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사상의 새로운 발견 - 금 정 태
by 처사21전통 사상의 새로운 발견
- 금 정 태
1. 신시(神市) - 자존(自尊)의 기반
우리 민족이 동물적 원시 상태에서 인간적 삶을 시작하고 자연적 무질서의 상태에서 하나의 질서를 창조하게 되는 사건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로 단군 신화(檀君神話)가 있다. 이 신화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는 다각적으로 검토될 수 있겠지만 우선 여기서 한가지 뚜렷한 특징으로서 그 강한 자기 긍정의 성격을 들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은 인간 세계를 탐내었고 또한 하느님이 직접 태백산을 선택하여 그 아들을 내려보냈다. 이 산정의 신단수(神檀樹) 아래가 신시(神市)니 바로 우리 민족의 근원지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한없이 밝은 산정에 자리 잡았던 것이요, 또한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을 받은 곳에서 삶을 시작하였다는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은 바로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이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단수 또한 우주의 중심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는 나무, 즉 세계수(世界樹)요, 신시도 우리의 생활 공간인 동시에 성전(聖殿)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국토가 지구 표면 위의 임의의 한 부분이 아니라, 가장 중심의 자리요, 신의 축복을 받은 신성한 땅이며 복지(福地)라는 확고한 믿음을 보여 준다.
우리 민족의 신화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긍정 즉 자존(自尊)은 우리 민족이 역사를 창조하고 이끌어 갔던 삶의 원동력을 이루고 있는 힘이다. 끈질기게 지속하면서 위기를 이겨 나갔던 민족의 저력과 자랑스러운 문화를 창조하고 비굴하지 않았던 민족의 정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자존의 민족 신앙은 단군 신화 속에서 이미 선명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민족 문화의 전통은 실제로 끊임없이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섭취‧동화시키면서 이루어져 갔다. 불교가 전래되어 그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을 때 그것은 민족 신앙을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덕 여왕 때 자장 율사(慈蔣律師)는 황룡사에 9층석탑을 세웠다. 이 9층 탑은 모든 주변 국가의 침입을 막고 항복과 조공을 받을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계시를 자장이 신인(神人)으로부터 받았다 한다. 그런데 이 9층 탑의 제1층은 일본을 지시하고 제2층은 중화(中華)를 지시한다 하였으니 한반도의 동남을 차지한 신라가 일본은 물론이요, 중국조차 누르고 올라서려는 민족 자존의 신념을 불교 신앙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8세기에 김대성(金大成)의 발원으로 조영(造營)되었다는 석굴암과 불국사는 건축술이나 조각의 예술성에서 전통 문화의 정화(精華)를 이루는 유산이다. 여기서 불국사의 건축 방식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는 이 땅에 이상(理想)의 복지(福地)인 불국(佛國)을 세우는 것임을 보게 된다. 즉, 신라의 불교 신앙이 호국 불교이기에 앞서, 이 땅을 불국의 복지로 믿는 불국토(佛國土) 신앙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 민족의 뿌리 깊은 자기 긍정이요, 자존 의식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맹자도 “자포자(自暴者)는 함께 말을 할 수 없고 자기자(自棄者)는 함께 일을 할 수 없다.”하였거니와 진실로 자긍‧자존의 정신이 없다면 이상의 설계도 불가능하고 실현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그 뿌리에서 우리의 땅을 신성시하고 우리의 것을 사랑하는 긍지를 지켜왔던 것이다. 이 자존의 긍지가 민족의 신앙으로 뿌리를 내림으로써 우리 민족은 온갖 역경을 뚫고 나가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것이요, 이것이 최남선(崔南善)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 역사의 특징으로 연면성(連綿性)과 강인성(强靭性)과 목적성(目的性)을 이루게 하였고 낙천적 민족성을 길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역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바로 이 국토를 세계의 중심이요, 축복된 땅으로 구현하려는 신념과 도전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내다볼 수가 있게 된다.
2. 사직(社稷) - 자주(自主)의 논리
우리 민족이 이 땅을 사랑하고 또 그 나라를 지켜왔던 것은 민족의 신앙이면서 동시에 투쟁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대륙과 일본 열도의 가운데 위치한 한반도에는 유사(有史) 이래 주변 국가들의 충돌로 인한 위협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안으로 민족의 일체감을 다지고 밖으로 외교 관계의 지혜로운 운영으로써 이루어진 강인성과 유연성(柔軟性)의 결합에서 찾아진다.
중국 대륙의 강대한 국력에 대해서 우리의 민족 국가를 보존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한편으로는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여 우리의 문화를 계발하고 국력을 기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전통을 창조하였다. 신라는 가무 유렵(歌舞遊獵)하는 전통적인 풍류도(風流道)에 충효의 유교적 윤리와 무위 자연(無爲自然)의 도교적 이상과 행선 피악(行善避惡)의 불교적 교화를 포용함으로써 화랑 정신이라는 삼국 통일의 국민 정신을 함양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륙의 무력 위협을 외교적 친선으로 무마하거나 또는 저항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고구려가 수(隋)와 당(唐)의 양조(兩朝)에 걸친 침략을 받으면서도 이를 물리쳐서 대군(大軍)을 괴멸시켰던 것은 한국 민족의 투지가 얼마나 강인한 것인가를 뚜렷이 역사에 새겨놓았던 기념비이다. 이러한 국토 수호를 위한 투지는 거란과 몽고의 침입 속에서 고려에 계승되었고 일본과 청의 침입 속에서 조선에 계승되었다. 한말(韓末) 일제의 근대적 무력에 의한 침략 정책에 부딪혔을 때, 고구려의 대수당(對隋唐) 항전 투지를 다시 살려내려는 각성이 강하게 재연되었던 사실은 한말 의리학파의 한 사람인 김평묵(金平黙)에서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대륙에 대한 투쟁과 도전으로만 일관하였던 주변 민족들은 거의 중국에 병합되어 마침내 멸망하였지만 한국 민족은 외교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로부터 자주권을 공인받을 뿐 아니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국민 의지와 국력도 있었지만 대당(對唐) 외교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힘입었던 것이며, 임진왜란에 국토를 지켰던 것도 조선 왕조의 대명(對明) 외교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우리 민족이 유지해 왔던 외교 정책은 사대 교린(事大交隣)의 입장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 외교는 강대국에 인접하고 있는 지정학적 현실 속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적인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사대(事大)가 자주(自主)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상보적(相補的)인 것이었다. 신라가 당(唐)에 대한 사대 외교를 통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였지만 당이 한반도를 통치하려는 태도를 드러내자 다시 당에 대한 항전을 하여 국토 통일을 성취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사대 외교를 회복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주권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도 만주족과 중국 대륙의 명(明)이 상쟁(相爭)하는 틈에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로 안전을 유지하다가 국제 정세를 잘못 파악한 인조 때의 배금 정책(排金政策)으로 두 차례 호란(胡亂)을 겪었다. 그러나 신흥 청조(淸朝)에 사대의 예를 취하면서도 항복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론(北伐論)이 효종 이후 강렬하게 일어나 사대 외교와 복속 관계가 결코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실학파의 사상가들은 홍대용(洪大容)의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에서 처럼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가하였다. 중국만이 화(華)가 아니라 우리 민족도 문화적으로 동등한 화(華)를 내세울 수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에 대해 사대의 외교 관계 아래서도 정치적 자주권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주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강대국에 대한 외교 정책인 사대와 국토의 수호신이요 국가의 상징인 사직(社稷)의 양자는 사대가 사직의 안전을 위한 수단이라는 관계에서 또는 사직이 사대에 우선한다는 비중의 평가에서, 언제나 지혜로 운영을 해 왔던 정치 문화의 전통이 바로 우리의 민족 역사를 지켜 주는 이념이 되어 왔다.
3. 절의(節義) - 민족의 정기(正氣)
사생취의(捨生取義)란 생명을 버리면서도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의리(義理)라는 것이다. 의리를 위해 남자는 충절(忠節)을, 여자는 정절(貞節)을 지키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에 깊이 뿌리내린 기상이요 정기이다.
충담사(忠談師)는 기파랑(耆婆郞)이라는 화랑을 찬미하는 사뇌가(詞腦歌)에서,
일오천(逸烏川) 조약돌이
랑(郞)의 지니신 마음 갓을 좇고자,
아---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를 꽃판이여
라고 노래하고 있다. 잣나무처럼 높고 서리보다 매서운 굳은 절개는 수난을 이겨 내는 우리 민족의 이상적 인간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의(義)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이(利)를 넘어서서 더욱 가치를 실현 할 수 있는 정신의 바탕이다.
화랑도의 한 사람인 김흠운(金欽運)은 전쟁터에서 백제 군사의 기습을 받아 모두 도망하게 되었을 때 “이름 없이 죽지 말라.”는 권유를 받고서 “대장부가 이미 나라에 몸을 맡겼거늘 사람이 알거나 모르거나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겠는가.”라고 하며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는 공명심을 벗어나서 생명을 바쳐 절의를 지켰던 것이다. 김흠춘(金欽春)도 황산 전투에서 그의 아들 반굴(盤屈)에게 “신하로서는 충성이 가장 중하고 자식으로서는 효도가 가장 중하다.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충성과 효도를 아울러 이룰 수 있다.”고 훈계하니 반굴이 적전에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충성과 효도는 유교의 기본 덕목이면서 한국인의 전통 깊은 실천 윤리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충효의 덕목도 현실 속에는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없지 않다. 여기서 생명을 버리면서 추구하는 의리를 실현할 때에 충성과 효도가 더욱 높은 경지에서 완성된다는 파악은 바로 한국 민족의 정기가 의리라는 더욱 근원적이고 숭고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몽주가 고려 왕조를 위해 지킨 충절은 조선 왕조도 이를 높이 추장(推獎)하였던 것이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하여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사육신 또는 생육신을 후세에 기리는 것도 그 정신이 권력이나 이익에 동요됨이 없이 정통을 수호하려는 의리를 지켰다는 데 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민족의 정기는 부당한 외침을 당하였을 때 민중 속에서 언제나 의(義)를 주창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이나 한말의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정의를 통해서만 민중을 결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 의리의 신념은 무한한 용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민족 역사를 통하여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던 3학사의 한 사람인 홍익한(烘翼漢)은 심양에 붙잡혀 가서 청 태종(淸太宗)의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청 태종이 대세와 이해로 회유를 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내가 지키는 것은 대의(大義)일 따름이니 성패와 존망은 논할 것 없다.”라고 하여 죽음으로써 의리의 신념을 지켰다. 북벌 정책을 추진하던 효종도 송시열(宋時烈)에게 “나는 북벌의 이 일을 내 재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그만둘 수 없는 것으로써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그의 필연적인 신념을 밝히고 있다. 국가의 운명을 걸고 청나라를 공격하겠다는 대사(大事)를 계획하는 마당에서, 현실적인 타당성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의리에 마땅한 것이기에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신념은 진실로 민족 정신의 광명 정대한 기상을 뚜렷이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4. 인도(人道) - 민족 정신의 바탕
우리의 민족 정신이 형성된 바탕에는 티없는 맑음과 밝음이 깃들여 있으며 강한 긍정과 힘이 함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빛깔이 있다면 흰 빛이라고 쉽게 동의하게 된 데는 백의 민족이라 불리울 만큼 흰 빛깔의 옷을 즐겨 입기 때문이다. 흰 빛깔은 바로 어둠이나 비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밝음과 낙관의 상징이다.
인류의 여러 사상적 갈래에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인도의 사상처럼 생명을 비관적으로 파악하는 입장도 있고, 유태의 전통처럼 선과 악이 갈등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전통은 인간 그 자체를 전적으로 긍정하며 이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단군 신화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 세상을 탐내어 하강하였다 하였고, 곰은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여 여자가 되었다. 단군은 곧 하늘과 땅이 결합되어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의 시조요, 우리 민족의 인간상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인간관은 생명을 전적인 축복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신라의 불교 문화가 융성하던 시기에 원효 대사는 무애(無碍)라 이름 붙인 바가지를 두드리며 수많은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대중을 교화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교 방법은 어려운 수행이 대중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교 교리도 염세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낙천적인 즐거움의 분위기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파악하는 데서 계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심은 유교 사상의 수용과 더불어 더욱 깊어졌다. 삼국 시대 이래 충(忠)․효(孝)․열(烈)의 정신은 국민 정신으로 일반화 되었다.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의 창제와 더불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게 하여 효자ㆍ충신ㆍ열녀의 일화를 그림과 함께 훈민정음으로 해설을 담아 국민 교육의 교재로 간행하였다. 더 나아가 조선 시대에 주자학의 발전 과정에서, 특히 퇴계(退溪)와 기대승(奇大升)의 사단 칠정 논변(四端七情論辯)을 거치면서 태극 이기론(太極理氣論)의 자연 철학적 방면보다 심성 이기론(心性理氣論)의 인간학적 방면을 중심 과제로 깊이 강구하여 한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바탕이 인간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주는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동학(東學)이 민중신앙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그 교리 속에 ‘인내천(人乃天)’ 또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내세운 것은 바로 우리 민적의 심성을 단적으로 표출시켰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에 와서 물질 문명이 극도로 발달하고 이데올르기의 대립이 우리의 목전에 절박하지만 우리 민족의 정신 문화적 전통이 인간의 근원적 본성에 대한 긍정적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결코 기계문명이나 이데올르기 속에 인간을 파괴하고 상실시키는 자기 부정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전통 문화가 현대의 상황 속에 재창조된다면 그것은 인간 긍정의 인도적 사상의 방향을 열어 줄 것이요, 또한 여기에 장래가 있어서 인간 운명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인류 역사의 미래적 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금장태. 이화여대 교수
♣개인별 탐구 과제
1. 이 글을 쓴 목적은 무엇인가?
2. 단군신화에 나타난 ‘강한 자기 긍정적 성격’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3. ㉠과 같은 민족 자존 의식이 범할 수 있는 잘못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가?
4. ‘사대가 자주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이라는 필자의 주장을 본 문의 예를 통해 다시 한 번 쉽게 설명해 보자.
5. 우리 민족의 정신이 인간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 예를 찾아가며 설명해 보자.
6. 필자는 우리의 전통 문화를 현대의 상황 속에 재창조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가?
♠모둠별 토의 과제
1. 이 글의 필자는 중국에 대한 사대 외교를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었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 비판적으오 검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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