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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과 이범석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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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과 이범석

 

이 기 동 ( 역사학자 )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생각한 민족 해방의 전략-전술론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 점차로 민족의 역량을 쌓아 가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만주 같은 곳에 흩어져 사는 교민들을 무장시켜 당장에 일제에 맞서 독립 투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앞것은 말하자면 점진적인 실력 배양의 이론이요, 뒷것은 즉각적인 무장투쟁의 이론이 되는 셈인데 안창호가 앞이론의 대표자라면 이동휘 장군은 뒷이론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1919년에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그 해 5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만들어졌거니와 안창호나 이동휘 장군도 여기에 참여하여 저마다 중요한 부서를 맡았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임시 정부는 천구백이십년대에 이렇다할 실적을 남기지 못한 채로 공전만 거듭하고 말았다. 이처럼 사정이 악화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던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안창호와 이동휘 장군으로 대표되는 전략-전술 이론의 대립과 갈등이 커다란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된다.

 

한말에 비밀 결사대인 신민회를 만들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두 사람의 전술 대립은 끝내 조정되지 못한 채로 끝나고 말았다. 임시 정부의 파벌에 싫증이 난 안창호는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이동휘 장군은 무력 투쟁 이론을 열렬히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임시 정부의 파벌 싸움에만 열중했다. 그의 무력 투쟁 이론은 만주의 동쪽 끝에 위치한 북간도 지방에서 젊은 사자들의 손으로 과감히 실천되었다.

 

십구 세기 후반부터 많은 교민들이 떼지어 살고 있던 북간도 지방의 공기는 상하이와는 전혀 달랐다. 여기에서는 민족 지사들의 정치 놀음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오직 개척 농민의 절박한 생존 의식이나 국내에서 쫓겨 온 의병 부대의 넘치는 투쟁 의식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처럼 북간도의 풍토와 공기는 신선하였으며 또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2010월에 독립군과 대규모의 일본군이 맞부딪치는, 다시 없을 무장 투쟁이 펼쳐질 수 있었고 한편으로 투쟁을 성공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이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것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때의 독립군 사령관인 김좌진은 서른두 살이었고, 그 밑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던 이범석은 스물한 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사령관을 보좌했던 참모장 나중소만은 쉰여덟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늙은이와 젊은이가 한데 어울려 싸웠다는 점이나 더욱이 한말부터 의병 투쟁에 종사해 온 노장이 젊은 사령관의 부하가 되어 도왔다는 점으로서도 독립군 부대의 발랄하고 건강한 체질을 느낄 수 있다. 이 청산리 싸움 때의 독립군 군가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그때의 분위기를 잘 전해 주고 있다.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을

삼천리 강산에 열혈이 끓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하느님, 저희들 이후에도 천만대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이 한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빛나는 전사를 하게 하소서.

 

김좌진이나 이범석으로 하여금 총을 들고 일본군에 맞서 싸우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내가 바보 같다고 비웃지 말기를 바란다. 물론 그들의 조국애가 그들을 부추겼다는 것은 잘 안다. 다만 이 지극히 추상적인 조국애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것이다. 김좌진은 비명에 갔고 따라서 자서전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석은 김좌진이 간 지 사십 년이 넘게 살아 남아서 심장 장애로 죽기 여섯 달 앞서 회고록 우등불을 세상에 내놓았다. 1971년 겨울에 출판된 이 회고록의 후기에서 이범석은 고백하기를 자기는 거의 청-장년기를 사나운 바람과 눈보라 곁에서 오로지 조국을 괴롭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증오의 철학을 익혔노라고 하였다. 이범석의 이 표현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조국애라고 할 때에는 그처럼 소극적으로 느껴지던 것이 조국을 괴롭힌 자에 대한 증오라고 할 때에는 그 이미지가 강렬해지고 적극적이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가의 출현을 예감할 수 있다. 이 점은 김좌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좌진은 18891124일에 태어났고 이범석은 19001020일에 태어났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들이 태어난 십구 세기 말기는 조선 왕조가 커다란 아픔을 겪던 때였다. 국내의 봉건 체제가 급격히 무너져 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봉건 체제에 대한 반항과 외세에 대한 저항이 이 시대의 정신 사조를 지배하였다. 김좌진이나 이범석은 모두 부유하고 이름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이 거대한 시대 사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충청 남도 홍성 지방의 안동 김씨 집안에 태어난 김좌진은 열대여섯 살 때에 집안 종들을 모두 해방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토지도 거의 다 소작인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전주 이씨의 왕족 가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궁내부와 농-상공부의 고위 관리를 하고 있던 이범석의 아버지도 일찌기 집안 종들을 모두 해방시켰다고 한다. 실로 이범석에게 증오의 철학을 일깨워 준 장본인은 그의 해방된 종이며 나이 많은 벗이었던 정태규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은 노-일전쟁이 끝난 바로 뒤부터 본격화하였다. 1905년에 강제로 맺어진 을사 조약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박탈당했고 다시 두해 뒤에는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항일 구국 운동은 전국에서 유례없이 고조된다. 그때에 김좌진은 십대 후반기에 들어섰으나 을사 조약이 맺어진 해를 앞뒤로 하여 본격적인 구국운동에 투신하고 있음을 본다. 열다섯 살에 종들을 해방시킨 그는 그 이듬해에 고향에 호명 학교를 세워 항일 구국 교육에 열중하는가 하면, 을사 조약이 맺어진 뒤에는 서울에 올라와 그때의 이름있는 항일 단체에 들어가 활동한다.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 사람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회에 들었다. 또 안창호가 만든 청년 학우회에도 가담했다. 또 고향에 돌아와서는 그때의 대표되는 항일 단체였던 대한협회 지부를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은 1910년에 대한 제국이 마침내 일제에 합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이처럼 일찍부터 항일운동에 몸을 던진 데에는 고향의 특수한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홍성 지방은 한말을 통해서 의병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펼쳐진 곳이었다. 김좌진이 일곱 살밖에 안되던 해인 1895년에 민비가 일본인 낭인 패거리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곧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홍성에서도 김좌진의 먼 일가가 되는 김복한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때에 궐기하였다. 특히 김좌진이 열일곱 살 되던 1905년에 을사 조약이 맺어지자 이곳 홍성에서는 또 다시 크게 의병 투쟁이 펼쳐졌다.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 부대가 이듬해 홍주성을 점령하자 일본군은 이를 빼앗기 위해 홍성 읍내로 밀어 닥쳤다. 일본군의 이 의병 토벌 작전에서 많은 양민들이 학살을 당하거나 재산을 잃었다. 이러한 고향에서의 경험들은 김좌진을 혁명가로 만드는 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나라를 잃은 뒤인 1913년에 대한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주로 독립 운동에 절대로 필요한 군자금을 모아서 나라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맡아서 했다. 김좌진은 모금을 위해 부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때로는 협박도 고문도 사양하지 않고 했다. 소년 시절부터 차력을 했다고 하는 김좌진은 힘이 장사였고 또 달리기도 잘했다. 그러나 그는 모금 활동을 벌인 지 두 해만에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세 해 동안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1917년에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곧장 만주로 망명했다.

 

한편으로 이범석은 그가 여덟 살이 되던 1907년에 커다란 충격을 맛보게 된다. , 그의 집에서 해방된 종이었으며 그의 둘도 없는 친구였던 정태규가 의병 투쟁에 나섰다가 학살된 것이었다. 본디 정태규는 이범석의 아버지가 해방시켜 주려 할 때에 처음에는 이를 거부한 사나이였다. , 사대 독자로서 어머니 없이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라는 이범석을 버리고 집을 나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정태규는 이처럼 의리깊은 청년이었으나 그때의 고급 관리였던 이범석의 아버지의 주선으로 서울을 지키는 시위 연대의 병사가 되었는데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선 제1대대의 한 병사로서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범석의 회고에 따르면 정태규는 길에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은 채로 옛 주인의 집인 이범석의 집에까지 기어와서 숨을 거두었다.

 

대체로 보아 이범석은 다정다감한 편이었다. 그가 청년 시절에 이른바 증오의 철학을 익혔다고 해서 그를 오로지 혁명가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실제로 이범석에게서는 저 김좌진이 풍겨 주는 혁명가적인 체취를 느끼기가 어렵다. 그의 자서전에는 그가 젊은 날에 사랑한 말과 사냥 이야기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이 그의 계모 김씨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만주에서 우연히 만나 석달 동안 함께 살았던 러시아 여자 갈리나의 이야기이다. 청산리 전투나 정태규 이야기를 빼면 그의 자서전은 사냥과 여자, 그리고 끝없는 방랑 이야기만 남는 인상인데, 그것마저 아름다운 서사시체로 표현되어 있어 혁명가의 회고록을 읽는다기보다는 차라리 방랑을 주제로 한 무협 소설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범석은 열여섯 살이 되던 1915년 겨울에 국외로 탈출하여 망명하였으므로(그의 망명은 그보다 열한 살이 위인 김좌진보다도 두 해나 더 앞선다) 그때까지 그에게 커다란 자극을 준 사건은 자서전에 달리 보이지 않는다. 오직 정태규의 비극적인 최후만이 잊혀지지 않은 채로 그에게 증오의 철학을 익히게 한다. 물론 그는 합병되던 해에 시내의 사립 장훈 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 위대한 국어 학자에게서 받은 감화도 결코 정태규의 죽음처럼 선명한 인상을 남길 수는 없었던 듯하다. 더우기 그 기간도 짧았다. 이 범석은 1911년에 총독부에 의하여 군수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이천 지방으로 이사하여 이태 동안 소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두 해 뒤에 그는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삼학년 2학기가 되던 1915년 가을에는 첫부인인 김씨와 결혼하였으나 석달 뒤에 망명했다. 이때에 갑자기 망명하게 된 직접 계기가 된 것은 이 해 여름에 한강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여운형의 영향 때문이었다. 민족의 독립 뒤에 두 사람이 정반대의 길을 걸은 것은 역설스러운 일이다.

김좌진은 만주로 망명하자 곧 북간도를 중심으로 교세를 뻗치고 있던 대종교에 몸을 던지게 된다. 그때의 대종교는 이 지방의 교민 사회에는 가장 늦게 전파된 종교였으나 그 열렬한 혁명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애국 지사들의 사이에 크게 인기가 있었다. 그 중심 인물이 서일인데 그는 1921년에 이른바 자유시라고 일컬어졌던 블라고베시첸스크의 참변에 책임을 느끼고 자결한 사람이다. 삼일 운동이 일어난 1919년 팔월에 대종교 간부들은 독립군 부대인 군정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그 뒤에 상하이 임시 정부의 지령에 따라 북로 군정서로 이름이 바뀌어지면서 간부진이 새로이 짜여지게 되었다. 곧 총재에 서일이, 부총재에 현천묵이 뽑혔으나 이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 군부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직은 김좌진이 맡았다.

 

김좌진은 그때에 북간도에 떼지어 살고 있던 교포들 가운데에 열성 분자들을 무장시키면서 한편으로 정예 부대의 육성을 생각하였다. 곧 사관 연성소 설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봄에는 북간도 왕청현 서대파의 십리평이라는 곳에 땅을 마련하고 막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에 북간도에는 학생들을 교육할 마땅한 교관이 없었다. 서간도 지방의 신흥 무관 학교에는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다. , 여기에는 한말에 군부의 장교직에 있던 신팔균이나 삼일 운동 뒤에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온 김광서, 이청천 같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따라서 김좌진은 사관 연성소 개설을 눈 앞에 두고 서간도 지방의 무장 독립군 부대인 서로 군정서에 편지를 띄워 마침 신흥 무관학교에 와 있던 이범석을 부르게 되었다.

 

이범석은 그때에 스무 살을 갓 넘은 젊은이였으나 이미 중국 곤명에 있는 운남 육군 강무 학교 기병과를 일등으로 졸업한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는 앞에서 말한 대로 1915년 겨울에 상하이로 망명한 뒤에 그의 손위 매부가 되는 신석우의 소개로 저명한 민족 지도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특히 신규식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앞날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한말의 육군 중위 출신이었던 신규식은 그 뒤에 임정의 파벌 싸움에 실망하여 자결한 사람인데 그때에 손문과도 가깝게 알고 지냈다. 이범석은 때로는 신규식이 손문에게 보내는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고, 군관예비 학교인 항주체육학교에서 여섯 달 동안 공부한 뒤에는 신규식의 주선으로 1916년 가을에 운남 육군 강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에 열일곱 살이었던 이범석은 두 살이나 나이를 올려서 입학하였다고 한다. 19193월에 이 학교를 졸업하자 기병 연대에 배속되어 견습 사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가운데 이해 5월 말에 이르러 비로소 삼일 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자 그는 사표를 내고 상하이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때에 임시 정부를 휩쓸고 있던 파벌 풍조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만주에 가서 항일 유격전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가을에 서간도에 온 이범석은 이시영의 주선으로 신흥 무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 31일 압록강을 건너 후창, 자성, 혜산진에 진입할 계획을 세우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그 교육 훈련을 맡았다. 그러나 이 거사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범석은 그 동안에 이 결사대 요원들에게 거짓말을 한 결과가 되어 실의와 신경 과민 끝에 극약을 먹고 음독 자살까지 기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마저 실패로 돌아가 한없는 허탈감에 빠져 있을 때에 마침 김좌진의 편지를 받았다.

 

이범석은 곧 북간도에 달려가서 북로 군정서의 사관 연성소 창립에 가담했다. 연성소는 이해 5월에 육백 명쯤의 학생으로 개소식을 올렸고 6월에는 본격적인 교육과 훈련에 들어갔다. 이범석은 김좌진이 소장을 겸하고 있는 이 연성소의 주임 교관이 되어 교육과 훈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사관 연성소에 대한 귀중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크게 참고가 된다. , 김좌진의 비서처럼 일하던 한학자 이정이 작성한 사령부 일지가 그것인데 이것은 이해 71일부터 913일 사이에 일어난 사관 연성소 안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일지에 따르면 이범석은 때때로 학도 중대장직도 겸임했다. 그러나 그것은 석달 남짓한 짧은 기간으로 끝나고 만다.

 

그때의 일본 정부는 소련의 레닌 정부에 저항하는 반정부군 이른바 백군을 돕는다는 구실과 소련군에 의해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체코군 병사들을 구원하겠다는 구실로 시베리아에 출병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정부군은 레닌 정부의 이른바 적군에 의해 곳곳에서 진압되는 판국에 있었고 한편 체코슬로바키아군 구원의 명분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점차로 흐려지게 되어 처음의 출병 목적을 체코슬로바키아군 구원에서 한국과 만주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막는 것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앞으로 시베리아에서 철병하기 전에 블라디보스톡 파견군을 이용하여 연해주 일대와 나아가서는 북만주 지방의 무장한 한국 독립군을 섬멸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리하여 북로 군정서의 사관 연성소가 개설되던 1920년 여름부터 일제 당국은 장작림을 위협하고 공갈하여 장의 책임 아래에 한국 독립군의 무장 해제와 그 철수를 강행하게 하였다. 장작림은 일제의 노골적인 간섭에 마음 속으로 반발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따라서 이해 96일에 그가 보낸 이백 명쯤의 지방 군대는 서대파의 사관 연성소에 와서 자기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이에 사관 연성소는 열흘안으로 이동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군은 이제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연해주 지방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결코 안전을 도모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거기에는 일본군이 많이 주둔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곳은 치타에 수도를 두고 있는 이른바 극동 공화국의 지배 영역이기도 했다. 이 공화국은 레닌 정부와 일본군 점령군과의 완충국으로서 성립되었으나 그 색채는 두드러지게 공산주의적이었다. 사정이 이처럼 절박한 국면에 이르자 독립군은 국내로 쳐들어 갈 것을 결정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일본군과 대결하여 최후의 싸움을 한 것이다. 그들은 자폭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이해 99일에 사관 연성소는 필업식을 갖고 삼백열 명의 졸업생을 내 놓았다. 이 가운데에 이백 명으로 교성대를 편성하였거니와 이범석은 그 중대장에 취임했다. 이 교성대야말로 북로 군정서의 핵심 부대였고 동시에 청산리 싸움의 수훈 부대였다. 북로 군정서의 모든 대원들을 그 동안에 체코슬로바키아 병사들로부터 남모르게 사들인 우수한 무기로 완전무장을 했다. 이범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에 독립군이 소유한 무기는 소총 천 이백 정, 기관총 여섯 정, 박격포 두 문, 탄약 팔십만 발이었으며 그밖에 수류탄과 권총이 얼마쯤이 있었다. 한말 의병들이 가졌던 화승총과는 견줄 수 없는 우수한 무기들이었다. 독립군은 이달 14일에 서대파를 떠나 백두산을 목표로 삼아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5일에는 마침내 밀림으로 뒤덮인 청산리 협곡에 이르렀다. 이곳은 바로 백두산을 눈 앞에 둔 국경 지대였다.

그때에 일제 당국은 장작림 정권의 독립군에 대한 단속이 철저하지 못한 데에 불만을 품고 이 기회에 바로 일본군이 북간도에 출동하여 독립군을 크게 토벌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조작된 것이 102일의 이른바 훈춘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구실로 삼아 육군 항공대를 포함한 일본군의 대부대가 북간도에 출병하였다. 그때에 출동한 일본군 부대를 보면, 우선 함경도 나남에 주둔한 조선군 밑의 제19사단 병력을 주력으로 하여 이를 국경 지대로 북상시키고, 시베리아에 주둔한 이른바 우라지오 파견군 가운데에 제11사단의 일부와 제13사단의 한 보병연대와 제14사단의 제28여단을 동원하여 북간도 방면으로 진주함과 함께 독립군이 연해주로 빠져 나가는 통로를 막게 했다. 또 관동군 밑의 독립 수비대 가운데에 공주령의 제 20기병 연대와 철령의 제19보병 연대를 동원하여 서간도 일대의 독립군 기지를 파괴함과 동시에 북간도의 독립군이 서간도로 넘어오지 못하게 통로를 막아 버렸다. 이처럼 일본군은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큰 병력을 북간도에 쏟아 넣었을 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신형 장비와 화학 무기까지도 준비했다.

 

1020일에 미리 청산리 계곡에 숨어있던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를 받는 독립군은 다가오는 일본군 전위부대에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이렇게 시작된 청산리 싸움은 23일까지 나흘 동안에 걸쳐서 육십 리가 넘는 계곡을 끼고 여남은 차례의 크고 작은 격전을 치른 끝에 독립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일본군은 제19사단 기병 연대장 가노 대령이 전사한 것을 포함하여 천 명쯤이 이 전투에서 죽었다. 현지 일본 영사관의 비밀보고에는 구백 명이라 하였으나 상하이 임정 군무부가 발표한 천 이백 명 사살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범석은 회고록에서 부상자까지 포함하여 사상자 숫자를 삼천 삼백 명이라 하였다. 우리 독립군은 여기서 육십 명쯤이 죽고 구십 명쯤이 부상을 입었다. 이것은 세계 유격전 역사에 보기드문 큰 전과였다.

 

이 격전이 있은 다음에 독립군은 일본군의 감시망을 피하여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극동 공화국 정부의 무장 해제 요구뿐이었고 이른바 자유시 참변이 뒤따라 일어났다. 사정이 이처럼 절박해지자 김좌진과 이범석은 빈 몸으로 다시 만주에 숨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만주 지방에서의 독립군에 대한 감시와 취체는 점차로 삼엄해졌고 이제는 무장 투쟁은 도저히 불가능한 형편이 되었다. 그동안에 상하이 임시 정부로부터는 김좌진에게 군무 총장의 직책과 국무위원의 직책을 내린다는 통고가 있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오직 교포의 단합과 그 보호를 사명으로 하는 교민 사업에만 열중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가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던 가운데에 1930년 정월에 마흔두 살을 맞은 그는 집 앞 정미소 발동기의 고장을 수리하다가 옛날 부하였던 사람의 권총 저격을 받고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으로 이범석은 1920년대에 김좌진과의 직접 접촉이 끊어진 채로 (1925년 무렵에 한 차례 만난 일이 있으나) 만주와 외몽고에서 사냥으로 날을 보내게 된다. 때로는 장종창과 같은 거물 군벌 두목 밑에서 일하기도 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 뒤에는 항일 운동의 거두 마점산을 돕기도 했다. 그 뒤로 중국군의 고급 장교를 거친 이범석은 1940년에 임시 정부 중앙군으로서의 광복군이 창설되자 초대 참모장에 취임함으로써 오랜 방랑의 막을 내렸다. 독립 뒤에 이범석은 조선 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였고 정부 수립 뒤에는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의 자리를 함께 맡기도 하고 여러 고위직을 맡기도 했으나 정치가로서의 이범석이 반드시 성공적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정치가의 소질은 없었다. 그는 너무나 직선적이었고 저돌적이었으며 또 단순하였다. 그가 정치의 세계에서 낙제생 노릇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2511일에 일흔세 살로 죽기 얼마 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회고록에 쓸 수 있었다. “나에게도 결과로 보아 잘못된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언제나 개인의 를 위해서 을 해쳤다고는 꿈에도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 이 땅의 사람들, 뿌리 깊은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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