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엄마의 인간 선언 - 모성애는 없다?
by 처사21한 엄마의 인간 선언
모성애는 없다?
박 미 라
(여성문화예술기획총무/샘이깊은물 96년 1월호)
이대 입구 전철역이었다. 오후였는데 전철 입구에서 서너살 되어 보이는 아이와 그 엄마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다리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보채고, 엄마는 “나도 힘들단 말이야. 조금만 걸어가자”고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칭얼거리는 아이 때문인지 엄마의 얼굴은 피로와 짜증에 젖어 있었다.
전철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있는데 아까 그 엄마가 아이를 옆구리에 - 무슨 돌돌 만 달력처럼 - 낀 채로 내옆을 지나갔다. 안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기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아이는 아직도 칭얼거리고 있었다. 그 엄마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네 뜻대로 그렇게 편할 것 같니?”
다른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쳤지만 나만은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린아이를 둔 엄마라면 하루에도 몇번씩 아이와 이런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누가 알까? 구 속을. 결국은 아이한테 지고 말 그 뻔한 게임에서 늘 분한 마음을 삭이며 삭이며 살아야 하는 엄마의 짓밟힌 인권을.
엄마의 짓밟힌 인권
또 다른 장면이다. 한여름 기세좋던 태양빛이 한풀 꺾인 저녁에 아파트 베란다로 빨래를 널러 나갔다가 주차장을 가로질러 뛰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그 뒤로 한 엄마가 빗자루를 휘두르며 쫓아갔다. 뭐라고 야단하는 소리 때문에 아파트가 떠들썩해졌다. 아이가 분명히 무슨 사고를 쳤겠지.
다른 사람들이 그 장면을 어떻게 볼까가 궁금해졌다. 요즈음 어린아이 학대가 심심치 않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는데 아이에게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흥분하는 사람은 없을까. 엄마가 교양이 없다고 나무라는 이들은 없을까 했다.
한편으론 정겹기고 하고, 또 한편으론 코미디 장면 같기도 해서 쿡쿡 웃긴 했지만 나는 빗자루를 든 엄마가 느꼈음직한 심정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래, 아무리 어린 자식이라도 저렇게 밉고 화날 때가 있다. 남의 눈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흥분을 해서 길길이 뛰고 싶을 때가 있다. 그걸 누가 알랴. 엄마의 열받은 심정을.
“나는 젖소다”
텔레비전에 보면 정상적인 엄마들은 언제나 상냥하고 너그럽고 자식을 배려하고 신경질내는 법이 별로 없다. 히스테리칼한 엄마는 정신 병력이 있는 특별한 경우로 등장한다. 혼인 전, 친정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에 나는 우리 어머니만큼 비정상적인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늘 자기 문제 때문에 자식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비이성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나는 절대로 우리 어머니 같은 엄마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아 보니 나야말로 낙제점밖에는 줄 수 없는 한심한 엄마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십개월쯤이었다. 독한 감기에 걸려 보채는 바람에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운 적일 있다. 밤새도록 업고 서성거리지 않으면 자지러지게 울기를 사흘, 이 조그만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한숨도 못 자고 이렇게 힘들어 할까 하는 걱정의 느낌도 더는 생기지 않았고 나의 인내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린 시절에 읽은 「아리비안나이트」중에서 꽤 인상깊은 이야기가 있다. 상대방의 동정을 사서 그 사람의 등에 업히고 나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업은 이를 괴롭히는 늙은이 이야기인데 컴컴한 한밤중에 졸린 눈을 치켜뜨고 서성이다가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떠 올렸을까?
남모르게 눈물까지 짜내고 아이를 기르던 나는 마침내 뼈아픈 처세법을 터득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하고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기계다. 나는 젖소다. --나는 아이에게 모유를 주고 있었다 --수면 부족, 외로움, 피곤함 같은 건 감히 느낄 수도 없는 존재다. 내 몸을 완전히 포기하자.”
이런 자기 암시는 엄마로서 느끼는 고통을 완화시키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내 몸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 어쩌면 나는 그때에 득도의 경지에 올랐는지도 모른다.
아이와 엄마의 “고통 분담”
그러나 이 암시 요법도 한계에 부딪혔다. 아무리 내가 사람이 아니라고 최면을 걸더라도 나는 결국 사람인지라 자꾸만 사람의 생각이 머리를 들었다. 하루 종일 좁은 아파트 안에서 아이와 단둘이 있으려면 입에선 곰팡이가 피는 것 같았고, 남들은 지금 쉴새없이 움직이고 또 저만큼 앞서 달려가는데 나는 뭐하는 걸까, 나이는 자꾸 먹어가는데 이렇게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뭔가 하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텐데…하는 온갖 잡념에 사로잡혀 아이와 즐겁게 지낼 수가 없었다. 아이의 조그만 실수에도 폭발하듯이 화를 냈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텔레비전에만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결국에 나는 아이가 열다섯달이 되었을 때에 놀이방에 맡기기 시작했다. 내일을 찾으려고 그랬다. 아이의 행복만 전적으로 배려되고 엄마는 불행한 부모 자식 관계는 정상적이지 못하다. 엄마가 제 몫의 인생을 알아서 챙기지 못하고 아이에게 짜증으로 화풀이하는 것은 정말 못난 모습이다. 그래, 전에 어느 대통령이 역설했듯이 아이와 엄마는 “고통 분담”을 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엄마로서 느끼는 한계를 두고 나혼자만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위의 친구들도 자기 “모성”에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아무도 모르게 자책하고 있었다.
“어떤 땐 감정을 자제할 수가 업어. 아이가 별 것 아닌 실수를 했는데 이름모를 분노가 저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올라 오는 거야, 그럴 땐 아이를 막 때려. 그리고는 자학하고… 왜 이럴까.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잠재운 뒤의 자유
내가 속한 단체에서 진행하는 “여성의 경험 읽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자신의 경험이 사회와 어떻게 맞물려 있으며, 어떻게 여자들의 문제를 치유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자기 성찰 프로그램인데 이 모임에는 대개 삼십대 초반의 여자들이 모였다. 우리는 이 모임에서 여자들의 스트레스와 불만이 아이들에게 일상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알았다. 짜증을 내고 아이를 때리고 자학하고 또다시 짜증내고 하는 생활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로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내가 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하는 문제 때문에 더욱 가중되었다.
그 뿐만 아니다. “지나친 모성애”에서 나왔다고 하는 어머니들의 행동이 굉장한 이기심의 발로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밥 한 숟갈이라고 더 먹이려고 아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거나, 감기 기운이 조금만 있어도 우선 병원부터 찾는 것은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고생”이라는 생활 철학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희경이가 잠을 자면 얼마나 조용조용 소리 조심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한잠이라도 더 재우고 싶은 것은 아이를 아끼는 모성애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가 자는 시간에야말로 육체적으로 나 정신적으로나 엄마가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엄마들은 아이를 재우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아이는 그만큼 예민해진다. 그래도 그런 행동을 이기심이라고 비난하지 않고 “지나친 모성애”쯤으로 평가해 주니 다행이다. 그러니 굳이 변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 수밖에.
오해가 또 하나 있다. 엄마들은 자기의 아이를 두고 지나치게 변명이나 두둔을 하려고 한다. 아이가 너무 낯가림이 심하다거나, 너무 개구짖다거나, 늦되다거나, 울보라거나 또는 아이가 너무 둥글다거나, 길쭉하다거나 하는 평가들을 두고 애써 변명과 설명을 한다. 아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모두 자기 잘못 때문인 양 자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경우를 보건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해서보다는 엄마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하는 자기 변명일 때가 많았다.
천재 엄마까지 되라고 한다.
요즈음은 아이가 제대로 앉기도 전에 영재 교육을 시키라고 부추긴다. “모든 아이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걸 엄마가 어떻게 길러 주느냐에 따라 아이는 천재가 되기도 하고 둔재가 되기도 한다. 곧 모든 건 엄마 책임이다.”가 영재 교육자들의 주장이다. 천재가 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며, 천재가 너무 많은 세상은 생각만해도 끔찍함을 엄마들은 거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책임방기죄에서 벗어나려고 너도 나도 영재 교육에 뛰어든다 갓난아이를 안고 사설 영재 교육 기관에서 영재 테스트를 받으려고 뛰어다니고, 백만원을 호가하는 영재 교구를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아이앞에 쌓아놓는다. 이제 엄마들은 엄마가 아니라 교육자가 됐다.
또 요즈음 부모들에게 잘 알려진 한 교수는 “당신의 자녀가 흔들리고 있다.‘고 외친다. 모든 것이 부모 책임인데 엄마들이 이렇게 자녀 교육에 무지하고 책임감이 없어서야 되겠냐며 개탄한다.
행동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서구 교육 이론이 한국에 수입되고 나서 아이의 습관, 사고 방식, 태도는 모두 어떤 훈련을 받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됐다. 아이들의 모든 행동에 적극적으로 반응해라, “안 돼”하고 말하지 말고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해라, 일관성을 지켜라, 화내지 말고 비난하지 말아라, 아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위험한 것만 제외하고는 모두 하게 해라, 장난감은 되도록 손수 만들어주고 영아기부터 식탁 매너를 가르쳐라, 충분히 사랑을 표현해라,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대해라 하는 국적도 불분명한 교육론이 엄마들의 목을 죄고 있다. 요즈음은 임신 동안의 교육이 아이의 모든 인성을 결정한다며 아우성을 치니 임산부들조차 아이 때문에 바빠하고 죄스러워한다. 그야말로 “엄마 죽이기” 문화가 횡행하는 세상인 것이다.
“원수”같이 미운 자식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면 나는 억울함에 늘 가슴이 답답해지고 목구멍에선 하고 싶은 멍우리가 되어 치밀어 오른다. “엄마도 사람이다!”
애초에 모두 다 교육자로서 길러진 것도 아니고 부모 교육 기관이 따로 있는 모성을 배려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아이가 아픈 것보다는 제 몸 아픈 게 더 급하고, 아이의 억울함보다 내 생각이 더 앞선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후회하고, 그러고도 또 실수할 수 있다. 사오개월부터 시작한다는 이유식 - 왜 그리 죽류도 많고 만들기도 힘든지 -을 제대로 챙긴 엄마보다는 그러지 못한 게으른 엄마가 더 많고, 때로는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람인지라 철저하게 일관성 있는 엄마가 되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다.
치우면 어지르고 또 치우면 다시 어지르고, 물 엎지르고 밥 그릇 뒤집고, 우유 흘리고 하는 이런 일이 반복되면 대번에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고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아이가 너무 미울 때에는 뛰어 다니다가 세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엄마들의 말처럼 자식이 “원수”같이 미울 때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엄마들 자신에게도 아직은 “구만리 같은 미래”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이들의 소유만이 아니다. 우리 한명, 한명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공들여 키워진 존재다. 아이 키우기가 적성에 맞지 않을 때는 남자들처럼 직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받아야 한다.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아이에게도 자생 능력이 있다.
요즈음 엄마들의 이기심을 지적하면서 곧잘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을 들먹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옛날 어머니들은 더더욱 아이 양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맏이가 셋째를 업어 키우고 둘째가 넷째를 길렀다. 눈만 뜨면 부모는 논밭으로 나가고, 아이들은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 또 그때 어머니들에게는 취업을 해야 하거나 자기 영역을 가꾸어야 하거나 하는 삶의 대안이 전혀 없었기에 차라리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완벽한 어머니, 희생으로 가득 찬 어머니가 과연 아이들에게 절대로 필요한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자식들의 존경과 숭앙을 한몸에 받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간혹 듣는다. 그 자식들이 모든 여자를 자기 어머니와 비교하며, 저희들 또래의 친구들이 별로 없어 어머니를 친구 삼아 살고 있으며, 다 자라서 성인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영향력과 말씀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몇몇 알고 있다. 그 어머니도 일평생 자식을 위해 살아왔음을 서슴없이 자신한다. 우리에게 그런 어머니가 과연 필요할까.
일관되기로 치자면 한없이 숨막힐 수 있는 것이 그 일관성이다. 아이가 길거리에서 군것질거리를 요구할 때마다 언제나 단호하게 거절한다면 너무 삭막하다. 아이가 안 좋은 행동을 할 때마다 지적해야 한다면 하루종일 잔소리만 해야 한다. 아이의 기를 살려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언제나 지지해주는 것은 정말 잘 하는 일일까. 아이에게 완벽한 환경이 그렇게도 중요한 일일까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도 자생 능력이 있는데 말이다.
학문과 이론의 멍에
「어머니의 양육과 타인의 양육」의 저자 샌드라 스카는 아동학자이면서 어머니이다. 그 저자는 이 책에서 아이는 일부 교육학자들이 말하듯이 깨지기 쉬운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일 인간이 불행한 사건을 당할 때마다 영구적인 해를 입는다면 인류는 벌써 소멸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흥미있는 예를 제시했다. 팔십이년에 유시엘에이 연구자들이 네 가지 가족 형태 - 독신모 가족, 미혼 가족, 공동체 가족, 핵가족 -을 각각 오십 가구씩 선정해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부모의 양육 태도나 아이들의 발달 정도에서 가족 형태에 따른 차이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곧 지능, 독창성, 호전성, 부모에 대한 애착의 안정성, 활동 수준, 좌절의 견딤, 사회적 능력, 정서적 적응, 성숙도 들을 검사했더니 가족 형태 사이의 차이보다는 개인적인 차이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여자 저자는 현실적으로는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음에도 학문과 이론들이 그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엄마로서 부족함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이들이 거개 그런 부족함을 극복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낙관한다면 나는 우리 시대 엄마들이 왜 완벽하지 못한가보다는 왜 엄마로서 준비되지 못했나. 엄마들의 고도한 짜증과 스트레스는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주목하고 싶다.
엄마가 되자마자 지는 짐
우리 사회 남녀는 입시 교육과 취업 교육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되는 수가 많다. 사회 분위기도 다를 바 없어서 차밍(매력) 교실, 신부 교실은 많아도 제대로 된 부모 준비 교육 기관은 없다. 아이의 출산이 여자들의 진로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으니 아이출생 뒤의 모든 상황이 낯설고 황당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남편들은 만성화된 늦은 퇴근과 술문화에 젖어 아이 양육에 동참할 시간이 없고 언제부턴가 노부모들도 손주 맡아 주기를 꺼리게 됐다. 결국 아이 양육은 과거보다 더 심하게 엄마에게만 집중되어 버렸다. 산전에도 마찬가지지만 산후에도 몸조리할 기관이 제대로 없다. - 나는 전업 주부들도 자기의 건강을 관리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 하루에 두세 시간씩 아이를 맡아줄 시설 탁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말 못하는 아이의 요구를 이해하려고 안절부절못한다. 아이를 달래고 재워가면서 집안을 청소하고, 엄청나게 늘어난 빨래를 하고 기저귀를 삶고, 우유병을 닦고, 음식을 장만하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그러고 나면 하루가 간다. 밤에는 서너번씩 깨서 아이에게 우유병을 물려야 하기 때문에 깊은 잠을 자기 어렵다. 그래도 하루종일 받은 스트레스는 모두 엄마들의 몫이다. 아이를 낳으면서 부부가 하고 있는 일의 내용이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에 남편과의 의사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엄마가 취업을 하고 있을지라도 부담감과 스트레스는 마찬가지이다. 우선 여건이 맞는 탁아 시설이 충분치 않아 아이를 맡기는 것부터가 어렵고, 엄마의 노동 시간이 길기 때문에 아이를 맡기고 찾는 출퇴근 시간에는 언제나 조바심을 내야 한다. 가공 식품은 몸에 안 좋다고 하니 늦은 시간에라도 밥과 반찬은 만들어 먹여야 하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바로 잘 시간이 된다.
아이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
나는 그렇게 살면서도 우리나라의 엄마들이 거의 다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이 놀랍다. 모성 그 자체가 위대하기보다는 오랜 방황과 고통 끝에 강한 엄마가 되어 가는 과정이 위대하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많은 엄마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한 엄마가 자기 아이와 옆집 아일 베란다 밖으로 밀어뜨려서 죽인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내 주위의 엄마들은 아무도 그 여자를 비난하지 못했다. 아이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껴 보지 않은 엄마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여성의 경험 읽기”에 모인 엄마들은 자기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짜증과 스트레스가 자기 혼자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무척이나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사람이기에 개인의 욕구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는 꽤나 홀가분해했다.
엄마들의 인간 선언이 있고 너서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발견했다. 아이를 보는 생각이 달라졌다는 점에서 그랬다. 엄마도 사람인 것처럼 아이도 엄연한 한인격체이고 사람이다. 아이도 욕구가 있으며 그 욕구를 실현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울음으로 그것을 대신하게 된다. 아이의 울음은 짜증이 아니라 언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또 아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하고 천사 같은 존재만은 아니다. 아이들도 그 나름의 생존 전략을 가지고 부모와 역동적인 관계를 이루어 이용할 줄 알며, 때로는 “교활”하거나 악할 수도 있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성모 마리아만 있는 세상
아이의 행동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 아이의 울음과 방향에도 예전처럼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게 되었다. 아이와 하루종일 성심껏 놀아 주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자 오히려 홀가분해져서 시간을 정해 놓고 또는 분량을 정해놓고 그때만은 열심히 놀아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취업을 하고 얼굴이 밝아지자 아이는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엄마로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서 마음이 편해지자 육아가 예전처럼 지옥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우리에겐 우리가 만든 모성관이 필요하다. 혈통 계승이 지상의 목표였던 그런 시대에, 남자들이 전쟁터로 또는 기생집으로 나다니던 시절에 가족을 살리기에 필요했던 그런 모성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우리를 방황하게 만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드는 모성관에는 성모 마리아만 있고 사람이 없는, 자식만 있고 엄마는 없는 그런 불균형은 없어야 한다. ♣
박미라/이대 대학원 여성학과를 졸업하고, 여성신문사 기자로 일했으며 구십오년 삼월부터 “여성 문화 예술 기획”총무로 일하고 있다. 「이혼 - 또하나의 선택」, 「초보 엄마 파이팅」,「기센 여자가 팔자도 좋다」의 공동 집필자이다. 구십일년에 혼인하여 네 살된 딸이 있다.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