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사회신분구조의 변동
by 처사21조선후기 사회신분구조의 변동
조상제․권인혁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그 시기에 따라 이론이 없진 않지만, 대체로 양반․중인․양인․천민의 네 신분계층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 신분에 따라 지위나 직업․대우 등이 다르고, 납세․군역의 의무에도 후박(厚薄)이 있고 형벌에도 차별을 두었음은 물론, 주거․의복․혼인 등 일상생활과 거주지까지도 일정한 규격과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이 시대의 여러 가지 제도와 기구의 운영에 기본적인 표준이 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동일 신분 자체 내에 있어서도 상층과 하층의 차별과 적출․서얼의 차별대우를 하여 그들의 국가에 대한 의무종속의 한계를 세분하고 피지배층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을 조장하여 봉건통치에 편의를 도모하는 역할을 하여 봉건사회 유지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분제도의 붕괴는 곧 봉건사회 붕괴의 단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조선 양반사회의 위기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18,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농민층의 경제적 계층분화와 더불어 사회구성의 변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어 갔다. 한 일본인의 연구에 의하면, 대구시 일부와 달성군 일부에서는 양반 호수가 숙종 때의 8.3%에서 철종 때의 65.5%로 대폭적인 증가를 이루고 그 가운데서 정조 이후가 30.8%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와 반대로 상민호는 감소되어 철종 때에는 32.8%, 노비호는 급격히 감소되어 1.7%로 되어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신분제도가 해이되면서 점차 평등사회로 지향하고 있는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 정석종의 연구에 의하면, 계층별 인구 백분비의 경향이 18세기 초에는 양반층이 약 19%, 상민층이 약 50%, 노비층이 약 31%로 정상적인 인구분포를 이루고 있던 것이 19세기 초에는 양반이 약 44%, 상민이 약 34%, 노비층이 약 14%로 그 역현상이 심화되어 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상으로서 양반호의 증가, 상민호의 감소, 노비호의 격감으로 실질적인 소멸 현상을 볼 수 있으며, 18, 19세기의 격심한 계층이동 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같은 양반호의 증대는 상민․노비층의 상급신분에로의 끊임없는 상승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이며, 그와 더불어 양반층은 그 기존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지 않을 수 없는 반면, 그만큼 농민층의 지위가 점차 향상되어 갔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심한 계층이동을 가능하게 한 실제적인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신분상승의 방법면에서 고찰해 보면, 국가권력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말단관리와 일반농민의 뇌물거래를 통해서 비합법적으로 수행되기도 하였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임진왜란 때 국가재정의 고갈과 군량미의 부족을 보충하려는 임시조치로서 시작된 납속정책에 따른 것으로, 납속제를 통하여 농민들이 취득한 관직은 노직(老職)․증직(贈職)․영직(影職)․가설직(加設職) 등이었다. 이러한 납속제는 전쟁 뒤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19세기 중엽에 이르러는 흉년의 계속으로 국가에서는 진휼(賑恤)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더욱이 국가재정이 탕진되어 공명첩까지 매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를 논함에 있어서 현종 때의 ‘돈 내고 노비 면하기’ 문제, 노비종모법의 실시, 순조 원년(1801)에 내시(內․寺)노비 6만여명을 일시에 혁파한 사실 등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시기에 신분상승을 위하여 현실적으로 얼마만한 비용이 필요하였던가를 살펴 보기로 한다. 양반 직역(職役)을 취득하고 양반신분을 행세하는 데에는 납속정책에 응모하는 것이 첩경이었는 바, 이 납속 정책에는 수직(授職)의 대가를 납속사목(納粟事目)으로서 정하고 있어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종 원년과 2년의 모곡별단(募穀別單)에 가설직의 주부(主簿) 및 찰방(察訪)․판관(判官)․첨정(僉正)․첨지(僉知)․동지(同知)의 대가가 쌀로 각각 12석과 10석․15석, 11석․8석, 13석․40석, 30석․50석, 40석인 것이 그것이다. 영조 8년의 권분부민 시상절목(勸分富民施賞節目)에는 판관․주부․찰방의 대가가 조(租)로서 백석 이상, 동지․첨지의 대가가 천석 이상인 것으로 피곡(皮穀)으로는 전자가 40석, 후자가 400석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납속사목에서의 면천(免賤)에 대한 대가를 보면, 명종 때에는 종량(從良)을 받는데 필요한 곡식량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대략 50석에서 100석 사이의 분량이었다. 영조 20년의 『속대전』에 이르러서는 공․사노비의 속량가를 100냥까지로 정하고 있는 바, 이 시기의 쌀값을 1석 7냥으로 보면, 대략 쌀 14석 정도로써 천민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합리적인 방법으로는 당시의 국가 기강의 해이 속에서 자행된 것으로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타 신분에의 모거(冒擧) 현상으로, 여기에는 평민층이나 천민층이 양반층 또는 평민층으로 상승해간 현상으로서 관직을 모칭하거나 유학․공신 후예․교생․양민 등을 가칭한 것과 둘째, 평민층이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권력자의 종으로 투속하여 간 현상이 있었다. 셋째로, 위보(= 족보 위조)를 통한 양반층으로의 상승도 성행하였는 바, 정약용은 ‘오늘날 천류간민이 위보를 조작하여 충의를 모거하는 경우가 심히 많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과거 합격증인 홍패(紅牌)를 위조하여 매매한 경우도 볼 수 있으니
「근래에 御寶를 위조하고 科名을 위작하고 紅牌를 위조한다. 이런 일을 하는 무리들은 법을 두려워 않고 즐겨 죽을 죄를 범하고 발각되더라도 이를 다반사(茶飯事)로 안다」 《 우포청등록 3 》기미(1859) 4월 7일
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것은 유학(幼學)을 모칭한 층들이 그들이 획득한(=얻은, 애써 얻은) 신분을 보다 확실한 근거에 의하여 보증받는 작업에도 혈안이 되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함으로써 또는 과거응시 자체가 양반신분을 확증하는 방편이 됨으로써 이를 중시하였던 것이니, 순조 연간 과거응시에 몰려든 인파로 인하여 서울 근교의 길거리가 메워지던 사실이 그러한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넷째로는, 도망 노비수의 급격한 증가를 볼 수 있는 바, 그것은 이 시기 지배체제의 붕괴로 인하여 농민에 대한 봉건적 속박이 해이되었던(=풀어졌던) 점,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진 그들 자신의 성장, 그리고 유통경제의 발달과 결부되어(=더불어) 나타난 것이었다. 울산 호적대장을 중심으로 솔거노비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노비총수에 대한 도망․타거주 노비 소유호의 추이(=변화)가 18세기 초의 5.63%에서 19세기 초에는 16.17%로, 중엽에는 28.7%로 증가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노비에 대한 추쇄(推刷)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인 여건과 노비층의 힘이 그만큼 성장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러한 합법적․비합법적인 조치가, 마치 사소한 원칙이 무너지고 보면 그것이 전례(=본보기)가 되어 전체가 동요되는 바와 같이, 특히 조선후기 국가 지배체제의 해이를 계기로 한층 더 신분제의 붕괴가 극도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신분상승과 그 경제적 배경이 되고 있는 농지 소유관계를 경상도상주의 양안(量案) 분석에서 살펴보면, 평민 신분에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한 기주는 84명으로 이들의 평균 소유 농지면적은 81부 9속인 바, 양반기주 전체의 평균 소경 78부 1속과 평민기주 전체의 평균 소경 41부와 비교할 때 확실히 그것은 부(富)의 축적이 가능한 중농층의 농지면적인 것이며, 그리고 신분변동이 농지소유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계층간의 상승에서도 비슷하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신분상승을 이룬 기주들의 계층내부에서도 심한 분화가 전개되었던 것이니, 즉 1결 이상의 부농층과 생계유지도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는 25부 이하의 빈농층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피지배층 내에서 경제적으로 성장한 부농층이 양반신분으로 변화 상승하는 현상과 더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왜냐 하면 이 시기의 조선왕조는 봉건적인 사회경제질서 즉, 신분관계를 통하여 사회를 상하관계로 질서화하고, 지주․전호(佃戶)제를 통해서 농민대중을 경제적으로 지배통제하는 질서 위에 수립되어 있었는데, 양반작인의 확대는 이러한 사회경제질서를 파탄시켜 가는 까닭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분이 높을수록 그 경제적 부도 비례하여 증대되었던 봉건적인 신분질서를 전면적으로 해체시켜가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목민심서’에서는
「辛亥(1731)이후 한결같이 귀족은 날로 시들어가고 천민은 날로 횡포해져서 상하의 질서가 문란하여 교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한번 變亂이 일어나면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스러지는 형세를 능히 막지 못할 것이다.」<목민심서 역주본 Ⅳ>
라고 하였으며, 나아가 몰락양반들이 이서(吏胥)층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
「혹 貧寒士族이 그 진정을 호소하면 발길로 차고 나무끝에 거꾸로 매달고 규방으로 돌입하여 서가를 뒤지고, 부녀자가 놀라고 두려워서 머리를 박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으면 吏胥는 그 등을 타고 서서 다락을 뒤져 그 전답문권을 탈취하거나 비단 옷감을 가져간다. 슬피 호소하고 번거로이 원망함이 측은하고 슬프다.」
< 경세유표, 지관수제, 전제 8, 여유당전서 5 >
고 하는 형편이었다. 이들 몰락양반층은 일반농민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며, 현실 생활면에서는 오히려 그들보다 못할 정도로 전락된 경우도 있어 당시의 집권층에 대한 불만이 증대되어 갔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가지고 현실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러한 것은 당시의 농민봉기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것은 진주 농민봉기 시(=때)에 초군의 좌상으로 추대된 이철열의 신분도 이러한 몰락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배후조종 인물로 지목되어 고금도로 유배되었던 이명윤도 이탁의 5세속으로 이탁 이후 벼슬이 막혀 가세가 기울어지자 진주에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 것을 보아 실권(=권세 잃은) 세력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들 몰락양반층 가운데는 생활에 몰려 승려, 지사(地師)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매문(賣文)으로 자생(資生 : 사는 데 드는 돈을 대는)하는 유랑(=떠돌이) 지식층이 되어 거처가 일정치 않은 자가 증가되었던 사실들이 그러한 사정을 대변해 준다. 한편 경제적 성장을 기반으로 신분상승을 한 요호부민층(饒戶富民層)과 양반관료 체제 특히 지방관 사이와의 모순의 격화도 간과할 수 없겠다. 그들은 신분이나 특권에 의하여 경제력을 축적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재능이나 근면을 기초로 하여 경제력을 축적하였으므로 지방관의 가렴주구의 주된 대상이 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의 고통은 컸다. 따라서 국가적 토지소유를 지렛대로 한 지방관의 중간 수탈을 배제하는 것이 스스로의 안정된 성장을 위해서 필수적인 조건이었던 것이고, 여기서 그들은 지방관과 대립하여 대다수의 영세 빈농층과 그 궤도를 같이할 수 있었던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후의 철종 조(=때) 농민항쟁 등의 일련의 움직임에서 요호부민층의 동향도 이와 같은 모순의 격화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19세기 중엽 이상과 같은 경제적 계층분화와 더불어 신분질서의 변동, 그리고 동일계층 내부에서의 심한 분화는 새로이 부상하는 사회세력을 재편성하지도 못하고, 게다가 광범한 몰락 양반층이 형성되는 가운데 계층간의 갈등․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조선 봉건질서의 유지에 중대한 기능을 수행하여 왔던 유교적 가치기준도, 경제력이라는 물질적 가치가 중대하게(=크게) 대두되는(=나타난) 현실에서, 동요하게 되어 지배층의 권위도 상대적 지위로 전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이러한 가치관의 혼탁상태는 당시의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구심점을 상실하여 사회적 불안을 더욱 조성하여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후기 양반층 인구가 전체의 약 65~67%에 달하고 있음은 일면으로는 농민층의 성장 과정에서 봉건적 사회체제가 해체되어 점차 근대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사실을 의미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그만큼 잔존한 영세 농민층에게는 그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사실을 말해준다. 헌종 때의 예를 들어보면,
「옛날 첨군법에는 백성의 호적을 편성하는데 혹 장정을 누락시킴이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중략) 허다한 명목으로 모두가 역을 면하나, 다만 잔민으로 편첨함으로써 한 사람이 혹 3~4인 역의 어려움을 겸하게 된다.」 <일성록,헌종11년 1월10일>
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빈익빈하는 사회적인 현상과 그들을 더욱 강하게 동일한 계층의식으로 결속시키는 일면을 찾아볼 수 있겠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광범한 양반층의 증가현상과 더불어 평민과 천민의 구분은 말할 나위없이 양평(兩․平 : 양반과 평민) 간의 구분도 의미없게 되고, 양반층은 이전의 절대적인 지위에서 상대적 지위로 전락되는 반면, 농민층은 그 지위가 향상되어 근대적 평등사회로 점차(=조금씩) 이행되어(=옮겨) 가면서 그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추세를 간파한 정약용은 봉건적인 신분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사회를 구상하여
「중국에 생원이 있듯이 조선에는 양반이 있다. 고정림이 온 천하가 생원이 되고 있는 것을 우려한 바와 같이 나는 온 나라가 양반이 되고 있는 것을 우려한다. (중략)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바라는 바가 있는 즉, 온 나라가 양반이 되어 곧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여유당전서 1>
라고 말하였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농민층의 경제적 계층 분화에 의하여 사회 신분 구성의 변동이 합법적, 비합법적인 방법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 어느 방법에 의한 것이든 거기에는 농민층의 경제적 실력이 전제되고 있었고, 19세기 중엽에는 양반층이 65%를 넘는 신분변동 속에 계층간의 알력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다수의 몰락 양반층의 존재는 현실적으로 양반․평민․천민 사이에 종래의 엄격한 계층구분을 무의미하게 하여 농민층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향상되고, 또한 절대적으로도 그들의 지위는 위의 신분변동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그 시기의 사회적 모순에 항거하면서 인간 본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유교적 가치기준은 경제적 실력이 우선되는 현실에서 와해되어 당시의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여 갔으며, 계층간 이동과 동일계층 내에서의 분화가 격심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빈부간 그리고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갈등은 심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 중 양반층 내에서의 다수의 몰락 양반층의 존재와 경제적 실력증대를 기반으로 신분 상승을 한 요호부민층의 동향은 이 시기 농민항쟁의 주체세력을 형성한 절대 다수의 영세농과 상호 일치점을 가지게 되고, 여기서 그들 중의 일부는 항쟁 초기에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 한국근대농민항쟁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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