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의미
by 처사21직업의 의미
임 희 섭 (고려대, 사회학)
직업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이란 ‘휴식’과 ‘놀이’또는 ‘여가’를 위한 활동을 제외한 모든 ‘생산적인 활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주 어린 아동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공부를 하든지, 집안일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여러 가지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든 ‘일’이 곧 직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직업’이라고 할 때에는 ‘성인들의 일상적인 활동으로서 경제적으로 보상되는 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직업을 성인들의 활동으로 제한하는 것은 미성년자들이 경제적 소득을 목적으로 일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활동으로 ‘제도화’된 것이 아니며, 미성년자들이 장래의 직업을 위해 준비하는 학습 활동은 직업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직업을 성인들의 일상적인 활동이라고 보는 것은 성인들이 휴식과 여가를 위해 보내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생산적인 활동, 즉 일을 위해 사용하고 있을 때에만 그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흔히 일상적인 활동으로서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을 ‘실직자’ 또는 ‘실업자’로 분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제적으로 보상되는 일이 아닐 때에는 직업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주부가 집안 일을 하는 것은 분명히 성인의 일상적인 활동이고 생산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직업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그러한 가사 활동이 경제적 보상을 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은 가사노동도 주부가 아니라 파출부나 가정부가 할 때에는 그 일이 경제적 보수를 받는 일상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그것을 직업이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경제적인 보상을 받지 않으면서도 일상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 그러한 활동은 직업이라기보다는 자원 봉사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자원 봉사자들은 경제적 보상보다는 일 자체에 더 큰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수에 관계없이 생산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직업을 ‘경제적으로 보상받는 성인들의 일상적인 생산 활동’이라고 정의한다고 해서 직업의 개념이 아주 정확하게 규정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아주 나이가 어린 어린이들이 경제적 소득을 위해 일상적으로 일을 하는 일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인 보상을 받으면서도 소득보다는 일 자체를 위해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시간제로 일을 함으로써 일을 일상화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물려받은 재산을 가지고 별다른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집세만 받아 넉넉한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업의 개념을 완벽하게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대체로 성인들이 경제적 소득과 관련해서 수행하고 있는 일상적인 생산적 활동이라고 말함으로써 직업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직업은 거의 모든 개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활동인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성년기를 장래의 직업적 활동을 위한 준비 활동으로 보내고,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은퇴할 때까지 직업적 활동을 계속하는가 하면, 은퇴한 후에도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서 연금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고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평생을 직업과의 관계를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적 활동을 자신의 주된 활동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잠자는 시간과 식사를 하는 시간과, 그리고 여가 시간을 빼놓은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직업적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직업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한 과정이고 삶의 한 현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직업이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직업을 결코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직업을 별 깊은 생각없이 선택하기도 하고, 그럭저럭 남들 하는 대로 적당히 해 나아가면 된다는 식으로 직업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뚜렷한 직업관이나 직업 윤리를 갖지 않은 채로 우리의 직업 활동을 적당히 해 나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직업에 대해 소홀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인생 자체를 소홀히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한 부분을 뚜렷한 목적이나 가치관을 세우지 않은 채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한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이웃이 함께 엮어 나아가는 공동체 생활을 뜻있고 보람있게 살아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직업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직업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성취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우리는 바르고 명확한 직업관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보람있게 영위해 나아가는 지혜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업으로서의 직업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적 활동을 통해서 얻는 소득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은 생업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옛날의 양반이나 귀족들은 일을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계층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생업을 갖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지대, 즉 소작료를 받아 넉넉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생계를 위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신분에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관리가 되거나 기사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생계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부를 축적하거나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또는 귀족으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생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건사회에 있어서의 직업은 상민이나 천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귀족이 아닌 일반 상민이나 노예, 천민들은 그야말로 생계를 위해 힘든 노동을 도맡아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소득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되었으며, 그러한 배경에서 노동 천시(勞動賤視)의 사상이 생겨났던 것이다.
고대 희랍 시대의 문헌들에서도 노동은 고통과 질곡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생산적인 노동은 노예들의 일이었기 때문에 주인을 위해 ‘강제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들에게 일과 노동이란 오직 고통과 질곡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 있어서도 노동이란 다름 아닌 ‘원죄(原罪)’의 결과인 것으로 믿어졌다. 인간은 낙원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범함으로써 인간은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도록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사회에서부터 중세 사회에 이르기까지는 경제적 소득을 목적으로 하거나 생계를 위해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는 활동은 천시되었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활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관과 생업관, 그리고 직업관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과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는 모든 직업적 활동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의 직업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부르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적 활동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직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것이라고 배우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직업적 성공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업에 대해 긍지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직업적 활동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도들은 경제적 소득을 위한 생산적 활동이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생업으로서의 직업 활동에 대해 더 이상 죄의식이나 열등의식을 갖지 않아도 좋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과 노동과 직업을 신성한 의무로써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업 혁명은 더 이상 귀족이나 지주들로 하여금 소작료를 받아 일하지 않고도 호화스럽게 살아 나아갈 수 없도록 경제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산업 사회에 있어서는 더 이상 신분제도가 존속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누구나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통해서 얻는 소득으로 살아가야만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게 한 것이다.
봉건사회에 있어서의 지주는 엄격한 의미에서 직업이라기보다는 신분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주는 생산 수단인 토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가만히 앉아서 지대를 받아 호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으며, 그들의 일상적인 활동은 생산과 관계없는 유한계급으로서의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산업 사회에 있어서의 자본가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자본을 생산에 투자하고 관리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소득을 얻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직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업인이나 경영인과 같은 직업적 일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본가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자본가 중에는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재산소득이나 이자소득만 가지고 살아가는 재산가들도 있다. 그렇지만 특별히 생산적인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일없이 건물이나 토지의 임대료 또는 이자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라기보다는 단순한 재산 소득자에 불과하며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지 못하는 돈 많은 부자일 뿐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는 부동산의 임대료나 사채이자 또는 은행 이자만으로 부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났지만, 그들은 일상적인 활동으로서의 생업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치와 낭비 같은 과시적 소비를 일삼거나 대낮부터 골프나 치고 사우나나 하면서 소일하고 밤에는 유흥가에서 돈을 뿌리는 생활을 하고 있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존재가 되고 있다. 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은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로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단순한 재산 소득자에 비해 자신의 재산을 기업에 투자하고 기업의 경영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기업인으로서의 자본가들은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본가와 경영인이 분리됨으로써 자본가는 주주가 되고 기업 경영은 전문적인 경영인이 맡게 되었지만, 그에 따라 기업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게 된 자본가들도 단순한 재산 소득자들과는 달리 생산 부문에 투자함으로써 경제를 발전시키고 고용 기회를 확대시키는 국민경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소득을 낭비하지 않고 생산에 재투자하거나 사회사업과 문화 활동이 지원 등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자세를 갖는 동안에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산업 사회에 있어서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서는 모든 사람들이 생업으로서의 직업을 갖게 되었으며, 그와 같은 직업 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으로 살아가는 것을 오히려 떳떳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옛날과 같은 노동 천시 사상은 이제 사라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노동이 신성시되는 새로운 노동관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모든 사람은 생업으로서의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직업관이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정당한 노동(일상적인 창조적, 생산적 활동)의 대가로 얻게 되는 깨끗하고 정정당당한 소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직업관이 확립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직업을 단순히 ‘생계의 수단’이라고만 여기는 경제주의적 직업관을 갖게 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직업이란 단순히 생계를 위해 경제적 소득을 얻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야말로 호구지책으로 단순히 그날그날 굶지 않고 먹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물론 직업이란 생계 유지의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가장 큰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어 누구나 직업을 갖게 되면 기본적인 생계가 해결될 수 있고 어느 정도 저축을 해 나아갈 수 있는 수준으로 국민 경제가 향상되면, 직업은 단순히 생계 유지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벗어나서 여러 가지의 보람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활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직업을 통해 사람들은 경제적 소득을 올리고,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나아가는 자아실현의 기회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업적 활동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봉사하여 공헌하는 기회가 되며, 또 직장에서 접촉하는 많은 사람들과의 협동적인 사회 관계에서도 우리는 많은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직업은 생업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지만, 직업의 보람은 단순한 경제적 소득을 얻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직업과 사회적 지위
과거의 전통적인 봉건사회에서는 직업이 곧 그 개인의 신분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서양 봉건사회에서의 귀족은 봉건영주나 기사로서 활동하였으며, 농업이나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상민의 신분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직업이 서열을 가지고 평가되고 있었다. 양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선비 또는 관료가 가장 높은 직업으로 평가되었었다. 관료 가운데에서도 무관보다는 문관을 더 높게 평가하였으며 이러한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을 양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농업을 비롯해서 공업과 상업은 상민들의 직업이었다. 이러한 상민들의 직업 가운데서는 농업을 가장 높이 평가했는데 그것은 농업이 가장 중요한 생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농경 사회에서 농업은 부의 원천이었으나 부는 토지를 소유한 양반들의 차지였고,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 소출의 대부분을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양반들에게 바쳐야 했다.
조선조 중기까지만 해도 공업은 관청에 고용되는 상민들의 직업이었다. 공장(工匠)들은 관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들고 일정한 보수를 받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한편 상인들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 상업에 종사하여 그 중에는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신분으로 보아서는 아주 낮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양반과 상민의 사이에 중인 계급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급 관직이나 기술직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의관(醫官), 역관(譯官), 그리고 기상(氣象)을 보는 관리들과 같이 특별한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나 지방 관아의 육방관속과 같은 향리의 직업은 중인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세습하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관노(官奴), 사노(私奴)와 같은 노비직과 가장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백정(白丁)과 같은 직업은 천민들의 직업으로서 상민들도 종사하지 않는 직업이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신분 사회에 있어서는 직업이 곧 사람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직업에는 귀천에 따른 서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봉건적인 경제 제도가 산업 사회의 시장경제로 바뀌어지면서부터 직업과 신분 또는 직업과 계층의 관계는 크게 약화되고 그에 따라 직업의 귀천 의식도 이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도 직업이 사회적 지위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 것은 물론 아니다. 직업에 따라 소득이나 권력이나 위세 등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도가 높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도 높고, 반대로 소득이 낮거나 사회적 위세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지위가 낮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사회적 지위는 전통 사회에 있어서처럼 신분으로서 세습되는 귀족적 지위가 아니고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획득될 수 있는 지위이기 때문에 그러한 지위의 계층화를 반드시 부당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어떠한 사회든지 모든 사람이 똑같은 소득과 권위와 위세를 누릴 수 있는 완전히 평등한 사회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보상을 받는 사회가 있다면 그러한 사회가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로운 개인의 정당한 노력이 정당하고 공평하게 보상받는 사회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회는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즉 신분제도와 같은 계층간의 장벽이 없는 개방적인 계층 구조를 갖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산업 사회는 완전하게 개방적인 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개방적인 사회구조에 있어서는 직업에 따라 소득과 위세 등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곧 사회적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직업과 사회적 지위와의 관계는 직업의 종류보다는 각 직업 내에서의 종사상의 지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원과 공무원이라고 하는 직업의 종류 사이에는 아무런 지위의 차이가 없지만, 회사원 중에서 간부직에 있는 사람이 공무원으로서 하위직에 있는 사람보다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회사원보다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규모가 큰 농장을 경영하는 농민은 하급직의 회사원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산업 사회에 있어서는 직업의 종류에 따른 사회적 지위의 차이는 거의 없어지는 대신, 각 직업 내에 있어서의 종사상의 지위에 따라 각 개인이 얼마나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고 또 그와 같은 직책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높게 평가되느냐에 의해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정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든 낮든, 일반적으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사회 속의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게 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서로 직업을 묻게 되고, 상대방의 직업적 지위에 의해 그를 대접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상대방의 직함에 따라 ‘김 사장’이라든지 ‘이 부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최 선생’이나 ‘박 경사’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공식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개인의 직업이나 직책이 중요해지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직업적 역할에 의해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특히 그와 같은 공식적인 역할 관계가 중요성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개인이 누구이든 관계없이 의사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환자는 의사 앞에서 어디까지나 환자인 것이다. 버스 운전사는 그 개인이 누구이든 버스 운전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며, 학생은 학생다운 행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가 자신의 직업적 역할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사적인 개인으로서보다는 직업적 역할에 의해 우리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직업적 역할과 지위를 떠나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개인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직장의 일과 관계없는 백화점에 간다거나 음식점에 갔을 때, 또는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가정으로 돌아와 있을 때인 것이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직업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다른 무엇보다도 나의 직업적 지위와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직업은 우리에게 사회 속에서의 위치를 정해 주는 것이며, 직업을 통해 가장 많은 사회 관계를 가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 활동으로부터 은퇴한 사람들이 가장 적응하기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자신의 사회 속의 위치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직업이 없는 사람은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자신의 정체감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으로 고립감과 소외감까지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보다는 남성들, 그리고 노인보다는 장년층의 개인들은 비록 경제적으로 아무런 수입을 얻지 못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사회적 참여와 정체성을 위해 직업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직업과 자아 실현
개인에게 있어서 직업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정당하게 획득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그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해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상 일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보람이 될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경제적 소득을 바라지 않으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일하는 것 자체를 즐기거나 그것을 보람있게 생각하면서 일하기를 원하기도 한다.
필자가 아는 미국의 어느 대학교수는 정년 퇴임을 한 후에 자기가 평생을 봉직했던 학교의 뜰을 청소하는 대가로 약간의 보수를 받으면서 학생들과 토론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대통령이나 수상을 지낸 사람도 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회사의 중역이 되거나 대학의 평교수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열심히 일하면서 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자유중국에서는 퇴직한 전직 장군들이 청소년을 위한 휴양소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자녀들을 다 공부시키고 출가시킨 분이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이처럼 일을 한다는 것, 그리고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며 일 자체에서 얻는 보람이 매우 귀중한 것이다. 이처럼 일하는 것 자체가 큰 보람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일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은 무한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잠재적인 능력은 사용하지 않으면 계발되지 않는 능력은 마치 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지하자원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서 자신 속에 잠재해 있는 다양한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또 그것을 발휘할 수 있다. 똑같은 잠재적 능력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한 사람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데 반해 다른 한 사람을 일하지 않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무엇이든 큰 성과를 거둘 것이고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끊임없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일을 해 나아갈 때 그만큼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이 계발되고 더 발전해 나아가는 것을 보람으로 얻을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자아 계발은 젊을 때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평생 동안 계속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의 보람을 젊은 사람들만의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나이나 형편에 맞게 무엇이든 적당한 일거리를 찾아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신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성취감은 우리에게 큰 보람을 느끼게 해준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의 성과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낀다.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을 자신이 청소한 거리가 깨끗해지고 시민들이 깨끗한 거리를 명랑하게 걷고 있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보람있게 느낄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은 성취의 보람을 갖지 않고 일을 한다면 우리들의 직업은 그야말로 힘든 노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가 돈을 번다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고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돈의 노예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미국의 어느 마라톤 대회에서는 걷지도 못하는 불구자가 참가해서 사흘만에 골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만일 일등을 목표로 했다거나 상금을 목적으로 했다면 처음부터 경기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꼴찌를 하더라고 그 경기에 완주할 것을 목표로 하였고 불구자도 마라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그 경기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목표를 성취하였고 그러한 그의 노력과 성취에 대해서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꼴찌를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을 통해서 돈과 지위가 아닌 보다 더 소중한 다른 보람을 찾고 그것을 차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스스로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성실한 노력을 다하여 그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취의 보람이며 그와 같은 성취가 하나하나 쌓여질 때 우리는 큰 일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큰 성취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실패의 쓴잔을 더 많이 마셔야 할지도 모른다. 운동선수가 먼저 지방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다음에 전국 대회에서 성공을 하게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세계의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꿈을 크게 갖는 것은 좋지만 실력도 쌓아 놓지 않고 무모하게 큰 목표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성실하게 큰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취의 보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아실현의 과정은 또한 창조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항상 전부터 해 오던 방식이나 남들이 모두 하고 있는 방법으로만 일을 해 나아갈 수는 없다. 때로는 나 자신이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 내어 독창적으로 일을 해야 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성공했을 때에는 그것의 창조의 기쁨과 보람을 우리에게 안겨 주기도 한다.
창의적인 문제 해결은 개혁 또는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그러한 혁신을 통해 조직이나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 창의성을 요구하며 창의적인 문제 해결은 혁신을 낳고, 혁신은 발전을 낳는다. 따라서 이와 같은 창조적인 자아실현이야말로 우리에게 커다란 보람을 주는 것이며 직업적 활동은 우리에게 그러한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가 되는 것이다.
화가가 돈과 지위만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러한 화가가 그린 그림은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상품에 불과할 것이다. 창조적인 예술가는 작품의 상업적 가치보다는 예술적 가치의 창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작품을 만들 때 일하는 진정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들의 모든 직업 활동도 그 성과를 금전적 가치의 기준만으로 수행한다면, 우리는 매우 불행한 직업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스스로의 성실한 노력으로 성취의 보람을 누리며, 창의성을 발휘하여 창조의 보람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해 나아간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현명한 직업인으로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직업은 우리에게 고역이 될 수도 있고 보람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직업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 현대인의 직업 윤리 - 삶과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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