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과거, 오늘 그리고 미래
by 처사21사람의 과거, 오늘 그리고 미래
리키, 레윈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돌
아프리카 케냐에 투르카나(이전에는 루돌프 호라고 불렀음)라는 호수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백만 년 전, 그 동쪽 해안 근처에 있었던 야외 거주지에서 어느 원시인이 물에 닳아 매끄러워진 돌을 주워서 잘 다듬어 도구를 만들었다. 예전에는 자연의 작용에 의한 우연의 산물에 불과했던 것에 이제 의도적인 가공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돌은 나무 뿌리를 파내기 위한 막대기를 만들거나 동물의 시체로부터 살을 도려내는 데 쓰일 수 있게 되었다. 만든 사람에 의해 곧 버려졌지만, 석기는 우리를 우리의 조상들과 이어주는 끊을 수 없는 고리로서 현존하고 있으며 다른 많은 석기들과 함께 나이로 비에 위치한 케냐 국립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 도구를 만들었던 손, 그 도구를 만들고자 생각했던 마음이 우리에게 유전적으로 전해져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이 설렘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도 그 도구를 가질 수 있으며, 그 마음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는 데는 우리를 끊임없이 흥분시키는 불가피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전문가든 아니든 상관없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과거에 관해서, 즉 사고와 감정을 지닌 문화적 동물이 어떻게 해서 유인원화 비슷한 원시적인 조상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는가에 관한 보편적인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리라. 어떠한 진화적 상황이 원래의 유인원을 키가 크고 직립하는 지적 생물로 변화시켜 마침내 과학 기술과 판단력을 통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이 질문은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고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끝나 버릴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어떤 동물인가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푸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랜 조상들 마음 속에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이래, 인류(혹은 선인류)는 자신들과 바깥 세상 사이의 관계를 계속 생각해 왔다. 우리는, 약 1백만 년 전 초기 인류가 자신들의 주위 환경에 필수 불가결한 일부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수렵 채집인이었으며 자기들이 사는 세계를 존중했기 때문에 생존이 가능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보다 괘적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옛날부터 내려오는 인간적 관례―다양한 방법으로 위대한 자연의 힘에 호소한다는―를 이미 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대인,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용어는 호모 사피엔스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서 오늘날 현존하는 모든 종족은 이 아종에 속한다.]가 출현했다. 만약 외계인이 현대인을 관찰한다면 틀림없이 심술궂고 사악한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서로 전쟁을 한다. 또한 환경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낭비는 도저히 그칠 것 같지 않다. 인간은 또한 나라 안팎으로 만연된 의도적인 불평등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무시하려고 든다. 어떤 의미로는 현재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것은 인류이며, 인류는 그 뛰어난 창조적 능력으로 바란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구 밖의 관찰자들은 아마도 이 지상의 통치자들을 머리가 약간 돈 사람들로 생각할 것이다.
인류는 협동적인 동물이었다
우리가 돌아 버린 게 아니라면, 그리고 스스로를 미치지 않았다고 여긴다면, 인루가 어찌하여 이토록 급속히 자멸에의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인류라는 종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지나치게 진화해 버린, 어쩌면 심각한 생물학적 실패작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과학자, 극작가 들은 인류가 자멸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원인을 설명해 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트 교수, 로렌쯔박사 및 그 밖의 주창자들이 과학적인 믿음을 주고, 극작가인 아드리가 대중화한 견해, 즉 인간은 매우 공격적이라는 설이 제시되었다.
공격성 이론은, 우리도 동물의 피를 이어받은 이상 공격적 본능을 지녔으며 또한 그 본능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의 우리가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채식을 하던 유인원적 동물이기를 포기하고, 동물뿐 아니라 인간 상호간에도 서로 먹고 싶어하는 살륙자가 되었다는 되었다는 설명으로 뒷받침된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좀더 중요한 점은 이것이 사회로 하여금 이 세상의 악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 그것도 아주 위험스런 거짓이다.
인간이 동물 왕국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몸집이 큰 영장유가 지니는 일반적 식습관으로부터 벗어나 육식을 꽤나 즐기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근거로, 전인류가 살기 위해 수렵에 열중했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살해 본능을 지녔다는 생물학적 결론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 즉 우리의 조상들이 매우 협동적인 동물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토록 두드러지게 진화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유인원 같은 사회적 동물로부터 고급 구조와 조직을 지닌 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문화적 동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열쇠가 되었던 것은 분배―직업 및 식량분배―였다. 물론 우리의 조상이 인류로 향하는 길을 오는 데 육식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식은 식물성 식량의 채집이나 수확물의 분배 따위를 모두 포함한, 사회화를 지향한 변화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최근의 인류 역사가 사랑보다는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의 생활 양식이 수렵 채집에서 농경 생활로 바뀐 데서 오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변천은 약 1 만 년 전에 시작되어 인류와 주변에 변화를 가져 왔다. 수렵 채집인은 자연 질서의 일부를 이루지만, 농경인은 필연적으로 그 질서를 왜곡시킨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점은 정착 농경 사회에서는 재산 축척이 가능해져 그것을 지킬 필요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인류의 투쟁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그 투쟁이 지나치게 만연되어 있는 것도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빈약한 증거
우리의 조상들이 현생인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해 완벽하게는 알 수 없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에 관한 증거는 너무나 빈약하다. 예를 들어, 2백만 년 전에 사용했던 거주지 중 극히 일부만이 양호한 환경조건 아래서 보존되며, 그 중에서도 실로 극소수만이 언젠가 발견의 대상이 될 뿐, 나머지는 과거의 기록으로서 고요히 파묻혀 있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발견된 거주지 안에서 눈에 띨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란 고작해야 몇 개의 석기, 화석화된 뼈조각 몇 개 정도이다. 이것들이 예전의 복잡했던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엿보게 해 주는 빈약한 유물의 전부이다. 인류의 초기 문화에 관한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선사시대 연구에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진보가 있었다. 예전에는 석기나 화석 채집가를 통해 비교적 개별적으로 연구되었으나 지금은 여러 분야의 연구자에 의해 통합적인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 인류의 기원을 주제로 한 학자들의 모임에는 고고학자(석기를 연구), 고인류학자(초기 인류의 화석을 연구), 지질학자(고대인의 생활 주거 환경을 연구), 골편 발굴학자(뼈가 어떻게 묻혔으며 화석화 되기에 이르었는가를 연구), 인류학자(인류의 문화 및 체질에 관한 여러 문제를 연구), 동물 행태학자(원숭이나 유인원의 습성 연구), 심리학자(인류의 지능 발달에 관심을 가짐) 등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석한다. 이 회합의 성격이 잡다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런 사람들의 전문적 지식을 짜맞추면 인류의 기원에 관해 이제까지의 수준보다 더욱 완벽한 모습을 그려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각 학문 분야의 성과를 통합함으로써 인류의 진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뿐만아니라, 각 분야의 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함으로써 여태껏 찾아내지 못했던 문제점을 발견해 낼 수도 있다.
6백만 년 전에 시작된 인류의 진화
인류의 선사시대에 이 새로운 접근 방법을 통해 신인류 화석이 전례 없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이디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지역의 유적에서 중요한 화석이 계속적으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그 표본들을 철저히 분석하려고만 해도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발견된 화석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선사학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것은 화석 자체가 지니는 특질이다. 최근 몇 년 동안에 인류 진화의 길이 5백만 년 전, 아니 6백만 년 전으로 거슬로 올라갈 수 있음이 명백하다. 또한 기나긴 시대의 대부분을 통해서 우리의 조상들은 그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다른 인류와 같은 지역에서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다. 그 다른 인류는 두 종류가 있었으며 결국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진화상으로 볼 때 우리 조상과 사촌 관계에 있던 그들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시네라고 불리는데 그중 하나는 마른 몸집을 가졌고, 다른 하나는 훨씬 땅딸막한 몸집을 가졌다.
두 가지 유형의 오스트랄로피테시네와 우리들 호모 속 인류의 조상은 적어도 두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한 가지는 둘 다 라마피테쿠스라 불리는, 유인원과 비슷하고 체구가 작은 동물을 공동의 조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며, 다른 한가지는 직립 보행을 했다는 점이다.
라마피테쿠스는 늦어도 1천 2백만 년 전에 출현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진화상 어떠한 힘이 라마피테쿠스를 오스트랄로피테시네 및 호모라는 투 계통의 후속으로 분화시겼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단지 그 분화가 아프리카에서만 일어났을 뿐 그 밖의 대륙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인류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화석이 엄청나게 발견된에 따라 호미니드로 총칭되는 이 세 종류의 인류들 사이에 미묘한 형태상의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맨 처음에는 그들의 생활에 그렇게 심한 차이는 없었으나 호모 속 계통의 사회가 점차 복잡해짐에 따라 호모 속과 오스트랄로피테시네 사이에 진화상의 균열이 점차 커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화 과정에서 육식과 채식을 함께 받아들였던 것은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1 만 년 전에 인류가 농경의 가능성을 찾기 전까지는 그러한 생활 방식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 농업 혁명에 이어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그것은 오늘날의 기술 혁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인류 생활의 극적 변화의 결과, 세계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업 혁명 이전에는 1천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던 인구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40억이 넘었으며 놀랍게도 그 중 2/3나 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지리적인 분포 범위를 성공의 지표로 본다면 인류는 성공한 셈이다. 진화의 요람인 아프리카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은 지구 구석구석까지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생활이 가능한 곳에는 어느 곳에나 사람이 살고 있다. 이것은 인류가 진화에서 결정적인 요소인 특별한 적응력을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른 개별적인 종들 중에서 이처럼 다양한 환경에 살고 있는 것은 없다.
축소판 지구 역사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의 특별한 우월성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부터 45억 년 전, 태양계의 일부로서 지구가 탄생한 이래의 역사를 1천 페이지의 책 속에 집약시킨다면 각각의 페이지는 4백 50만 년에 해당한다. 맨 처음 책의 거의 1/4를 차지하는, 즉 약 2백 20페이지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가스 응축으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천체가 형성된 후 생명의 발전에 좋은 조건이 어떻게 서서히 생겨 났는가에 대한 내용이 기술될 것이다. 바로 이시점에서 생명체임에는 틀림없지만 매우 원시적인 젤리 형태의 작은 얼룩점 하나를 온난한 대양의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와 친숙한 형태의 바다 생물이 등장하려면 이 책의 3/4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어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5억년 전 이후가 된다. 수중 생활을 그만 둔 어류의 후속인 최초의 육상동물이 나타나는 것은 거기에서 다시 30페이지를 더나간 약 3억 5천만 년 전이 된다. 지구 역사 중에서도 특히 이색적이며 무시무시한 시기는 공룡 시대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2억 2천 5백만 년 전부터 7천만 년 전까지의 30 페이지가 그 시기에 해당된다. 7천만 년 전 갑자기 공룡이 사라지고 포유류 시대가 시작된다. 육상 생활에 작별을 고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최초의 영장유가 등장한 것도 바로 7천만 년 전의 일이었다. 최초의 포유류는 쥐 비슷한 작은 동물이었으며 그런 단순한 동물울 출발점으로 원숭이, 유인원, 인루가 진화해 온 것이다. 우리는 원숭이와 유인원, 심지어는 더 작은 동물인 쥐여우나 원숭이나 포토 원숭이와도 영장류로서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조상임을 알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화석은 약 1천 2백만 년 전(책으로 말하자면, 마지막에서 세 페이지째에 해당하는 부분)의 것으로서 바로 라마피테쿠스이다. 호모 속의 화석은 마지막에서 두 페이지째의 마지막 줄 근처에, 가장 오래된 석기는 마지막 페이지의 중간 부근에 나온다. 현생 인류의 발생은 책의 마지막 줄에 끼어들어 가야만 한다. 즉, 석기 시대인이 그런 미학적이고 상징적인 동굴 벽화, 농경의 발달, 르네상스의 지적 고양, 산업 혁명의 요란스러움, 강대국의 대립, 우주 여행의 시작, 그밖에 현대사를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은 맨 마지막에 한마디로 요약되어 들어 가야만 한다.
예측이 어려운 인류의 미래
현재로서는 인류를 지구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거쳐 온 우리 지구에는 앞으로도 기나긴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현생인류는 지구 역사의 1%에도 훨씬 못 미치는 극히 짧은 기간을 살아 왔음에 불과하다. 지금부터 2억 년 동안에도 인류가 계속하여 주도적 역할을 수행에 갈 것인가.
거의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소위 문명인을 특징짓고 있는 오만함과 낭비가 그대로 지속하는 한, 결국 우리는 환경을 지나치게 오염시키고 자원을 고갈시켜 인간이 적응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말것이라는 점이다. 또다른 이유는 지구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아무리 적응력이 뛰어난 생물이라 하더라도 고도로 복잡화된 종이 장기간에 걸쳐 생물학적 안정을 유지해 나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인류의 경우는 여러 가지 점에서 생물학적 측면보다 독특한 문화적 측면이 우선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의 장래는 더 불확실하다. 문화적인 면이 강한 탓으로 2억 년 후 우리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느니 오히려 가까운 장래의 진보에 관해 생각하는 편이 낫다고 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2억 년 후는 고사하고 앞으로 2억 년 동안의 전망조차 실로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우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문화의 다양성에 강하게 의존한 채 나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장차 인류가 안전하게 살아남는 데에도 문화가 지니는 융통성과 강력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화를 통해서 정의와 동정심이 넘치는 미래를 창조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고통과 비참함에 가득찬 미래를 만들 수도 있다. 문화는 우리에세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파묻혀 있던 인류의 과거를 더듬어 가다 보면 거기에서부터 우리들의 장래에 대한 어떤 통찰력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화석이 들어 있는 지층 속에는 뼈나 석기 이상의 그 무엇이 담겨져 있다. 즉, 인류의 생물학적 문제 해결에 있어 결정적인 실마리가 그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3백만 년 전 수렵 채집 생활 양식이 등장한 것은 어떤 힘에 의해서 인가? 또한 약 1 만 년 전 무슨 이유로 정착 농경 사회가 이루어져 장기적 안정 생활 양식으로 이행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의문점을 탐구함으로써 현대 사회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을 수도 있으며, 나아가 인류의 장래를 위한 어떤 지침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
리차드 리키/ 영국 출생으로 23세의 나이에 케냐 국립박물관의 요직을 맡았고, 박물관 취임 이후 케냐 북부 화석을 새로 발견하여 세계의 인류학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왜 호모만이 살아 남게 되었는가를 연구했다.
로저 레윈/ 오리진의 저자이며, 인간의 공격적 본능 이론을 비판하고 협동정신이야말로 인간성의 기본 양상이라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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