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혁명
by 처사21문화 대혁명
1965년 11월 요문원의 '신편 역사극<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가 발표된 뒤부터 1976년 10월에 강청 등을 비롯한 4인방이 체포되기까지의 약 10년 동안이 '문화대혁명'이라 불리는 시기이다.
이미 1962년 9월 모택동은 '계급과 계급 투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라고 지시하여 계속 혁명론의 입장을 다시 분명히 했으며, 1966년 5월의 '5.16 통지', 8월에 열린 8기 제11회 중앙 위원회 전국 회의의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등에 강령으로서 명시되었다. 그 요점은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계급 투쟁이 존재하며, 그 계급 투쟁이 당내에 반영되어 생기는 '실권파'를 타도해야 한다는 명제였다. 모택동은 직접 대중에 의거하여 대중을 일어나게 함으로써 당과 대중과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고, 정책과 노선의 올바름을 보증할 수 있다고 했다.
'5.16 통지'공포와 함께 문화대혁명은 대중 운동이 되었으며 홍위병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 가운데 유소기는 '주자파'(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라 공격되어 1968년에 당에서 추방되었으며 1969년 1월에 옥사했다. 등소평은 노동 개조를 위해 농촌으로 밀려났다.
초기 홍위병은 노동자, 빈농과 혁명 운동 희생자 등을 '홍오류(紅五類)'로 높이 평가했고, 구 지주, 우익 분자 등을 '흑오류'로 배격했지만, 이윽고 이를 특권주의로 인식한다고 하여 부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 간부와 대립하는 홍위병 조직이 생겨 저항이 시작되었다. 모택동은 관료주의의 발생을 막기 위해 코뮌 형태의 권력을 목표로 삼아 당을 전면적으로 개조하려 했지만, 그것은 결국 당과 행정 기구의 파괴에 이르렀다.
1967년 장춘교 등은 상해에서 당의 구 상해시 위원회와 인민 위원회에 대해 권력 탈취 투쟁을 시작했으며, 2월에 '상해 인민 공사'성립을 선언했는데, 이는 곧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이에 대하여 인민 해방군과 당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섭검영 등이 장춘교 등을 반격했지만, 모택동은 원로간부 섭검영 등을 '부활과 반격'을 꾸민다고 비판하면서 혁명 대중, 간부, 인민 해방군의 '3결합'에 의한 혁명 위원회 설치를 지시했다. 국방 장관 임표 등은 인민 해방군의 해체와 인민의 무장을 꾀했으며, 또한 소련 대사관 습격과 홍콩에서의 반영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를 기회로 코뮌파는 임표 등을 극좌파로 탄압했고 1968년에 접어들자 홍위병과 도시 지식 청년들을 농촌으로 쫓아보냈다. 인민 해방군이 행정에 개입했고 1966년에 당 제1 부주석이 된 임표는 1969년 4월 제9차 당 대회에서 당 규약 개정으로 모택동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1969년 진보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로 시작된 소련과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임표는 소련과의 대결 노선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한 반면, 모택동과 주은래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 때 임표는 국가 주석의 자리를 요구하다가 고립되었고 쿠데타도 실패하여 1971년 9월 소련으로 도망가는 도중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신화사 통신은 1980년 9월, 문화대혁명 당시 무고, 조작 사건이 25만 건에 달했고,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오심률이 75~80%에 이르렀으며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전국에서 탄압 받아 사망한 사람이 2천만 명, 운남성, 내몽골 등의 소수민족 지역에서 간부 72만 7천 명이 박해받았으며 그 가운데 3만 4천 명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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