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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정치에 주는 교훈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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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정치에 주는 교훈

 

이 기 백

 

역사의 교훈

 

역사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과거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역사학 입문서에나 그 첫머리에 으레 설명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인간의 과거 사실을 다 알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라는 이름 아래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최근에는 고고학이 발달하여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서도 인간의 과거 사실을 밝혀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결국 기록으로 건 물건으로 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실이 아니면 사실상 역사로서 다룰 수가 없다.

우리의 기역에 남아 있어야 역사로 다룰 수 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역사란 일종의 경험의 축적이라는 뜻이다. 개인도 과거의 자기 경험을 현재의 생활에 유용하게 살릴 줄 아는 자가 현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족도 과거의 경험(역사)을 살릴 줄 아는 민족이 현명한 민족이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살릴 줄 아느냐 하는 것은 곧 그 민족의 역사적 전통이 얼마나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시간의 길이'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와 장래의 새로운 역사적 창조를 일깨워 주는 역사적인 '경험의 깊이'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한 인간의 개인적 경험에 제한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에도 제한이 있기 마련이다. 이 제한된 경험을 보충하여 주는 것이 다른 민족의 역사적 경험이다. 그리고 다른 민족의 역사적 경험이 가지는 중요성은 자기 민족의 그것에 비하여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민족사 못지 않게 세계사를 중히 여기고 거기서 민족의 현재와 장래에 이바지할 창조적 정신의 유산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극히 중요한 일의 하나라고 믿는다. 다만 여기서는 내가 공부하는 한국사의 이야기만 다룰 수밖에 없다.

과거의 역사에서 현대에 대한 어떤 교훈을 찾고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똑같은 사실이 되풀이되지 않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기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역사를 체계화하고 이론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역사의 구체적인 사실들 속에 숨어 있는 법칙들을 찾아낸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간의 역사에 작용한 법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이를 다 알아낼 수는 없다. 또 그 법칙은 자연과학처럼 반드시 반복적이지도 않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법칙들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일정한 교훈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믿는다.

현군과 폭군

 

근대 이전의 한국에서 정치적 권력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주가 선한가 악한가, 혹은 어진가 어리석은가 하는 사실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따라서 과거에는 흔히 역사 기록조차도 군주 중심으로 엮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군주를 평하는 가장 간단한 표현은 '현군'과 '폭군'이라는 두 극단적인 용어가 되지 않을까 싶다.

폭군이라고 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누구나 연산군을 연상하게 된다. 위로 올라가면 고려의 예종이나, 태봉의 궁예가 또한 연상된다. 이러한 소위 폭군들이 지니는 공통적인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군주 개인의 향락과 권세를 위하여 귀족이거나 농민이나를 막론하고 국민의 행복을 희생시켰다는 데에 있다. 다만 이러한 판단을 내린 사람들은 농민이 아니라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대개는 귀족의 희생을 강요한 군주들이 폭군이라고 불리어 왔다.

연산군의 경우로 말하면, 경연(經筵)과 대제학(大提學)을 폐하여 문신들이 직간하는 길을 막았으며, 성균관을 놀이의 장소로 만들었으며, 원각사를 폐하고 기녀들을 거기 있게 하였으며, 또 경성 주변 30리 내의 농가를 철거시키고 이를 사냥터로 만들었다. 이 밖에도 그의 행동은 무소부지여서, 그가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향락 행위를 거침없이 해치웠다. 가끔 그의 이러한 행동을 인간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있으나, 그 같은 성격이 나오게 된 배경이야 어떠했던 간에 폭군이란 비난을 면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연산군이 군주라는 지위가 갖는 권위 하나를 믿고 전제 군주로서의 극단적 행동을 한데 대해서, 궁예는 전제군주의 권위를 종교적인 베일로 감싸려고 하였다. 스스로 자기를 미륵불이라 하고, 자기의 두 아들은 보살이라 하였으며, 또 자신이 불경을 지었다는 것은 이를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가 지었다는 불경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도리는 없으나, 이를 사설괴담(邪說怪談)이라고 비판한 승려 석총은 맞아 죽었다. 그리고는 신통력이 있어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칭하고, 자기의 아내 강씨를 간음하였다는 죄목으로 두 아들과 함께 죽인 것을 비롯해서 많은 신하들을 의심하여 죽였다.

폭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현군은 어떠한가. 우리는 현군 중의 한 사람으로 고려의 성종을 들어도 좋겠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곧 영을 내려 신하들로 하여금 시국에 대한 대책을 써 올리게 하였다. 이레 응하여 올린 많은 글들 중에서도 최승로의 28조에 걸친 긴 시무책은 성종이 가장 중요시하여 이 방향에 따르는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개혁의 목표란 한마디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성종이 현군인 까닭은 중앙집권적인 정치의 실현에 있었다기보다는 귀족정치의 실현에 있었다. 그는 중국의 고전이나 혹은 당, 송의 제도를 참작하여 일정한 법을 제정하고 이 법에 따라서 정치를 하되 개인적인 욕망은 최소 한도로 억제하였다. 귀족들의 의견을 최대 한도로 받아들이고, 제정된 법에 따라서 정치를 하되 군주 개인의 욕망을 최소 한도로 억제한 군주---이것이 곧 현군이었다.

 

물론 군주를 현군과 폭군의 두 유형으로만 나눌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도덕적인 면을 더 강조해서 선군이니 악군이니 하는 표현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군주를 정치가로서 평가 할 때는 현군과 폭군이란 표현이 비교적 적절한 용어가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모든 군주를 이 두 개 가운데 어느 하나로 이름을 붙여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한 군주라도 아마 어느 면은 현군으로서, 또 어느 면은 폭군으로서 평가되어야 할 양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군주에 대한 평가가 모든 귀족들 사이에서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경우나 궁예의 경우는 비록 전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거의 모든 귀족들이 일치하여 폭군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경우가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광해군은 조선시대 27왕 중에서 연산군과 함께 귀족들에 의하여 쫓겨난 두 임금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뒤에 혼란 속에서 내치와 외교에 뛰어난 치적을 나타내어 국정을 안정시키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왕이었다. 어느 의미로 보나 연산군과 나란히 조선의 대표적 폭군일 수는 없는 왕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폭군으로 낙인이 찍힌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광해군이 자기를 추대한 북인들의 세력에만 일방적으로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광해군은 북인에게는 현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치하에서 정치 무대에 발을 붙이지 못하던 서인들에게는 바로 폭군 그것이었다. 서인이 정권을 쥐면서 광해군을 내쫓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같이 귀족들의 세력이 분열되어 있으면 군주들은 퍽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런 때에 만일 군주가 그 중의 어느 한 파에 편파적인 친밀감이나 거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가 모든 귀족으로부터 한결같이 현군의 평가를 받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군주에 대한 충성이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는 전제주의 시대라 하더라도 따돌림당한 귀족들은 편파적인 군주를 폭군으로 규정하고, 이를 쫓아내는 일을 반드시 불가능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론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가 있었다. 가령 천명이 그를 떠났다고 규정하는 따위가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귀족들이 분열되어 있는 경우라도 군주들은 어느 일파에 치우치지 않는 현명함이 요구되었다. 정치의 안정을 원한다면 그것은 거의 필수적인 요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당쟁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여러 파의 인물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과 같은 정책을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탕평책을 씀으로써 군주의 권력이 사실상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왜 그런가 하면 어느 일파의 정권 독점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초연한 입장에서 귀족 위에 군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와 귀족과 민중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이전의 시대를 군주정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군주정치라고 해서 군주 한 사람이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그는 국민의 생사 여탈을 최후로 결정하는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일정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회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서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배적인 사회계층의 대표적 존재가 곧 군주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지배적인 사회계층의 의견을 존중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제도가 짜여져 있었다.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나 모두 귀족회의 제도가 있어서 중요한 국책이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왕은 그들에 의해서 쫓겨나곤 하였다. 고려에서도 도당회의(都堂會議)가 있어서 비슷한 구실을 담당하였다. 인사 행정에서 왕이 특별히 아끼는 신하를 승진시키고 싶어도 사찰기관인 어사대(御史臺)소속 관리들의 동의를 거치지 안으면 무효였다. 어사대의 관리들은 제정된 법 절차에 따라서 그들의 과거 경력이나 가문을 조사하여 적당한지 않은지를 심사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사간원(司諫阮)이라는 독립된 부서가 있어서 여기에 소속된 간관(諫官)들이 왕의 과오를 시정하도록 간언을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국왕은 국정의 최고 지위에 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차라리 부자유한 존재였다. 옹졸한 군주일수록 이런 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개인적 욕망을 따라 방종하면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가 대세를 통찰하는 높은 안목을 가진 군주들은 귀족들을 결속시킴으로써 정치의 안정을 유지하게 되고 현군의 칭호를 듣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은 그러나 이미 지난날과 같은 신분제 사회가 아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며, 그들이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누구에게 맡기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민중이 사회의 주인이 되고 보면, 옛날의 군주처럼 자기 권력의 안정만을 안중에 두고 관직을 적당히 안배하여 하나의 왕국을 재현시키려는 것처럼 보이던 이승만이 민중의 힘에 몰리어 쫓겨난 것이 무엇보다도 이 시대적 변화를 말하여 죽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현명한 정치가는 옛날의 현군이 하던 것처럼 지배계층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뜻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회 변화의 논리

 

역사란 물론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발전은 정치적으로는 흔히 정권의 교체로 나타난다. 정권의 교체는 같은 지배계층 내의 파벌 대립에서 말미암은 경우도 허다하게 있었으나, 이것은 사회적 발전과는 상관이 없다. 이런 때에는 왕조의 교체까지를 포함한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기의 하나로서 들 수 있는 것이 후삼국 시대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시대에는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실시되었다. 골품제도에 의하면 왕족만이 진골이라 하여 가장 우수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왕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으로는 부의 장관, 군사적으로는 독립된 부대의 지휘관 등을 모두 그들만이 독점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시대는 진골의 시대라고도 부를 만하다.

그런데 진골 밑에는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등의 하급 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정치나 군사의 책임자 자리는 맡지 못하고 진골 출신 장관이나 지휘관 밑에서 일정한 임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육두품 출신 가운데는 학문적으로 출중한 자들이 많았다. 가령 강수, 설총, 녹진, 최치원 같은 사람들은 다 그런 육두품 출신이었다. 이런 인물들은 모두가 신분제도에서 오는 제약을 벗어나서 왕에게 접근함으로써 큰 정치적인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런데 이들의 실제적인 정치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골품제의 사슬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리하여 육두품 출신 가운데서 사회적 속박에 대한 개혁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아 갔다.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올렸다는 십여 조의 건의는 그러한 개혁안이라고 짐작된다. 가령 당나라에서와 같이 과거제도를 실시하자든지, 골품에 관계없이 승진의 길을 열어 주자든지 하는 것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안은 거부되었고, 따라서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유랑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제자들은 훗날 고려라는 새 왕조에 가서 출세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신라는 옛 신분제도를 깨고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응하여 국가에 활력을 불어넣지 못함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놓이고 노쇠해 가고 말았다. 반대로 반 신라적인 새 사회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만일 육두품에서 무력이 허락되었더라면 그들은 신라를 정면에서 타도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다만 육두품은 중앙집권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어서 대개는 유학자로 진출하였던 만큼 그러한 기회가 허락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방에서 출현한 호족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들은 중앙의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각자가 무력을 키워 나갔다. 장보고 같은 사람은 '섬놈'에 지나지 않았지만, 만 명의 해군을 거느리고 청해진이라는 독자적인 군사기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무슨 장군, 무슨 성주라고 하는 많은 지방 호족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장보고는 국왕을 추대한 공으로 그의 딸이 왕비가 될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섬사람의 딸이라 하여 진골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들은 지방에서 독자적 힘을 길러 신라 타도의 깃발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 송악 성주 왕건이 있어서 뒤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서 신라의 육두품 출신 학자들이 새로운 사회, 정치, 경제 제도를 조직하는 두뇌 구실을 했다. 육두품보다도 이 지방 호족 세력을 포섭하지 못한 것이 신라가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역사가 진전하는 데 따라서 지배적인 사회계층은 부단히 갈리어 왔다. 대개는 지배적인 사회계층이 자기들의 지배력 행사에 적합한 사회나 정치나 경제의 기구를 짜고, 그 짜여진 틀 속에서 자신들의 영원한 집권을 다짐하곤 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항상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구세력에 위협을 주었다. 신 세력을 포옹하기를 꺼리는 것이 구세력의 대처 경향이었고, 이것은 결국 그들이 애써 다져 놓은 딱딱한 껍질을 깨버리게 하곤 하였다. 요컨대 역사의 발전 속에서 사회는 항상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역사 발전의 앞을 내다보는 현명한 정치가에게 새로운 책임이 지워지곤 하였다.

폭력과 정치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은 대개 원기 발랄하고 신선한 기풍을 지니고 있지만, 또 무모한 반면을 지니고 있기가 일쑤였다. 가령 후삼국 시대의 견훤이나 궁예가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한다. 견훤은 성급하게 신라를 타도하려고 한 나머지 신라 서울 금성을 쳐서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간하고 금은 보화를 노략질하는 짓을 저질렀다. 그의 무모함은 후계자의 선택에서도 나타나서 드디어는 장자 신검에게 강제로 쫓겨나서 절에 유폐되고 말았다. 뒤에 그는 몰래 도망쳐서 자기의 적인 왕건에게 항복하였고, 왕건의 군대에 앞장서서 자기의 아들 신검을 치고, 자기가 세운 나라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후백제가 망한 후 그는 고려의 서울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절간에 머물러 있다가 울분에 못 이겨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그리고 궁예의 무모함은 견훤 못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왕건에게는 무리를 삼가는 지혜가 있었다. 말하자면 무력으로서보다도 오히려 정치적 방법으로 천하를 얻으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천하가 호족들의 세계인 것을 알고 그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왕건이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욱 정치적인 수단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후삼국의 통일이 가능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역사가 폭력보다 정치에 더 편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족한 구체적 사실은 그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고려의 무신정권 시대가 그러하다. 고려 문치주의 아래에서 농민이나 심지어는 천민 출신까지도 끼인 무신들은 신분적으로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들이 문신 세력을 뒤엎고 무신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이것도 동일한 지배계층 안에서의 정권이 아니라 사회계층의 교체였던 셈이다.

그런데 정권을 쥔 무신들 서로간에 치열한 정권 다툼이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28세의 청년 장군 경대승의 집권이었다. 그는 무신란의 주동 인물인 정중부를 살해하고 정권을 쥐었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무신들은 무신정권의 원로인 정중부를 살해한 것에 반감을 품고 그에게 적대적이었다. 이에 그는 도방이라는 사병 조직을 만들어 신변을 호위하게 하는 한편, 비밀히 사람을 풀어 주막 같은 데서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붙잡아다 처형하는 일종의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이런 공포 분위기를 정신적으로 감당해 내지 못하고 견훤과 마찬가지로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무신정권은 여러 차례의 변동 뒤에 최충헌에 이르러 안정이 되었는데 그와 그의 동생 최충수와의 관계에서도 무모한 저돌 행위와 정치적인 사태 수습 방법 가운데 어느 것이 훌륭한 것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최충수는 형과 어머니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딸을 태자비로 삼는 등의 억지를 부리다가, 형과 맞서 싸워 패하였다. 개경에서 패한 그는 임진강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재기를 꿈꾸었으나, 쫓아온 최충헌의 군대에게 붙들리어 죽고 말았다. 이에 견주어 온건한 최충헌이 정권 안정에 성공한 것은 왕권을 적당히 견제하고 문신을 포용하고 천민 반란군을 회유하는 등 그의 정치적 역량에 말미암은 것이다.

역사의 심판

 

우리들은 흔히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정치가들의 발언 속에서, 자기들의 행동을 후대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아마 자기의 정치적 행동이 역사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발연을 하는 듯하다. 사실 인간의 행위는 부단히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그 심판은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냉혹한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도덕적인 기준에 입각해서 정치가의 해동을 판단하여 그를 옹호도 하고 비난도 한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문제는 A냐 B냐 C냐 하는 정책 결정이 도덕과는 상관없으면서도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정치지도자의 식견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식견의 부족과 이에 따르는 정치적 과오도 역사의 용서 없는 심판을 받는다. 하물며 도덕적인 결함으로 이한 정치적 과오에 대해서는 가장 가혹한 심판이 내려지기 마련이다.


이기백 / 서울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지금은 한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사 신론', '신라 정치사 연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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