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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 시대 오스트레일리안을 위한 강철 도끼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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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 시대 오스트레일리안을 위한 강철 도끼

 

 

로리스톤 샤프

 

문 제

이르 요론트(Yir Yoront) 부족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열대 지역인 케이프 요크 반도 서쪽 해안가에 있는 콜맨 강 어귀에 살았는데, 다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처럼 원래 쇠붙이(금속)를 전혀 알지 못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본다면, 이 부족의 문화는 구석기 시대에 속했다. 이 부족은 사냥을 하거나 고기를 잡거나 먹을 만한 식물들을 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꾸려나갔고, 그 밖에 필요한 물건들은 개간이 안 된 숲에서 얻었다. 그들이 길들인 유일한 동물은 개였다. 식물은 따로 기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부족들과 달리 이르 요론트 부족은 짧은 손잡이가 달린 돌도끼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도구는 이 부족 사람들의 경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19세기 말엽쯤에는, 이르 요론트 부족이 사는 땅에 쇠로 만든 유럽의 연장들과 다른 물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인이 사는 지역이 퀸즈랜드 북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점차 넓어져 감에 따라, 그런 물건들은 점점 더 많이 흘러들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서양의 기술적인 물건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은 짧은 손잡이가 달린 쇠도끼였다.

1930년대 중반에 미국의 한 인류학자가 13개월 동안 이르 요론트 부족과 함께 숲에서 산 적이 있었다, 이때까지 이르 요론트 부족은 비교적 고립되어 살면서 옛날 그대로 독립적인 경제 생활을 누려오고 있었다. 구석기 시대의 기술을 가지고 완전히 자급 자족하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돌도끼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쇠도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꽤 많은 쇠도끼들인 남쪽에 사는 여러 유럽인 들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넘어 오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오스트레일리아의 숲에서 여전히 원시적인 상태로 살고 있던 이르 요론트 부족이 점점 더 많은 쇠도끼를 가지게 되고 사용하게 됨으로써, 이 사람들의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을까?

사건의 흐름

1) 1623년에 네덜란드 탐험대가 이르 요론트 부족이 살고 있는 해안에 상륙했다. 그때에 만났던 원주민에 대해 쓴 당시의 항해 일지를 살펴보면, 원주민들이 쓰던 문화적 물건들은 1935년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겁을 먹은 그 '인디안들(Indians)'의 마음을 끌어 보려고 쇳조각과 구슬을 원주민들에게 주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곳에 머무는 이틀 동안 원주민 한 사람을 납치했고, 다른 한 사람은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이르 요론트 사람들이 백인들과 처음으로 만났던 일이 그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듯이, 쇳조각과 구슬도 남아 있지 않았다.

2) 기록에 따르면, 백인들이 두 번째로 이 지역과 접촉한 것은 1864년의 일이었다. 그 기록을 보면, 그 당시에 백인들이 만났던 토착민들이 이르 요론트 부족의 직계 조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원주민들이 퀸즈랜드 북쪽에서 출발하여,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케이프 요크 반도를 가로질러, 북쪽 끝에 새롭게 세워진 정부 소유 목장으로 옮겨 가고 있던 백인 목축업자들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그 결과로, '미첼 강의 전투'라고 알려진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꽤 긴 시간동안 유럽인들의 발포에 과감하게 맞선 희귀한 사례였다.

한 백인 목축업자는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일기에 쓰고 있다. "……우리는 카빈총으로 사방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댔다. 그 사격으로 그들은 죽거나 상처를 입었지만 이미 창을 모두 던지고 난 뒤여서 쓸 수 있는 창이 남아 있지 않았다……약 30명쯤이 죽자, 우리 우두머리는 신중하게 사격을 멈추고 나머지 사람들이 도망가게 내버려 두었다. 59발의 총알이 발사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거나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 유럽인들 무리는 이르 요론트 지역에 사흘 동안 머물렀다가 북쪽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3) 원주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백인들과의 첫 접촉은 1900년쯤부터 이루어진다. 이 부족은 가끔 백인들과 마주쳐 목숨을 잃곤 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때부터 백인들이 이르 요론트 부족이 사는 땅 남쪽에서 계속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쪽에 목장을 가지고 있던 백인 목축업자들은 원주민들을 납치하여 목동이나 하녀로 쓸 목적으로, '야생의 검둥이들'을 습격하곤 하였다. 그러한 토벌대 중 하나가 콜맨 강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이르 요론트 남자들과 여자들이 총에 맞아 죽었다. 원주민들의 주장에 따르면, 백인들은 죽은 사람 하나에 담배 한 개비씩 내놓으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이런 친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토벌대의 우두머리는 원주민 전사의 창에 찔려 죽고 말았다.

4) 이때쯤 정부는 토착민을 다루고 통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케이프 요크 반도 서쪽 해안가의 7백 마일에 걸친 지역에 선교 지역 세 군데를 세울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런 목적에서 해안 지역의 좁고 긴 땅이 원주민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어, 그 지역은 그로부터 백인들이 이줄할 수 없게 되었다.

1915년에 성공회 선교회가 미첼 강 어귀 근처에 세워졌는데, 이 선교회는 남쪽에 사는 이르 요론트 부족의 이웃 땅에 있어서, 이르 요론트 마을에서 걸어가자면 사흘쯤 걸렸다. 이르 요론트 부족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선교 지역과 관계를 맺거나 가까이 가는 것을 꺼려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가끔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선교 지역에 있는 세 개의 '마을'들 가운데 하나에 정착해서 거의 영구적으로 살기도 했다.

5) 이렇게 해서, 숲에서 자급 자족하면서 살아온 이르 요론트 사람들의 대부분은, 1942년까지 정부의 보호 지역과 선교 지역 사이에 끼어서, 남쪽에서 밀려오는 새 질서라는 더 거친 현실에 맞닥뜨리지 않고 살았다. 이르 요론트 땅의 동쪽 지대는 메마르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북쪽 지대는, 아쳐 강 장로교(Archer River Presbyterian)의 선교 지역이었는데, 이른 요론트 부족과는 접촉이 없는 다른 부족들이 해안가를 따라 살고 있는 곳이었다. 서쪽으로는 카펜테리아 만의 얕은 모래톱이 넓게 퍼져 있었고,그곳에서 토착민들은 가뭄기에 미첼 강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작은 범선만을 드문드문 볼 수 있었다. 이런 주변 환경 속에서 한 세대가 넘는 기간 동안 보호를 받아 온 이르 요론트 부족은, 예전에 문명화된 사회로부터 받은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1930년대까지, 싸우고 습격하는 이르 요론트 부족의 전통과 토템 신앙(자연물들을 가족과 종족의 상징으로 숭배하는 신앙)의 종교 의식들이, 서구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6) 미첼 강 부근에서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자,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예전에 얻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서양 물건들을 얻게 되었다. 토착민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려는 뜻에서,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에게 몇 가지 서양 물건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 덕분에 여전히 숲에서 살고 있던 토착민들은 많은 서양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 물건들을 가지고 자기네들끼리 거래를 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선교를 할 목적으로 원주민들에게 인기가 있던 쓸모있는 물건들을 무료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많은 원주민들을 죽게 했던 병을 고쳐 주기도 했다. 그러나 총과 술과 해로운 마취제는 주지 않았다. 원주민들에게 이런 혜택을 베풀면서 의기양양해진 선교사들은 상황이 좋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렇게 손에 넣은 서양 물건들 중에서 담배를 빼고 원주민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짧은 손잡이가 달린 쇠도끼였다. 그래서 선교 지역의 창고에는 원주민들과 거래할 짧은 손잡이가 달린 쇠도끼들이 언제나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선교사들은 전도를 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축제나 다른 종교적인 축제 때에 원주민들에게 쇠도끼를 나누어 주었고, 선교 지역을 찾아온 원주민들에게도 가리지 않고 쇠도끼를 나누어 주었다. 다른 유럽 물건들처럼 몇 개의 쇠도끼들은, 선교 지역 남쪽에 있는 목장들과 접촉이 있던 토착민들을 통해 이르 요론트 부족에서 흘러 들어갔다. 그러한 쇠도끼들은, 이르 요론트 사람들이 백인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기 전에 원주민들 사이의 거래선을 통해 이르 요론트 사회에 들어갔을 것이다.

관련된 요소들

도끼라는 물건 자체보다 원래 갖고 있던 돌도끼를 둘러싼 이르 요론트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 돌도끼가 원주민들의 문화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돌도끼가 쇠도끼로 바뀐 데에 따른 몇 가지 결과들을 아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다.

돌도끼 한 개를 만드는 데에는 몇 가지 단순한 기술들이 필요했다. 돌도끼의 모양이나 쓰임새를 세밀하게 이해하는 성인 남자들―오직 성인 남자들만이―은 돌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 도끼를 만드는 일은 여자들이나 아이들한테는 적당하지 못한 일로 여겨졌다. 우선, 몇 가지 재료들과 그 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장소를 알아야만했다. 예를 들면, 자루가 제 역할을 하도록 돌도끼 머릿부분 위에 꽉 붙잡아매는 잘 휘는 나무라든가, 그 나무를 묶어 주는 나무껍질이라든가, 도끼 머릿부분을 자루에다 단단히 고정시킬수 있게 해주는 고무풀 같은 것들이 도끼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었다. 이 재료들은 정확하게 모아져서 보관되었고 계획에 따라 꼭 맞는 크기로 잘라져서 쓰였으며 자연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재료들은 모든 사람의 것이어서 특별한 허락이 없이도 남자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가 있었다. 도끼의 머릿돌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자연을 좀 알고 도끼를 만드는 간단한 기술을 알고 있다면, 평범한 남자들은 누구나 돌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불(고무를 가열하기 위해)을 가지고 있고, 자르는 연장들(이것은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조개 껍질로 만들어진 것이다.) 몇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남자는 누구나 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

돌도끼가 다른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데에 주요한 도구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돌도끼가 원주민들이 먹고 사는 경제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남자, 여자, 어린이들―이 도끼를 쓸 수 있었다. 사실상 여자들이 더 많이 썼다. 여자들은 도끼를 가지고 날마다 해야만 하는 귀찮은 일들을 해나갔다. 가령, 음식을 만들려면 집집마다 계속해서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충분한 땔나무가 있어야 했고, 모기를 쫓거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도 불을 땔 나무가 필요했다.(7월의 겨울 기온은 화씨 40도―섭씨 4도쯤―아래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모든 여자들은 도끼를 사용해 많은 나무들을 자르거나 베어 왔다. 남자들과 여자들, 때로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연장이나 무기나 장비를 만들기 위해 도끼가 필요 했다. 우기에 비와 곤충들을 피할 둥근 지붕이 있는 오두막을 만들 때에도 돌도끼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뭔가를 말려서 보관하는 높은 단을 드리우는, 날씨가 너무 쨍쨍하고 뜨거울 때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차양을 만드는 데에도 돌도끼가 필요했다.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채소를 캐거나 동물의 고기를 모아 놓거나 할 때에도 도끼는 필요한 연장이었다.

이르 요론트의 사람들은 돌도끼를 쓰면서 보다 기술적인 방식, 즉 자연 그대로가 아닌 문화적인 연장으로 자연과 관계를 맺었다. 또한 돌도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자연보다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즉, 이른 요론트 남자들은 도끼의 머릿돌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만 했던 것이다. 왜냐 하면, 이르 요론트 땅은 지질학적으로 최근에야 모래가 쌓인 평평한 지층이어서 도끼의 머릿돌이 될 만한 마땅한 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끼의 머릿돌은 남쪽 400마일쯤에 있는 널리 알려진 채석장에서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 채석장의 남자 장사꾼들은 여러 갈래의 먼길을 따라 이르 요론트 지역에까지 그 돌을 가져왔다. 장사꾼들은 이르 요론트 남자들 한테 돌을 가져다 팔고 돌아가기도 하고, 다른 길들을 따라 더 먼 북쪽 부족들에게까지 가기도 했다. 이르 요론트 남자들은 남쪽의 그 장사꾼들과 북쪽의 부족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이르 요론트 성인 남자들은 북쪽이나 남쪽에 정식으로 맺어진 한 사람 이상의 거래 상대자가 있었다. 거래가 이루어질 때에 이르 요론트의 남자들은 거래 상대자에게 자신들이 쓰고 남은 창을 주었다, 이 창은 가오리의 가시 돋힌 뼈를 창 끝에 단 것으로, 사람 살을 꿰뚫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이르 요론트 남자들은 12개의 창(몇 개는 북쪽에 있는 거래자에게서 얻은 것)을 남쪽의 거래자에게 주고 도끼의 머릿돌을 얻었다.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지역으로 가면 갈수록, 가오리 뼈로 만든 창은 더욱더 귀중해졌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우기가 되면 어떤 목장의 원주민은 다른 목장의 원주민에게 거래의 대가로 예전처럼 가오리 뼈로 만든 창을 주고 있다. 우기가 되어 백인 목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숲으로 돌아가 다음 가뭄기가 될 때까지 자급 자족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르 요론트 부족이 사는 땅에서 150마일쯤 떨어진 남쪽 땅에서는 가오리 창 하나로 도끼의 머릿돌 하나를 바꿀 수 있었다. 비록 일일이 조사를 해 보지는 못했지만, 남쪽으로 더 멀리 떨어지고 채석장과 좀더 가까운 곳에서는 가오리 창 하나로 대여섯 개의 도끼 머릿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간에서 양쪽을 연결해 주는 사람들은 창이나 머릿돌이 없어도, 단순히 양쪽을 왔다갔다 하면서 중간 상인의 이익을 얻었다. 장사꾼들은 다른 물건들도 이런 방식으로 옮겼다. 또한 이 물건들은 숲과 목장에 사는 원주민들 사이의 거래를 통해 옮겨지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이런 거래를 통해 자기 부족의 테두리를 벗어나 다른 부족의 사람들과 인간적인 관계도 맺게 되었따. 이런 거래에서 남자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물건인 창과 도끼(돌로 만든 것이든 쇠로 만든 것이든)가 거래되었다. 또한 이런 거래의 대부분은 가뭄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가뭄기는 이런 거래 말고도 다른 흥미로운 활동들이 많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가뭄기에는 다른 큰 원시적 축제가 벌어졌다. 이 축제는 성년 의식과 토템 의식을 중심으로 하여 벌어졌다. 많은 원주민들이 참석하는 이 축제는 원주민들에겐 아주 매력적인 행사였다.

이르 요론트 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직 성인 남자들만이 도끼의 머릿부분을 얻어와 완성된 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오직 성인 남자들만이 도끼를 간직할 수 있었고, 오두막에서 다른 장비들과 함께 도끼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성인 남자들만이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허리띠의 등쪽에 도끼를 찔러 넣은 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도끼를 쓰고 싶은 여자들이나 아이들은 도끼를 남자한테서 빌려야 했다(이런 일들은 낮 동안에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또한 여자나 아이들은 빌린 도끼를 재빠르게 사용해야 했고, 도끼를 다 쓰고난 뒤에는 빌린 남자한테 돌려 주어야만 했다. 남자는 '내 도끼'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여자나 어린아이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여자나 아이들이 도끼를 이야기할 때에는, 도끼란 언제나 남자의 것임을 가리키는 '당신의 도끼'나 '그의 도끼'로 말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정해진 친족 관계에 따라 필요할 때마다 남자 어른들에게 도끼를 빌렸다. 남편과 사이가 좋은 여자는, 남편이 도끼를 쓰지 않을 경우에는 도끼를 사용해도 되는 줄 알고 있었다. 아내들과 사이가 좋은 남자는, 물어 보지 않아도 아내들이 자신의 도끼를 쓸 수 있게 해주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또는 결혼을 했어도 남편이 나가고 없는 여자는 먼저 오빠나 아버지에게 도끼를 빌리러 가곤 했다. 다른 특별한 상황에 생길 때만, 그 여자는 어머니의 형제나 다른 친척 남자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돌도끼를 빌리러 갈 수가 있었다. 나이 어린 여자애나 남자애는 아버지나 오빠나 형에게 도끼를 빌려 달라고 했지, 어머니의 형제한테는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성인 남자들도 도끼를 빌려야 할 때에는 똑같은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 돌도끼를 통해 맺어졌던 사회적 관계들은 모두 상호적인 관계들이었다. 도끼의 쓰임새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가 어떤 것인가와 관계를 맺는 두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정해 주었고, 그런 관계가 어떤 것인가와 관계를 맺는 두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정해 주었고, 그런 관계가 어떤 것인가와 관계를 맺는 두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정해 주었고, 그런 관계가 계속되도록 해주었다. 이르 요론트 사람들이 맺은 모든 활동적인 관계에는 더 높은(지배하는)지위나 더 낮은(종속적인) 지위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그야말로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도끼를 둘러싼 모든 일에서 남자 어른들한테 의존해야만 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남자 어른들보다 더 낮은 지위에 있었다. 남자들 사이에도 나이 어린 남자는 나이 많은 남자나 손위 친척들에게 의존했다. 비록 형이 언제나 동생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는 해도, 평등한 관계에 가장 가까운 것은 그래도 형제들 사이에서였다. 또한 물건을 거래할 경우에 거래 상대자들끼리는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거래 상대자들은 대개 서로 형제 같은 관계를 맺었다. 비록 둘 중 한 사람은 항상 다른 한 사람보다 연장자로 대우받게 되어 있고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면 그 덕에 좀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는 해도 말이다. 이렇게 도끼를 축으로 하여 되풀이되고 널리 퍼지게 된 행위로 말미암아, 성별과 나이와 친족 관계에 따른 역할이 사회 속에서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런 관계는 대개는 우호적이었으나 드물게는 적대적이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은 특별한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러이러하게 행동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이르 요론트 부족에 속한 한 사람의 지위는 성별과 나이와 친족 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또한 전체 부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부계 토템 씨족들 24개 가운데 어느 한씨족에 속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결정되었다. 한 사람이 어떤 특별한 곳에서 가지고 있는 이름과 권리는, 그 사람이 특정한 하나의 씨족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나타냈다. 각각의 씨족들은 수백 개의 토템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토템들 중 하나나 두 개가 그 씨족의 이름이 되었다. 씨족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름도 그 토템들에서 나왔다. 이러한 토템들은 태양, 별, 새벽 같은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을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상상에 의한 귀신들, 무지개뱀들, 영웅적인 조상들 같은 문화적인 종류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한 토템의 종류에 속하는 개체들은 언젠가는 죽거나 없어지는 반면에, 그 종류 자체는 반드시 계속해서 남아 있고 파괴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 씨족의 토템들은 그 씨족이 영원히 이어지고 안정된 세계로 남아 있도록 해주었다. 세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다른 씨족과 구분되는 한 무리의 토템들과 각자 관련을 맺었고, 이렇게 해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무리를 이룰 수 있었다.

돌도끼는 우리들에게 팬티나 파이프가 그러하듯이 이르 요론트 부족에겐 남자다움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었다. '소유 의식'이라고 할 만한 일련의 복잡한 생각 끝에, 그들은 도끼가 남자들에게 '속한다'고 정의하였다. 이르 요론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아직 훈련이 안 된 어린이들을 빼고)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다, 그와 비슷하게, 창이나 창을 던지는 사람이나 불을 만들어내는 막대기도 남자와 연관되었다. 그것들은 오직 남자들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었으며, 남자다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르 요론트의 모든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도 유독 돌도끼를 통해 남성의 가치를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했다. 남자가 아닌 사람이 도끼를 써야 할 경우, 그 사람들은 남자에게 도끼를 빌리러 가야만 했던 것이다. 결코 돌도끼가 아닌 다른 물건을 빌리러 남자에게 가지는 않았다. 이렇게 도끼는 이르 요론트 문화를 꿰뚫고 흐르는 중요한 행동 근거가 되었다. 남성의 우월성과 남성의 지배는 정당한 것이었고, 남자의 일은 여자의 일보다 더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족장 지배나 가부장제라고 부리기보다는 남성 중심주의라 부르는게 적당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남성의 가치가 여성의 가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남성의 우월성을 인정했다. 젊은이가 나이 든 사람에게 도끼를 빌리게 됨으로써, 나이 든 사람은 연장자의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이런 것은 이르 요론트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행동 근거가 되었다.

이르 요론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 그들의 행각의 체계, 말하자면 토템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이다. 원주민들은 본래 시간이 두 개의 커다란 시대(epochs)로 나뉘어진다고 믿었다. 그 하나의 시대는, 세계가 시작될 때의 어렴풋하고 신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온화하고 훌륭한 조상들과, 나중에 그 씨족의 조상이 된 문화적인 영웅들이 살던 시기이다. 두 번째 시대는, 현재를 포함하는 새로운 질서가 오래된 과거의 질서를 이어받은 시기이다. 미래는 원초적 시대가 혁명적으로 바뀐 이래 아무 변화 없이 이어지는 현재의 연속 또는 재생으로 간주되었다.

원주민들은 모든 우주는 조상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남겨진 뒤로 '지금도 처음 그때 그대로이다'라고 믿었다. 따라서, 조상들의 생활이 바로 이르 요론트 사람들의 매일매일 생활인 셈이었다.

'개가 이구아나 뱀의 뒤를 쫓다가 그 이구아나가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리니 그 나무 위를 쳐다보며 밤새도록 짖다(Dog-chases-iguana-up-a-tree-and-barks-at-him-all-night)'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그 외에 다른 이름들도 가졌다. 왜냐 하면, 조상의 변화된 자아(ego)가 똑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람은 자기의 조상처럼 '햇살이 비추는 구름 아래의 이구아나(Sunlit cloud Iguana)' 씨족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토템들과 관련을 맺었다. 실제로 자신의 조상이 똑같은 일을 했다고 믿기 때문에, 성년식이 벌어지는 동안 그 사람은 개가 되어 다른 씨족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공격하고 죽이는 역할을 했다.

 

'개가 이구아나……(Dog-chases……)'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는, '검은 오리를 찌르는 창' 씨족에서 온 두 명의 아내가 있고, '토박이 친구' 씨족에서 온 아내 한 명이 있는데, 모두 그런 식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 아내들 중의 한 사람은 장님이었다. 그에게서 또 그런 식의 이름을 가진 아이 넷이 있다. 그는 손목이 부러졌고 왼손잡이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사람의 조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살펴보면, 이르 요론트 부족에게서는 현재가 도리어 과거에 영향을 미쳐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실 속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일들이나 사고들을 해명하기 위해 신화적인 세계를 이리저리 뜯어고쳤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르 요론트 부족에게는, 신화적 세계를 실제 세계의 중요한 부분에 맞추고 실제 세계를 미리 있는 신화적 세계에 맞추는 괜찮은 균형 장치가 있었다. 이러한 조절 작용으로, 현재란 틀림없이 과거를 그대로 비추는 것이라고 믿는 소박한 근본주의가 유지될 수 있었다.

분 석

아주 많은 쇠도끼들이 무차별하게 이르 요론트 부족에게 소개된 것은, 그 시절에 함께 일어난 많은 변화들 가운데 한 가지이다. 그러므로 쇠도끼의 소개로 어떤 기술 혁신이 일어났나 하는 결과만을 따로 가려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도끼가 쇠도끼로 바뀌면서 생긴 많은 특이한 결과들을 따로 알아볼 수는 있다.

돌도끼가 쇠도끼로 바뀌었다고 해서 도끼를 만드는 기술에 특별한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은 아니었다. 원주민들 스스로 쇠도끼의 머릿부분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머릿돌은 바깥 세상에서 끊임없이 공급되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가지고 있는 도구로 나무 줄기를다듬어서 부러진 도끼 자루를 쉽사리 바꿔 끼울 수 있었다.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백인들이 선교 활동을 하거나 소목장에서 사용했던 것처럼(가령, 목수일 하는 데 쓰기도 하고 천막의 말뚝을 박는 데에 쓰기도 하고 망치로 쓰기도 하고 하는 것처럼) 쇠도끼를 다양하게 쓰지는 않았다. 사실 쇠도끼는 돌도끼만큼밖에 쓰이지 않아서 토착 원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에 실제로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쇠도끼는 몇 가지 일들을 훨씬 더 잘 해냈으며 오랫동안 써도 날이 나가지 않았다. 그런 점들만으로도 쇠도끼는 원주민들에게 가치 있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쇠도끼가 돌도끼보다 훨씬 더 능률적이라든지 쇠도끼를 쓰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주민들이 쇠도끼를 쓰면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리라는 백인들의 가정(거꾸로 쇠도끼에서 돌도끼로 바꾸었다면 백인들은 분명 퇴보라고 생각할 것이다)은 실제 원주민들 생활에서 거의 증명이 되지 않았다. 쇠도끼나 다른 서양 물건들을 쓰게 되어 남게 된 여가 시간이 원주민들의 생활 조건을 더 좋아지게 하지도 못했으며, 그렇다고 예술 활동을 북돋아 주지도 못했다. 원주민들은 남는 시간을 잠을 자는 데 썼을 뿐이다.

돌도끼를 원하는 사람은 늘상 거래를 통해 도끼의 머릿돌을 얻어 왔으며, 그 거래 상대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머릿돌만 있으면 쉽게 도끼를 만들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재료들은 널려 있었고 도끼를 만드는 기술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자신의 기술을 쓰지 않고도 쇠도끼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던 거래 상대자와 관련을 맺는 대신에 대단히 변덕스러운 선교사들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만약 한 원주민이 쇠도끼를 선물로 나누어주는 선교 행사에 우연히 갔다거나, 선교사에게 어찌어찌 '괜찮은' 원주민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게 되면, 그 사람은 쇠도끼를 간단히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는 선교 지역에서 간단한 일을 할 기회가 생기면, 그 사람은 좀더 쉽게 쇠도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들이 보기에, 쇠도끼를 더 좋아하는 것은 자주적인 생활을 버리고 의존적인 생활을 선택하는 꼴이 되는 셈이었고, 훌륭하게 조직되고 정의된 기술이나 행위에 따라 움직이는 상태를 버리고 잘못 정의된 행위에 따라 움직이는 꼴이 되는 셈이었다. 남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일수록 이런 생각이 강했다. 원주민 할아버지들은 예전에 자신이 만났던 백인들이 아주 사나웠다는 경험을 갖고 있어서 백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들은 선교 지역과 관계되는 것을 한사코 피했고, 선교 지역으로부터 쇠도끼를 직접 얻어 오려 하지 않았다.

쇠도끼가 이르 요론트 사회에 들어오자,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에서 느낀 것보다 더 심한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선의로 생각하여 들여놓은 새로운 요소들 때문이었다. 선교가 확산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끼를 갖게 되었다, 쇠도끼는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 심지어는 아이들에게까지 직접 널리 퍼져갔다. 선교사들의 호감을 산 여자도 쇠도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얻은 쇠도끼는 분명히 그 여자의 것이었다. 이것은 여자가 예전에 남자인 남편이나 친척으로부터 도끼를 빌리곤 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그 여자는 그렇게 얻은 도끼를 '나의 쇠도끼'라고 불렀다. 이렇게 자기의 것이 된 쇠도끼가 있어서 그 여자는 다시는 돌도끼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선교 지역에서 직접 쇠도끼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이든 남자들은 예전처럼 도끼를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그 남자의 부인들과 아이들은 쇠도끼를 자기 것이라고 여겼다. 심지어 나이든 남자들이 그 쇠도끼를 빌려쓰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여자와 젊은이들이 쇠도끼를 얻게 되어 예전처럼 돌도끼를 쓸 필요가 없게 되자, 여자와 젊은이들은 점점 더 독립적으로 되어갔다. 따라서 예전의 종속적 관계는 점점 약해졌다.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성별이나 나이, 친족간의 관계 따위에 따라 구분되던 사람들 사이의 역할에 아주 큰 혼란이 일어났다.

거래 상대자들 간에 맺어진 관계도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 어떤 이르 요론트 사람이 남쪽에 동생뻘 되는 거래 상대자가 있고, 거래가 이루어질 때에는 형으로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했었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 그 동생뻘 되는 거래 상대자가 선교 지역과 접촉을 했거나, 더 나아가 쇠도끼를 얻었다고 한다면, 이제 동생뻘 되는 거래자는 더 이상 낮은 지위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쇠도끼가 예전의 관계를 심각하게 약화시킨 것이다. 바야흐로 쇠도끼를 얻은 원주민이 자신에게 잘해 주는 '애인'에게 그 쇠도끼를 기꺼이 줄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다른 부족과 늘상 맺어온 거래선을 통해 도끼를 처분해 버릴 수도 있었다. 많은 쇠도끼들이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원주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가게 되었다. 쇠도끼 때문에 생긴 다른 상황들을 좀더 살펴보도록 하자. 가뭄기 동안 많은 부족 사람들이 어울리던 성년식과 축제에 대한 열기도 전보다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 축제는 해마다 가뭄기가 되면 벌어지던 전통적인 행사였다. 축제 기간 동안 거래 상대자들 사이에서는 여러 물건들이 교환되었다. 이르 요론트 남자들은 축제 기간 동안 일년 내내 쓸 도끼의 머릿돌을 구해 놓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 남자들은, 쇠도끼나 백인들의 다른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로 하여금 전혀 낯선 사람들에게 몸을 팔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거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동료 의식도 점점 약해졌다. 성년식 같은 축제에 참석해야 할 이유도 점점 없어져 갔으며, 참석한 사람들도 차츰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사회적 행사들이 점점 쇠퇴하게 되자, 사람들은 다른 사회적인 일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들에게 쇠도끼가 점점 더 많이 퍼지게 되자,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성격과 서로 의존하며 살던 풍습도 바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양의 친족 관계가 이르 요론트 사회에 나타나게 되었다. 예전의 원주민들 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다른 대여섯 사람들과 함께 평등하게 행동하는 경우는 직계 가족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의 다른 부족에서도 한 사람은 친족 체계에 따라 다른 대 여섯 사람에 비해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낮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뭔가 지시를 하거나 요구할 수가 있었다. 동시에 그 사람 위에는 그 사람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대여섯씩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간섭할 수 있던 추장의 지위도, 그 어떤 권위적인 지도력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잔디를 태우거나 동물을 몰거나 토템 의식을 치뤄내거나 하는 번거로운 일에서 자신의 기술이 어떻게 쓰이고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해야 할 것인지는 각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번거로운 일들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선교 지역과 목장에 사는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자신들보다 낮은 지위에 있으므로 자신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원주민들에게 강요했다. 백인들로부터 도끼를 비롯한 선물들을 받으려고 크리스마스 축제에 모여든 원주민들은,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 백인들이 원주민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상황과 마주쳤다. 이 백인들은 나이나 성별이나 친족 관계(이미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원주민들도 알아채고 있었다.)를 무시하고, 원주민들을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로 취급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원주민들을 막일꾼과 똑같은 부류로 취급했다(그러나 만약 어떤 백인이 기둥 구멍을 파려고 다양하게 섞인 원주민들로 일꾼들을 구성해서 그 가운데 한 원주민으로 하여금 일꾼들을 관리하게 했다면, 그 원주민 '감독자'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원주민들은 잠을 자고 그 감독자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원주민들은 일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원주민들이 보기에는 다른 유럽 물건들처럼 쇠도끼도 사회 조직이 갖추어지고 지도자가 정해졌던 예전의 원주민 사회를 낯설고 거북하게 만들고 있었다.

쇠도끼는 백인 문화에서 들어온 다른 요소들과 연관을 맺으면서,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생각과 감정들, 가치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대신할 만한 새로운 것이 나오기도 전에 원주민들의 생각과 감정과 가치들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뿌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이르 요론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든 이르 요론트 문화가 무너지고 파괴되고 있다는 허탈감이 자리잡게 되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자, 혈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자체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살펴보면, 원주민들의 행동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잘 알 수 있다. 또한 본래부터 자연의 의존적이었던 가치들이 어떻게 약화되었는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성 중심, 남성의 위신이나 남성다움, 나이에 따른 위신과 여러 다양한 친족 관계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도 뚜렷해질 것이다. 이런 변화는 대개 다음과 같다. 아내는 이제 더 이상 도끼를 빌리기 위해서 남편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또한 성년식조차 치르지 않은 어린 아들도 더 이상 아버지에게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도리어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내나 아들에게 쇠도끼를 빌리고자 하는 경우가 생겼다. 이런 경우에 그 남자는 혼란스럽고 불안 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여자들이나 소년들은 쇠도끼를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들을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압박했던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를 얻은 여자들과 소년들도 역시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어떤 물건이 누구의 것인지가 제대로 정해지지가 않아서 원주민들은 물건을 훔치거나 뺏어오기도 하였다. 커다란 종교 의식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흥분들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도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생활도 이제 점점 더 재미가 없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이르 요론트 사람들을 자살(이 사람들에게 '자살'은 낯선 말이다.)로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이런 결과는 토템 신앙 체계를 살펴보면 더 선명하게 파악된다. 유럽 문화가 들어오기 전까지 원주민들은 예기치 않은 큰 재해나 위기 상황 없이 안정된 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았다. 이런 원시적 상태에서 토템 신앙 체계는 급격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잘 막아 주었다. 원주민들의 토템 신앙은 우주가 태초의 그대로라고 설명했다. 이런 생각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장벽 역할을 하면서, 오래된 문화가 충격 받는 것을 완화해 주었다. 이런 장벽은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은 아니어서 일상 생활에서 작고 사소한 변화들이 일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아주 큰 변화는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이르 요론트 사람들이 물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가벼운 통나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통나무에 달라붙어 헤엄을 치면서 강이나 해안이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입구를 건너 다녔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북쪽 45마일 지점에 사는 부족들이 나무껍질로 만든 카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쪽에 사는 이 부족들은 이르 요론트 사람들처럼 강둑이나 해안가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게 아니라, 카누를 타고 강 한가운데로 갈 수도 있고 가까운 바다에까지 나가 고기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르 요론트 사람들이 헤엄치면서 끊임없이 느껴왔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이 악어나 상어, 독이 있는 가오리나 고깔 해파리들이 떼지어 몰려드는 바닷가를 카누를 타고서 건넜다.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북쪽에 사는 부족들이 가지고 있는 카누를 불러올 주술이 자신들한테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카누를 만드는 재료들이 이르 요론트 부족이 사는 땅 주변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비스러운 조상들에게도 카누가 없었고 그래서 자신들한테도 카누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카누는 북쪽 부족의 조상들이 세운 우주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르 요론트 부족이 카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카누를 만들어 내고 쓰기 위해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카누를 받아들이려면 매우 어려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모든 것이 신화로 이루어진 한 사회가 카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신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떻게든 자기들의 신화적인 조상들 중의 어떤 카누와 관련시켜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그런데 조상들 중에서 누가 카누와 관련되는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하여 모든 공동체가 카누가 있는 신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그 사회는 카누를 가진 씨족의 토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르 요론트 부족은 이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 그래서 카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처럼, 원주민 문화가 유럽 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토착민들의 일상 생활에는 새로운 모습들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들은 원주민들이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토템 신앙 체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이런 상황을 쉽게 무시해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토템 신앙 체계에 들어 있던 원칙들에 따라 그런 현상을 설명하고 짜 맞추려고 했다. 이르 요론트 부족은 1930년대 중반기에 이런 문화 변동의 과정에 놓여 있었다.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면서 유럽의 물건들과 새로운 행동들을 받아들였다.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유럽의 문화를 다양한 여러 씨족들의 토템들이라고 생각했다. 즉, 유럽의 문화가 자기들이 원래 갖고 있던 토템들과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럽 문화를 이르 요론트 토템 신앙 체계에 맞추려고 하였다. 이렇게 생겨난 몇 가지 새로운 신화를 살펴보면, 이르 요론트 사람들이 시도한 일들이 그다지 만족스럽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귀신들은 원래 모두 '머리를 동쪽에 둔 시체(Head-to-the-East Corpe)' 씨족의 토템들이었다. 귀신들은 하얀 것으로 여겨졌고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백인 남자도 역시 하얀 것이었고 역시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백인 남자, 백인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머리를 동쪽에 둔 시체 씨족의 토템이 되었다. 당연히 백인들이 가져온 쇠도끼도 그 씨족의 토템이 되었다. 그러나 쇠도끼도 하나의 도끼 이므로, 햇살이 비치는 구름 아래의 이구아나 씨족의 토템인 돌도끼와 분명 무슨 연관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럽 물건들처럼 쇠도끼는 나름의 독특한 기원 신화가 없었다. 또한 쇠도끼와 관계를 맺은 신화적인 조상들도 없었다. 어느 날 오후에 티 나무(아시아나 태평양 섬들에서 자라나는 백합과의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던 어떤 원주민이 이런 혼란을 해결해 줄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을까? 아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이 원주민은 자기들의 기원 신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볼 것이다. 이 원주민은 기원 신화가 잘못돼서 백인들의 크고 새로운 우주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무시무시한 의심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한 씨족에서 다른 씨족으로 옮겨 다니던 쇠도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돌도끼를 대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쇠도끼는 원주민 문화를 뒷받침해 주는 모든 것들을 마구 잘라내고 있었다.

이르 요론트 지역의 남쪽에 사는 원주민들도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곳에도 선교 지역과 목장으로부터 원주민 문화에 적당하지 못한 여러 가지 문화들이 흘러들어 왔다. 이 원주민들은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들도 유럽 문화에 휘말려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제 토템 신앙 체계만으로는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문화를 설명해 낼 수가 없었다. 원주민들이 신화를 만드는 재래적인 과정은 완전히 무너졌다.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원주민들은 더 어찌해 볼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기의 토템신앙 체계를 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원주민들은 이 새로운 문화를 더 이상 무시할 수만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기들 것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토템 신앙과 관련한 사고 체계는 토착 문화의 여러 가지 특징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고 체계가 무너지자 아주 섬뜩하고 느닷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하나의 문화가 완전히 무너지자 사람들이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들은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거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잘 다듬어져 내려온 생각들은 안정된 환경 속에서는 그 사회의 문화를 지켜 주었지만, 바깥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는 너무나 완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고 체계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원주민들이 예전에 갖고 있었던 감정과 가치 및 행동 방식도 간단하게 끝장이 나버렸다. 대신 냉당함과 무관심이 원주민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꼼짝없이 바깥에서 온 사람들(원주민들이 잘 되기를 바라기도 하고, 못 되기를 바라기도 하는)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목장이나 국경 마을 주위에 뒤죽박죽 모여든 낙담한 토착민들은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기운이 팔팔한 원주민들은 미첼 강 부근의 선교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다. 선교 지역에 우기가 계속되는 동안, 한 인류학자는 치약이 놀라운 속도로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막을 알고 보니, 나이든 남자들이 새로운 숭배를 위해 치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든 남자들은 오랫동안 써온 주술적인 재료들이 힘이 약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운 재료들을 가지고 선교사들이나 부족의 몇몇 젊은이들을 향해 악의적인 주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에게 무시당한 나이든 남자들은 잃어버린 권력이나 위신을 다시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건한 공격 방식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주술이 힘을 발휘할 거라는 확신마저도 이제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개간 안 된 숲에서 사는 이르 요론트 부족은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혼란스러운 문화 속에서 느끼게 된 개인적인 상실감이나 좌절감으로 말미암아, 이르 요론트 사람들은 너무나 엄청난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미래는 분명 이 혼란스런 현재가 그대로 계속될 터였다. 그 결과 원주민들에게 토템으로 숭배되었던 조상들과 신화적인 과거도 없어지게 되었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미래 역시 예전처럼 통일되어 있지도 않았고 확실하지도 않았다. 이제 원주민들은 불안정과 불안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이런 압박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몇 가지 상징적인 공격을 해보거나, 속으로 움츠러들어 무관심과 냉담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몇 가지 현실적인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그 반면에, 이런 과정들이 계속되리라고 믿고 있던 선교사들은 그 상황을 이용해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 할 수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새로운 우주와 새로운 문화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로리스톤 샤프 / 현재 미국 코넬 대학 인류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케이프 요크 반도 이르 요론트 부족의 사회 조직』, 『이르 요론트 부족의 제의와 경제』, 『동북 오스트레일리아 부족들과 토테미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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