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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대로의 인간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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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대로의 인간

 

루 소

 

인간들이여, 동료 인간들을 깊은 사랑으로 대하라. 그것이 당신들의 첫째 의무이다. 어 떤 신분의 사람에게도, 어떤 연령의 사람에게도, 인간에게 관계 있는 모든 것에게 인간적으로 대하라. 인간애보다 더 위대한 지혜가 있겠는가.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 아이의 놀이를, 즐거움을, 사랑스러운 본능을, 호의를 가지고 지켜 줄 일이다.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담 겨 있고, 마음은 언제나 평화로웠던 그 시절을 때로 그리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우리 가운 데 있단 말인가. 어째서 당신들은 천진 나만한 아이들에게서 그 짧은 순간의 즐거움과 그들 이 남용할 줄 모르는 귀중한 행복을 빼앗으려 하는가. 당신들에게 있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 금방 지나가 버릴 그 최초의 몇 년을 왜 당신들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채워 주려 하는가. 아버지들이여, 죽음 이 당신들의 아이를 언제 데리고 갈는지를 알고 있는가? 자연이 아이들에게 준 이 지극히 짧은 시간을 그들로부터 빼앗음으로 해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이가 산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면, 되도록 인생을 즐기게 하는 것이 좋다. 언제 신에게 불려 가도 후회가 없도록,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많은 사람의 소리가 들려 온다. 저 허위로 가득 찬 지혜의 외침 소리가 멀리서 들려 온다.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밖으로 쫓아내고, 언제나 현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며, 우리가 추적할수록 자꾸 도망쳐 버리는 미래를 쉴 새 없 이 추적하고, 우리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가려는 저 허위에 가득 찬 지혜의 외침 소리가!

당신들은 나에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나쁜 성향을 교정하는 시기이다. 고통을 적게 느끼는 어린 시절에 고통을 많이 주어, 이성의 시기에 고통을 덜 느끼게 할 필요가 있다.”라고. 그러나 그런 일이 모두 당신 뜻대로 된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또, 아이의 약한 정신을 괴롭히는 당신들의 그 훌륭한 교육이 아이에게 주는 고통에 의해, 아이가 무엇 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당신들이 멋대로 아이에게 주는 고통에 의해, 아이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아이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는 이상의 괴로움을 왜 주는 것인가? 현재의 괴로움이 장래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 런 짓을 하는가? 당신들이 고쳐 준다는 나쁜 성향이 자연에서 생겼다기보다 오히려 당신들 의 잘못된 배려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화(禍)가 되는 선견지명, 그것은 한 인간을 언젠가 행복하게 해 준다는 불확실한 희망에 의거해서, 현재의 그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만일 이런 범속한 이론을 내세우는 무리가 있어, 방종과 자유를 혼 동하고,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과 응석을 받아주는 일을 혼동한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겠다.

공상을 추구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 우리의 현 상태에 적합한지를 잊지 않도록 하자. 인간은 만물의 질서 속에 그 지위를 차지한다. 아동기는 인간 생애의 전체 속에 그 지위를 차지한다. 따라서 어른은 어른으로서 다루고, 아이는 아이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각각에게 그 지위를 주어 그곳에 정착시키고, 인간의 구조에 따라 생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인 간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그 이상의 것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외부의 원인에 의존한다.

우리는 절대적 행복이라든지 불행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 세상은 모든 것 이 뒤섞인 상태에 있다. 순수한 감정이라는 것은 맛볼 수가 없다. 인간은 같은 상태에 한 순간밖에 머무르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가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흐 름 가운데에 있다. 행복도 불행도 만인에 공통적으로 있는데, 단지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고통을 가장 적게 받는 사람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은 기쁨을 가장 적 게 느끼는 사람이다. 언제나 기쁨보다 고통이 더 많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행복은 하나 의 소극적인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은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의 최소량에 의해 측정되어 야 한다.

고통의 감정에는 언제나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뒤따르며, 기쁨의 관념에는 반드시 그것을 즐기려는 욕망이 뒤따른다. 모든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하며, 그 결핍에는 반드 시 고통이 뒤따른다. 따라서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 사이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혜, 즉 진정한 행복의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줄이는 데에 있지는 않다. 욕망이 능력보다 적으면, 우리 능력의 일부는 할 일을 잃게 되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완전한 상태에서 즐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우리의 능력을 증대하는 데에 있지도 않다. 동시에 욕망이 더 큰 비율로 커질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불행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은, 오직 능력을 넘는 욕망을 없애, 힘과 의지를 완전한 평형 상태에 두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힘이 활동 상태에 있게 되고, 마음은 평정을 유지하여, 조화를 이룬 상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는 자연은, 처음에 인간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 자연은 인간에게, 직접적으로는 자기 보존에 필요한 욕망과 그것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능력만을 주었다. 그 이외의 능력은 모두, 필요에 의해 발달하도록, 예비로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숨 겨 두었던 것이다. 이 본원적인 상태에서만, 힘과 욕망의 평형을 찾아낼 수 있고, 인간은 불행해지지 않는다. 잠재적인 능력이 활동을 시작하면, 모든 능력 중 가장 활동적인 상상력이 눈을 떠, 다른 능력을 앞지른다. 상상력이야말로,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우리 능력의 한계를 넓혀,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기대에 의해 욕망을 자극하고 크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엔 손이 닿는 곳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 도로 도망쳐 버린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이미 모습을 바꾸어 먼 저편에 나타난다. 이미 지 나온 나라는 벌써 눈에 들어오지 않고, 우리는 그것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이 제부터 갈 나라는 계속해서 커지고 넓어져 간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지쳐 버리고,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쾌락을 맛보면 맛볼수록 행복은 우리로부터 멀어져 간다.

반대로, 자연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인간의 능력과 욕망의 차이가 좁아져, 행복에서 멀어지는 일이 적어진다. 불행은, 결핍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핍 감을 느끼게 하 는 욕망 속에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는 한계가 있으나, 상상의 세계는 무한하다. 전자를 크게 할 수는 없으니 까, 후자를 작게 하기로 하자.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괴로움은 이 두 세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체력, 건강,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는 신념, 이것들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행복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 안에 있다. 신체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제하면, 우리의 불행은 모두 상상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 사실은 상식적인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 할지 모른다. 나도 그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실천 문제에 들어가서는 그것은 결코 상식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오직 그 실천에 관한 것뿐이다.

인간이 약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약하다는 말은 하나의 관계, 즉 그 말이 적용 되는 자의 어떤 관계를 나타낸다. 체력이 욕망을 채우고도 남는 자는 곤충이나 벌레라 할지 라도 강한 존재이다.

 

힘에 부치는 욕망을 가진 자는 코끼리나 사자, 또는 정복자나 영웅, 나아가 신이라 할지라도 약한 존재이다. 자신의 본성과 투쟁했던 반역의 천사는, 자신의 본 성에 따라 평화롭게 사는 행복한 인간보다 약한 존재였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만족하 고 있을 때, 인간은 대단히 강하다. 그러나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안간힘을 쓸 때, 약 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까, 능력을 크게 한다고 해서 당신이 강한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만약 당신의 오만함이 능력 이상으로 커지면, 당신의 능력은 반대로 줄게 된다. 거미가 자기 집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알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도록 하자. 그렇게 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자기가 약하다는 것 을 느끼지도 한탄하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동물은 자기 보존에 필요한 만큼만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만이 여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여분의 능력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다니, 실로 기묘한 일이 아닌가. 모든 나라에서 인간의 손은, 그 생활에 필요한 것보다 많은 것을 만들어 낸다. 만 약 인간에게 이 불필요한 능력을 계산에 넣지 않을 만큼의 현명함이 있다면, 언제나 필요한 만큼의 것만을 가질 것이다. 파보리누스는 말했다. “큰 욕망은 많은 재산으로부터 생긴다. 그래서 흔히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 리는 것이 된다.” 우리는 좀더 행복해지려고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괴롭힘으로써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어 버린다. 스스로 만족하여 사는 사람은, 누구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사람은 선량한 사람으로 살 것이다. 악인이 되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이익이 되겠는가.

만약 우리가 죽지 않는 존재로서 태어난다면, 우리는 대단히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다. 죽는 것은 괴롭다.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이 세상을 언제까지나 살수는 없으리라는 것, 좀 더 좋은 삶이 이 세상의 괴로움을 끝나게 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즐겁다. 설령 이 지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할지라도, 누가 그런 달갑지 않은 선물을 받으려 하겠는가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별 있게 사고하는 사람이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이다.). 운명의 잔혹함과 인간의 부정에 대해, 어떤 구원의 길이, 어떤 희망이, 어떤 위안이 우리에게 남게 될 것인가. 앞길을 아무 것도 생각지 않는 무지한 인간의 대부분은, 인생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인생을 버리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총 명한 인간은,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눈길을 돌리고, 이 세상의 것을 버려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오직 어설픈 지식과 허위로 가득 찬 지혜만이 우리의 시야를 죽음에까지 넓히지만,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최악의 불행으로 간주한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인생의 고통을 그만큼 잘 견뎌 내는 것이다. 죽음이 조만간 그 고통을 끝내 주리라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는 삶의 대가를 너무도 비 싸게 지불하는 것이 될 것이다.


루소/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학가이다. 루소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인간의 회복’ 으로 , 인간의 본성을 자연 상태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의 계몽주의 적 여러 저서가 근대 사상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저서로는 『사회 계약론』, 『에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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