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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권리와 의무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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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권리와 의무

 

김 태 길

 

일의 사회성

야생의 머루나 다래를 자기가 먹기 위해서 따는 행위와 같이 타인과의 관계가 별로 없는`개인적인 일`도 간혹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타인과 관계가 있는 `사회적인 일`이다. 하나의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장에서의 일은 말할 것도 없으며, 채소를 가꾸거나 가축을 기르는 행위와 같이 단순한 일의 경우도 가족 또는 그 밖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일이 갖는 타인과의 관계란 넓은 의미의 이해 관계이다. `이해 관계`란 다소간의 대립이 내재하는 관계이며, 사람들의 이해 관계가 대립하는 곳에는 반드시 윤리의 문제가 발생한다. 윤리란 이해 관계의 대립에서 오는 갈등을 방지하거나 해결하는 올바른 처방을 위한 지혜에 해당한다.

일과 관련해서 생기는 기본적 윤리 문제의 첫째는 누가 어떤 일을 얼마나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에는 무수하게 많은 종류가 있어서 어떤 것은 힘들고 어려우며, 어떤 것은 즐거움을 느끼며 쉽게 할 수 있다. 어떤 일은 일 그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기 쉬우나, 어떤 일은 그것을 느끼기 어렵다. 누구나 즐겁고 보람의 느낌이 강한 일을 하고자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나, 모두가 원하는 일만을 골라서 한다는 것은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나 만족스러운 사회의 존속 내지 형성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기가 처음에 갖고 싶었던 일자리를 얻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히 다른 일자리로 방향을 돌리게 마련이거니와, 첫 번째의 일자리가 아니라고 해서 다음에 얻은 일자리를 과소 평가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실제로 얻은 일이 도리어 적성에 맞을 확률이 높으며, 어떤 일이든 그 일에 대해서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은 보람된 일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자아 실현의 길도 열리게 마련이다.

일과 소득

우리가 어떤 일을 선호하는 것은 그 일 자체를 하고 싶은 충동 때문만은 아니며, 그 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갖는 매력에 몰릴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직업으로서 어떤 일을 선택할 경우에는 그 일 자체의 매력보다도 그 일에 따르는 수입이 갖는 매력이 더 큰 동기로서 작용하는 사례가 많다. 적성에 따라서 직업을 선택하기보다는 직업에 따르는 수입을 따라서 선택할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우리들의 실정이다. 만일 어떤 일을 하더라도 수입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면 오랜 교육 기간 내지 수련 기간이 필요한 의사나 법률가에 대한 선호가 오늘의 한국의 경우처럼 심한 경합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일자리를 에워싼 경쟁은 일자리만의 경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대한 경쟁이요, 전체로서의 생존 경쟁의 뜻까지 함축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힘이 많이 들고 괴로움이 큰 일일수록 수입이 많고, 즐겨 가며 쉽게 할 수 있는 일에는 보수가 적었다면 문제는 비교적 간단했을 것이다. 힘이 많이 드는 일은 많은 수입으로 보상이 되고, 보수가 적은 일은 일 그 자체가 쉽고 즐거움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므로 심각한 사회 정의의 문제가 생길 소지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반대여서 힘이 많이 들고 괴로움이 큰 일보다도 그 자체에 즐거움과 보람이 느껴지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경우가 많다. 이에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유리한 일에 대한 선호와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불리한 일에 대한 기피가 불가피하게 되며, 불리한 일밖에 차지가 돌아오지 않는 계층의 사람들은 이중의 불만을 갖게 된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가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쉬운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많은 보수가 돌아가고, 힘든 고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적은 보수가 돌아간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모순이 아니냐 하는 그것이며, 이러한 모순은 사회의 구조의 모순에 유래한다고 볼 때 이 문제는 곧 사회 정의의 문제로 연결된다.

어떤 일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것은 자유 경쟁을 통하여 결정되고, 어떤 일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받느냐 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관계가 지배하는 시장 경제의 원칙을 따라서 결정된다. 시장 경제에서의 물가의 형성도 결국은 자유 경쟁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얼마나 보수를 받느냐 하는 문제를 전체가 자유 경쟁을 통해서 판가름이 나는 셈이다. 그 경쟁의 과정이 공정하게만 이루어졌다면 자유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그가 놓이게 될 불리한 처지를 불평 없이 받아들일 의무가 있는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욕구의 대립을 오로지 당사자들의 자유 경쟁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인간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인정하는 이상, 개인 또는 집단 사이의 갈등을 `약육 강식`의 원칙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없음은 명백하다. 자유 경쟁에만 맡겼을 경우에 약자들이 놓이게 될 불리한 처지를 돕기 위한 어떤 사회적 조치가 있어야 마땅하다, 약자에게도 생존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한 약자에 대한 보호의 책임이 사회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자리를 에워 싼 경쟁에서 패자의 위치로 밀려난 약자를 보호하는 길은 실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자리를 맡기는 방향에서가 아니라, 약자에게 돌아간 일자리를 경제적으로 우대하는 방향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의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선반공에게 환자를 맡기거나, 과학적 지식이 약한 미장공에게 연구실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며, 다만 선반공이나 미장공이 하는 일에 대한 보수의 수준을 올리는 방향으로 불평등을 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어느 정도의 대우로써 약자에게 돌아간 일자리를 보호하는 것이 공정한가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게 된다.

일자리와 임금 격차

현재 우리 나라의 임금 지급의 실태는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관리직과 기능직, 숙련공과 단순 노동자 사이에 격차가 심하다. 같은 고학력자 사이에서도 직종에 따라서 수입의 격차가 크고,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관리직 가운데서도 중역과 평사원 받는 대우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전용 승용차와 판공비 등 부수적 혜택까지 계산에 넣을 경우, 고위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하위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수십 배의 우대를 받을 경우가 허다하다. 기업주에게 돌아가는 이 익금까지 계산한다면 고소득자와 저소득자의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유흥업소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의 하루 저녁 수입이 수레를 끌고 쓰레게를 치우는 환경 미화원의 한 달 수입보다 훨씬 많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실정에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옳은지에 대해서 만인이 수긍할수 있는 원칙과 방법을 제시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여기서는 몇 가지 예비적 고찰을 통하여 문제의 핵심을 좀더 분명히 밝히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일자리와 그 대우에 관한 문제를 완전한 자유 시장의 논리에 일임하는 것이 인간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정하는 견지에서 볼 때 사리에 맞지 않는다면, 일자리와 일의 성과를 만인에게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 일자리는 사람들의 능력에 따라서 맡겨야 일이 일같이 될 수 있으며, 일의 실적에 관계 없이 만인을 평등하게 대우할 경우에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노고를 아끼게 되어 생산성이 크게 떨어질 염려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취해야 할 길은 한편으로는 공개된 경쟁을 통하여 사람들의 능력 발휘를 촉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력이 약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중간 노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중간 노선의 바로 어느 지점이 가장 올바른 지점이냐 하는 것이 우리들 앞에 놓인 문제의 초점이다.

최저 임금 제도, 작업 환경의 개선 등을 규정하는 근로 기준법은 대부분의 국가가 도입하고 있는 약자보호의 기본적 장치이다. 우리 한국에서도 이 기본적 장치를 도입하고 있으나, 그 실천이 미온적이어서 유명 무실할 경우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노동3권의 보장을 주 목적으로 삼는 노동 조합법도 그 입법의 기본 정신은 약자의 보호에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약자를 직접적으로 보호하기보다는 약자들 자신이 결합함으로써 강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제도라는 점에 특색이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자유 시장 경쟁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그 한계가 있으며, 당사자 쌍방이 모두 합리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경우에는 큰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는 약점을 가진다. 그리고 근로자들이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조직적 단결을 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이 제도를 가동하기 어렵다는 것도 또 하나의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윤리의 본질은 자율성에 있다. 근로자들의 단결된 힘에 밀려서 마지못해 그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은 윤리적 해결이기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한 해결이다. 더욱 협동적이고 더욱 명랑한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분배의 주도권을 장악한 강자의 편에서 자진하여 약자의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정당한 몫을 나누어 주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상이란 본질상 먼 목표에 불과한 것이며, 강자 계층의 윤리적 자율만을 팔장끼고 앉아서 기다릴 없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생활력이 약한 사람들 또는 유리한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생존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제도의 확립을 요청한다.

복지 사회 정책

여러 나라에서 시도하고 있는 '복지 사회 정책' 은 불우한 계층의 생존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제도의 구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지 사회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들에도 몇 가지유형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초보적인 것은 매우 소극적으로 복지 사회 정책을 강구하는 나라로서, 미국을 그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미국의 경우는 우선 기업을 살림으로써 국민의 총생산을 높이고 나서, 그것을 토대로 저소득층의 생활 보장문제를 해결한다는 순서를 밟는다. 이와 같은 소극적 사회 복지 정책의 나라에서는 생산의 증대를 중요시하는 까닭에 고용정책에 있어서도 생산성이 높은 고급 기술 요원의 완전 고용에 가장 우선적인 역점을 두고, 경제성장을 위해서 그다지 크게 기여하지 않는 저임금 단순 노동자들의 고용문제는 뒤로 미루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생산의 능률을 높임으로써 국민의 총생산을 늘린 다음에, 누진율의 세금제도를 통하여 고소득층의 수입을 저소득층으로 다시 나누도록 한다는 것이 이 소극적 복지 사회 정책의 기본 방침이다.

복지 사회 정책을 실시하는 나라의 둘째 유형은 영국을 그 대표로 볼 수 있는 '사회 보장국가(social security state)'이다. 이 둘째 유형의 나라에서는 저소득층의 복지 생활을 위하는 정도가 첫째 유형의 경우보다 강하며, 사유 재산권과 시장기능에 대한 정부의 간섭도 첫째 경우보다 적극적이다. '사회 보장 국가'가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전 국민의 기본 생활 보장과 기회의 균등이다. 기본적으로는 개인적 자유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되, 국민 모두의 기본생활만은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이 둘째 유형의 근본입장이다.

복지 사회 정책을 실시하는 나라들의 셋째 유형은 덴마크나 스웨덴으로 대표되는 '사회 복지 국가(social welfare state)'이다. 좁은 의미의 '사회 복지 국가'는 전통적 의미의 자유보다 평등을 더욱 중요시하는 점이 앞에서 말한 사회 보장 국가와 다르다. 사회보장국가의 경우는 모든 국민에게 기본생활만은 보장하되, 그 이상 높은 수준의 생활을 즐기는 문제는 각자의 능력에 의한 자유 경쟁에 맡긴다. 그러나 사회 복지 국가의 경우는 국민 전체의 빈부 격차를 되도록 좁힘으로써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로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다만 그 목표의 실현을 위하여 사유 재산 제도의 철폐가 필요하다고는 보지 않는 점에서 사회 복지국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주의 국가와 구별된다.

사회 복지 국가가 추구하는 평등은 경제적 평등이며, 개인적 성취의 평준화는 아니다. 사회 복지 국가에서도 개인이 소질을 개발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을 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온 국민이 타고난 소질을 발휘하여 자아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을 그 소임의 일부로 삼는다. 다만 개인들이 타고난 소질의 차이에서 오는 성취의 차이가 개인들의 수입의 차이를 크게 하여 계급의 대립을 초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사회 복지 국가의 기본적 견해이다.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일자리와 일에 따르는 소득을 에워싼 사회 경쟁에서 패배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어떠한 제도를 도입해야 하느냐 하는 물음에 대하여 보편적 타당성을 가진 해답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라마다 구체적 상황에 차이가 많으며, 구체적 상황 여하에 따라서 각국에 적합한 제도에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일과 관련된 구체적 상황 가운데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의 일을 대하는 태도 또는 일에 대한 가치관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상적인 제도일수록 그것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인간성을 요구하거니와, 일과 소득분배에 관한 제도의 경우는 그 제도 밑에 있는 사람들의 일을 대하는 태도 또는 일에 대한 가치관 여하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의 기반이 되는 것은 일의 사회성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 안에 살고 있으며, 모든 일은 사회 생활의 일부인 까닭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자연히 사회상이 따르게 된다. 우리는 일을 통하여 사회에 참여하고, 일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한다. "일을 통하여 사회에 참여한다." 함은 우리에게 일할 권리가 있음을 함축하며, "일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한다." 함은 우리에게 일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일할 권리가 있다." 함은 일할 능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줄 책임이 사회에 있음을 함축하며, "우리에게 일할 의무가 있다." 함은 일의 괴로움이 그것을 거부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일에는 노고가 따르기 마련이나, 그 노고의 정도는 일의 종류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힘들고 괴로운 일을 피하고 그 반대의 일을 맡고자 하는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거니와, 이 경쟁이 정정 당당하고 규범을 따르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다. 그리고 노고가 많은 일을 맡게 된 사람들이 일에 대한 보수에서도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사회 현실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성실한 배려를 하는 것도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김태길/ 철학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저서로는 '윤리학',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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