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은 양과 음이다
by 처사21자유와 평등은 양과 음이다
이 명 현 (서울대, 철학)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또한 자유롭게 태어났다. 이것은 서구 근대 사회 사상가들의 부르짖음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평등과 자유가 인간의 원칙적 권리로 선언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기에 그것들은 우리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함부로 침해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저 선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닌 저항의 언어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이제까지 사람은 평등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대접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난 사람인 왕과 귀족은 으레 그렇지 못한 아랫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부리고 학대를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등과 자유가 만인의 배꼽에 붙어 나온 권리라는 주장은 너무나 기상천외의 외침이요, 오만스러운 도전의 언어가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당시 그 선언을 통해 확보하고자 한 것은 왕과 귀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생각과 노력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평등은 어디까지나 보통 사람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권리 주장의 전례와 근거로 주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생각과 노력에 따라 꾸려 가는 데 있어서 지배자의 간섭과 억압을 받지 않아야 하는 까닭은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똑같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하며 간섭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원리의 전제 조건과 근거로서 평등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서양 근대 사회 사상가들의 목소리의 참된 뜻이며, 따라서 고전적 자유 사상의 알맹이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주장이 성공을 거두었을 때, 즉 왕과 귀족이 없어진 세상이 되었을 때, 평등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자기 식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평등은 전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말이 아닐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는, 있으나마나 한 빈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남은 것은 자유뿐이었다. 각자 자기의 생각과 능력, 그리고 노력에 따라 자신의 인생의 집을 짓는 데 열을 올렸다. 경쟁이란 다름 아닌 이런 상황에 붙여지는 묘사적 표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타난 결과는 너무나 뻔했다. 어떤 사람들은 큰 집을, 어떤 사람들은 작은 집을 지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큰 집도 작은 집도 짓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생겨났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격차의 폭은 점점 더 커갔다.
사태가 이쯤 되었을 때 사람들은 평등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임금과 귀족만 없어지면 모두가 자유롭게 되며, 그렇게 됨으로써 크는 사람이 평등한 인간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결코 모든 사람이 가진 것이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때 평등은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안 가진 자 사이의 문제라기보다는 돈을 가진 자와 돈을 못 가진 자 사이의 문제로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자유의 원리가 현실적으로 활성화되었을 때 평등의 원리는 현실적으로 매우 부진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을 산출하는 마당이 다름 아닌 자유 시장이었다. 따라서 자유 시장은 경제적 불평등의 중압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그 불평등을 고발하는 지식인들에게 제거해야 될 주된 목표물로 인식되었다.
자유 시장 그것은 곧 평등의 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 시장을 토대로 움직인 결과 생겨난 돈 많이 가진 사람이 이끌어 가는 경제 제도는 평등의 적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경제를 자본주의라는 말로 불렀다. 여기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외연(外延)이 같은 말로 정착되고 말았다. 자유 시장 없는 자본주의도 불가능하며 자본주의 없는 자유 사상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버렸다.
이제 평등의 원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갈 길은 너무나 분명한 것 같이 보였다. 불평등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 시장의 주역인 자본가와 함께 자유 시장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평등의 원리에 열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유란 한갓된 수식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평등의 언어가 자유주의 전통에서 차지하고 있던 그 빈약한 위치와도 흡사했다.
평등 원리의 실현을 기치로 내걸고 이룩된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와 함께 자유 시장을 없애고, 그 대신 통제 경제, 배급 경제 제도를 도입했던 것은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잘 알고 있다. 그와 함께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것은 부르조아 사회의 낡은 가치로 격하됨과 동시에 사회 전체라는 대의 명분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동구 변혁이라는 역사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유와 평등을 둘러싼 사회 체제 전개의 얼개라고 할 수 있다.
어제까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절대 이념으로 떠받들던 나라들에서 자유 시장 경제의 도입을 목청 높여 주장하며 그 활성화를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오늘 동구 변혁의 실상이다. 이제 시장 경제는 살 만한 사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변혁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배제된 사회가 지니게 되는 결함은 비능률과 비효율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나태와 무책임이라는 것을 역사적 실험이 보여주고 있다. 통제와 배급에 의한 경제 운영이 개인들 사이의 경제적 분배의 평등을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데는 효과적이다. 그러나 분배는 생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전제 조건인 생산 활동에 결함이 생길 경우 분배의 평등이란 이념이 지니는 한계는 너무나 자명하다. 극단으로 말해서 ‘궁핍의 평등한 분배’란 것이 인간에게 지고의 이념이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충족하고 싶은 많은 욕구를 지닌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자유 시장은 인간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자극하는 자유의 광장이다. 경제의 효율성과 생산성은 인간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살아 움직일 때 더욱 높아 간다. 어제 공산권에 속했던 나라들에서 자유 시장의 활성화를 통해 이룩하려는 것은 아마도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적 경험은 결코 자유 시장의 활성화가 ‘젖과 꿀이 넘치는 낙원’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고전적 낙관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자유 시장이 자아내는 빈부의 격차를 비롯한 경제적 곤경들을 국가의 개입에 의해 해결하려는 사회적 개입주의를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한결같이 채택해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유의 광장인 시장과 평등을 위한 조정 장치인 사회적 개입, 이 둘의 결합은 하나의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서 있다. 그리하여 모든 극단적 주의들(isms)은 오직 책 속에만 적혀 있을 뿐, 현실 세계에서는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있다. 모든 주의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시각의 극단화의 형식이다.
인간은 결코 나만의 고립적 체계 속에 안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 이외의 수많은 인간들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저 서로 맞물림의 얽힘 속에서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자연은 결코 나의 단순한 먹이의 제공처만 아니다. 자연의 삶 없이 인류의 삶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더욱이나 서구인들은 오랫동안 자연을 정복하여 죽임으로써 인간의 살림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그릇된 환상을 문명의 목표로 삼아 왔다. 인간의 삶은 더불어 있음의 한 과정일 뿐이다. 나 아닌 무수한 인간과 자연의 존재들과 주고받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다. 모든 일방 통행적 관계는 억지요, 오류요, 악이다.
자유는 개체들의 관점에서 본 삶의 원리이다. 평등은 그 개체들의 얽힘의 관계 집합이라는 전체의 관점에서 본 삶의 원리이다. 자유를 양의 원리라 한다면 평등은 음의 원리이다. 양과 음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존재는 다른 하나의 존재를 전제한다. 상대방의 존재를 통해서만 자기됨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같아지는 순간, 모든 것은 끝장난다. 그러므로 양과 음은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닫힌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둘로 있음으로서만 같이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 체계이다.
그러므로 자유와 평등, 어느 한 쪽만을 고집하거나, 한 쪽을 빈 접시로 만들어 버리고 나면 우리의 삶은 홀아버지의 신세이거나 홀어머니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자유가 삶의 생기의 원리라고 한다면, 평등은 삶의 균형의 원리라 할 수 있다.
똑같은 크기의 비둘기장에 갇혀 똑같은 먹이를 공급받는 삶, 그것은 결코 인간의 품위에 어울리는 삶일 수가 없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 ‘가장 불리한 조건에 놓인 사람’을 위한 배려 장치가 없는 사회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가 아니며, 따라서 결코 도덕적인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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