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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여자 팔자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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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여자 팔자

이태영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

 

우리 속담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듯이 흔히 마른 그릇으로 쓰이던 뒤웅박은 거기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팔자'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듯합니다. 말하자면 여자는 어떤 임자 곧 어떤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 팔자가 정해진다는 뜻인 것입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를 상고하건대 여자의 팔자는 동ㆍ서양을 가릴 것 없이 처음부터 '뒤웅박 팔자'였습니다.

역사학도들은 흔히 여성의 역사를 자유 시대, 침체 시대, 해방 시대로 나누어 보는 듯합니다. 중세까지를 자유 시대로, 봉건 시대를 침체 시대로, 산업화 때부터를 해방 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론이 분분하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은 본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문화의 양상은 가부장권 지배 문화에 의해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 곧 여자를 겨우 뒤웅박으로 여기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에는 두 개의 서로 엇갈리는 말이 명시되어 있는데 그 제 1장에 '남자의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창조했다'는 것이 그 하나요, 그 뒤에 '하느님이 사람(남자, 여자)을 창조했다'는 것이 또 하나입니다. 성경 속의 남녀 평등 근거는 바로 그 뒤의 것이 될 터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 전통은 오랫동안 앞엣것만을 내세움으로써 자연스럽게 여성을 남성에 예속시키는 가부장권 문화의 전거를 마련하였으니 그 결과로 서구 사회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고 상승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여성에게 자유 시대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함이 옳겠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에서 여자는 처음부터 뒤웅박 팔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나라 여성들의 역사

 

그 점에는 우리 나라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시가 <공후인>은 고조선 때의 것으로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데, 백수 광부가 달려와 물에 빠져 죽자 말리며 뒤따라오던 여자(아내)가 슬피 울며 시를 지어 부르고 따라 죽었다는 기록입니다. 그 뒤 삼국 시대의 여성들의 애환이 담긴 시편들에서도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낱 종살이에 불과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중기에 이르러 가부장권에 의한 여성의 억압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의종 때부터 충렬왕 때에 이르는 동안에 신라 때까지 이어졌던 골품 제도가 부서짐과 함께 왕족들의 일부 다처제 혼인 제도가 여성을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켰습니다. 특히 이 기간동안 지배층의 신분 안정을 위한 처녀 공납은 우리 여성 역사에 뼈아픈 수난의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가부장제 지배 체제는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더욱더 강화되었습니다. 철저한 왕권 중심의 신분 사회 체제인 조선 왕조 정치 체제의 이념적인 기반이 된 유교의 여성관은 '충신은 불사 이군(不事 二君)이며 열녀는 불경 이부(不敬 二夫)라'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부부 관계를 왕권 확립을 위한 군신 관계의 윤리와 동일 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남편을 군신 관계에서처럼 섬기고 따르는 열녀관에 입각한 일부 일처제를 확립하기 위해 처와 첩의 지위를 엄격히 구분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로 하여금 내실 세계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 내외법을 강요했으며 과부의 재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자는 대체로 글을 읽어서도, 시문을 지어서도 안 되며, 글을 가르친다손 치더라도 여자는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원리였습니다. 이런 윤리관 속에서 형성된 조선 오백 년의 역사는 남자는 하늘로, 모든 여자는 그 하늘을 떠받들고 우러르는 땅으로 규정하여 이분화 시키면서 남성 우월주의의 신화를 창출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그와 함께 정절 이데올로기와 현모 양처의 신비화를 통해 여성의 비인간화를 가속화 시켰습니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도 새로운 형식의 여성 억압이 자행되었습니다. 강대국의 약소국 지배는 다시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로 축소되었으며 이 여성의 억압은 여성을 철저히 성의 대상물로 유린하는 정치적인 폭력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이십만 명에 이르는 우리 나라 여성들이 야만적인 정복욕에 불타는 일본 군인들의 위안부로 강제로 징집되었으며 역사는 이에 무능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이 산업화 시대는 현대 여성을 상품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60년대 초의 5ㆍ16 뒤로 이른바 조국 근대화의 깃발 아래 도입된 선진 자본주의 산업화 정책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국가 발전의 근본을 두고 민주화에 우선해서 물량주의적인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 결과로 지난 스무 해 동안에 국민 소득이 상승하고 물질의 풍요로움이랄까를 얼마쯤 누리게 되긴 했지만 물질 만능주의, 생산 제일주의의 가치관을 앞세움으로써 인간을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거나 인격을 상품으로 대치시키는 역기능을 심화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기능과 물량을 근본으로 삼은 산업화 정책을 무절제한 외자 도입과 노동력의 수탈 사이의 함수 관계 속에서 저임금 정책을 표면화시킴으로써 노동력이 크게 여성 쪽에 의존되게 하는 한편으로 성차별에 입각한 위계 질서를 굳혀 놓았습니다. 곧 저임금 정책이 여성 노동력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지배하는 남성 밑에 지배받는 여성이 있게 되고, 너무 많이 가진 자와 너무 못 가진 자, 누르는 자와 눌림 받는 자, 권력을 행사하는 자와 권력 앞에 무능한 자, 귀한 자와 천한 자로 대별되는 계층의 양극화가 70년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70년대 사회 현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비인간화 현상'일 것이며 그 대상은 대부분이 여성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국가의 내적인 발전과는 관계없이 정치의 국제화, 기업의 수출화, 관광 개발 사업을 통한 외화 유치 정책을 둘러싼 달러 시장에는 기생 관광을 비롯한 성폭력이 공공연히 감행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경제적인 무력감과 성적인 열등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 여성을 평등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일이야말로 나라의 앞날을 좌우하는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성 해방 운동은 남녀 모두의 인간화 운동

 

이렇듯이 한국 여자는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수탈과 억압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나라의 장래와 미래에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여성을 인간화하여 그 능력을 개발하는 데에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구의 반인 여성의 해방 운동은 사회 운동이며 그와 함께 생존권 운동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인간이 되자는 운동입니다. 그 실현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를 나는 '인간화 부조 사업'이라는 말로 고쳐 말하고자 합니다.

이야기의 갈래가 좀 다를지 모릅니다만 내가 지난 서른 해 동안에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자리에 들 때까지 해 온 일은 남의 집 안방을 들여다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빼앗기고, 짓밟히는 일에 견디다 못해 하소연해 오는 그 수많은 여자들을 보아 오는 동안에, 그들이 대개 두 가지 유형을 나타내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는 "나도 똑같은 인간인데 왜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런 꼴을 당하나요?" 하고 반발하는 쪽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인간됨조차 알지 못한 채로 체념을 한 상태에서 그 아픔을 다스릴 길이 없어 "이 고통을 껴안고 죽어야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어 오는 쪽입니다. 말하자면 가부장권 문화의 모순을 깨닫고 반발하는 -그러나 거기에 대처할 만한 힘은 전혀 없습니다- 세대가 나타났는가 하면 아직 전통의 족쇄를 의식하지 조차 못하는 여자들도 얼마든지 많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인간화 부조 사업'은 바로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나 미래 사회는 더 나은 역사를 향해 전진해 갈 것이며 날로 변화를 거듭 하는 세계는 어쩔 수 없이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가치관이 영웅 시대에서 평범한 인간의 창조 세계로, 지배 복종의 체제에서 평화와 형제애로 묶인 지구 공동체 형성의 세계로, 민족주의에서 세계 시민주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확실히 도덕률의 진보로 보아 마땅할 것입니다. 이렇듯이 자의로나 타의로나 역사가 변하고 있는 만큼 인간 관계의 변화도 또한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모체는 '인간화의 실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발전과 모든 번영의 궁극 목적은 인간답게 살려는 정신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화 운동은 그 어떤 경제적인 번영보다 앞서 있는 요청이며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여기에 여성의 인간화의 과제와 사명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천년에 걸쳐 답습된 가부장권 문화를 하루 아침에 쓰러뜨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행동만이 역사를 한 치씩 한 치씩 변화시킬 수 있다는 소신 속에서 그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여성의 인간화를 이루는 길

 

첫째로, 여성의 인간화는 가정의 민주화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의 꽃이라고 할 현모 양처 이데올로기는 '현부모 양부처주의'의 실현으로 극복되어야 하며 전통 가족 제도의 모순점을 보충하고 민주적 가정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모색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실제적인 가정의 주인이면서 무의식 속에서는 가정의 예속인으로 자처하는 여성의 고정관념을 깨어 부술 체험이 전제되어야 하며 여성 자신이 품은 성 차별의 편견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의 민주화란 가족 구성원이 자기의 능력과 개성을 발휘할 기회와 능력을 보장받으면서 그와 함께 가족 구성원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함께 사는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 민족의 기도문에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셨음을 하늘에 감사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보기에 곁에 있는 여자의 몰골이 얼마나 신수 팔자가 사나와 보였길래 그런 기도가 나왔겠습니까? 태어나기만 하면 벌써 종속되는 존재로 여겨져 인격도 없고, 자주성도 없고, 독립심도 없는, 제가 제 인생을 살지 못하는 한심한 존재이므로, 비참한 존재이므로, 사람이 아니므로,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준 것을 감사드린다고 했을 줄로 압니다. 비록 세상이 크게 달라지고 여자의 인간됨을 지난 어느 때보다 존중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나 적어도 아직 우리 나라 여자의 팔자는 썩 좋은 것이 못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는 남자 없는 가정, 여자 없는 사회에서 살아 왔습니다. 그 결과는 가정의 비민주화로 이어졌고 그것은 당연히 사회와 국가의 비민주화를 불러 왔습니다. 그 결과는 가정의 비민주화로 이어졌고 그것은 당연히 사회와 국가의 비민주화를 불러 왔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여자가 스스로 딸을 남자에게 복종하는 여성으로 길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는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원칙이 가정 생활에서 몸에 밸 때에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똑같이 자기 세계를 창조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가정에서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가정은 폭발적인 잠재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더 먼저 가정 안에서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이 깨어져야 하며 오히려 협동과 화합으로 뭉쳐야 합니다.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나는 오랫동안 여러 가정의 복잡한 사연들을 알아 왔습니다. 내 안경은 남의 집 안방 구석구석의 더럽고 아픈 정경을 들여다보는 안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경으로 나는 또 한 가지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크고 탐스러운 지혜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학식이나 식견이나 경륜은 남자에 따를 수 없다 하더라도 -그걸 쌓을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슬기로움은 여자가 한결 더 돋보이더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는 외국인들에게 흔히 "한국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유능해 보인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들의 객관적인 눈에도 한국 여자의 지혜 주머니가 커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여자들이 이 지혜와 남아도는 힘을 어디에다 쓰고 있습니까? 그 엄청난 잠재 능력이 어떻게 분출되는고 하니, 치맛바람, 각종 투기로 비뚤어지게 터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보고 흔히 여자에게 너무 많은 힘을 주어서 그렇다고 한탄하는 남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옳은 힘입니까? 마루 밑에 숨어서,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인생을 위해서 용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어, 마루 밑에서 나오게 하여 창의로운 데에, 평화로운 데에 쓰면 상상할 수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 넣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정 민주화의 과제에는 좁은 의미의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민주적인 확대 가족으로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지역 공동체, 직업을 통한 공동체, 이념적인 확대 가족과 같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남과 하나 되는 체험을 넓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여성이 가정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는다는 차원에서라기보다는 사회의 전체적인 발전과 인간화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는 파업의 하나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탁아 사업 같은 것이 시급히 요청됩니다.

둘째로, 여성의 인간화는 여성의 경제화로 촉진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의 가사 노동에 대한 경제적인 가치 평가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남녀는 똑같이 능력 있는 존재로 태어났으나 태어난 뒤에 후천적 환경이 여성을 무능력자로 만들었습니다. 여성이 하는 일, 곧 가사 노동 같은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짙어져서 여성은 남성보다 곱절의 일을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놀고먹는다는 열등 의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정 부인은 흔히 직업란에 손수 '무(無)'라고 쓰는 코미디가 지금도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자아관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하나로 여성이 맡고 있는 일에 대해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고 남들도 그렇게 보도록 가사 노동이 경제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며 그와 함께 남편이 번 수입은 부부 공동의 재산으로 인정하는 법 제도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여성의 인간화는 여성의 사회화로 성취되어야 합니다.

이를 가정에서 뛰어나와 사회로 진격하라는 신호 나팔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성의 사회화란 먼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이 몸담은 사회의 현실과 장래에 대해 입체적인 관심과 주관적인 책임 의식을 갖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자기의 삶을 사회 공동체로 확대시켜 생각하는 윤리 의식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여럿이 살게 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인구의 반인 여성들이 올바른 사회 의식을 가지고 가정과 사회를 이끌어 나갈 때에 민주 복지 사회는 절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사회 속에서 여성의 자기 선언이 값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여성들이 사회 의식을 다지는 데에는 다음의 서너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 단계는 남자의 전용물로 되어 있는 사회와 가정의 담을 헐어 내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 교육이며, 둘째 단계는 민주 시민으로서 알 권리와 따질 권리와 지킬 의무를 깊이 비판을 활발히 발표하여 사회 여론을 발전시키고 끌고 갈 수 있도록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올바른 직업관을 가지기 위한 전문적이고 계속적인 평생 교육이 제도로써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여성의 인간화는 인권 운동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여성 운동의 대상은 남성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비민주적인, 비인간적인 심성과 가치관입니다. 따라서 여성 운동의 목표는 인권 운동이며 다원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운동입니다. 모든 인간이 존중되고 자유와 평등이 최고의 가치관으로 인정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여성 운동의 목표가 설정되어 있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곧 오늘날 남녀 평등을 이야기할 때에 어디까지나 인권 평등이라는 기본 원칙에 바탕을 둔 평등이 문제가 되어야지, 그러지 않고 남녀의 역할 평등이라는 기반에 서서 평등을 주장하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여성 현실의 문제는 헌법에 바탕을 둔 정치화의 능력으로 풀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차별은 각종 양극화 현상으로 상징되는 민주적인 가치의 상실이니 만큼 여성 운동이 인권 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는 기본 원칙은 굳건히 지켜져야 할 것이며, 한국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많은 선한 노력들과 그 보조를 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여성 운동은 바로 새로운 차원의 문화 운동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여성의 인간화는 여성을 천하게 여기는 사조에서 빚어진 모든 지배 문화에 결별을 선언하고 남자와 여자가 조화하여 평화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는 인간 문화, 또는 모성 문화를 형성하는 일이야말로 여성 해방 운동의 근본 과제입니다. 문화는 그 시대 이념의 총체적인 현상이니 시대와 인습과 제도를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의 인간화와 여성 문화 창출은 동전의 안과 밖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으며 노력에 따라서는 서로 촉진제가 될 수 있습니다. 장래의 한국 사회를 더 인간답게 발전시키고 비인간화된 지배 문화를 인간 문화로 살리는 힘이 여성 문화라면, 이는 우선 인간답게 살수 있는 기본 여건이 먼저 이루어진 뒤에야, 이를테면 가족법을 개정하는 것처럼 나쁜 제도와 인습을 과감하게 개혁한 다음부터 틀을 잡아 갈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문화. 그것이 여성문화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아온 남성 문화의 시대가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가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며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남성 문화의 소산인 전쟁을 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남성문화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화평과 의로움을 여성의 힘을 빌어 이룰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필리핀 코라손과 같은 여자가 상징하는 의미는 무척 큽니다.

경계해야 할 물질 숭배와 이기심

 

이 모든 여성의 인간화 작업에서 가장 경계하여야 할 일로 물질 숭배와 이기심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산업화된 이 시대의 대표되는 위 두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에는 여성의 인간화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이 문제에 대한 중산층 여성들의 뼈아픈 각성이 요구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풍요로운 물질 속에 안주하여 이기심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발전이 산업화에 기대어 이루어진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잘살아 보겠다고 해서 한 그 발전의 결과로 우리 대다수는 돈의 종이 되었습니다. '돈, 돈, 돈'하다가 돈이 목적이 되고,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의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돈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듯이 달려들어 마침내 돈을 얻으면 돈을 주인처럼 모시고 사는 가련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보다 더 중한 돈이 생겼으니까 돈이 시키는 대로 돈을 따라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돈만 보지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저 돈이 이루어 놓은 물질 문명의 뒤만 쫓아갑니다.

여기에서 여자가 빠져 나오기는 남자의 경우보다 더욱더 힘듭니다. 돈 잘 벌어다 주는 남편 밑에서 갖은 호강을 하고 사는데, 여성 해방이 무슨 관심거리이며, 여성의 인간화가 무슨 흥미 거리가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인간을 본위로 하는 가치를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돈을 따르자고 결심하였으므로 인간을 보는 눈이 비뚤어진 것입니다. 이 물질을 지키자니 이기심은 더욱더 커지고, 남을 아끼고 돕는 마음은 또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남성 문화의 모순을 깨닫기는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요컨데 풍요로운 물질 속에 남자의 비호를 받으며 안주하는 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여성의 인간화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다른 여자들보다 사회의 혜택을 더 많이 받은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각성이 요구됩니다.

이 이야기 끝에 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나는 본디 욕심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돈도 좋았고, 지위도 좋았고, 명예도 좋았습니다. 다 싫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런 것들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돈을 무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니 지난 서른 해는 돈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인간이나 내가 세운 정신적인 욕구와 이념을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을 싫어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고상하지도, 비범하지도 않은 보통 인간이 돈과 싸우는 일은 여간 고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버린 돈이 나를 유혹할 때에 나는 꼭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서 있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칠순을 넘기고 보니 그 유혹을 피해 온 제가 조금은 대견스럽습니다. 이 장황한 이야기는 사람이 물질과 이기심에서 벗어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어서 잠깐 해 본 말입니다.

인류의 평화는 가정의 평화에서부터

 

마침내 여성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 전체의 문제이고 인류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엔은 이미 1975년을 여성의 해로 선포하고 온 인류의 각성을 촉구하였습니다.

앞으로 인류가 살아남는 문제는 그 잠재되었던 인류의 반인 여성의 능력을 소외시키고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똑같이 오늘의 한국 여성의 소외 현실은 소외된 역사 현실로 확대하여 해석해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차별 받는 게 좋다는 사람 있습니까? 거기에는 불만이 있습니다. 불평이 있습니다. 불평이 있으며 불화가 있습니다. 그 불화는 마침내 싸움이 되어 터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싸움이 번지면 전쟁이 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시작된 곳이 어디입니까? 안방입니다. 차별 받는 여자의 불평과 불만이 먹구름처럼 쌓여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평화는 가정에서, 여자에게서 나온다고 해야 옳습니다. 안방의 두 남녀가 평화롭게 인간 관계를 풀어나가지 못하면 그 사이에서 나온 인간은 화합할 수 있는 인간이 못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인간 관계를 처음으로 배우는 처소가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정의 남녀가 대등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 화합할 때에 비로소 남을 핍박하지 않고, 남을 희생시키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태영/서울대 법대에서 가족법을 전공했다. 법학 박사이며 제 2회 고등 고시 사법과에 합격, 법조계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한국 가정 법률 상담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한국의 이혼 연구』, 『나의 만남 나의 인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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