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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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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손 보 기

 

사람의 조상

다른 짐승과 달리 지구 위에서 자연에 적응하고 환경을 개척하여 문화를 이루는데 이바지한 주인을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은 오늘날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는 동안 생리가 꾸준히 변화하고 진화하여 왔다. 먼저 네 발로 걷다가 두 손을 써서 연모를 만들게 되면서 두 발로 걷게 되었다. 다른 짐승이 무서운 손톱과 발톱과 송곳니를 가지고 있어서 생리적으로 더 강하지만 사람이 삶을 더 잘 꾸려 나갈 수 있게 된 것도 머리를 쓰는 능력에서 비롯하였다. 사람도 여러 갈래가 있어서 덜 발달하는 갈래는 죽어 없어지고, 환경에 더 잘 적응하고 이겨내는 갈래는 더 번창하게 되었다.

사람은 동물의 분류로는 동물 계, 등뼈 동물 문, 젖먹이 동물 강, 영장 목, 인류초과, 인류 과, 인류 아과, 인류 속, 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으로 나뉘는데, 그 뒤의 슬기슬기 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고비를 거쳤음을 선사 고고학의 연구로 알게 되었다.

사람의 가장 오랜 조상으로부터 지금 살고 있는 사람까지 내려온 줄기를 나무의 줄기에 견주어 그려보면 다음의 그림과 같다.

이 그림에서 보면 사람의 가장 오랜 조상으로 여겨지는 라마 원인은 천사백만 년 전으로 헤아려지는 옛날에 사람과 같은 송곳니를 가지고 있어서, 원숭이처럼 먹이를 잡아뜯는 식의 생활이 아니라 두 손을 써서 연모를 만들어 쓴 것으로 헤아려진다.

이러한, 사람의 먼 조상인 라마 원인은 그 뒤 오백만 년 전쯤에 사람과 남쪽 원인으로 갈라졌을 것으로 여겨지며, 사람은 사람으로 발전하고 남쪽 원인은 그들대로 다른 길을 걸어간 것으로 보여진다. 아프리카의 올드바이 산골짜기에서 나온 남쪽 원인이나 남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나온 남쪽 원인은 이러한 다른 갈래로 갈라진 원인이고, 이디오피아의 오모 강이나 케냐의 루돌프 호숫가에서 나온 삼백만년 전쯤의 사람은 곧바로 서서 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빙하기를 거치면서 더욱더 발전하여 나타난 것이 '자바의 사람'이나 '북경의 사람'이다,

그 다음이 서쪽 유럽을 중심으로 가장 늦은 리쓰 뷔름 간빙기에 나타난 '슬기로운 사람'이다. 머리 부피가 지금 사람과 비슷하게 커졌고 연모 만드는 법도 많이 발달시켰고 사람이 죽으면 꽃을 꺾어 돌려 꽂아 주었고 예술도 조금은 표현할 줄 알았다.

이들은 이란에서 나온 것이 아시아에서는 맨 처음이었으나, 그뒤에 중국에서도 나왔다. 우리 나라의 제천군 점말 용굴에서는 앞팔뼈 하나와 사람의 얼굴을 새긴 뼈 따위가 나와 이 인종이 아시아 동쪽에까지 퍼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인종은 십만 년 전쯤에 나타났다가 삼만 년 전쯤에 오늘날의 사람이 나타나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사람과 관계되는 슬기 사람은 십오만 년 전에서 오만 년 전쯤까지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자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슬기가 자라고, 생리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식으로 서로 작용하여 오늘날의 사람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생리 발전의 과정은 진화와 돌연변이가 아울러 이루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은 머리의 부피나 머리의 신경 단위나 키가 그들의 조상보다 커졌고 사회와 문화를 이루어 서로 협동하는 단위가 크고 수효도 많아져서 지구의 왕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자연을 부수고 더럽히고 자연의 자원을 없애는 위험한 짓까지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지구를 벗어나서 우주의 다른 별에서 살려고 애쓰는 점은 짐승이나 다른 영장류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

사람이 다른 짐승과 구별되는 점을 생리 면에서 따져 볼 때에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는 머리의 부피가 크고 신경 단위의 수효가 뛰어나게 많고 말하는 기관이 아주 복잡하게 발달한 것들을 들 수 있다.

이제 같은 영장류의 머리 부피를 가지고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관계를 볼 수 있다.

긴 팔 원숭이 104.0 입방 센티미터

침팬지 398.5 입방 센티미터

오랑우탕 434.4 입방 센티미터

고릴라 534.6 입방 센티미터

오늘날 사람 1345.0 입방 센티미터

 

여기에 나타난 입방 센티미터의 값은 남녀의 차이를 고르게 넣어서 평균값은 낸 것이다. 사람은 처음 라마 원인 단계에서는 머리의 부피가 사오백 입상 센티미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 사람에서는 두 곱 반이 넘는 크기로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오늘날 사람에 이르기까지 머리 속 부피분만 아니라 신경 단위도 꾸준히 늘어 왔다. 침팬지로부터 오늘날 사람까지 머리 속 부피와 신경 단위를 견주어 보면 아래표와 같은데, 이 표에 따르면 머리의 신경 단위가 몸의 신경 단위보다 더욱더 늘어났다. 머리의 신경 단위는 바로 머리를 쓰는 힘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힘은 빙하기와 같은 기후를 이겨내고 살 수 있는 슬기를 낳게 하였다.

돌이나 뼈, 나무, 뿔로 연모를 만들어 사냥하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짓고 동굴을 찾고 움막을 짓고 또 불을 피워서 살 수 있게 되고 말을 만들어서 서로 뜻을 통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발전은 생리의 진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가능하였다. 이같은 생리의 진화와 문화의 발달 관계를 좀더 자세히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이 서로 양쪽 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속머리 (뇌)의 크기가 는다.

몸속 기관의 복잡성이 더해진다.

기능의 변화가 일어난다.

행동의 규범에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사람의 생리의 진화는 행동의 규범에 변화를 가져 오고, 이러한 자극은 바로 연모 만들기와 연모 쓰기와 의사 표시의 수단을 늘이고 나아가서 사회를 구성하게 하는데, 이때는 혼인의 방식, 집안에서의 규범, 동족끼리의 경제 협력, 경제에서 남녀가 저마다 맡는 구실 들이 정해지게 된다.

생리의 진화가 행동의 규범에 변화를 가져온 일은 이 밖에도 또 있다. 오늘날 여러 인종 사이에 삼천이 넘는 다른 말이 있는데 이 같은 복잡한 말이 발달된 것은 사람이 소리를 낼 수 있는 목청 기관이 발달된 다음부터라고 볼 수 있다. 네안데르탈 슬기 사람만 하여도 목청이 사람의 셋째 목등뼈(받침 목등뼈, 돌림 목등뼈 다음)에 붙어 있어서 아, 오, 우, 같은 큰 홀소리를 낼 수 없었고, 오늘날 세 살 아래의 어린아이가 말하는 능력과 비슷하였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그러나 요사이 사람이 태어난 뒤에는 생리적으로 목청이 목등뼈의 넷째와 다섯째 사이에 걸리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의사를 통할 수 있는 말이 생기고 종족 또는 민족마다 서로 다른 말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리의 발달은 바로 모든 문화에 변화를 일으키고 발전을 가져왔다. 언어가 없는 영장류에게는 본능 말고 서로 보고 따라서 하는 흉내 내기로 이루어지는 행동이 있지만, 이러한 흉내는 연모를 쓰게까지는 하여도 연모를 만들게 하지는 못한다. 연모 만들기는 앞날을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데, 이런 능력은 머리의 신경 단위가 사십억이 넘는 원인 단계에서부터 뚜렷하게 나타난다. 사람 머리의 신경 단위가 늘어난 것이 중요한 생리의 발달인데, 그로 말미암아 내일을 위하여 준비하는 동물이 될 수 있었으며, 서로가 도와서 삶을 이루어 가고 그 속에서 윤리를 찾아서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동물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의 문화는 자연에 적응하고 연모를 만들고 좀더 나은 앞날의 삶을 마련하려는 데서 일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문화는 사람이 글자를 발명하여 문명을 이루기 전 까지 적어도 삼백만 년 동안 식생활을 해결하는 데에 시간의 거의 전부를 썼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기들의 식량을 가꾸어 내게 되고서야 여유를 갖게 되어, 글자를 발명하고 문명을 이루었다.

문명 이전의 사람

문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사람은 사냥과 고기잡이와 끌어모으기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무에서 열매를 따고 풀뿌리를 캐고 잎을 모으고 사냥을 하는 삶의 방식이 주가 되었다. 이러한 삶의 시기를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로 나눈다. 구석기 시대는 삼백만 년 전부터 만이천 년 전까지 이어졌고, 중석기 시대는 만이천 년부터 팔천 년 전까지 걸치는 시기인데 세계 여러 곳에서 조금씩 차이는 있다.

구석기 시대는 사람의 역사의 대부분인 99%를 차지하는데, 이 구석기 시대를 사람의 생리와 문화의 발전으로 보아 또 전기와 중기와 후기로 나눈다. 전기 구석기 시대는 삼백만 년 전부터 십오만 년 전까지로서 남쪽 원인, 곧선 사람들이 살던 시기이다. 중기 구석기 시대는 십오만 년 전부터 사만 년 전까지 네안데르탈 슬기 사람이 살던 시기이고, 후기 구석기 시대는 사만 년 전부터 만이천 년 전까지 오늘날 사람이 맨 끝의 빙하기인 뷔름 빙하기가 끝날 때까지 살던 시기를 말한다.

중석기 시대는 빙하기가 물러나고 점차로 따뜻한 기후가 다가오는 시기로서, 사람이 아직 질그릇을 많이 만들어 쓰지 낳았던 때를 말한다. 이때는 또 사람의 삶에 새로운 씨앗을 뿌려서 가꾸어 식량을 거두어 내는 데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쇠를 녹여 연모를 만들고 이 쇠연모로 생산을 늘리고 권위를 높여서 사람의 사회를 크게 겨레로 묶고 나라로 이끌어 넣게 된 것이 바로 문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전기 구석기 시대의 곧선 사람

전기 구석기 시대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원인은 처음에 더운 열대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생각된다. 그들의 뼈는 거의 더운 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들은 슬기가 발달하여 자갈돌로 자갈돌을 쳐서 떼어낸 외날찍개를 주로 만들어 썼다. 격지, 곧 몸돌에서 떼어 낸 조각돌도 더러 쓰기는 하였지만, 이때의 격지는 날카로운 날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외날찍개에서 날을 더 잘 내게 하려고 머리를 쓰면서 머리 신경 단위가 늘고 하여 쌍날찍개를 만들게 되었다. 쌍날찍개에서 더 발달한 연모를 만들어 낸 것이 주먹도끼인데 이 주먹도끼는 처음에 육십만 년 전쯤에는 날이 틀어져서 마치 '갈 지자' 모양으로 나타나 엇갈림떼기 수법이 고르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석장리에서 나오는 석기 중에 외날찍개 같은 것이 오십만 년 전쯤에서부터 시작하여 삼십만 년 전쯤까지에 걸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같은 석기의 수법과 모양은 여러 시기의 사람의 슬기와 견주어 볼 때에 알맞게 발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석기는 격지를 쓰는 것이 많아졌는데 주구점의 곧선 원인은 격지를 많이 썼고 크락톤의 원인들도 격지를 많이 썼으며 찍개도 만들어 쓴 것으로 알려졌다. 격지가 많이 쓰이게 되면서 격지의 크기도 커졌다. 큰 격지를 얻으려면 돌망치로 쳐서 떼어 내는 것보다 뿔이나 뼈로 치면 되었다. 그렇게 하면 자루가 달린 망치를 쓰는 이치와 같아 길고 얇은 격지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같은 뼈망치와 뿔망치는 원통망치로 주먹도끼를 만들 때도 날을 고르게 뗄 수 있게 하여 주는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고른 날을 가지는 주먹도끼가 나오게 되는데, 이것은 사십만 년 전쯤에 퍼진 수법이다. 이러한 발달은 지루하고 느린 것이었다. 몸돌 연모(격지를 떼어서 남는 것이 몸돌로서 찍개, 주먹도끼 따위를 말한다)는 여러번, 많은 때는 백 번쯤 떼어 내야 하나의 석기가 되어 나오는데. 격지는 크고 날이 잘선 것을 쓰게 되어 많은 석기를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격지 석기가 많이 만들어지는 것은 원통망치 떼기가 발달한 뒤의 일이다.

이러한 발달이 있기까지 그 동안에 서너 차례의 빙하기 곧 발라브랑키안(도나우). 균쓰, 민델, 리쓰 같은 빙하기가 지구에 찾아 왔다. 그때마다 바다가 낮아졌고 기후도 추워져서 바늘잎나무가 주로 자라고 추운 기후에 사는 짐승이 많아졌다.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찾아 오면 얼음산이 녹아서 홍수가 지고 바다도 높아져서 육지였던 곳이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넓은잎나무가 자라고 지구의 따뜻한 기후 속에 잘 사는 짐승이 나타나는 이런 간빙기가 세 차례나 지나갔다. 이러한 기후와 자연의 변동 속에서 사람은 꾸준히 발달하여, 동굴을 찾기도 하고 불을 피우기도 하고 옷을 지어 입기도 하고 움집을 짓기도 하였다. 중국 주구점의 곧선 사람은 칠십만 년 전에서 오십만 년 전쯤 나뭇가지를 꺾어서 집을 짓고 불을 피우고 살았다. 이같이 불을 피우고 같이 모여 살면서 사람의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들 곧선 사람들이 살던 흔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도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중기 구석기 시대의 슬기 사람

중기 구석기 시대는 곧선 사람과 네안데르탈 슬기 사람이 지구의 무대에서 서로 자리를 바꾸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사람은 주먹도끼, 찍개라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편인 연모를 덜 만들고, 돌을 잘 다듬어서 넓고도 얇은 격지를 만들어 긁기 좋고 깎기 좋고 자르기 좋은 연모를 만들었다. 이들은 미리 꾸며진 기술을 가지고 격지를 떼어 낼 자리를 편편하게 하고 돌을 앞, 뒤, 양옆으로 편하게 돌려 가며 떼어 내서 원하는 모양의 날을 가진 격지 석기를 만들어 냈다. 이 격지 석기를 만들 때에는 먼저 떼기를 베풀고, 다시 떼어 낸 격지에 잔손질을 세밀하게 더해서 능률이 오르는 석기를 만들었다. 나아가서 격지의 날 쪽을 띄엄띄엄 떼어내서 톱니날을 만들어 나무나 뿔이나 뼈를 자를 수 있는 오늘날의 톱의 원리를 발명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짐승을 사냥하는 데에 쓰려고 돌을 공처럼 둥글게 다듬어 크고 작은 둥근돌을 만들고, 이를 동물의 힘줄을 말려서 만든 끈으로 묶어서 두세 개를 같이 휘둘러 사냥감에 던져서 사냥하는 사냥돌도 만들어 냈다. 오늘날의 유도탄의 원리를 터득한 것이다.

이 같은 발달은 사람의 머리 부피가 오늘날의 슬기슬기 사람과 비슷해졌고 머리의 신경 단위가 비슷해진 것에서도 볼 수 있는데, 시기로는 지금부터 십오만 년 전쯤에서 사만 년 전쯤까지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오늘날의 사람과 비슷한 슬기를 가져서 말도 잘 하였다. 그러나 목청의 자리가 덜 발달하여서 오늘날의 사람보다 말의 속도가 십분의 일쯤으로 느렸다고 생각된다. 또 그들의 예술 의욕도 싹트기 시작하여 사람의 얼굴을 뼈에 새기거나 짐승을 뜻하는 것을 새겨 놓은 것이 나온다. 제천군 점말 용굴의 사람얼굴 모습, 곰 모습, 토끼 모습, 청원군 두루봉의 사람 모습, 표범 모습 따위는 바로 이러한 슬기 사람들의 예술 활동이고 짐승의 개념을 그림으로 표시한 보기이다. 그것들은 이미 있는 자료의 전체 모양에다 간단한 수법으로 새기고 뚫고 쪼아 냄으로써 만들고 싶은 형태를 만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람의 얼굴 모습은 프랑스의 퐁떼슈바드의 중기 구석기 유적에서도 나온 것이 있다. 이때의 사람들인 네안데르탈 슬기 사람은 지금 까지 주로 유럽에서 나타났지만, 이란, 중국, 한국의 점말 용굴에서도 나왔다. 그들이 살던 흔적을 보면[지도 2]와 같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슬기슬기 사람

후기 구석기 시대의 주인은 슬기슬기 사람으로 바로 오늘날 우리의 조상이 된다. 전에는 이들이 네안데르탈 슬기 사람에서 나왔다고 이야기되었는데, 요사이는 그들을 다른 가지로 뻗어간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사람은 먼저 머리 모양에서 이마 위의 눈두덩이 튀어나온 것이 들어갔고 머리 부피와 신경 단위가 더 늘어났으며 몸매도 더 곧바른 모습으로 되었다.

후기 구석기 사람은 연모 만들기에서 네안데르탈 슬기 사람이 이루어 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직접떼기가 아닌 간접떼기 수법을 발명하였다. 이 간접떼기란 돌을 다듬어 떼어 내서 평평한 면을 이루도록 한 다음에 뿔이나 뼈를 끌처럼 대고 위에서 그 뼈끌을 망치로 쳐서 떼어 내는 수법이다. 이 수법은 돌날떼기 수법이라고 하는데, 이 떼기에서 만들어지는 돌날 격지는 그 날이 면도날같이 얇고 날카롭다. 이 돌날떼기는 흑요석이나 부싯돌같이 유리질(규사)이 70%가 넘는 돌로 입자가 고운 것이어야 하지만, 이러한 기술을 터득한 것은 석기를 만드는 수법에서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이러한 돌날은 물고기의 배를 가르거나 가죽을 자르는데 능률이 뛰어났고, 또 이 돌날의 한쪽을 내리쳐서 만든 새기개는 뼈나 뿔을 깎아 내고 후벼 내고 새겨 내는 데에 더없이 훌륭하였다.

후기 구석기 시대는 가장 마지막 빙하기인 뷔름 빙하기의 제 2단계에서 제 3단계로 넘어가는 사이의 간빙기 때쯤에 시작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사람은 지구의 여러 곳에 넓게 퍼졌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자연에 적응하면서 인종의 차이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따하서 세계의 인종은 백인, 흑인, 황인, 홍인 따위로 나뉘고 아이누, 에스키모, 호주인 들로도 갈라져 나타났다. 이들 인종의 차이는 서로 유전이 다른 계통으로 나뉘는 점도 있고, 환경이나 문화에 따라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이는 점도 있다.

유럽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를 석기의 모양, 수법, 그림이나 조각품의 특징으로 나누는데 다음과 같다.

 

1. 삼만칠천 년에서 삼만이천 년 전쯤까지는 돌날의 한쪽을 잔손질로 무디게 하고 한쪽날을 쓰는 돌날 자르개가 흔히 만들어졌다. 벽화 따위의 그림은 별로 나타나지 않은 시기이다(샤똘 뻬로니앙 문화).

2. 삼만이천 년 전부터 이만육천 년 전쯤까지에는 부채꼴 밀개, 콧날등 밀개 따위가 많이 만이 들어지고, 잔손질은 깊고 엇먹는 수법을 썼다. 그림으로는 짐승의 머리만을 그리는 방식이 많은 편이다(오리나시앙 문화).

3. 이만오천 년 전부터 이만 년 전쯤까지에는 날카로운 찌르개와 외쪽 슴베를 만든 화살촉이나 창끝을 많이 만들었다. 그림은 제법 균형 있게 그렸으며, 짐승도 등과 배 쪽을 둥근 곡선으로 그리고 있어 실감을 주지만 발이나 손 같은 세밀한 부분은 잘 처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그라벳 문화).

4. 이만 년 전쯤부터 만오천 년 전쯤까지에는 찌르개를 많이 만든 편인데, 돌날의 양쪽날 쪽에서 앞뒤면에 걸쳐 눌러떼기의 수법으로 잔손질을 베풀어 평행된 자국이 나타나는 아름다운 찌르개를 즐겨 만들어 냈다. 이 시기의 그림이나 조각은 뚜렷하게 뛰어난 솜씨와 수법을 보여 준다. 짐승의 네 발이나 사람의 발은 작아진 느낌을 주는 편이다(쏠뤼뜨레앙 막다레니앙 초기 문화).

5. 만오천 년 전쯤부터 만사천 년 전쯤까지에는 가늘고 작은 돌날로 찌르개, 송곳, 톱니날 같은 것을 많이 만들었다. 그림도 짐승은 털까지 그리는 세밀한 솜씨에 실감을 뚜렷이 주는 제 모양의 그림을 그렸고, 여자의 모양은 엉덩이가 큰 여자를 그리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막다레니앙 중기문화).

6. 만삼천 년 전부터 만천 년 전쯤까지에는 뼈 작살이 만들어지고 부리 모양의 새기개가 많이 만들어졌다. 그림은 짐승을 그릴 때에 덜 살쪄 보이게 그리게 되었으나 솜씨가 떨어져 보이는데, 이때는 후빙기에 접어들어 이러한 짐승이 줄어들고 없어진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막다레니앙 후기 문화).

 

위와 같은 후기 구석기 문화의 특징은 유럽을 중심으로 찾을 수가 있으나, 시베리아, 중국, 한국, 일본, 미국, 호주 같은 곳에서도 그 특징의 일부가 발견되고 있다. 한국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사람의 자취로서 석기가 발견되는 곳은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와 부포리, 한강가, 예성강가, 공주 석장리, 금강가, 태화강가, 낙동강가 들이며, 울주군 천전리의 선바위에 새긴 큰뿔사슴과 기다란 짐승의 모습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조각으로 여겨진다. 한편, 석장리 후기 구석기 시대 집자리에서는 돌에 새긴 짐승과 사람의 머리털이 여러 개 나왔는데, 이 머리털은 황인종(몽고 인종)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발견으로 후기 구석기 시대의 인종과 현재의 한국인은 인종 면에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람은 몽고 이종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차이는 있지만 누런 살갗, 속쌍꺼풀의 실눈, 두드러진 광대뼈에서 그런 특징을 찾아볼 수가 있다. 누런 살갗은 살갗으로 붉은 피가 덜 비쳐서 누런 인상을 주는 것이고, 쌍꺼풀은 눈동자를 덮는 속꺼풀이 눈 구멍뼈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 그것이 눈의 양쪽으로 몰려서 눈이 실눈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체질의 특징은 추위에 견디고 살갗이 어는 일이 없도록 적응하게 된 것으로 풀이되고, 코가 작고 낮은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보호 작용은 추운 데에 사는 사람들의 추위에 대한 적응으로 볼 수 있다. 코, 눈, 광대뼈 사이의 빈 칸은 공기가 통하는 길이 되는데, 낮은 코는 춥고 메마른 공기 속에서 이를 감싸 주기위한 적응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을 따져 볼 때에 한국 사람은 그 조상들이 멀리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근처 같은 곳에서 오래 살다가 옮겨온 것으로 볼 수 있고, 또 북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도 이러한 추운 지방에서 살다가 옮겨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북쪽 추운 지방에 살던 슬기슬기 사람 중에서 몽고 인종인 황인종이 세계 인구의 많은 수효를 차지하게 된 것은 추위 속에서 삶을 개척하고 슬기를 기르고 더 나아가서 문화를 창조하게 하는 뛰어난 머리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의 속머리 고른 무게는 큰 편으로, 남자가 1,413.7 그램이고 여자는 1,268.4그램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중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는 만이천 년 전부터 팔천 년 전쯤까지 사이에 일어난 문화이다. 이 문화의 유적은 그다지 많이 찾아지지 않았는데,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흔적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저절로 나는 곡물을 잡초를 없애서 잘 자라게 하여 거두기도 하고, 잡은 초식 동물을 기르려고 한 흔적도 보인다. 이 시기는 특히 활을 발명하여 사냥 기술을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빙하가 물러가고 따뜻해져서 숲이 자라고 큰 짐승도 사라지고 나니까 앞서 사냥하던 기술로는 사냥이 어렵게 되었다. 숲 사이를 빨리 달리기도, 여러 사람이 몰이를 하기도 어려워졌다. 여기서 활을 발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작살을 많이 :쓰게 되었다. 조개를 모으고 굴을 따고 하는 데에는 그릇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바구니 같은 것을 짜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고기를 잡는 그물도 만들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같이 중석기 문화에서는 들에서의 사냥보다도 바다에서의 고기잡이와 조개 모으기가 더 많이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이러한 자취는 바닷가에 많았는데, 바다의 높이가 그때보다 지금은 더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살던 자리가 많이 바다 속으로 묻혔을 가능 성이 짙다. 이리하여 중석기 문화는 덜 밝혀졌지만, 한국에서 공주 석장리, 통영군 상노대도 같은 곳에서 점차로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집자리에서는 길이가 삼 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석기가 주로 발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문명의 시작

신석기 문화는 우선 농사를 짓게 되는 것이 큰 혁명으로, 그 전까지는 사냥, 고기잡이, 모으기 같은 것으로 살아 왔던 사람들이 숲에 불을 지르고 그 땅 위에 씨앗을 뿌려서 곡식을 심어 먹게 되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나무를 자르는 데에 편한 돌도끼를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구석기 수법에다 다시 갈아서 날을 곱게 만드는 수법을 발명해야 했다. 떼기 좋은 돌을 골라서 켜를 이루는 켜바위나 청석을 많이 썼지만 차돌이나 쑥돌을 떼어서 갈아 쓴 돌도끼도 나온다. 돌을 가는 데는 물을 끼얹어 가며 하는 것이 좋으니 물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고, 곡식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다. 중석기 시대의 바구니를 가지고는 어렵게 되었다. 여기서 흙을 빚어 구어서 질그릇을 만들게 되었다. 질그릇은 바구니의 속이나 겉에 흙을 발라서 잘 두들기고 눌러서 구울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찰흙을 빚어서 흙 때를 흰떡처럼 길게 만들어 새끼를 서리듯이 '서리기'방법으로 그릇 모양을 만든 다음에 그 이음새를 두들기고 다져서 만들 수도 있었고 흙띠를 둥근 또아리처럼 만들어서 쌓아 가는 '쌓기' 방법을 써서 그릇모양을 이룬 다음에 이음새를 두들기고 눌러서 만드는 수도 있었다. 이러한 수법으로 만든 것이 신석기 문화의 중요한 연모가 되었다. 움집, 귀틀집 따위를 짓고 살게 된 이 시기의 사람은 땅을 파고 곡식을 심고 거두는 데에 사람의 노동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중석기 문화 단계까지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식량을 갖추기가 어려웠는데, 신석기 시대에 농업으로 식량 생산을 하면서부터 많은 인구가 모요 살 수 있게 되었고, 넓은 숲을 자르고 말려서 불사르고 씨앗을 심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서울의 강남구 암사동에 많은 집자리가 이어서 나온 것으로 보아 고기잡이와 모으기만으로 삶을 이어 갔다기보다는 생산의 단계로 들어섰다고 보겠다. 지탑리의 기장 또는 수수로 보인다는 탄화된 곡식은 농경이 있었음을 말하여 준다.

신석기 문화의 자취는 우리 나라의 많은 곳에 있고 조개더미로도 나타나고 있다. 이같이 하여 신석기 문화는 지구 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숲을 밭으로 만들어 갔고 화전을 일구어 먹는 방식으로 농업 생산이라는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인구가 많이 모여 살게 되자 문자가 생겨났는데, 그 문자는 문명을 일으키는 터전을 만들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은 문명 사회를 이루면서 쇠를 녹이는 새로운 발명을 하였다. 그것이 청동기 문화이다.

이처럼 사람은 라마 원인, 곧선 사람, 슬기 사람, 슬기슬기 사람으로 진화하면서, 늘 문화를 이루고 새로운 기술을 낳고 새로운 사람의 사회를 이루고 새로운 말과 뜻의 전달 방법을 꾸며 냈고 과학을 일으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람도 지구 위의 자연 문제, 삶의 문제, 사회문제, 민족 문제 같은 어려운 문제를 사람의 조상이 늘 풀어 왔듯이 풀기 마련이다.


손보기/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 현재 단국대초빙교수 및 한국민족학 연구소장이며 저서에는 '한국, 만주의 구석기 유적'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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