적인 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곳에서는 신을 세계의 총체로서 이해한다. "신은 모든 것이 서로 관계하는 그 방식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물론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의 신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예속되어 있다. 우리가 예속되어 있는 바로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은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운명, 또는 같은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의지에 예속되어 있지 않는 세계이다."
철학의 몰락
『논고』를 완성한 후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 후 그에게 자신의 저서에 의심을 품게 하는 기묘한 일이 발생한다. 그는 이 책에서 너무나도 자명하게 세계는 '사실'들로 나뉘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세계는 '사물' 또는 '사건'들로 나뉘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실재를 분석하는 데는 단 하나의 명백한 가능성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로써 『논고』의 근본 전제들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사람들이 명제를 요소 명제들로 분해하면 명제의 의미는 명백해진다는 주장도 언어에서는 한 낱말이나 문장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어서 다의적인 애매함이 지배적이라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석이 필연적으로 참된 실재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밖에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복잡한 사태와 단순한 사태, 복합 명제와 단순 명제의 구별도 의문스러워진다.
도대체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은 없다. 더 나아가 그림 이론도 무제가 된다. 왜냐 하면, 단순한 사태나 사물들도 없고 단순한 명제들도 없다면, 사람들은 단순 명제들이 단순한 사태들이나 사물들을 그려낸다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신비론도 포기한다. 이렇게 해서 『논고』의 전 체계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새로운 실마리를 찾아야만 했다. 이것이 『철학적 탐구』를 쓴 이유다. 그는 그 책에서 철학적 어려움과 '사유의 혼란'은 언어가 다의적이기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제 언어 탐구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 명제가 아니고 일상 언어이다. 일상 언어는 가장 근원적인 현실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철학도 일상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의존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일상 언어의 도움으로 철학의 전문 용어를 깨뜨릴 수 있다. "우리는 낱말들을 형이상학적인 쓰임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일상적인 쓰임으로 되돌려 보낸다."
언어에서 낱말들이 명백하지 않은 이유는 낱말들이 등장하고 있는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바뀌어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낱말도 명백하게 철학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 "하나의 낱말이 어떻게 적용될는지 알아챌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낱말의 쓰임을 눈여겨보고 그것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단일한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사용되는 언어의 맥락에 따라 저마다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협정을 체결할 때, 시계를 볼 때, 시간의 길이를 잴 때…… 시간의 표현은 각기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잇다. 요컨대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 낱말의 쓰임이다."
여기에 철학적인 노력이 개입하게 된다. 철학은 여러 가지 가능한 의미를 해명한다. "철학은 언어의 매개에 의해 덫에 걸려 있는 우리의 지성에 맞선 투쟁이다." 그러한 덫은 특히 사람들이 일반적인 개념, 예를 들면 '없음[無]'이나 정신을 사물로 간주하거나, 도는 사람들이 - 플라톤적 의미로 -모든 실재하는 말[馬]이 연관된 '말(馬)'의 본질이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근본적인 오류이다. 사람들이 목마뿐만 아니라 목장에 있는 말에게도 적용하여 사용하는 '말'이라는 낱말은 아무런 '하나'의 본질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이 경우에 결정적인 것은 같음이 아니라 다름이다. 상상했던 본질의 같음은 서로 다른 여러 맥락에 놓여 있는 낱말의 '가족 유사성'으로 환원된다.
그런데 낱말들이 등장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수많은 언어에 수많은 세계가 있다. 이 언어 세계의 상이함에 따라 낱말의 의미도 변한다. 예컨대 '당신'이라는 표현은 연애하면서 쓸 때와 협박하면서 쓸 때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가진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안에서 낱말들이 저마다 다른 의미로 나타내는 것을 '언어 놀이'라고 부른다. 언어 놀이는 흡사 그 안에서 그때마다 다르게 말해지는 테두리(범위)와 같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것을 예로 든다. "명령들, 명령들에 따라 행동한다 -- 바라봄에 의한 도는 측정에 의한 대상의 묘사 -- 묘사(그림)에 따른 대상의 산출 -- 경과의 보고 -- 경과에 대해 추측을 세워 본다 -- 가설을 세우고 검토한다 -- 도표와 도식으로 실험의 결과를 기술한다 -- 이야기 하나를 창작한다, 읽는다 -- 연극을 상연한다 -- 가요를 부른다 -- 수수께끼를 푼다 -- 농담을 한다. 이야기한다 -- 응용된 계산 문제를 푼다 --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 --부탁, 감사 저주, 인사, 기도."
비트겐슈타인이 이해한 철학의 과제는 따라서 언어가 사유에 설치해 놓은 덫을 사유가 피해 가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다. 전통을 통해 전승되어 내려 온 철학적 문제의 얽히고 설킨 무지막지한 혼란으로부터 구제되는 길은 언어 놀이의 해명과 묘사에 달려 있다.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단지 공중 누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언어가 서 있는 언어의 바탕을 파헤친다." 따라서 철학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결국을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 에 대한 논의가 아니다. 철학은 '실제에 있어 순전히 기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낱말들의 사용을 기술하는 것이다. "모든 설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술이 들어서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전수된 전통적 철학은 막을 내린다. 비트겐슈타인이 끌어올린 것은 철학의 몰락인 셈이다.
빌헬름 바이쉐델(Wihelm Weischedel)/19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마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내다 1975년 사망했다. 저서로는 '철학자들의 신', '회의론적 윤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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