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와 오자
by 처사21손자와 오자
사 마 천
손자(孫子), 즉 손무(孫武)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병법에 뛰어났으므로 오왕(吳王) 합려(闔廬)의 초빙을 받았다. 그때 합려가 말했다.
"그대가 지은 열세 편의 병서는 다 읽어보았소. 어디 한번 실제로 군대를 훈련시켜 보일 수 있겠소?"
"좋습니다."
"여자라도 상관이 없을지?"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합려는 궁중의 미녀 180명을 불러내었다. 손자는 그들은 두 편으로 나누고 오왕이 아끼는 여인 두 사람을 각각 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전원에게 창을 들린 다음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자기의 가슴과 좌우의 손과 등을 알고 있는가?"
"예 !"
"'앞쪽'이라고 명령을 하면 가슴을, '왼쪽'이라고 명령을 하면 왼손을, '오른쪽'이라고 명령하면 오른손을, '뒤로'라고 명령하면 등을 보아야 한다."
"예 !"
이렇게 구령을 결정한 다음, 손자는 부월(掝洸)을 갖추어 두고, 몇 번씩 되풀이해가며 군 령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막상 북을 치며
"오른쪽 !"
하고 호령하자 여자들은 웃어대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손자는
"군령이 분명하지가 못하고, 명령 전달이 충분치 못한 것은 장수된 사람의 죄다."
하고, 다시 세 번 군령을 들려주고 다섯 번 설명을 한 다음, 큰북을 울리고
"오른쪽 !"
하고 호령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여전히 웃어대기만 하였다. 그러자 손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령이 분명치 못하고, 전달이 불충분한 것은 장수의 죄이지만, 이미 군령이 분명히 전달되어 있는데도 병졸들이 규정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곧 대장 된 자의 죄다."
그러고는 군령대로 두 대장을 참수하려 했다. 위에서 관병 하던 오왕은 자신이 아끼는 여인 두 사람이 손자의 손에 참수되려는 것에 놀란 나머지 황급히 전령을 보내어 제지하였다.
"과인은 이미 장군의 용병이 뛰어난 것인 줄 알았소. 과인에게 그 두 여자가 없다면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니 부디 용서해 주기를 바라오."
그러나 손자는
"신은 이미 임금의 명을 받아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령 을 받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고, 마침내는 두 대장의 목을 베고 임금이 그 다음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뽑아 새로 대장으로 세웠다. 그러고는 다시 북을 울리고 호령을 내렸다. 그러자 여자들은 왼쪽이라고 하면 왼쪽으로, 오른쪽이라고 하면 오른쪽으로, 앞으로 하면 앞으로, 뒤로하면 뒤로, 꿇어앉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모두 구령대로 따랐다. 웃기는커녕 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손자는 비로소 오왕에게 전령을 보내어
"부대는 이미 갖춰져 있습니다. 내려 오셔서 시험해 보십시오. 왕의 명령만 계시면, 군사 들은 물과 불 속이라도 즐겨 뛰어들 것입니다."
하고 보고했다. 그러나 왕은 이렇게 말했다.
"장군은 훈련을 끝내고 숙사에서 쉬도록 하오. 과인은 내려가 보기를 원치 않소."
이때 손자는 이렇게 탄식했다.
"왕은 다만 병법에 대한 의논만을 좋아할 뿐, 병법을 실제로 사용하지는 못하겠군."
그리하여, 합려는 손자가 용병에 뛰어난 것을 인정했고, 마침내는 그를 장군으로 등용하였다. 뒷날 오 나라가 서쪽으로 초 나라를 무찔러 서울인 영(櫾)을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나라를 위협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 알리게 된 데는 손자의 힘이 컸다.
손무가 죽고 백 년쯤 지나 손빈(孫撊)이 나타났다. 손빈은 아(阿)·견(甄) 둘 다 산동성(山東省)에 있다. - 두 고을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손무의 후손으로서 일찍이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은 공부를 마친 다음 재빨리 위(魏)나라에서 벼슬하여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손빈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가만히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러들였다. 손빈이 찾아오자 방연은 그의 재능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더욱 실감한 나머지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그 벌로 두 다리를 꿇고, 이마에 묵(墨, 글자를 새겨 넣는 것)을 넣었다. 그렇게 되면 손빈이 부끄러워서라도 숨어살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 뒤 제나라 사신이 위나라 서울 대염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손빈은 창피를 무릅쓰고서 비밀리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나라 사신은 이내 손빈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몰래 자기의 수레에 숨겨 제나라로 데리고 갔다.
제나라에 간 손빈은 곧 장군 전기(田忌)의 인정을 받아 그의 빈객으로 머물게 되었다. 전기는 때마침 도박에 빠져, 공자들과 기사(騎射)를 즐기고 있었다. 어느 날 손빈은 그 내기를 구경하다가 기사의 허점을 간파하게 되었다.
당시의 기사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한 조로 해서 3조가 각 한 번씩 차례로 세 번 경기를 벌이게 되어 있었다. 손빈은 그 3조의 말을 각기 비교한 끝에 속력 역시 3등급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손빈은 전기를 부추겼다.
"내기를 다시 해보시오. 내가 장군을 이기게 해드리리다."
전기는 손빈을 믿고 왕과 공자들에게 다시 천 금을 건 내기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다시 경기를 시작하게 되자, 손빈은 그에 앞서 전기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방을 일러 주었다.
"장군은 제일 느린 하등 수레를 상대방의 가장 빠른 상등 수레와 달리게 하고, 장군의 상등 수레는 상대방의 중등 수레, 장군의 중등 수레는 상대방의 하등 수레와 달리게 하십시오."
경기가 끝나자 전기는 2승 1패의 전적을 거두었으므로 결국 내기에 이겨 천 금을 얻었다. 이 일로 손빈의 재능을 더욱 신임하게 된 전기는 마침내 위왕(威王)에게 그를 천거했다. 위왕 역시 손빈과 병법에 관한 문답을 가진 뒤로는 스승으로 받들게 되었다.
그 뒤 위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위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려 했으나, 손빈은 스스로 '형여(刑餘)의 몸[전과자]'임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래서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삼되, 손빈은 군사(軍師)로서 치차(輜車,포장 마차)속에 들어앉아 작전 지휘를 하도록 했다. 이윽고 전기가 군대를 발동하려 하자, 손빈이 나아가 계책을 올렸다.
"실이 엉킨 것을 풀려면 잡아당기거나 두들겨서는 안 됩니다. 싸움을 편들려면 덮어놓고 주먹만 휘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노리는 점을 가로막을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무방비 상태에 있는 허점을 칠 때 싸움은 자연 풀리게 됩니다. 지금 위나라에 남아 있는 자는 다만 노약자에 불과합니다. 이제 장군께선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수도 대염(大染)을 신속히 점령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적의 허점입니다. 따라서, 위나라 군사는 자기네의 도성을 구하기 위해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이야말로 한 번 움직여 조나라의 포위를 풀고 동시에 위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전기가 손빈의 계책을 따르자, 과연 위나라 군사는 조나라 수도한단(邯鄲)을 떠나 급히 귀국했다.
제나라 군대는 이를 주릉(柱陵)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에서 여유 있게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15년 뒤, 위나라는 조나라와 더불어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는 위급한 사정을 제나라에 말해 왔다. 제나라는 전기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구원하게 했다. 전기는 또다시 곧장 대염을 향해 쳐들어갔다. 위나라 대장 방연은 급보를 받자 즉시 한나라를 버려 두고 귀로에 올랐으나 이미 국경을 넘어선 제나라 군사는 계속 진격해 왔다. 이때 손빈은 전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들 삼진(三晋) - 한(韓), 위(魏), 조(趙) - 의 군사는 원래가 사납고 용맹스러울 뿐 아니라 제나라를 경멸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제나라 군사를 가리켜 겁쟁이라고 부르는 실 정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주어진 형세를 잘 이용하여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 나갑니다. 병볍에는 '승리에 취해 백 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그 상장군을 꺾이게 되고, 오십 리를 급히 달리는 군사는 반밖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적은 우리를 겁쟁이로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들에게 더욱 약한 것을 보여 주게 되면, 적은 우리 꾀에 빠져 급히 추격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군대가 위나라 땅을 넘어선 오늘부터 숙영지를 움직일 때마다 아궁이 수를 줄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즉 오늘은 10만 개, 내일은 5만 개, 모레는 3만 개, 이렇게 줄여 나가는 겁니다."
전기는 그대로 실행했다. 한나라에서 되돌아온 방연은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기 사흘째에 이르자, 탄성을 올렸다.
"나는 처음부터 제나라 군사가 겁쟁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생각과 다름없구나. 우리 땅을 침범한 지 사흘만에 벌써 도망병이 반을 훨씬 넘다니."
그리고 곧 보병은 따로 떼어놓은 채, 기병 등 정예 부대만을 이끌고 이틀 길을 하루로 단축시켜 급히 제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손빈이 위나라 군사의 속도를 계산해 본 결과, 저녁 무렵이면 마릉(馬陵)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릉은 길이 좁고 양쪽에는 험한 산이 많아 복병을 두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손빈은 길옆에 있는 큰 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겨 낸 다음 그 흰 부분에다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
고 써 두었다. 그리고 제나라 군사들 가운데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무수한 쇠뇌를 가지고 길 양쪽에 숨어 있도록 한 다음
"날이 저물어 이곳에 불이 밝혀지는 것을 보는 즉시 일제히 쏘도록 하라."
고 명령해 두었다. 방연은 과연 날이 저문 뒤에야 그 나무 밑에 이르게 되었고, 흰 데에 씌어진 글씨를 보기 위해 불을 밝히게 되었다. 방연이 그것을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복병의 수많은 화살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위나라 군사는 갈팡질팡 앞뒤를 분간하지 못했다. 방연은 더 이상 지혜를 써 볼 수도 없이 싸움에 패하게 된 것을 알고는
"기어코 그 녀석[孫撊]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
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쳐 죽었다. 제나라 군사는 승세를 몰아 위나라 군사를 전멸하다시피 하고, 위나라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아 귀국했다. 손빈은 이 승리로 인해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세상에 그의 병법이 전해지게 되었다.
오기(吳起)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용병에 유능했다. 일찍이 증자(曾子) - 공자(孔子)의 제자 증삼(曾參) - 에게 배운 적이 있어 노(魯)나라 임금을 섬긴 일이 있다. 그때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 왔다. 노나라에게는 오기를 대장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그의 아내가 제나라 여자였으므로 혹시나 하는 의심을 품고 주저했다.
그러나 오기는 공명심에 불탄 나머지 자기 아내를 죽여, 자기와 제나라와의 관계를 분명히 밝혔다. 그 결과, 노나라는 오기를 장군에 임명했고, 오기는 제나라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노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오기를 악평할 뿐이었다.
"오기는 시기심이 강하고 잔인하다. 젊었을 때만 해도 벼슬을 구해 천 금이나 되는 가산을 탕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조롱한 마을 사람을 30여 명이나 죽이고 위나라에서 도망쳤었다. 그때 오기는 어머니 앞에서 자기 팔을 물어뜯으며 '대신이나 재상이 되기 전에는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고 맹세하더니, 증자를 모시고 있던 중에 그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맹세를 지켜 귀국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기는 증자에게 '박정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쫓겨나서 노나라에 오게 된 것이다. 노나라에서 병법을 배우고 노나라 임금을 섬긴 뒤로는 제 아내를 죽여가면서까지 임금의 의심을 풀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작은 나라다. 오기로 하여 조그만 싸움에 이겼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제후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의 나라다. 그 위나라에서 도망쳐 온 오기를 계속 중용한다는 것은 곧 위나라와 의 친교를 해치는 것이 된다."
오기에 대한 이러한 악평을 전해들은 노나라 임금 역시 심중에 의혹이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는 오기를 해임하고 말았다.
오기는 찾아갈 곳을 궁리하다가 당시에 현군이라고 칭송 받던 위문후를 택했다. 문후는 중신인 이극에게 오기의 사람됨을 물었다.
"오기는 어떤 사람이오?"
"오기는 재물을 탐내고 여자를 좋아하기는 하나, 용병에 있어서는 사마양저와 겨룰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리하여, 문후는 오기를 장군에 임명했다. 과연 오기는 진나라를 쳐서 다섯 개 성을 함락시켰다.
오기는 장군으로서 군대를 거느릴 때에는 언제나 하급 병졸들과 먹고 입는 것을 똑같이 했고, 누울 때도 자리를 까는 법이 없었으며, 행군할 때도 수레에 타지 않았다. 또한 자기가 먹을 양식은 자기가 가지고 다니는 등, 사졸들과 고락을 같이 나눴다.
언젠가 병졸들 가운데 종기를 않는 사람이 생기자 오기는 그 모름을 입으로 빨아 내었다. 그러자, 그 병졸의 어머니는 그 소문을 듣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누군가가
"당신 아들은 졸병에 지나지 않는데 장군께서 친절하게도 종기를 빨아 주기까지 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우는 거요?" 하고 묻자, 그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지난 해 에도 오기 장군께서 그 애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주었습니다. 그이는 감격한 나머지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장군께서 지금 또 자식의 종기를 빨아 주셨으니, 그 자식도 필경은 어디선가 싸우다가 죽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는 겁니다."
문후는 오기가 용병술에 뛰어날 뿐 아니라 청렴하고 공평하여 유능한 자라면 누구라도 기용해서 사졸의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를 서하태수로 임명하여 진나라와 한나라 군사를 막게 했다.
문후가 죽은 뒤, 오기는 계속해서 문후의 아들 무후를 섬겼다. 무후는 언젠가 배를 서하에 띄우고 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중간 지점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며 오기에게 말했다.
"참으로 아름답구료, 이 산과 물의 험난한 것이야말로 우리 위나라의 보배로구료." 이에 오기가 공손히 대답했다.
"나라가 보배로 삼아야할 것은 임금의 덕일 뿐 지형의 험난한 것은 아니옵니다. 옛날 삼묘씨는 동정호를 왼쪽에 끼고 있고, 팽려호를 오른쪽에 끼고 있었으나, 덕의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우왕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라의 걸왕이 도읍한 곳은, 하수-황하-와제수를 왼쪽에 끼고, 태산과 화산을 오른쪽에 두었으며, 이궐-하남성-이그 남쪽에 있고, 양양-산서성-이 그 북쪽에 있었으나, 정사가 어질지 못한 나머지, 상나라 탕왕에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은나라 주왕은 맹문산을 왼쪽으로 하고, 태행산을 오른쪽으로 하고, 상산이 그 북쪽에 있고, 하수가 그 남쪽을 둘러 있었으나, 주왕이 덕으로써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나라 무왕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문제는 임금의 덕에 있지 지형의 험난에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만일 임금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이 배 안의 사람들도 모두 적으로 변하게 되옵니다. 무후는 "과연 옳은 말이다." 하고, 오기에게 계속 서하 태수를 맡겼다. 이로부터 오기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다.
그 무렵이었다. 위나라에서는 새로 재상의 직을 설치해 전문(혹은 상문)을 임명했다. 오기는 자신이 되리라 기대 했었으므로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전문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다.
"당신과 공로를 비교해 보고 싶은데 어떻소?"
"좋소"
"3군의 장군이 되어 사졸들로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도록 하며, 또 적국이 감히 우리 위나라를 넘볼 수 없게 하는 점에 있어서 당신과 나,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시오?"
"당신을 어찌 미칠 수 있겠소."
"백관을 다스리고, 백성들의 신뢰를 받으며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점에서는 누가 낫겠소?"
"당신을 따를 수 없소."
"이 세 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만 못한데. 지위는 나보다 높으니 무슨 까닭이오?"
"지금은 임금님께서 아직 나이가 어려서 온 나라가 불안에 싸여 있소. 대신들은 아직 왕에게 심복하고 있지 않으며 백성들도 왕을 신뢰하지 못하오. 이런 시기에 있어 우리 중의 어느 쪽이 재상으로 적합하겠소?"
오기는 잠자코 말이 없다가 얼마 뒤에야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맡기겠지요."
전문이 말했다.
"이것이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에 앉게 된 까닭이오." 그제야 오기는 자신이 전문만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게 되었다.
그 뒤 전문이 죽자, 공숙이 재상이 되었다. 공숙은 도한 위나라의 부마였으므로 위세를 떨쳤다. 그는 오기가 거추장스러웠으므로 늘 벼르고 있었다. 때마침 부하 하나가 이렇게 진언해 왔다.
"오기를 내쫓기란 쉽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오기란 사람은 절조가 굳세고 청렴하지만 이름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상공께서 먼저 임금과 말씀하실 기회를 만들어 '오기는 현인입니다. 임금께선 아직 나이 젊으시고, 또 강한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신은 오기가 우리나라에 머물러 있을 생각이 없지나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하십시오. 임금께서는 '어떻게 하면 머무르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상공께선 임금님께 '시험삼아 공주를 시집보내도록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오기가 머물러 있을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고, 머무를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사양할 것이니 이것으로 점쳐 보십시오' 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해 두시고, 오기를 초대하여 함께 댁으로 가신 뒤에, 공주(공숙의 아내)로 하여금 성난 얼굴로 상공을 푸대접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하십시오 오기는 공주가 상공을 푸대접하는 것을 보게 되면, 공주에게 장가들 생각이 없어져 임금의 청을 거절하게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오기는 무후에게 부마되기를 사양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여 그를 신임 하지 않게 되었다. 오기는 좌를 입게 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초 나라로 건너갔다.
초 도왕은 일찍부터 오기가 현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오기를 맞아 곧 초 나라 재상에 임명했다. 오기는 법령을 분명하게 집행하고 필요치 않은 벼슬들을 없애버리며, 또 왕족들 중에서도 이미 멀어진 사람들의 봉록을 폐지시켜, 그 비용을 싸움에 종사하는 군인들에게로 돌렸다. 그는 강병책을 추진해 합종이니 연횡이니 하는 유세객의 논리를 무시해 버렸다. 이리하여, 남쪽으로는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진ㅑ채를 병합, 삼진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진 나라를 쳤다.
한편 오기로 인해 벼슬자리가 떨어진 초 나라 왕족들은, 모두 오기를 미워하며 죽일 기회 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도왕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하고 말았다. 대신들이 반 란을 일으켜 일제히 오기를 공격했다. 오기는 쫓기다가 도왕의 영구를 둔 방으로 가서 시 신 뒤에 가서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오기를 쫓던 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기에게 화살 을 쏘아 붙였다. 오기도 죽었지만 화살은 도왕의 시신까지 꿰뚫었다. 도왕의 장례식이 끝 나고 태자가 임금으로 앉아 영윤-당시의-재상에게 명해서, 오기를 쏘느라고 왕의 시신에 까지 화살을 쏘아 댄 자들을 모조리 잡아죽이도록 했다. 이로 인해 멸족의 화를 입은 집 이 70여 세대나 되었다.
태사공은 말한다.
"세상에서 군사를 논하는 사람은 누구나『손자』13편에 대해 말하고, 오기의 병법도 세상 에 많이 유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것을 생략한 채 다만 그들의 사적과 시책에 대해서만 논했다. 옛말에 '능히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말하는 것은 아니며 능히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능히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손빈은 방연을 치는 데에는 그렇게 밝았지만, 그에 앞서 자신이 형벌을 당하는 화을 방지하지는 못했었다. 오기는 문후에게는 형세가 덕만 못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면서도, 자신이 초 나라에서 행한 것은 각박하고 몰인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몸을 망쳤으니 슬픈 일이 아닌가."
사마천/중국 전한의 역사학자이다. 기원 전 104년에 공손 경과 함께 태초력을 제정, 후세 의 역법의 기초를 이루었다. 친구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한 것을 변호하여 궁형에 처해지매, 아버지의 뜻을 이어 불후의 명작『사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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