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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의 속임수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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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의 속임수

 

 

광고 필름을 들여다보면 세상이 보인다. 여자를 지키는 힘은 칠푼이 거짓 화장이고 남자의 매력은 여자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중후(?)한 돈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넓은 집이냐?” “아니옵니다.” “좋은 차냐?” “아니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날씬한 몸매이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광고 카피는 오늘의 현실이었다. 젊은 여자가 구하는 것은 좋은 집이나 차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얻는 조건이 될 날씬한 몸매인 것이다. 날씬한 몸매, 모델 같은 얼굴이 넓은 집, 좋은 차를 보장해 줄 남자를 가깝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성형외과가 만드는 매력

그 믿음은 인도한다. 차암 스쿨이나 성형외과로. 아직도 성형외과가 교통 사고나 화재 같은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원 모습을 찾아주는 곳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무엇이 기준인지 모르지만 낮은 코를 높여 주고 건강한 외꺼풀에 칼을 대서 쌍꺼풀을 만드는 사람들이 너무 흔하다. 광대뼈를 깎고 턱을 깍고 멀쩡한 이마의 머리 부분을 도려낸 뒤에 실리콘을 집어넣어 강 수연 같은 짱구를 만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눈썹 문신이나 주름살 제거 술이 흔히 행해지며 도툼한 입술을 만들려고 입술을 부풀리기도 한다. 짱구 이마 팔백만원, 윗입술, 이랫입술 각각 이백만원, 광대뼈와 턱깎는 데에 각각 사백만원이다. 부르는 것이 값이다. 이 미친 짓이 아름다운 얼굴, 매력 있는 몸매라는 이름으로 오랑시에 페스트 번지듯이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의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의사라는 직업 자체를 존경해 본 일이 없다.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 중에 의사가 있어도 그 때문에 내가 의사라는 직업 자체를 경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코믹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는 성형외과의 현실을 듣고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성형외과가 만들고 있는 아름다움은 징그럽고 매력이란 것은 괴물 같다.

 

 

롱다리의 신화의 비밀

연못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반해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나르시스 신화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그런데 화려하게 화장을 한 어떤 여자가 쇼윈도우에 비친 자기 모습을 훔쳐 보고 있다면 그것은 어떨까? 자기 자신일까? 혹시 그때에 그 여자가 훔쳐 보는 얼굴은 누군가와 비교되는 그 자신이지 않을까?

 

현대 소비 사회에서 매력 또는 아름다움은 차이의 질서 속에서 기능하는 잉여적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관념에 관여하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의 관념은 기호화되어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분화되어 나간다.

 

예를 들면 현대 우리 사회에서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한 개념이 신장이다. 사실 키가 작음이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그 자체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적어도 백육십오 센티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파급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사람들에게 각인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백육십오 센티미터라는 기호를 기준으로하여 백육십칠, 백육십삼, 백칠십,백육십 센티미터 같은 기호들에 주목하는데 각각의 기호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불란서의 후기 구조주의자 데리다의 말대로 상이한 것들의 차별성 속에서 의미로 드러나는 것이다. , 백육십이라는 기호는 백오십오라는 기호와 백육십오라는 기호 사이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지 그 자체로 구체적 내용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십 센티 미터의 작은 차이는 원래 생활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던 필요 신장, 예를 들면 백오십 센티미터를 완전히 무화시켜 버리고 과잉 신장들의 차이의 질서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일까? 굽높은 구두의 소비, 나아가서 롱다리 수술이 되지 않나?

 

사실 롱다리가 미남, 미녀의 조건이 된 것은 매력 시장의 세계화(?)와 관계가 있다. 화면발이 잘 받는 롱다리의 헐리우드 남녀 배우들을 모방하는 측면도 있고 키가 큰 외국 여자들이 출전하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나 세계 모델 선발 대회가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자 거기에 참가할 수 있는 외모인지 아닌지가 우리 세대들의 마음에 내면화된 것이 롱다리의 신화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롱다리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롱다리이기를 바라며 또한 롱다리가 아니라는 것이 컴플렉스가 되기도 한다. 이 조작된 컴플렉스를 이용한 장사도 꽤 잘 된다. 다리를 절단해서 이물질을 끼운 뒤에 다리를 길게 만드는 수술이 늘고 있고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를 롱다리가 되게 하려고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힌다. 이쯤 되고 보면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이 아니라 이윤을 남기는 장사이다.

 

 

요즈음 매력의 실체

도대체 이런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극단으로 말하면 이런 현상은 화면의 현실에 놀아나는 것이다. 화면의 매력에 취해 현실을 보면서 매스컴이 보여주는 대로 소비하는 자들, 그자들이 바로 신세대, 엑스 세대, 미시족이 아닐까.

 

예를 들어 미시족은 여전히 매력(?)을 추구하는 개성 있는 아줌마들이다. 아이를 들쳐업었거나 세파에 지친 모습으로 생선 한 마리를 싸게 사려고 시장을 돌고 돌던 아줌마들을 구경하기란 이제 너무나 힘들다. 그보다 서울 거리에서 익숙한 풍경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통굽 구두를 신고 모델인지 배우인지 확인할 길없는 화장을 한 이른바 그 미시족들이다. 매력 있나?

 

요즈음에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매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견적이 얼마인지 확인할 길 없는 성형된 얼굴, 누구의 간섭도 받기 싫은 나만의 오피스텔, 롱코트, 헵번브라운 색, 맵시있는 차, 통굽은 구두, 색색을 넣은 염색 머리, 근사한 레스토랑, 그리고 주말 여행들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권위와 도덕으로부터 해방되어 나는 나만의 세계를 고집한다면서 쌍꺼풀과 코 높이는 수술은 기본으로 하고, 추가로 턱을 깎거나 이마에 실리콘을 넣고 넓은 이마를 만들어 매력있는 얼굴을 만든다. 매력의 기본이 되면 광고 필름 스타들이 입고 나오는 옷과 장신구로 비슷한 분위기를 만든 뒤에 염색 머리를 섹시하게 빗어 넘기고 맵시 있는 차를 뽑아 그에 어울리는 동반자와 여행을 떠나 길에다 돈을 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매력 있는 인간들에게서 무엇을 확인하나? 근검 절약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던 우리의 부모들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 부모들의 삶의 형식을 해체하고 매력있는 개성적(?) 문화를 주도하는 신세대, 엑스 세대, 미시족 들의 이름은 정말로 매력있는 이름일까?

 

 

매력을 팔았던 산소 같은 여자

현대 사회에서 소비란 일종의 신앙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하느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이방인으로 그 존재가 무화되듯이 소비 사회에서 소비와 관련이 없는 사람은 매력 없는 인간이 된다. 이렇게 볼 때에 현대의 매력있는 인간들이 지향하는 소비 구도는 논리의 측면에서는 종교와 흡사하다. “왜 신을 믿지?” 하는 질문에 인간이니까 하는 대답말고는 무엇돌 필요가 없는 신자가 가장 철저한 신자이듯이 왜 도톰한 입술을 하지?” 하는 질문에 섹시하니까 하는 말 말고는 아무말도 필요가 없는 자들이 현대 소비 사회의 신자들이다. “김혜수를 따라 입술 바깥으로 루즈를 칠하면서 섹시하기를 기대하는 이들은 한때에 섹시하다는 이유로 얇은 입술을 원했던 자들이다.

 

화창한 구십사년 봄에 트로픽오렌지 색을 바르고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여자의 이미지가 그 가을에 재즈와인 색의 이미지로 유혹했을 때에 정말 계절 감각이 있는 세련된 여자상,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향하여 자신을 개발해 가는 에로스의 현신을 만났었나? 그런 이미지의 주인공들을 아는 체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 재즈와인으로 유혹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시장 바구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만났다고 상상해 보자. 특정한 이미지를 창출했던 여자들을 장터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영애라는 기표는 거개 그 여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사용하는 특정한 여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어떤 이미지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영애와 함께 트로픽오렌지, 재즈와인을 찾아갔던 여자들이 이제 더는 그것을 찾지 않는다. 이제 그 여자들은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고 믿으면서 나의 변화를 또다른 색 곧 파스텔로우즈나 레게베이지로 시도하여, 누군가를 유혹하고 누군가에게 유혹당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트로픽오렌지, 재즈와인은 더는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관심하는 색은 또다른 템프테이션의 색으로 선포되는 그 헵번브라운이다. 한때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여겨졌던 색이 이제 촌티를 내고 한때는 시선을 끌지 못했던 색이 지적인 색으로 등장하는 것은 과연 계절의 변화 때문일까?

 

트로픽오렌지의 여자가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가 트로픽오렌지가 상정한 제품의 결핍을 만들어 냈듯이, 그리고 재즈와인의 여자가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가 재즈와인이 상정한 제품의 결핍 관념을 만들어냈듯이, 이제 헵번브라운 여자의 이미지에 유혹된 인간은 그 이미지를 뒤로 감춘 상품의 결핍 관념이 조장되어 그 상품을 욕망한다. 개인의 개성 연출(?)의 도구가 될 새로운 제품을 바라는 욕망은 기존에 자기 연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제품을 촌스럽게 보이게 한다. 립스틱으로 말하면 더는 트로픽오렌지, 재즈와인이 개성 연출의 도구로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때에 이런 것들이 레게베이지로 대체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아직 반도 채 쓰지 않은 재즈와인은 그의 선배 트로픽오렌지가 그랬듯이 헵번브라운의 유혹으로 폐기되어 쓰레기가 된다. 그것이 립스틱 뿐일까?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없다고 한다. 왜 없을까? 아니, 없어야 할까? 영원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아야만 오늘의 매력이 내일의 천박함이 될 수 있고 그래야만 또다른 매력을 추구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제의 천박함이 오늘의 아름다움이 되고 오늘의 아름다움이 내일의 천박함이 되는 것을 미의 상대성 때문인 것으로 기술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현대 사회가 소비를 창출하려고 선포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이 없어야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등장할 수 있고 그래야 유행에 뒤진 것을 해체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해체의 목적은 아름다움의 본질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 패턴을 유도하는 데에 있다.

 

내가 내 모습에 점수를 매겨(이것이 생활 속에서 기호화가 침투된 구체적인 예이다.) 성형 수술을 하거나, 화장품이나 유행하는 옷으로 나의 개성을 표현한다면, 그것이 성공으로 평가되거나 실패로 평가되거나 나는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그리하여 분화되는 아름다움의 기호들의 차이들의 질서 속에 편입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때에 나의 나만의 세계 추구는 나의 세계의 포기가 된다.

 

대체적으로 요즈음의 화장품 광고는 미인이라고 규정되어 미인이 된 화면 미인을 모델로 쓴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 스타들에 익숙해진 여자들은 그 스타들을 기준으로하여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고 머리를 하며 성형을 한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매력 있는 개성 연출이다. 그러나 그것은 만족될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절대 권력이나 영원한 스타가 존재하지 않듯이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우리의 관심은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의 사실성 규명에 있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명제가 우리의 욕망을 산출해내는 광고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소비 시장의 필요성과 요구에 따라 규정케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상품 판매의 중요한 전략이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끊임없이 유행을 창출하고 그 유행을 창출했음을 상징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하는 기업은 그 새로운 매력의 표상이 될 신인을 찾아나선다. 말할 것도 없이 기업이 찾은 영화 광고 스타는 다시 매력이 있다고 인정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여 그것을 팔아야 하는 기업에겐 영원한 상품이 없듯이 영원한 스타가 없듯이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이런 과정에서 이런 방식으로 힘을 얻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명제의 사회적 역할은 분명하다. 사회는 아름다움을 두고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고 규정하여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에게 탄타루스의 물처럼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심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욕망은 인간을 시달리게 하는 욕망이다. 이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결핍 관념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사용 가치를 무시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촌티와 매력 사이의 유행

매력 있는 인간이 되려고 차암 스쿨에 다니고 섹시한 입술을 하려고 성형 외과를 찾으며 미시족이 되려고 헬스 클럽에 다니면서 미니스커트가 어울릴 몸매를 만들려고 노이로제에 걸리고 개성있는 인간이 되려고 빨간 머리, 노란 머리를 하며 주말을 즐기려고 스포츠카를 뽑는다. 그러나 실상은 유행에 따라 행동하여 유행을 창출한 기업의 이윤 창출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지 매력 있거나 여유있는 실존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유행은 그것을 따르는 자에게는 매력을 아는 자, 아줌마가 아닌 개성 있는 미시족, 신세대 같은 칭호를 훈장처럼 붙여주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는 촌티로 응징한다. 미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여 우리로 하여금 만들어지는 미인이 되는 필요 조건으로서 따라 다니는 소도구들 곧, 상품들을 소비하도록 우리를 소비 시장으로 내몬다. 여기에서 인간은 소비의 주체로 선포되지만 실상 소비의 노예일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입는 것이 왜 매력적이지?’를 현실 세계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기호의 세계에서 유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하고 그것은 분명히 기호의 세계에서 유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사냐건 웃지요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처럼 매력이 규정되는 방식을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받아들여가고 있는 현대 소비 사회의 사도가 된 우리에게 왜 아름다운가 왜 매력적인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소비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사실상 소비의 객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무때나 우리네 안방을 침해하여 우리를 유혹하는 매스컴이 주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보여주는 것이 많다. 인간은 오직 매력의 창조자인 매스컴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연약한 피조물일 뿐이다. 남자에게 매력적이게 보이려고 여자를 지키는 힘인 화장품을 바르고, 그런 여자를 소유하려고 무슨 무슨 이름의 중형차를 굴릴 줄 아는 여유 있는 남자가 되기를 동경한다. 무조건 군림하는 남편이 아니라 처제가 혼인할 땐 대형 냉장고를 선물하는 자상한 남자, 가사일을 멀리하는 남자가 아니라 대형 세탁기로 빨래를 할 줄 아는 남자가 매력적인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소비가 매개인 분위기를 만드는 여자’, 그 여자의 분위기를 창출할 돈을 가진 남자가 매력의 필요 조건이라는 그림일 뿐이지 현실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매스컴은 자기들이 만든 이미지의 현실성을 확보하려고 살아있는 남자, 여자를, 그 이미지를 내용물로 갖는 포장지 정도로 대접할 뿐이다. 여기서도 현실적인 남자와 여자는 의미가 없다. 도대체 의미 있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 시장이 창출한 이미지에 맞게 시장에서 소비할 줄 아는 인간들이다.

 

 

나르시스와 허수아비

사실 인간의 소외가 그 특징인 현대문화의 타락은 거개가 결핍에서 유래하기보다는 너무나 편리해진 생활 조건들(상품들)에 기인한다. 상품들이 주는 생활의 편리함이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듯하지만 실상은 삶을 무력하게 만드는 측면이 강하다. ‘상품 미학 비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 하우크가 한 말을 빌려 보자. 처음에는 꼭 필요하지 않았던 상품들은 필요하면서도 자질구레한 일들을 훨씬 쉽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나면 그 일들은 그 상품의 도움 없이는 매우 어렵게 되어서 불가피하게 그 상품을 구입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필수적인 것은, 그것 없이는 더는 생활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불필요한 것과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상황은 화장을 해 본 경험이 있거나 승용차를 사용해 봤으면 쉽게 이해된다. 화장은 처음엔 화장을 한 사람을 예쁘게 만들어 주어 그 사람을 당당하게 서게 하는 듯하다. 그러나 화장을 해본 사람은 화장을 하지 않고는 외출하기 힘들다고 하지 않나! 얼굴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화장을 하면 기본이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마치 나체로 사람들에게서는 것과 같아 외출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 화장품은 얼굴을 매력적이게 하는 보조품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 된다. 그런 상황을 정당화하는 명제가 그 유명한 말 여자에게 화장은 예의이다.’가 아니냐! 팔푼이 거짓 얼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째서 예의인지를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승용차의 경우도 그렇다.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승용차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좋은 차라고 인정된 차를 가진 사람은 매력의 중요한 조건을 구비한 것이다. 티코를 타고 다니는 사십대는 매력이 없어 보인다.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삼십대는 동경의 대상이다. 사실 교통 수단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볼 때, 그리고 서울이라는 교통 지옥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주차하기 힘든 그랜저보다는 티코가, 티코보다는 버스가 편할 수 있다. 그러나 매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순이 된다. 그래서 불편하고 비경제적이어도 큰 차를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렇게 소비에 길들여지는 사이에 가장 강력하게 등장하는 것은 역시 화폐 물신화 현상이다. 모든 인간 관계가 소비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비를 할 수 없는 인간은 볼품없는 인간, 매력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실 매력적인 인간을 보는 현대의 상식은 정말로 비상식적이다. ‘어떤 인간이 매력적인가에 필요하고 충분한 조건을 나열할 순 없어도 분명한 것은 소비와 관련이 없는 인간은 매력 있는 인간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가 쉽다. 그래서 현대를 호흡하는 우리들에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한달 월급 하루에 소비하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실연의 고통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현대인이 다음 문장을 왜 좋아할까?

 

, 그 사람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러나 그 불행으로 나 그 시절을 견뎌냈다.’

 

실연의 고통을 갖는 것이 예스러울뿐더러 촌스런 당당한 세대들의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규가 담담해서 오히려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앞의 신경숙의 깊은 슬픔의 마지막 문장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문장은 우리 세대들에게 어떤 화두가 될까? 포스트모더니즘에 공감하는 세대는 욕망은 있어도 사랑은 없는 세대라고 해야 한다. 왜 그럴까? 그 사람들은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본다는 것은 이영애를 통해 내 연인을 찾는 것이며 이정재를 통해 내 사랑을 꿈꾸는 것을 말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영애의 이미지도 실제의 이 영애와 관계가 없으며 이정재도 혜린이라는 여자를 지키는 불운의 기사일 뿐이지 실제의 이 정재는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들이 현실을 강력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정재의 헤어스타일, 이영애의 립스틱 색깔을 따를뿐더러 그런 사람들을 닮은 남자, 여자를 자기의 파트너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그 유명한 말이 성격 나쁜 것, 머리 나쁜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얼굴 못생긴 건 참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숏다리가 아름답다

도대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원래 아름답다는 말은 아는 사람답다는 뜻의 말일 수 있겠다는 짐작이 요즈음에 대두되었다. 아무튼 아는 사람답다고 했을 때에 그 안다는 것은 여자를 아는 남자, 남자를 아는 여자라고 할 때의 안다는 말과 뜻이 같을 것이다.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대상화시켜 평가하는 눈으로 내려볼 때가 아니라 그 속에 내 삶의 의미와 흔적이 녹아 있을 때에 쓰는 말이다.

 

언제 아름다울까? 개성 추구라는 미명 아래에 높은 굽으로 롱다리의 소망을 실현하려 하고 끊임없이 자기의 신체를 가꾸어 준다는 환상 속에서 높이고 깎고 문신하고 칠푼이, 팔푼이 거짓 화장으로 꾸며낸 그 외모가 아름답다고 생각되나?

돈이 없어도 편하게 만나 속내를 털 수 있고 그 상처가 곧 내 상처가 되어 그 온기가 상처의 자생적 치유력이 될 때에 아름다움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때에 외모란 오로지 내 사람을 가리키는 특징으로 소중할 뿐이지 화면에 따라 기준이 제시되어 등급이 매겨지지는 않는다. 노틀담의 꼽추가 아름답고 히드클리프가 매력적이고 벙어리 삼룡이가 가슴시린 것은 그 사람들이 롱다리의 미남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상처 속의 진실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숏다리가 아름답다. 하기야 롱다리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이 숏다리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와 세계를 공유한 그이가 바로 숏다리여서 숏다리가 내게 그이를 연상시킨다면 그 숏다리는 소중한 것, 아름다운 것이다.

매스컴이 만들어 낸 개성 있는 미남, 미녀라는 폭력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추남이 되기도 하고 미녀가 되기도 하는 이 세대는 늘 보이지 않는 매스컴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매스컴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을 찾아 불나비처럼 달려드는 일의 귀결은 분명하다. 물 좋은 사람을 찾아가고 그 물 좋은 사람에게 걸맞는 물 좋은 사람이 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에 인간은 정신이 있는,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좋은 생선과 질적으로 다를 것이 별로 없는, 값이 매겨져 기호화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 사이에 넌 얼마짜리라는 평가만 있고 따뜻한 시선이 결핍된 신세대는 그래서 불행한 세대이다. 그들이 , 그 사람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러나 그 불행으로 나 그 시절을 견뎌냈다.’는 문장을 좋아하는 것은 불행까지도 삶의 증거가 되는 그 만남의 아름다움을 체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체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말할 것도 없이 불행 자체가 아니라 불행까지도 껴안는 것이 의미가 되는 그 만남의 진지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모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록 옷입는 방법에 서툴고 화장을 할 줄 몰라도 인간 냄새를 풍기는 사람, 비록 숏다리에 버스를 타고 다녀도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매력적이지 않나!

 

 

여전히 쇼윈도우를 훔쳐볼까?

나르시스의 자기 사랑은 자아가 눈을 떴다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과 통할 것이다. 그런데 쇼원도우에 비친 자기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에 보는 것이 우리에게 화면(이미지)으로 다가온 어떤 유명 연예인과 비교된 자기 자신이라면 자아에 눈을 뜬 나르시스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규정된 그 어떤 것에 함몰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움의 기호를 해체시킬 수 있는 반성의 능력을 키워가지 못할 때에 인간 해방을 그리는 우리의 꿈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이주향/ 수원대학교 철학교수, 저서로는 현대인의 직업윤리’(공저)가 있다. 문화와 사상, 현대 사회와 사상, 문화 철학들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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