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전에 나타난 민중의 모습
by 처사21토끼전에 나타난 민중의 모습
호랑이와 토끼를 그린 낯익은 민화가 있다. 호랑이의 에헴하고 길게 빼어문 담뱃대에다 토끼가 싹싹하게 불을 붙여주는 그림이다. 민화 특유의 회화적인 필치에 익살이 넘쳐흐른다. 그림으로 나타낸 우화, 일종의 만화적인 감각을 느끼게도 한다. 이 민화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곧 호랑이와 토끼로 어떠한 인간 관계를 비유하고 있는가?
요컨대 호랑이는 강자로, 토끼는 약자로 유추시킬 수 있다. 이 유추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호랑이와 토끼로 비유된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그림의 배경인 이조사회에 있어서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곧 관과 민의 사이에 적용될 것임이 물론이다. 특히 그 사회의 기본구조였던 양반지주와 농민의 관계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었다. 양반지주의 권위 앞에 농민들은 자기의 노동력을 제물로 바치며 오직 비굴과 아첨으로 관용과 자비를 구걸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굉장히 위엄을 갖춘 호랑이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토끼의 몸짓은 비굴해만 보이지 않고, 어딘가 영리함과 쾌활함이 내비치고 있다. 자기의 예속적인 처지를 숙명적으로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약빠르게 보위하여 실속을 차리려는 계산적 아첨, 즉 교활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반면 토끼의 굽실거림에 흡족해하는 호랑이는 어딘가 미욱하게 보인다. 그러나 토끼의 교활성은 호랑이의 권위에 하등 손상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한줌도 못되는 토끼에 의해서, 드러낸 이빨과 숨겨진 발톱으로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위세는 좀처럼 손상될 것 같지 않다. 지배층과 백성과의 관계는 그러한 생각을 심어주기에 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서민문학에 나타난 토끼의 형상은 아주 다르게 부각되어 있다. [토끼전]이 그러한 것이다. 이 작품의 골자는 산중에 사는 토끼가 별주부의 꾐을 받고 용궁에 같다가 끝내 용궁의 왕을 위해서 자기의 간을 제공하지 않고 슬기롭게 빠져나왔다는 이야기다. 봉건권력의 정점인 국왕에 대해서 절대 봉사 복종하는 것이 떳떳한 도리였고, 자기를 희생으로 바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거기에 충효라는 명분을 부여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며 부귀를 따내는 비결이었다. 별주부가 토끼를 잡아오겠다고 자청해 나선 것도, 토끼가 용궁에 가면 부귀를 누리게 된다는 별주부의 감언이설에 혹한 것도 대개 이러한 현실적인 배경에서 움직여진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간 빼준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되는 줄도 모르고 자기 내장의 일부를 빼내서 남에게 주어 버린다는 말이다. 요즈음 말로 자아의 상실, 또는 주체성의 포기를 뜻하는 것이다. 토끼가 용왕에게 '간의 헌납'을 거부한 행위는 곧 봉건권력에 자기를 팔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토끼는 자기 간을 받침으로써 만고의 충신이란 허위의 영광을 길이길이 남길 수 있었다. 실은 또 '간의 헌납'은 자유의사를 무시한 농락과 협박으로 강제된 일이었다. 토끼는 교묘한 꾀를 써서 간을 빼앗기지 않고 위기를 벗어나 소중한 자아와 자유를 지키고 찾은 것이다.
용왕은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고, 그의 신하들은 하나같이 기회주의. 출세주의로 처세하여, 무능을 만용으로 떠벌리는 따위의 용렬한 것들이다. 병든 용왕의 신음은 어쩌면 지긋지긋했던 봉건체제의 마지막 무너지는 거창한 소리같이도 들린다. 그리고 용궁의 떨거지들은 무능력하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봉건관료층의 꼬락서니같이도 들린다. 이제 토끼는 호랑이 앞에 설설 기던 옛날의 토끼가 아니다. 물론 아직 정면으로 대어들어 거꾸러뜨릴 만한 역량은 못 가졌지만, 마음대로 이용당하고 예속되지 않을 정도의 힘과 꾀를 구사하는 것이다. 즉, 굴종을 도덕적인 당위로 몰각하지 않을 자아의식과, 역사를 거부할 만한 저항적인 힘이 생겼다고 하겠다. 각성하여 저항하는 토끼, 이것이 새롭게 창출된 토끼의 형상이다. 이 점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어떻게 그런 형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가.
19세기의 우리나라는 활발한 민중의 저항운동이 새 역사를 모색하고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대규모 무장항쟁으로부터 시작하여, 1862년 진주민란을 거쳐, 갑오농민 전쟁으로 발전하였던 역사운동은, 한마디로 반봉건적인 민중의 힘으로 추진된 것이다. 이 역사운동이 토끼의 형상에 투영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민중의 주체적 창조적 움직임이 우리의 토끼를 슬기롭고 저항적인 성격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민중의 성장은 전투적 정치적 행동을 발발시킨 한편, 그들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해방시켜 발랄하게 만듦으로써 민중미술의 형태에도 활력을 불러일으겼다. 서민적 구비적 양식인 소리와 몸짓으로 약동하게 여실히 엮어내는 판소리와 탈춤이 바로 그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민중투쟁의 예술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민중예술의 형태를 통해서 성립된 서민문학이 그 시대 문학사의 주류로 등장하였다. 그 작품 내용의 골자는 권위주의의 부정이다. 예컨대 나도 한 떳떳한 사람이다는 '인격'을 주장하는 춘향의 항거와, 양반의 위엄을 여지없이 조롱하고 풍자하는 말뚝이의 항거는 토끼의 형상과 함께 봉건적인 속박을 반대하고 평등을 요구하는 민중의 의지를 대변한 것이다.
[토끼전]은 민족 전래의 우화에서 소재를 취한 점이 또한 특이하다. 동물 세계에 붙임으로써 이야기를 기발하게 엮어가며 주제사상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각 이본에 따라 스토리가 변화다단하고 주제도 유동적이었던 것이다. 필자 소장의 [토처사전]은 수다한 민간본 중의 하나이다. 이런 종류의 필사본 소설들은 판소리의 구비적 적층을 통과하고 소설적인 기록으로 정착된 이후 다시 민간에 전사되는 과정에서 윤색 부연되어 따로 정본이 있을 수 없거니와, 대개 글씨와 내용이 어울려 유치하고 산만한 상태를 벗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곧 당시의 실상이었다. 민중적인 문화는 저급한 수준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토처사전]도 세련된 문학작품은 아니다. 역시 불필요한 부연이 지리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없지 않고, 굳이 들추자면 결점 투성이지만, 특히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주목되는 바 있다.
첫째, 토끼의 형상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원체 경박하고 마음이 좁아서 곧잘 깝죽되고 실수도 연발하는 반면, 용궁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학식 언변, 지모가 군신들을 능가하고, “풍채도 거룩”해서 한 미인(별주부의 부인)의 마음을 사로잡기까지도 하여, 스스로 "나 같은 영웅호걸 수중에 보았느냐"고 호언했던 것이다. 작중에서 그에게 '토선생'이란 칭호를 쓴 것부터가 그렇지만, 토끼에게 걸출한 면모를 부여한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둘째, 주제표현이 특히 신랄하다. 이 작품은 민중의 저항과 자각을 우화적인 수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기에 낡은 체제를 지탱하는 윤리로서의 충이라는 도덕관념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수반되고 있다. 토끼의 형상을 강하게 만들어 토끼의 비상한 수완에 의해서 주제 내용이 드러나는데, 흔히 다른 본에는 없는 흥미롭고 신랄한 대목이 보인다. 이를테면, 용왕이 토끼의 농간에 넘어가 자기 개인의 목숨을 연장키 위해 명색 충성을 다 바친 별주부를 당장 잡아서 완배탕을 끓여 먹겠다거나, 별주부가 자기 부인의 정조를 팔게 하는 것이나, 토끼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한 나머지 죽어버린 별주부의 부인을 만고의 열녀라고 표창하는 등등의 장면들은 자못 이색적이다. 봉건주의의 허약상과 모순성이 재미나게 효과적으로 폭로된 곳이다.
셋째, 양반들의 등쌀에 찌들린 농민의 형상은 왜소한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필 조그만 토끼에다 그들의 상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토끼란 게 호랑이 앞에 담뱃불을 붙여주면 제격이지만 민중적 토끼로는 언젠가 모순이 생기게 마련이다. 저항적인 역량이 커가면 커갈수록 그것은 왜소한 토끼의 인상에 빗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토처사전]에서 모순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왜소한 토끼에다가 상당한 무리를 저지르면서까지 강한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왜소와 걸출이 상반된 ‘토선생의 아이러니’가 성립된 것이다. 농민전쟁에 의해 주도된 19세기 우리나라 역사운동은 새로운 사회를 창출할 만큼 성숙한 이론과 확고한 실천적인 역량으로 추진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허다한 우여곡절과 심각한 갈등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민중 자체도 자기의 일관된 논리를 갖추기 어려웠다.
'토선생의 민중적 형상'이 다소 일관성을 잃게 된 것도 따지자면 결국 그러한 시대 사정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토끼의 형상에 그 시대 민중의 고난이 얼룩져 있다.
[토끼전]이 잡다한 이본을 파생시켰음을 언급하였지만, 이본에 따라서는 민중적 건강성이 퇴색되고 주제사상이 변질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토끼는 뒷전으로 밀리고 별주부가 내세워져, 충을 설교한 내용으로 변조되는 것이다. 혁명을 요구하는 민중의 소리가 높아질수록 그것을 제지 역행시키고자 하는 책동도 집요하게 나오는 법이다. 민중예술도 한편에서 반역사적인 움직임에 왜곡 이용되었다. 토끼의 형상은 명암의 양면을 띠었던 것이다.
어둠에 밀려 빛을 잃어버린 토끼가 있는가 하면 아득히 동터오는 빛을 찾아 앞으로 뛰어가는 토끼가 있었다. 앞으로 뛰어가는 토끼의 발길 앞에서 결코 순탄한 도로가 뚫려 있던 것은 아니었다. [토끼사전]의 토선생도 용궁에서 탈출한 이후 또 덫에 걸려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기도 한다. 어떤 이본에서는 다시 또 솔개에게 잡혀먹힐 뻔한 장면도 나온다. 아무리 험난한 역경도 토끼는 좌절하지 않고 꾀를 써서 강인하게 슬기롭게 빠져나간다. 여태까지의 우리 민족이 겪어온 시련을 예견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토끼의 고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제 몸뚱이처럼 생긴 이땅의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마음껏 뛰어볼 수도 없다. 그리고 그를 조금 얽매어 두고 슬슬 간을 빼가려는 음모가 안에서 밖에서 종식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강인하고 슬기로운 우리의 토끼는 간을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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