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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과 컴퓨터 세상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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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과 컴퓨터 세상

이 주 향(수원대학교 철학과 교수)

 

 

 

나는 원시인이다. 하기야 내가 자신을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나와 가까운 몇몇 사람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문명의 이기를 누릴 줄 모른다나 어쩐다나? 실제로 내집엔 그 흔한 전기 밥솥 하나 없다. 나는 아직도 솥이나 냄비에 밥을 해 먹는다. 몇 년전에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전기 밥솥과 전자 렌지를 사오셨는데 며칠 뒤에 전자 렌지는 친구가, 전기 밥솥은 후배가 가져갔다.

 

유통을 모르는 삶

 

나는 아직도 샴푸로 머리를 감지 않는다. 비누를 쓴다. 뽀얗게 화장하고 높은 구두를 우아하게 자가용을 타고 다니기 보다는 맨 얼굴에 운동화를 신고 흙을 밟으며 걸어다니기를 즐긴다.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후기 자본주의는 망할 거라고 친구들이 말한다. 미용실엘 가나, 화장품을 사나, 유행 따라 옷을 사나? 도무지 유통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대단한 환경 보호론자여서는 아니다. 나는 아직도 문명의 이기라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쩔쩔매면서 사람은 자연의 일부라는 믿음에 기대있는 어설픈 자연주의자이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문명과 자연을 대립시키지 않고 문명 속에서 자연을 해석해 내는, 과학과 기술의 영광을 기꺼이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집에도 문명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퍼스널 컴퓨터가 그것이다. 비교적 늦게까지 나는 컴퓨터를 구입하지 않았다. 컴퓨터 좀 사라는 성화가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내 글씨를 사랑했고 그 글씨로 내가 만들어 간 강의록들과 친숙해 있었다. 그러나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내가 관계하는 크고 작은 단체에서 한글로 작성하여 까지 디스켓과 함께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정중한 단서를 꼭 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컴퓨터를 구입했고 내 글씨를 잃어버렸다.

 

 

유행 따라 사는 컴퓨터

 

너도 낟 컴퓨터를 유행 따라 구입하고 있다. 이미 컴퓨터는 입학 선물, 졸업 선물로 가장 선호되는 품목이 되었다. 아예 단체로 구입하는 대학교까지 생겼다.

 

경희대가 다음 학기부터 컴퓨터 망으로 교육을 하기로 하고 모든 학생에게 노트북 컴퓨터를 보급키로 했다고 한다. 경희대가 보급하기로 결정한 그 컴퓨터의 기종은 인터넷까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삼성 펜티엄 노트북인데 올해부터 학생들은 그것으로 싫든 좋든 컴퓨터 세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같은 움직임은 연세대, 이화 여대에서도 있었지만 기업과 컴퓨터 가격 절충이 되지 않아 아직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라고 한다. 등록금말고 백육십몇만원을 더 내고 컴퓨터를 구입해야 한다는 학생들의 부담이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한 수강 신청과 재택 수업, 과제물 제출 들과 같은 첨단 교육 방식의 발빠른 움직임으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일까?

 

더군다나 컴퓨터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그 양상이 변한다. 인터넷이 좀더 대중화되면 퍼스널 컴퓨터 자체가 사라지고 넷 컴퓨터(엔시)의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근거있는 추측도 나돌고 있다. 엔시 시스템에서는 인터넷이 퍼스널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버 기능을 하게 되기 때문에 사용자는 워드 프로세서 기능만을 구비하면 된다. 여기서는 현재 퍼스널 컴퓨터의 값을 올리는 주요 원인이 되는 고급 칩이 필요없게 되므로 많은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도 컴퓨터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상황이 그렇다면 컴퓨터 첨단 교육으로 우리가 오늘 얻을 수 있는 것이 볼펜과 노트말고 노트북 컴퓨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강의를 듣는 것이고(몇 과목에 한해서는 재택 수업도 가능하겠지만) 과제물이나 수강 신청을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쯤일 텐데 그 목적으로 전교생에게 일괄해서 노트북 컴퓨터를 사게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빌 게이츠의 약속

 

어쨌든 모두들 말한다. 컴퓨터를 모르고는 과학 문명이 지배하는 시대를 앞서가기는커녕 따라갈 수도 없다고. 그리고 과학 문명의 시대를 앞서가려고 터를 배운 우리들은 빌 게이츠라는 컴퓨터 황제를 부러워하며(아마 컴퓨터 세상을 통해 그 사람이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돈을 부러워하는 것일 테지만) 컴퓨터가 약속한 세상을 꿈꾸고 있다. 어느 심야 토크쇼에서 빌게이츠는 말했다.

 

새로운 세상이 옵니다. 굳이 시장을 가지 않고도 집에서 쇼핑을 할 수 있고 음악회 티켓도 집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영화관에 가지 않고도 새로운 영화를 볼 수 있지요

 

모든 일을 집에서 할 수 있다! 분명히 새로운 세상이다. 그러나 좋은 세상일까? 백화점 세일 기간에는 주변 도로가 자동차로 꽉꽉 막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 집안에서 손끝으로 쇼핑하는 세계는 교통이 막히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세상이기는 할 것이다. 어디 쇼핑뿐일까? 어쩌면 우리는 학교에 가지 않고도 졸업할 수 있으며, 회사에 가지 않고도 월급을 받고, 물리적 처소를 정하지 않고도 만남(?)을 할 수 있는 신기한 세계를 생각보다 일찍 맛볼지 모른다. 방안에 앉아 인터넷으로 모든 세계와 교류하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경험하기 어려웠을 세계를.

 

 

손끝으로 만난 세계

 

컴퓨터 세계가 보증해 주는 세계를 한 번 그려볼까?

아침에 일어난 경이는 허둥대며 학교를 갈 필요가 없다. 그 대신에 블랙 커피를 한잔 들고 우아하게 컴퓨터를 작동시켜서 김교수의 강의를 듣는다. 질문이 있어 자판을 두드렸더니 교수가 곧바로 답변을 보내 왔다. 리포트도 인터넷을 통해 교수의 전자 우편함으로 보내면 되고 성적표는 학기 말에 컴퓨터로 올 것이다.

 

리포트를 쓰려고 굳이 도서관에 갈 필요도 없다. 도서관과 접속하여 필요한 자료를 찾은 뒤에 자료를 주문해서 전송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점심은 미국으로 유학간 남자 친구 창이와 먹기로 약속되어 있다. 가상 현실 식당에 가서 창이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돌아온다. 오늘의 유일한 외출이다.

 

오후에는 인터넷을 접속하여 이태리 디자이너를 만난다. 경이는 그 디자이너가 보여준 자켓이 맘에 들지만 디자인이 너무 단순한 것이 맘에 걸린다. 그래서 단추를 좀더 달아 달라고 특별 주문을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소비자가 생산에도 관여하는 세계의 한 그림이다. 그리곤 곧바로 동경 대학에서 특별 강의하는 세르의 강연장에 참석하고 그 대학 도서관을 둘러본 뒤에 공부를 많이 했다고 위로하고 헐리우드로 발길을, 아니, 손길을 옮긴다. 어제부터 헐리우드에서 배급하기 시작한 가을의 전설를 바로 그방에서 받아보려고.

 

브래도 피트에 매료된 경이는 미국에 있는 창이에게 하나도 미안해 하지 않고 브래도 피트와 가상 현실 데이트를 즐긴다. 그러고 나니 밤 열두시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지만 경이는 너무나 많은 사람과 관계를 가졌다. 강의료, 도서관 사용료, 옷 주문비, 영화 시청료, 브래드 피트 데이트 비용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경이의 통장에서 자동 지출된 것이다.

 

경이는 손끝으로 세계와 관계했던 그 방에서 곤히 쓰러져 잔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또다시 컴퓨터를 작동시킨다. 아니, 컴퓨터의 세계로 들어간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그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소화도 제대로 안되고 머리도 아프고. 큰 병원에 가지 않고 가까운 무인 진료실에 들러 큰 병원 유명 의사의 진료를 로봇을 통해 받은 경이는 의사가 권하는

멀티미디어가 약속하는 세계에서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미디어의 계기로서 존재할 뿐이다. 엑스 세대, 미시족이 부르짖었던 자유개성선언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소비 전쟁의 전리품이었듯이, 멀티미디어에서 사람은 멀티미디어 왕국을 유지시키는 아이디번호일 뿐이다. 이십일 세기가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만남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 세계를 보는 그런 사람이다

운동을 하려고 헬스 클럽으로 차를 몰고 간다. 경이의 행적에서 멀티미디어로 처리된 것은 경이도 모르는 사이에 통장에서 자동 결제가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정보 사회를 유지시키는 힘이 된다.

 

 

멀티미디어와 정보 소비 체제

 

멀티미디어 세계가 화려하게 약속한 것이 있다. 정보 민주 사회가 그것이다. 현재 우리는 정보 사회의 문으로 들어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호흡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정보 사회가 열린다는 것은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에 막대한 부가 가치가 붙는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컴퓨터, 구체적으로는 멀티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의 생산, 소비, 유통 체제가 일대 변혁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가 가치를 만드는 중요한 정보의 유통이 멀티미디어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정보가 멀티미디어 안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될 때에 정보의 유통 구조는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 사회의 구조까지 바뀔 수 있다. 어떻게? 멀티미디어 속에서 정보가 유통된다 함은 정보의 생산, 유통, 소비가 쌍방향적으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여지껏 선보인 방송, 라디오 들의 미디어는 일방향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사회에서는 의사 소통이 쌍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다. 소비자는 방송 프로그램에 빠른 의견을 보낼 수 있으며 직접 관여할 수 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가요 프로에서 제일 위의 가요를 생방송 시간에 집계하는 방법이나 생방송 게임 천국의 원리가 초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직접 관여 방식이다.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지만 정보는 더는 을 위한 정보와 같이 수단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소비 상품이 된다. 이는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 한편으로 얻은 수익이 현대 자동차 한해 매출 결과로 올린 수익보다 많다는 데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월트디즈니사가 에이비시 방송사를 인수했다는 것으로도 읽어 낼 수 있는 것이지만 앞으로 사회는 제조업보다는 정보 산업이 주가 될 것이다. 정보 산업이 제조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가 가치를 생성하게 되면 세계 시장 구조는 대대적으로 개편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단순히 정보 민주주의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미디어에서 일어나는 상호성”, “쌍방성은 민주화와 관계하기보다 정보 소비 양식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보 소비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 상호성이 의미하는 것이 뭘까?

 

 

더는 모래시계신화가 없다.

 

멀티미디어의 사회에서는 미디어 몇 개에 수많은 익명의 수용자가 매달리는구도가 깨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서기 이천년대가 되면 아시아에서 시청할 수 있는 방송 채널의 수효만도 천이백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당연히 시청률 육십 퍼센트 어쩌고 하는 모래시계의 신화는 존재할 수 없다. 천개가 넘는 채널을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는 더는 절대 군주와 같은 권력을 쥔 발신자가 보내는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지리하게 수용하기만 하는 수용자가 아니다.

 

거기에다 멀티미디어에서 소비자는 익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명을 회복한다. 작은 예로 통신의 가입 절차를 생각해 보면 실명을 회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 멀티미디어에서 소비자는 아이디(신분)” 번호로 힘을 행사하며 그것으로 자기의 요구 사항을 기업에 직접 전달하여, 특정한 기업체와 의사 소통을 하면서 생산에 참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른바 앨빈 토플러의 프로슈머”(생산적 소비자 곧 생산자임과 동시에 소비자이며 소비자임과 동시에 생산자인 사람) 개념이 생명력을 갖게 된다.

 

논리적으로는 소비자의 수효가 넘게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소비자는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소비자는 미디어가 발신하는 정보권 안에 있기보다 미디어 자체를 생산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설가는 자기가 쓴 소설을 출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미디어에서 유료로 공개하여 그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직접 팔 수 있으며 의사는 미디어에서 중요한 상담과 진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에 멀티미디어에서 다른 정보의 소비자인 이들은 또한 멀티미디어에서 자기 정보의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때에 정보의 개념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정보 홍수에 떠내려 가는 신세

 

여태까지 정보의 가치는 그 희소성에서 생성되었다. 노하우인 정보는 환금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 세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정보의 폐쇄성이 붕괴된다. 누구나 정보를 가질 수 있고 이용할 수 있고 기존하는 것이면 가공 처리를 하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다.

 

나는 몇해 전에 라디오 심야 생방송 프로에서 고전을 소개하는 코너를 맡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에 그 프로의 원 진행자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곡가였다. 그이는 그때에 벌써 컴퓨터로 작곡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존하는 곡 정보들을 가공 처리하는 그 자체가 새로운 노래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정보의 가치는 희소성이 아닌 과잉성에 의존하게 된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하늘의 별보다도 많은 정보들과 마주칠 수 있다. 그러면 당연히 어디에 어느 정보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다. 지구에서 편안히 살아 온 사람이 우주에 나가면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미아가 되기 쉽듯이 누구에게나 공개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정보, 의미있는 정보를 창출하기보다 안절부절못할 확률이 더 높다. 다만 거기에서 정보를 조합하여, 의미있는 정보를 창출하는 사람만은 성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포르노 사진 몇장의 의미

 

인터넷을 통해 정보 사냥을 해 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이 있다. 인터넷이 실제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은 인터넷을 통해 자동차를 사려 했던 사람의 체험담을 소개했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최신 정보를 믿고 광고를 낸 딜러를 찾아갔지만 현장의 딜러는 인터넷의 가격은 몇 달 전의 것이라며 더욱 값을 올리더라는 것이다.

 

사실 멀티미디어가 가져다준 새로운 세계라는 환상만 믿고 인터넷에 들어가 본 사람들의 솔직한 느낌은 기막힐 정도로 허무하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스럽게 불만을 토로하며 인터넷은 낡고 쓸모없는 정보만 가득찬 대형 휴지통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주인이 우주를 헤매듯이 인터넷을 헤매다 보면 유용한 정보를 얻기보다 우주 미아가 되어 머리만 아픈 경험이 더 친숙할 것이다. 기껏 얻어 오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오락용 프로그램이거나 인격 형성에 도움이 안되는 포르노 그림 몇장이기 쉽고.

 

그러나 바로 그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까지 급속도로 파고들고 있는 멀티미디어 산업은 아직은 유치하고 저급한 오락 산업에서만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시작의 종소리이다. 오락이나 포르노로 시작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을 그 세계로 흡수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자질구레한 상품에서 세계 시장을 석권한 일본이 그 동안 자기들의 경제가 앞서갈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 미국을 두고 당황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세계 전략이 그 동안 일본이 놓쳤었던 멀티미디어 산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티미디어와 뉴미디어는 어떻게 다를까?

 

멀티미디어는 세계를 바꿀 것이다.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는지 알려면 멀티미디어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미디어의 다양한 요소들을 한 기계 안에 모은 것이라는 멀티미디어의 정의는 공허해서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은 멀티미디어는 제품이 아니라 시장 장르에 속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멀티미디어는 신제품이 아니라 기존하는 생활 양식을 전체적으로 바꿀 새로운 생활 양식이며 가치 생성 체계라는 것이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멀티미디어는 인식의 범주이지 개별적 인식이 아니다.

 

하기야 멀티미디어는 제품의 수준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구별해야 할 것은 멀티미디어와 뉴미디어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혼돈스럽게 사용되는 이 개념들은 사실상 차원이 다른 개념들이다. 뉴미디어가 시에이티브이, 위성 방송, 전자 신문 같이 새로운 미디어 장르로서 멀티미디어의 표현 수단이나 일부 제품군일 뿐이라면 멀티미디어는 정보 인프라,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뉴미디어 들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 구조 전부를 가리킨다.

 

가트 체제가 무너지고 새롭게 구축된 더블류티오 체제의 뼈대는 시장의 세계화이며 그 내용은 소위 뉴미디어 전쟁이다. 여기서 현재 멀티미디어 산업 구조의 삼분의 이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이 주도권을 쥔 것이다. 생각해 보자.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영어 배우기 전쟁을. 멀티미디어에 기반해서 미국이 세계 시장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 체제에서 살아남으려고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지, 어디, 영어가 풍기는 그 고매한(?) 향기 때문에 영어를 부러워하나?

 

 

그물에 갇힌 존재

 

정보 그 자체가 어떤 것 곧 상품의 수단이었을 때에 시장이 주어진 것이었다면 정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세계에서 시장은 무한히 팽창을 할 수 있다. 구 원리는 무한 팽창을 하는 우주와 같아서 막을 방도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어떻게?

 

무엇보다도 화면에서 모든 일이 처리되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화면으로 회의를 하고 화면으로 거래를 한다. 표면상으로는 화면을 통해 인간이 하고자 하는 일을 주체적으로 처리하는 듯이 나타나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미디어 바깥을 사적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법률혼주의를 채택하고 이는 나라에서 보는 사실혼과 같다. 같이 살지 않고 혼인 신고만 했어도 본부인이나 본남편이며, 십년이나 이십년을 살았어도 혼인 신고가 되어 있지 않다면 도덕적으로 손가락질 되는 무의미한 정부(情夫)일 뿐이듯이, 미디어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은 사적 언어놀이일 뿐이다. 의미있는 생활은 미디어를 통해 결제 받을 수 있는 삶이며 결제 받지 않는 생활은 단순히 사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사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진실이 숨어있는 실존 공간이라기보다 자본의 확대 재생산의 관점에서 무의미한 그런 공간이다.

 

이렇게 볼 때에 미디어는 단순한 수단을 넘어서 생활 세계 그 자체를 규정하는 막강한 힘이 된다. 중요한 것은 진리나 진실이 아니라 진리라고 인정해 주는 틀, 바로 미디어가 된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는 부차적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화면으로 처리되어 부가 가치가 붙었는가 않았는가다. 메시지는 메시지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메시지가 탄 형식 때문에 힘을 갖는 것이다. 이 때에 미디어는 분명히 푸코의 말을 빌 필요도 없이 권력이며 또한 감시자이다.

 

맥루한의 말처럼 미딩가 메시지다. 예를 들면 소비를 하게 되는 이유, 처소, 가격, 지급 방법이 모두 월도 화이드 웹”(전세계적인 그물)에서 결정된다. 월드 와이드 웹, 이것이야말로 자율적 식민지를 뜻하는 세계화의 궁극적 지향점이 아닐까? 미디어는 단순히 특정한 내용을 전달시키는 매체가 아니라 정보 사회에서 존재 의의를 부가하는 심판관이다. 김춘수의 시 과 같다. “(미디어)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나는 다만 하나의 흔적에 불과했다.

 

내가 한 의미가 되게 하려고 컴퓨터가 돌아가는 메카니즘에 끼어야 하는 세상, 우리는 기술 문명의 이름으로 그 세상을 찬양해야 할까?

 

 

번호로 남겨지는 사람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란 말처럼 모호한 말고 드물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말에 설렌다. 나는 그 말에 기대기를 좋아한다. 그 말에 기대어 있으면 사람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체계나 체제가 보인다.

 

멀티미디어가 약속하는 세계에서 사람은 주인이 아니라 미디어의 계기로서 존재할 뿐이다. 엑스 세대, 미시족이 부르짖었던 자유개성선언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소비 전쟁의 전리품이었듯이, 멀티미디어에서 사람은 멀티미디어 왕국을 유지시키는 아이디번호일 뿐이다. 이십일 세기가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살아 있는 만남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를 통해 세계를 보는 그런 사람이다.

 

담그고 싶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그 세계에서 발을 담글 것이며 그 세계는 분명히 그 세계의 어린 양들에게 정보적 풍요를 누리게 할 것이다. 신문이나 티브이, 위성 방송, 도서관의 비디오 자료도 언제나 관찰할 수 있고, 스포츠 중계를 관람할 때도 쌍방향형 시스템을 통해 시청자가 원하는 위치와 각도로 카메라를 자유롭게 움직여 관람할 수 있다. 또 별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도 세계 최고의 미남, 미녀와 환상적인 데이트를 할 수 있다.

 

확실히 새로운 세상이다. 그러나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내 삶을 걸 수 있다고 하며 들떠도 좋은 세상일까?

 

 

정보는 물 같으나 진실은 공허하다

 

과학 - 기술이 문명의 가장 큰 매력은 원시인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있는 힘을 다해도 피할 수 없었던 엄청난 자연의 파괴력에서 사람을 안전하게 대피시켜 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삶에서 아예 자연성을 빼앗아가 버리고 그리하여 사람을 문명에 사육되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면? 컴퓨터가 약속한 편한 세상으로 문명인은 속여도 원시인은 못 속인다.

나는 표정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주름 하나 없이 나이보다 십여년이 주책없이 젊어보이는, 세월이 비껴 간 사람보다는 세월의 흔적을 표정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살과 피가 도는 사람이 좋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순진함을 내세우는 철없는 사람보다는 희노애락을 이해하는 따뜻한 사람을 좋아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최고 축복은 그런 사람과 친숙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삶은 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 속에 부딪치면서 고통과 사랑을, 기쁨과 슬픔을 체현하게 되고 그 희노애락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의미있는 일이 화면 상으로 처리되는 세계라면? 그 세계는 살과 피가 도는 인간의 삶까지 화면에 가두는 거세된 세계가 아닐까? 정보는 물처럼 흔하지만 진실은 신화처럼 공허한 세계에서 우리는 또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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