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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자연 과학이 성립하기까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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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자연 과학이 성립하기까지

교양 과학 연구회

'과학'이라고 부를 만한 자연 과학은 근대 유럽에서 비로소 형성되었다. 그것은 물질적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자연의 방법적·이론적 연구를 전진시키고자 하는 사회 세력(근대 부르주아)이 형성되고 이들이 봉건적 사회 제도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리스도 교회와 그 신학적 이데올로기와 싸우게 되었고, 그리스 유물론 철학과 개별 자연 연구 분야에서 달성된 성과를 받아들여 발전시킴으로써 완성되었다.

신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1) 종교로부터 독립한 자연 연구

14세기 중엽이 되자 봉건적·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의 지배에 붕괴를 가져오는 새로운 태동이 점차 강하게 나타났다. 즉, 직인들이 도시에서 기술을 개량한 것에 힘입어 사회적 생산력이 높아짐에 따라 물질적 생산과 생산물 판매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의 부가 증가했으며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다. 그 결과, 그때까지는 주로 인간의 원죄라든가 죄로부터의 영혼의 구원과 같은 종교적·신학적 문제에 지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지식인들의 현세의 문제, 나아가 부의 소재가 되는 자연 및 직인의 기술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의 이동은 천국이나 인간의 타락과 구원 등에 대해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자연 현상에 관한 성서의 기록이나 교회의 견해에 무조건 구속당하지 않고 자연 연구를 수행하고자 하는 지향을 낳았다. 그리하여 자연과 사회 전체를 신을 정점으로 하는 계층적 구조로 본 토마스 아퀴나스의 포괄적이고 통일적인 목적록적 세계관 ― 13세기 후반 이래 가톨릭 교회가 공인한 세계관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신이나 인간 영혼에 관계된 문제는 교회와 신학에 맡기겠지만 자연 문제는 거기에서 분리하여 연구하겠다는 사고 방식, 즉 자연 과학의 종교로부터 독립, 신앙과 이성의 분열이라는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근대 자연 과학 성립의 사상적 전제가 준비되었던 것이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붕괴되고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어 가는 과도기이며, 중세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뒤섞여 서로 싸우는 격동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 근대 자연 과학의 기초가 다져지고 자연 과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일찍이 보여 준 위대한 업적이 이루어졌다.

(2) 영국 유물론의 선구 베이컨

먼저 영국 유물론의 선조인 프랜시스 베이컨에 관해 살펴보자. 그를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은 그가 중세말에 시작된 자연에 관한 시각 전환을 선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지배하에 자연의 사물을 둠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생활을 비약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급무라고 통감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은 복종시킴으로써만 정복된다.' 라고 생각하여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여러 특징과 법칙에 대한 인식을 비약적으로 전진시킬 필요가 있고, 자연 연구를 목적 의식적·조직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자연에 적극적으로 작용하여 자연으로부터 인간에게 필요한 부를 끄집어낼 수 있도록 자연에 대한 지식을 개발하고자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 이후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과들이 나타났는가. 먼저 17세기 말 뉴턴이 통합하게 된 두 분야 ─ 천문학과 역학 ─ 에서 거둔 성과가 주목된다.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에 대한 입증

(1) 왜 천동설이 계속 유효했는가

천문학 영역에서는 우선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확립했다.

지동설은 지구를 전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낡은 세계관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든 것이었다. 지구 중심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신뢰받았고 또 사람들이 가진 일상 생활의 소박한 경험에 의해 강하게 지탱되었다. 확실히 지구는 정지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 전체를 통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 수많은 공전 궤도를 가정하여 비로소 혹성 운동의 불규칙성을 단지 외양상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고, 더욱이 그것이 너무나 지나치게 기교적이어서 그 설명에 성공할수록 ‘천체는 지구 주의를 완전하게 원을 그리면서 회전하고 있다.’는 단순 명쾌한 판단과 점점 더 확실하게 모순될 수밖에 없는 부자연스러움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이 학자들에게 신봉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사정을 설명하려면 앞에서 든 이유에다 또 한 가지 이유, 즉 지구는 바로 ‘주(그리스도)의 대리인’인 로마교황이 있는 신성한 장소라고 하여 이곳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 그리스도 교회 이데올로기의 작용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지동설

그렇다면 과연 코페르니쿠스가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출현한 것이다.

그 당시 활발해진 대양 항해에는 정확한 천체 관측에 기초한 배의 위치 결정이 요구되었고, 거기에는 정밀한 항성표가 필요했다. 또 부활제 등의 날짜를 정확하게 산출하려면 달력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통감하고 있었던 교회측의 입장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정확한 천체 관측을 그때까지보다 더 잘 지도하고, 관측지에 좀더 잘 합치될 이론이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당시 이미 80개나 되었던 공전 궤도의 수가 반감되어지는 개선이 이루어졌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구태 의연한 요소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천체의 운동을 원운동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 그것이다. 바로 '천구'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도 우주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닫혀져 있으며 유한하고 거대한 구의 그각각에 천체가 부착되어 있는 집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와 같은 고루한 천체관에도 불구하고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간행된 1543년을 근대 자연 과학의 원년으로 보는 데는 아마 그다지 반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그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이론에서 어떠한 세계관이 도출되었으며, 또 역사적으로 무엇을 낳았는가 라는 점이다.

(3) 케플러의 3법칙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매우 감격적으로 받아들인 천문학자가 독일의 케플러이다. 초기 저작에서는 우주의 조화에 관해 신비주의적 사변을 펼치기도 했으나 그 후 점차 그런 사고에서 해방되어 갔다. 그리고 덴마크의 대관측가 티고 브라헤가 남긴 상세한 관측 기록을 받아서 그것을 열심히 추적하고, 스스로 화성의 운동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 자료를 기초로, 계산기가 없었던 飁였으므로 몇 년에 걸쳐 계산하고 매우 고심 한 끝에 행성의 궤도를 규정하고 있는 법칙을 발견하는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냈다. 유명한 '케플러의 3법칙'이 그것이다.

『신천문학―천계의 물리학』에 발표된 제 1·제2법칙은 각각 '행성은 태양을 하나의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린다', '행성과 태양을 잇는 직선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린다(행성 궤도가 그리면 면적 속도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세계의 조화』에 발표된 제 3법칙은 '임의의 두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제1·제2법칙은 행성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나타내고, 제 3법칙은 태양계의 구조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제 1법칙에 의해 '천체의 운동은 원운동이다'라는 저 낡은 도그마가 마침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점을 우선 주목해야 겠다. 이 점은 그가 전에 사로잡혀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적 '2세계'설, 즉 '천상계'는 신적인 세계이므로 '지상계'와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고 방식에서 해방되어 이제 세계의 물질적 통일이라는 유물론의 입장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다음에 위의 3법칙의 확립에 의해 그가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영(정신)'이 천체를 움직이고 있다는 신비적 관념에서 해방되어 법칙적으로 작용하는 물리적 힘이 천체를 움직인다고 하는 자연 과학적 입장으로 이행할 수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겠다.

(4)갈릴레이의 천문학상의 발견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케플러 이상으로 근대 자연 과학의 건설자는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

고전 역학의 형성에 대한 기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가 지상 물체의 역학을 상당한 정동까지 건설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갈릴레이 스스로가 고안하고 제작한 망원경에 의한 관찰에서 시작되었으며, 여기서 그는 두 가지 종류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 한 가지는 지동설과 직접 관계된 것이다. 우선 목성이라는 커다란 별 주위를 4개의 위성이 돌고 있다는 발견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달이 지구를 돌고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발견이 이 지동설의 목성판이며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 같은 현상이 금성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지동설 반대론자들은 오히려 지동설이 옳다면 지구와 태양 사이에 있는 금성과 수성에서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 같은 현상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이 없다고 끝까지 우겨대고 있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달의 현상을 한 금성을 발견하여 이 반대론을 분쇄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지동설이 옳음을 깊게 확신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고심하여 쓴 것으로 보이는 『천문 대화』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발견이란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 달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완전한 공 모양이고 평평한 표면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 표면 역시 구멍이나 골짜기들로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이었다. 왜냐 하면, 달이 그렇다면 '천상계'를-하늘과 땅을-엄격히 구별해야만 하는 근거가 아주 완전히 없어져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자로서 갈릴레이는 자신이 행한 관측을 통해 세계의 물질적 통일이라는 유물론의 기본적 입장을 비로소 사실에 의해 궤적으로 확증한 것이다.

(5) 천상계와 지상계의 동질성을 명확히 한 그 후의 연구

편의상 여기에서 갈릴레이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천상계 물질의 연구를 통해 그것과 지상계 물질의 동질성을 확인해 낸, 후대의 연구 가운데 두세 가지를 더 언급해 두겠다.

물체가 완전한 기체 상태일 때 발하는 빛을 분광기로 분석하여 그 물체의 화학적 조성을 밝혀 내는 스펙트럼 분석이라는 방법이 있다. 태양이나 항성, 또는 혜성은 빛을 내보내고 있으므로 이 방법을 통해서 그 화학적 성분을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연구되어진 바로는, 천체가 지구와 똑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간혹 우주 공간에서 날아온 운석이 지구 표면에 다다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 성분은 대부분 철이었으며 달리 무언가 지구상에 없는 독특한 원소가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은 자연 과학자의 노력 속에서 완전히 입증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갈릴레이가 구축한 고전 역학의 기초

이번에는 갈릴레이가 지상 물체의 역학을 만들어 내기 위해 쏟은 노력에 대해 살펴보자.

그가 쓴 『신과학 대화』의 머리말을 보면 기계적 기술과 역학 연구가 가진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그는 도시의 직인들이 발전시켜 온 기계적 기술에 흥미를 갖고 거기서 제기된 이론적 여러 문제-예컨대 파괴에 대해 물질이 갖고 있는 저항력의 문제, 물체가 자유 낙하할 때 생기는 법칙의 문제, 투사물이 그리는 궤도의 문제 등-를 해결함으로써 새로운 과학 건설하려고 했다. 이리하여 물질적 생산과 자연의 객관적 합법칙성에 대한 인식 사이의 밀접한 연관, 즉 '손과 머리의 결합'이 고대 자연 과학 이후 실로 오랜만에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가 앞에서 든 문제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머리'를 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필요성을 크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연 과학자의 분석적·비판적 사고력으로 같은 현상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공기 중에서 나무조각이 종이보다 더 빨리 낙하하는 것은 물체의 모양이나 무게에 따라 공기 저항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또 이 저항은 물체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갖고 있을 경우에는 문제삼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닐까. 따라서 무게가 다른 쇠구슬 두 개를 탑 위에서 떨어뜨리면 두 개가 동시에 지면에 닿지 않을까. 이런 방식으로 갈릴레이는 문제를 추궁하였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진공 상태에서는 어떤 물체나 모두 같은 속도로 낙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추론하고, 이어서 이 자유 낙하에 관하여 낙하 거리·낙하 시간·가속도라는 변수 사이의 연관을 발견하는 과제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한 본질적 연관을 끌어낸 후에 다시 공기 중에서 물체가 낙하하는 여러 형태를 문제 삼는다면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그는 이윽고 문제가 되는 연관을 찾아내서 정식화되는 데 성공했다. 낙하하는 물체의 법칙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더욱이 이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역학의 근본 원리가 되는 이른바 관성의 법칙까지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공의 존재를 전제로 했던 그의 연구 자세는 추상적 사고를 구사하여 진공과 무수한 원자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현실에 감각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던 데모크리토스의 자세를 따른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와 같이 과학적 인식의 방법론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고전 역학의 기초를 구축하여 갔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의 작업은 역학적 현상을 과학적으로 인식한다는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공헌이었고, 동시에 그 인식의 방법론도 '상식에서 과학으로' 현저하게 끌어올린 것이었다.

(7) 뉴턴에 의한 고전 역학의 완성

영국의 뉴턴에 관해서는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위대한 업적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첫째,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부터 시작되어 케플러에 의해 발전되어 온 성과와 둘째, 지상의 물체에 대한 역학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비판하는 등 중세에 이루어진 여러 연구를 근거로 하면서 갈릴레이가 거둔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의 성과를 뉴턴은 자신의 저작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프린키피아)』에서 종합해 냈다. 여기에서 고전 역학이 원리적으로 완성되었고, 자연 과학이라는 큰 건물의 견고한 초석이 비로소 놓여졌던 것이다.

뉴턴에 의한 역학과 천문학의 종합이 갖는 의의는 지상에 있는 물체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이 모두 동일한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증명하여 세계는 물질적으로 통일되어 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8) 자연관에서는 유물론에 철저했던 데카르트

데카르트라고 하면 보통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자기 의식의 확실성을 근거로 하는 주관적 관념론을 주창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연관에서는 유물론에 철저했다. 중요한 점은 그가 당시의 대표적 기계인 펌프나 기중기, 시계 등의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를 기초로 그러한 기계의 작동과 비교하여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였다는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실체, 즉 '연장(延長)의 속성'을 지닌 물체라는 실체와 '사유(思惟)의 속성'을 지닌 정신이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물체로부터 정신을 분리해 내고,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채용했다. 따라서 그의 물질학에서는 자연은 기계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물체가 집적된 세계로서 설명되고, 정신의 원리는 배제되고 있다. 요컨대 자연이란 물체가 오로지 기계화, 즉 역학의 법칙에 따라 운동하고 있는 세계이며, 동물조차 자동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철저한 기계론적 유물론의 입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연관의 변증법적인 발전

(1) 형이상학적·기계론적인 사고 방식이 지배적이었던 18세기

18세기의 자연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18세기는 이른바 수학적 자연고학, 즉 역학이 주역을 담당한 17세기와, 생물학을 둘러싸고 자연 과학의 여러 부문이 커다란 발전을 본 19세기의 중간에 있는 과도기였다.

이때 자연 현상들의 통일과 연관을 주장하는 변증법적인 물질관이 일부에서 나타났다. 특히 독일의 칸트는 『천계(天界)의 일반 자연사와 이론』에서 뉴턴의 역학을 기초로, 성운(星雲) 덩어리에서 태양과 모든 행성이 형성되었다고 논하여 발전이라는 관념을 개입시킨 자연관을 내놓았다. 그러한 일들은 주목할 만하지만, 18세기 전체를 통하여 지배적이었던 것은 형이상학적이고 기계론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기계론적 사고 방식은 요컨대 만사를 역학을 모델로 하여 파악하는 입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칸트 자신도 만년에 '자연'을 '필연적 제법칙에 따라서 규정되고 있는 한에서의 물질의 존재이다.'라고 정의했던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필연적 제법칙'이란 뉴턴 역학의 제법칙을 이르는 것이다.

(2) 변증법적 자연관을 부활시킨 3대 발견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역학 분야에서 그 일반 원리의 정식화에 관련된 중요한 업적들이 거듭 나왔을 뿐 아니라 특히 19세기 중엽부터 역학 외의 자연과학 분야들에서 전면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특히 지질학·생물학·열역학 등의 분야에서 거둔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18세기의 형이상학적이고 기계론적인 자연관이 물러가고 변증법적인 자연관이 준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엥겔스는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중에서 형이상학적 자연관에 가장 강력한 타격을 준 것은 다윈의 '생물 진화론'이었다고 하고, 또 『포이에르바하론』에서는 이것과 더불어 슈라이덴 및 슈반에 의한 '식물 세포와 동물 세포의 발견', 그리고 마이어 등에 의한 '에너지 보존과 전환의 법칙'의 확립을 일컬어 변증법적 자연관의 부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3대 발견'이라고 하였다.

(3) 형이상학적 자연관과 변증법적 자연관

자연을 개개의 부분으로 분해하고, 여러 가지 자연물·자연 과정을 일정한 부류로 분류하고, 생물체 내부를 여러 가지 해부학적 형태와 관련하여 연구하는 자세는 15세기 말부터 19세기 후반까지 400년간 자연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거대한 진보의 근본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이 연구 방법에서 연구자들에게 자연물·자연과정을 개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서, 커다란 전체적인 연관을 염두에 두지 않고 파악하는 습관, 즉 그 자연물·자연 과정을 운동하지 않고 정지해 있으며,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 불변의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습관이 형성되어 버렸다. 물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과 사고 방식은 그런 습관이 자연 과학에서부터 철학으로 옮아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관점과 사고 방식은 사물과 개념을 하나하나 다른 사물·개념과 분리시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정되고 경직된 한번 주어지면 그뿐이고 변하지 않는 연구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개개의 사물에 사로잡혀서 그 생성과 소멸을 잊고, 그 정지에 사로잡혀 그 운동을 잊고, ‥‥‥다만 나무만을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세기 후반에는 3대 발견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자연물·자연 과정도 서로 연관이 있고, 서로 이행하며,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발전·소멸되는 것이라는 사실, 요컨대 자연은 모두 변증법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자연의 이러한 구조·활동 방식은 먼 옛날 탈레스나 헤라클레이토스가 직감적으로 파악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일단 형이상학적 자연관에 의해 부정된 후 형이상학적 자연관이 장기간 지배적이었으나, 근대 자연 과학의 발전으로 형이상학적 자연관이 부정됨으로써, 즉 바로 '부정의 부정'결과로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활된 것이다.

이제 사태는 이미 자연을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으로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연 과학자가 변증법적인 사고 방식을 연구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배운 자연 과학자가 이제까지 손꼽을 정도밖에 없기 때문에 발견된 여러 성과와 종래의 사고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음에 이야기할 20세기 초기의 유명한 '혼란'도 마찬가지로 설명되는 것이다.

물질의 개념을 둘러싸고

물리학에서 라듐 등이 방사능을 내면서 '붕괴'해 가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논거로 하여 '물질의 소멸'을, 즉 유물론의 파산을 소리 높여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근거가 있었는가?

(1) 물질이란 무엇인가

철학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이란 객관적 실재이며 물질의 이러한 '유일한 성질'은 물리학의 진보와 함께 하나하나 밝혀지는 것이지 물리학 연구 대상으로서의 물질이 여러 가지 구조·성질에 의해 속박되는 것은 아니다. 라듐이 원소로서 어떠한 활동을 하는가라는 물리학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떠하거든, 그것은 라듐이 의식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인가 어떤가 하는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물질'과 물리학적 개념으로서의 '물질'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듐의 '붕괴'를 발견한 것으로 관념론자들이 열망하는 '물질의 소멸'이 증명될 수는 없다. 이 발견 이전에나, 이후에나 라듐은 객관적 실재로서의 '물질'인 것이다.

(2) 물리학의 발전이 변증법적인 자연관의 정당함을 증명한다

이 '물질'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물질이 소멸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한계가 소멸하는 것이며, 우리의 지식이 한층 심화되는 것이다. 전에는 절대적이고 불변하고 근원적이라고 여겨 왔던 물질의 성질〔불가입성(不可入性), 관성, 질량 등〕이 소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질은 이제 물질의 몇 가지 상태에서만 드러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므로 무언가 불변의 요소, 물질의 불변의 본질을 승인하는 것은 변증법적 자연관이 아니고 형이상학적, 즉 반변증법적·반과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의 발전 그 자체가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의 파산과 변증법적 자연관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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