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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시장 풍경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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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시장 풍경

정승모

 

사람과 사람,공간과 공간을 한데 묶는 꿈

 

전통적인 우리 시장의 모습은 농촌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정기 시장에서 찾을 수 있다. 정기시장은 지역 사회를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으로 한데묶는다.여기서'공간적'이라는 말은 지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거리와 인구의 수까지를 포함한다.시간적으로는 개시일(開示日), 즉 장날이 지정되어 있으므로 능률적으로 판매자와 구매자를 한 장소로 모은다.

전통 사회의 시장은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개개의 촌락들은 이와 같은 원리를 통해 서로 연결시켜 전체 사회와 닿게 하는 역활을 해 왔다.또한 시장은 그 시대 그 지역 주민의 생활 실태를 반영한다.그들이 평소에 무엇을 먹고 입는지,생활속에서 어떠한 물건들을 사용하는지는 시장에 가보면 알수있다. 농민들은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도라도 구경삼아 시장에 나와 본다. 이것이 농촌 시장의 특징이다. 그래서 '남이 장에 간다고 하니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라는 속담도 있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농촌의 마을도 장날이 되면 활기를 띤다. 장터에서 이르는길은 손이나 어賁,등 머리 위에 곡식 자루,닭,계란,채소 등을 지니고 나오는 농민들로 북적거린다. 장에는 못 보던 새로운 물건이 있는가 하면,자주 못 만나는 친척을 만나 주막에 마주 앉아 막걸리 잔을 주고 받을 수도 있는 곳이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도시의 유행도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귀와 입을 통해 시골 구석까지 퍼져나간다.또한 시장은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고갈 수 있는 곳이며 젊은 남녀들에게는 서로가 눈을 맞추어 눈을 맞추어 보는 사교의 장이다.또 아이들은 이곳에 와야 엿이되든 사탕이 되었든 사달라고 할수 있으므로 부모를 졸라 이곳으로 온다. 먹거리에 대한 기대는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장터 국수,장터 국밥,지금은 도시에 연쇄 음식점상호로도 쓰이는 이것들은 말만 들어도 매일 똑같은 밥과 반찬에 식상한 입맛을 새롭게 해준다.

시장의 왁자질껄함,이것은 장터 국수가 입맛에 새로운 것처럼 지루할 정도의 조용함에 익숙해 있던 농부의 귀를 흔들어 놓은 청량제이다.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방감도 맛볼수가 있다.시장은 소음이 갖는 상징성이 한껏 드러내는 무대인 것이다.

장터에서 들을 수 있는 능청맞은 익살과 노랫가락,깡깡이 소리는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서민의 소박한 오럭이자 무대 예술이다.이들에 의해 장터는 어느덧 연희의 공간으로 바뀐다.이를 눈치 챈 상인들은 고객들을 더 많이 모을 속셈으로 아예 굿판을 벌인다.시장 개업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난장,백중날 열리는 백중장 등은 장터가 민중의 놀이 마당임을 실감케하는 시장의 큰 행사들이다.

자루 속의 감자처럼 조직되지 않은 민중에게 시장은 자연스러운 집회처가 된다.민란의 불길이 시장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한 것도,일제의 총칼에 맞서 만세를 불렀던 것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도 시장이 갖는 이러한 특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시장이 주는 해방감이 있고 사람들도 많이 모여 있으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불만을 행동으로 옮길수 있었고 독립을 외칠수 있는 용기가 솟았던 것이다.

시장에서는 경제적 교환이 행해졌음은 물론 이와 같이 사회적 교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문화적 전통이 이어져 나갔다. 적어도 '시골장에서는 파는 사람이 곧 사는 사람이고 사는 사람이 곧 파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통용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산업화된 현대사회의 농촌시장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없다. 왜냐 하면,거의 모 든 부분에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농민은 원래 반상인(半商人)이었다. 빈손으로 시장에 나가는 농민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과거에는 그랬다.그러나 모든 것이 상품화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농민이 시장에 들고 갈 만한 품목은 자꾸 없어져 간다.아직 기계로는 만들 수 없는 채소 등 농산물이 있어 시장에 내다 팔기는 하나 과거에 비하면 저주 있는 일은 아니다.농민의 수공품 생산은 이미 도시의 공산품에 밀려 끊어진 지가 뗩다.농촌 시장의 도처에 도시 자본이 침투해 있다.이제 농촌 시장도 농민을 세계 자본주의 체계로 편입시키는 통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 시장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가 볼 만한곳은 여전히 농촌시장,즉 시골장뿐이다.시공장에서는 장날마다 꼭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주로 순회 상인들로서 각자 자기 자리가 있어서 장이 설때마다 그 자리를 지킨다. 시장에는 이와 같은 행상인 말고도 이들을 따라 함께 이동하는 장수들이 있다. 신발을 수선 하는 신기료 장수,냄비,솥,쟁기 같은 각종 생필뿐이나 농기구를 고쳐 주는 수선공,이발사,점쟁이 등이 그들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풍각쟁이,악당,극당서커스단들도 순회 상인들을 따라 공연장을 옮겼다.

시골장에 가면 장날은 농민들의 날인 것이다. 농민들은 대개 20~30리 정도의 거리안에 사는 주민들이다. 이들은 물건을 구입할 헌금은 마련하기위해 자신들이 직접 생산한 상품들을 조금씩 들고 시장에 나오기도 하고,제사 지낼 때 필요한 제수를 장만하는 등 순전히 물건 구입을 목적으로 시장에 오기도 한다.시장에 나온 거의 모든 농민들은 장날만은 아마추어 상인이 된다. 또 단순히 장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고,시장가까이 있는 읍사무소 조합에 들러 일을 볼 겸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시골장은 해가 뜰 때 시작되어 해가 질 때 끝이 난다. 따라서 계절로 보면 겨울보다 여름이 개장 시간이 길다.또한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서 대목장일 때가 보통때마다 길다.대목당은 철시인,즉 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많은 장으로 대시(大市)라고도 하며,일 년중에 추석 전 장과 설날 전이 이에 해당한다.

과거 시골장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당시 장시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장시를 돌아보니 촌촌에서 사람들이 모두 돈꾸러미를 차고 나갔다가 취하여서 붙들고 돌아온다."

또 1800년대 초에 우하영(禹夏永)이 역은 [천일록(千一錄)]에는 '장이 서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줄을 잊는다.'라고 하였다.

규모가 작은 한 시골 정기 시장에 관하여 기술한 외국인 켐벨의 다음 글에서는 외국상품이 이미 침투한 개항기 이후 시골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장으로 가는 길을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로 활기를 띠었다.부녀 자들은 머리위에 참외,배 등의 과일을 담은 도기나 바구니를 이고 가고 있었다.황소나달구지에는 연료용 마른 나무가 실려가고,말은 곡물과 건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의 생산품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윗도리를 벗어 제쳐 반나체가 된 지게꾼은 내리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허리를 굽힌 채로 도기와 칼로 퍼서 만든 나무 그릇을 붙들에 맨 지게를 등에 지고 가고 있었다.그 당시는 마을의 큰 거리가 시장으로 되어 있었다.그 당시는 마을의 큰 거리가 시장으로 되어있었다.그리하여 이따금 사각형으로 넓혀지고 점포를 만들기 위해 짚으로 된 차양들이 재빨리 쳐지곤 하였다. 정기 시장에서는 토산품만 아니라 외국 삼품도 팔고 있었다.토산품은 주로 과일이었다.예를 들면 탐스러운 살구 등이다. 그리고 연어와 건어,잎담배,명석에 널려있거나 부대에 들어 있는 대맥, 여러 가지 품질의 쌀,콩과 수수,숯,무쇠 단지와 솥,면포와 섬우로 만든 직물,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광주리와 농,은 가락지 ,머리핀과 여러 가지 장신구,짚신과 대마로 만든 신,여러가지 여러 가지 모양의 갓과 기타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외국삼품으로는 회색모직물,상등의 마포(麻布)수건,바늘 일제 성냥,베를린에서 온통에서 온 통에 튼 청색 물감과 병에 든 아니린 염료,싸구려 칼,세멘시의 씨로 만든과자,리본,끈,권련초와 니스 칠한 일제 담배 파이프,싸구려 비누와 맨체스터에서 만든 약간의 물품들이 있었다."

한국 중부의 한 정기 시장에 관한 이사벨 비숍여자의 기술도 캠벨의 그것과 유사하다.

'장날이 되면,언제나 단조로운 모습을 보이던 한국의 마을들은 온통 활기와 윤기를 띠게 되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야단스럽다.이른 새벽부터 당국이 정기시장이 서도록 지정한 지점으로 가는 소로(小路)는 농민들로 메워진다.이들은 주로 닭,돼지,짚신,그리고 모자나 나무 주걱과 같은 자기들이 생산한 물건을 시장에서 팔거나 다른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 장으로 가는 것이다.동시에 커다란 길에서는 상인들,정확히 말하면 무거운 짐을 진 짐꾼이나 소 잔등에 짐을 싣고 온 행사인들과 합류하게 된다.이들 행상인은 순서에 따라 일정 구역에 서는 모든 시장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다.이들 중 소수의 사람만이 차양을 치고 주로 여러 가지 품질의 종이,그리고 견포(絹布0,견사(絹紗).허리띠로 사용되는 끈,용정향 단추,감은 견사 작은 가울,담배지갑,남자용 빗,바지끈,거울이 달린 상자 등을 판매한다.그러나 한국인 의 수요나 기호에 맞는 상품은 낮은 걸상이나 그저 맨땅 위의 거적때기에 진열되어 있다.이때 상인은 남의 집 앞을 사용하는 대가로 집주인에게 약간의 돈을 지불한다(정기 시장은 마을의 큰거리에 서게 된다.).걸상 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다음과 같다.

주먹 크기만한 알사탕(이것들 중 어떤한 것은 그 안에 참깨가 들어 있다),대량으로 팬매되는 감미 식품,여러가지 직물,즉 영국이나 일본산 모직물,마포,대마포(大麻布),적색 면직물, 한국산 희귀 견직물, 주로 정기 시장에서 대량으로 팔리는 아닐린염료, 그리고 샤프탄, 인디고와 형광 염료이다. 바로 그 걸상에는 또한 긴 담뱃대, 청소년층에 널리 보급되어 있는 일본제 궐련초, 가죽 가방, 일본제 성냥, 나무빗, 끝에 금.은실이 달려 있는 머리핀과 은전을 넣는 돈지갑 등이 진열되어 있다.

땅에 깔려 있는 거적때기 위에는 짚으로 만든 돗자리, 짚신과 노끈으로 만든 신, 규석 조잡하고 거친 한국산 견직물, 수요가 많은 말고삐용 줄,빗자루, 나막신, 흑색 유포, 그리고 짚.갈대.대나무로 만든 여러가지 형태의 갓이 진열되어 있다. 또 거기에는 한국산 철제 제품으로서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단지, 제철(蹄鐵), 삽, 문고리, 못, 망치, 조선산 초근(草根)등이 있고 과일로는 크고 딱딱한 배, 밤, 그리고 땅콩, 생강 등이 놓여 있다."

1980년대 초에 발간된 책이긴 하지만 임병무의 "장날"에 나오는 청주의 목물전(木物廛)풍경에서도 과거 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활처럼 휘어진 약전 골목 끝에서 고당 다리로 향하다가 왼쪽으로 꺾어들면 유서 깊은 목물전이 초췌한 모습을 드러낸다.......

동동주를 뜰 때 사용하는 용수, 알곡과 뉘를 고르는 키, 눈비를 쓸고 낙엽을 치우는 싸리비와 대나무비, 시루떡을 찔 때 없어서는 안 될 어레미와 가는 체, 대갓집 잔칫날 갖가지 전을 부쳐 두던 채반과 광주리, 조상의 차례를 지낼 때 쓰던 각종 제기, 이불 호청을 풀먹여 다듬던 방망이, 국수 만들 때 사용하던 홍두깨, 곡식을 찧던 돌 절구, 밥 푸는 나무 주걱, 봉당이나 마루를 쓸던 장목비(수수비), 농산물을 담아 두던 대가구, 사대부 집은 물론 일반 민가에서 사용하던 주방 기구인 조리와 도마, 흥부의 삼간 모옥에 얹혀 있던 뒤웅박, 농가에서는 안될 삼태기와 바소쿠리, 콩 타작할 때 후려 패는 도리깨, 자개상, 개다리 소반 등 민가에서 쓰던 갖가지 물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이 이곳이다."

지금의 시골장은 자본주의 싱품 경제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개항 이전의 시골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본 것처럼 그 외형만은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담고있다.

그러나 도시의 시장은 외형마저 크게 변화되어 예전의 흔적을 찾기 힘들게 됐다. 그러면 시전이라 일컬어지던 과거의 도시 시장, 특히 서울 시전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에는 장을 보려는 사람들이 새벽에는 이현(梨峴,지금의 종로 4가 배오개)과 소의문(昭義門,서소문) 밖에 모이고 오후에 종가(종로)에 집결하는 서울 풍경이 나와 있다.러시아 대장성에서 펴낸 "한국지(韓國誌)"(1905년)에는 서울 시전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건물은 창고가 딸린 기다란 단층 시설로 창문이 아주 적다. 건물은 길기 때문에 크지 않은 어두운 방으로 나누어져 뒤칸들은 상품을 쌓아 두는 창고로 이용되었으며 앞칸 정면에서 상인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가 손님이 오면 어두운 방에서 물건을 꺼내 온다. 이러한 상점들은 한 종류의 상품만을, 즉 서화지나 제지품을 판매하고 있으나 대신 여러 가지 등급과 품질의 것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어두운 작은 방들이 마주보게 되어 있으며 높고 두꺼운 벽으로 거리쪽이 가려진다. 안쪽으로 점포들이 이어진 각 줄 옆에는 툇마루를 놓아 여기에 상인들이 앉아서 상품의 일부를 손님에게 보이기 위해 진열해 놓는다. 손님들은 베란다 사이로 나 있는 좁은 마당 을 따라 오간다. 이들 점포의 옆은 문이 나 있는 벽으로 막혀 있다. 이것은 물건이 도난당하는 것을 막고 관리들의 물욕을 자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 진것으로 보인다."

또 이 책 에서는 우리가 흔히 구멍 가게라고 부르는 소규모 점포의 모습도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 건물들은 보통 앞뒤 두 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거리 쪽을 향하고 있는 앞칸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열어 놓아 팔 물건을 진열해 놓는다. 뒤칸 방은 상인과 그의 가족들이 살림하는 방이다. 상점이 이러한 모양으로 시설되어 있기때문에 특히 상품의 수요가 적은 겨울철에는 상점 주인은 보통 뒤칸방에 앉아 벽에 만들어 놓은 구멍을 통해 상점을 지킨다."

위의 견문기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 전통 시장의 분위기를 대략이나마 느낄 수 있다.


정승모/ 국립민속박물관 연구원이며, 저서로는 '시장의 사회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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