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독서창고

원자 폭탄

by 처사21
728x90
반응형

원자 폭탄

 

 

원자 폭탄의 비극

 

194586일 일본 히로시마의 상공에는 여느 때처럼 미군의 B-29폭격기가 공습을 해왔다. 그 당시의 일본인들은 늘 적기의 공습 사이렌 소리에 익숙했기 때문에 특별히 긴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투하된 폭탄은 인류가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괴력의 원자 폭탄이었다. 폭발의 순간 엄청난 섬광과 수백 만 온도의 열기, 강한 폭풍과 대기 중 거대한 버섯구름이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이 폭발로 인해서 반경 10km이내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6만 수천 명이 즉사했다. 이러한 원자 폭탄의 위력에 일본은 며칠 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제 2차 세계 대전은 종결되었다.

 

 

그 이후 1995년에는 종전 50주년을 기념해 미국의 대표적 국립 박물관인 스미스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ion)'2차 세계대전과 원자 폭탄'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주최하려고 하였으나 과연 그 상황에서 원자 폭탄의 사용이 정당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격렬한 논쟁의 여파로 흐지부지 되었다.

 

우익 인사들을 비롯한 미국 정부는 미군이 원자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군은 싸우고 싸우다 정 안되면 모두 자살해버리는 옥쇄 작전으로 나왔기 때문에 19447월의 싸이판 전투나 8월의 티니안 전투에서처럼 그냥 일본에 침투하려고 했다면 미군에게 큰 피해와 희생이 있었을 수 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19458월 당시의 일본군 형편과 미군의 형편을 비교해 보면 미군이 일본 열도를 포위하고 자유자재로 폭격할 수 있을 만큼 미군의 전력은 압도적으로 우세했었다.

 

 

여기서 미군은 우선 소련이 대 일본전에 참여하면서 생긴 국제적 역학 관계의 미묘한 변동을 그토록 잔인한 수단을 사용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소련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종용했다.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면 독일은 동서 양측으로부터 공격받는 상황이 되고 일본도 남북 양측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사회주의 정권은 제 1차 세계 대전에 반대하면서 혁명을 이끌어 내어 집권한 정부였고 제2차 세계 대전도 역시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전쟁에 끼어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이 먼저 소련을 침공하면서 마지못해 유럽전에는 참여해야만 했다. 그러자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극동의 대 일본전에도 참여할 것을 여러 차례 강요했다. 결국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독일이 항복해 유럽전이 종결될 경우 그로부터 3개월 이내에 대일 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이 항복한 지 정확하게 3개월이 되는 날인 194589일 소련의 시베리아 군과 극동 함대는 대 일본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독일이 항복한 뒤 3개월 동안 국제 정세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소 간의 전시 협동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연합군이 점령한 독일 지역 중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동유럽에서는 친 소련적인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될 기미를 보이고 있었고 독일 자체도 미소 양 진영으로 분단될 조짐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만약 소련이 남하해 중국과 일본을 점령할 경우 여기에서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친 소련적인 사회주의 정권들이 들어설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미군이 소련군에 앞서 이들 지역을 접수해야 하는데, 미국 본토는 멀리 태평양 건너에 있어 아무래도 소련군을 앞지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더구나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군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원자 폭탄은 미국이 이러한 난처한 처지에 대한 가장 빠른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원자 폭탄 때문에 일본은 소련군이 일본 영토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일찍 항복했고 이는 미국으로서는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이 세력권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고 마침내 전쟁에까지 돌입하게 된 것을 보더라도 이 시나리오는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원자 폭탄의 사용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후 20세기 후반을 규정하게 될 국제 질서의 준칙인 동서 냉전의 논리에 의해서 모험적으로 실험된 정치게임일 뿐이었다. 이것이 모험적인 이유는 원자 폭탄의 파괴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단 한 번의 피폭으로도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는다는, 엄청난 결과 때문이다. , 상대방이 원자 폭탄을 소유하고 있고 반격 능력이 있는 한 그 나라에 대해 원자 폭탄 공격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 본다면 원자 폭탄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원자 폭탄을 소유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1949년 소련이 핵 폭탄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이를 실증했다. 이렇게 해서 핵폭탄을 소유함으로써 그 사용을 억제한다는 이른바 '핵억지 전략'이 정식화되었다.

 

 

1938, 독일의 과학자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은 당시 주기율표의 맨 마지막에 들어 있는 원자량이 가장 무거운 물질인 우라늄이 중성자와 충돌하면 절반으로 쪼개지고 이때 여분의 중성자가 생성되어 연쇄적으로 다른 우라늄 핵들을 쪼갠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이것을 무기에 응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이 널리 공표되면서 덴마크의 과학자 닐스 보어, 이탈리아 물리학자 페르미,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연쇄 반응에서 발생되는 막대한 에너지를 무기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핵무기의 제조 가능성을 미국 정부에 보고했고 이에 따라 미국은 '맨해턴' 계획이라고 알려진 비밀 핵무기 제조 계획에 착수한다. , 이들 과학자들이 핵분열이라는 과학적 사실만을 발견했을 뿐 핵무기를 제조한 것은 아니라고 알려진 거솨 달리 실제로는 핵무기 제조계획에 어떤 형태로든 가담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미국 정부에 핵무기 제조를 조언한 것은 독일이 먼저 이를 개발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핵억지이론에서 드러났듯이 핵무기를 막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모두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란 점에서 핵무기의 파괴력을 예상하고 이를 사전에 막지 않은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이들은 사후에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1950년대 이후 핵무기 반대 운동에 앞장서지만 이미 강대국들의 핵무기 경쟁은 그 정도를 지나버린 상태가 되어 있었다.

 


 

728x90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