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인류
by 처사21우주와 인류
1. 우주에 진출한 인류 - 1961년
인간이 기계를 타고 하늘을 날기 훨씬 전에 프랑스의 베르느 같은 공상 과학 소설가는 인간이 대기를 나는 것을 넘어서 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여 대중의 상상력과 흥미를 돋구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도 우주 공간을 돌아다닐 수는 없다고 믿었다. 실제적인 문제로서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외계에서 생존을 유지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중 일어난 놀라운 기술의 진보가 이런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V-2로켓의 출현이 그것인데 이 로켓은 독일의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1912~1977)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독일의 패전 이후 V-2로켓의 기술은 미국과 소련 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 기술은 양국의 독자적 로켓 개발 계획의 기본 기술로 사용되었다.
1957년 소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의 궤도를 돈 로켓인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성공했다. 이는 인간이 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꿈의 실현에 첫 걸음을 내딛는 쾌거였으며 그로부터 미소 양국간의 정치적인 '우주 개발 경쟁' 즉, 자국의 국민을 위성에 태워 우주로 보내는 첫 번째 국가라는 영예를 얻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4년 간 미소 양국은 유인 우주선 발사를 위해 분주하게 무인 우주선 발사 실험을 행했다. 1961년 4월 12일, 결국 소련은 유리 A. 가가린(1934~1968)이 탑승한 유인 우주선 보스톡 1호를 발사했고, 가가린은 최초로 우주 여행을 한 사람이 되었으며 지구로 귀환하기 전에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돌았다.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우주 비행을 한 사람은 알랜 B. 쉐퍼드(1923~)였다. 그는 가가린이 돌아온 뒤 3주일 후인 5월 5일에 우주로 나갔다. 1961년 말엽에는 2명의 소련 우주 비행사와 2명의 미국 우주 비행사가 로켓을 탔는데 미국 비행사는 실제로 우주 궤도를 돌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20일에 존 글랜(1921~) 이 미국 우주 비행사로는 처음으로 지구 궤도를 돌았다.
가가린이 지구 궤도를 돈 지 5년 후, 소련은 유인 우주선을 8번 발사했고 미국은 머큐리 호와 제미니 호를 이용해서 12번을 발사했다. 최초의 여자 우주 비행사는 소련의 발렌티나 테레슈코바(1937~ )이며, 그녀는 1963년 6월 14일에 보스톡 6호를 타고서 지구 궤도를 48 바퀴나 돌았다. 미소 양국은 유인 우주 비행의 꿈을 달성하고서 이제는 우주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려고 시도했다. 1968년 12월 미국의 아폴로 8호는 프랭클린 보만, 제임스 러벨, 윌리엄 앤더스를 싣고서 지구를 떠났다. 이는 지구 궤도를 이탈하여 우주 공간 깊숙이 진출한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이었다.
아폴로 8호는 인간이 전에 도달했던 어떤 곳보다도 멀리 나간 셈이었다. 그들은 25만 마일을 비행했으며, 우주선을 달 주위 궤도로 진입시켰다. 일 년 후, 그들의 동료 우주 비행사는 달 표면에 실제로 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2. 우주 개발 시대의 도래-1969
1961년에 우주에서도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후 미소 양국은 각자 자국민을 달로 보내고 귀환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60년 대 중반, 양국은 한 명 이상을 태울 수 있는 우주선을 개발하여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달까지 비행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소련이 유인 우주선을 첫 번째로 쏘아 올리는 기세를 보이자, 미국은 1965년과 1966년에 2인 승 우주선인 제미니호를 10차례나 쏘아 올려 이에 맞섰다. 제미니 호는 330시간의 임무를 수행했고 이 비행 기록은 1970년 대 초반에 와서야 깨졌다.
미국의 달 탐사 계획에 아폴로 우주선을 이용했는데, 아폴로는 세 명의 승무원을 싣고 지구를 떠나 달 궤도를 돌 수 있었다. 2명의 승무원은 달 표면을 탐사하며 며칠간을 보낸 후, 모선의 동료와 다시 합류하여 지구로 귀환했다. 최초로 인간이 탑승한 아폴로 우주선(아폴로 7호)은 1968년 10월에 지구 궤도를 시험 비행했다. 1968년 12월 21일, 아폴로 8호는 승무원을 싣고서 달까지 비행했으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프랭클린 보만, 제임스 러벨, 윌리엄 앤더스는 외계의 궤도를 돈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아폴로 8호는 달에 착륙하기로 계획되지 않았다.
1969년 7월 13일에 심화된 연습 비행이 있은 후, 아폴로 11호는 플로리다의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발사되었다. 아폴로 11호는 최초로 달 표면에 인간을 착륙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7월 20일, 닐 암스트롱, 에드윈 올드린은 마이클 콜린스를 달 궤도에 남겨 둔 채 달 표면으로 내려갔다. 암스트롱은 몇 시간 후에 달 표면에 발을 디딘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닐 암스트롱은 스스로 이것을 '인류를 위한 위대한 발걸음'이라고 말했다. 이후 12명의 인물이 먼지투성이의 달 표면에 착륙해서 걸어다녔지만, 닐 암스트롱의 행보는 본격적인 우주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더욱 위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주 기지의 건설>
17세기 초, 망원경 덕분에 다른 행성이 달이나 지구와 마찬가지로 고형(固形)물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세기말에는 인간이 지구를 떠나 실제로 달과 다른 행성을 여행할 수 있다는 내용의 환상적인 글들이 많이 나왔으며 20세기 초의 인류는 진보된 기술을 이용하여 지구에 이웃한 다른 행성들까지 가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미소 양국은 1950년대 후반에 우주에 진출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찾아내었다. 1969년, 미국인들은 달에 다녀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 밖의 다른 행성까지 가는 계획은 실행할 수 없었다.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것은 지상의 관제 센터에서 조종되는 무인 우주선들을 발사하는 것이었다.
1959년, 소련의 루나 3호는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을 최초로 사진으로 찍어서 전송해 왔다. 1966년과 1968년에는 미국의 달 궤도 탐험선이 달의 대부분 지역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으며, 착륙하여 달 표면을 자세히 분석하기도 했다.
1962년에 미국은 지구를 출발한 지 4개월만에 다른 행성의 사진을 근접해서 찍은 최초의 우주선인 마리너 2호를 금성을 향해 발사했다. 1965년에 마리너 4호는 화성에 도착하여 화성 표면의 사진을 전송해 왔으며 7년 후에 발사된 마리너 9호는 화성 궤도를 90일 간이나 돌았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미소 양국은 탐험 용 우주선을 달, 화성, 수성으로 추가 발사했으며, 미국은 실제로 12명의 우주 비행사를 달로 보냈던 것이다.
1970년대 초에 미국과 소련은 달 이외의 다른 행성에 우주선을 착륙시키기로 결정했다. 소련은 베네라 9, 10, 13, 14호를, 1975년부터 1982년까지 계속해서 발사했으나 금성의 대기 상태가 워낙 험악해서 4척의 우주선이 잠깐의 교신 후에 녹아 버렸다.
진정한 행성 탐사는 미국에서 발사한 두 대의 바이킹 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우주 탐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었는데, 바이킹 호는 화성에 착륙했을 뿐만 아니라 몇 년 동안 이 붉은 행성에 설치된 전초기지로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976년 6월 20일, 바이킹 1호의 착륙선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화성 표면의 상세한 사진 4장을 지구로 전송해 왔다. 9월 3일, 바이킹 2호의 착륙도 역시 성공적이었다. 이 두 척의 우주선은 화성에서의 계절 변화를 관찰, 화성의 환경에 관한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전송했다. 바이킹 2호는 43개월 동안 지구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바이킹 1호는 1982년에 지구의 통제에서 벗어나 작동 불능 상태가 되기까지 무려 76개월 동안이나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3. 무한으로 나가는 우주 시대
1957년 초에 인간들은 인공위성들을 발사함으로써 우주 탐험의 첫 발을 내딛었다. 사람들은 이후 15년간 무인 탐사선을 금성, 수성, 화성, 목성 등 비교적 가까운 행성들로 보냈고 달 표면을 걷기도 했다.
미국은 1970년 대 더 큰 임무를 띤 4대의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들의 첫 번째 임무는 태양계 내에서 지금까지 우주선이 이미 탐사, 관찰했던 비교적 지구에서 가까운 행성들에 비해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4개의 큰 행성인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임무는 지구로부터 외계로 보내는 인사말을 싣고 태양계를 벗어나서 우주의 미 탐사지역 깊숙이 비행해 가는 것이다.
파이오니어 10호와 파이오니어 11호는 1972년과 1973년에 각각 발사되어 1979년에 목성과 토성을 통과했다.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는 1977년에 발사되었는데 1979년과 1981년 사이에 목성과 토성을 방문했으며 보이저 2호는 계속 비행하여 최초로 천왕성과(1986)과 해왕성(1989)을 방문한 우주선이 되었다. 보이저 2호가 1989년 8월에 최대한 근접해서 찍은 해왕성의 뒷면을 지구로 전송했을 때 명왕성은 실제로 해왕성보다 태양에서 더 가까이 있었다. 이 때부터 4대의 우주선은 태양계 가장자리를 넘어서 비행을 하기 시작했는데, 연간 5억 킬로미터의 속도로 우주 속을 여행하게 되었다.
보이저 2호가 1990년 2월에 마지막으로 전송해 온 사진은 4800만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있는 춥고 어두운 곳으로부터 도달한 인류 역사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스스로 태양이 주는 따뜻함, 안락함으로부터 벗어나 미지의 다른 곳 다른 생명체에게 존재를 알리려는 시도를 개시한 것이다.
1993년 5월, 보이저는 태양계와 그 바깥쪽의 우주를 구분해주는 경계선인 태양풍 경계선(heliopause)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최초로 탐지해냈다. 파이오니어 호나 보이저 호는 인류 역사가 종말을 고했을지도 모를 먼 미래에 우주의 다른 생명체에게 지구에 인류가 존재했음을 알려 줄지도 모른다. 1970년대에 시작된 우주로의 여행은 인류 역사가 새로운 장을 열었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된 것이다.
<우주 시대와 우주 비행사>
우주에 인간이 만든 인공위성을 최초로 쏘아 올린 나라는 소련이다. 1957년 10월 4일 무게 83. 6kg의 스푸트니크 1호는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궤도를 도는 데 성공했다. 한 달 후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생물이 견딜 수 있는가를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곧 1958년 1월 31일 미국도 최초의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 올렸다.
최초로 우주 비행을 하고 돌아온 동물은 두 마리의 개였다. 1960년 8월 19일 소련은 스트레르카, 베르카라는 이름의 개 두 마리를 실은 우주선을 발사했다. 이 우주선은 지구를 18바퀴 돈 다음 무사히 지구로 돌아 왔다. 이 실험은 인간이 지구 밖을 여행한 다음 지구로 귀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우주 시대의 개막을 한층 앞당겼다.
그 실험을 바탕으로 인류 최초로 우주 공간을 여행한 인간이 탄생했다. 그는 소련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다.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돈 다음 무사히 귀환했다. 같은 해 8월 보스토크 2호는 치토프 소령을 태우고 지구를 열 일곱 바퀴 돌았다. 이에 미국도 '머큐리 계획'에 의해 인간의 우주 비행을 성공시켰다. 두 나라는 우주 시대의 선두 주자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인공 위성을 쏘아 올리는 한편 인류의 오랜 꿈인 '달로 가는 길'을 정복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959년 가을, 소련은 루니크 2호를 달에 명중시켰다. 그리고 10월 4일 발사된 루니크 3호는 달의 뒷면 사진을 찍어 영원한 수수께끼였던 달의 뒷면을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1966년 1월 루니크 9호가 달의 '폭풍의 바다'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잇달아 미국의 서베이어 1호도 달에 착륙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1968년 12월에 세 사람의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내려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달에 갔다 온 인간은 이번엔 인간이 과연 우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소련은 세 사람의 승무원을 실은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세 사람 모두 숨진 채로 돌아왔다.
1973년 5월, 이번엔 미국이 최초의 우주 정거장 스카이랩을 발사했다. 스카이랩은 작업실, 공기 저장실, 도킹실, 태양 망원경 대, 사령실 등이 있고 침실, 식당,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아내는 장치를 사용했으며 물과 음료수, 70여 가지의 식품이 골고루 비치되었고, 일과 후 다른 일상 생활을 하며 휴식을 즐길 수도 있었다.
스카이랩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 즉, 우주 왕복선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4월 최초의 우주 왕복선 콜롬비아 호에 이어 첼린저 호, 디스커버리 호, 어틀랜티스 호 등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1986년 1월 28일, 유인 우주 왕복선 첼린저 호가 발사 후 73초만에 16km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 왕복선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성공을 눈에 두고 있다.
4. 꿈이 현실로- 스타워즈
현재 지구 둘레에는 약 4천 5백 개의 비행 물체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통신이나 기상 관측 위성 같은 실용 목적의 위성뿐 아니라 군사 목적의 위성들이 상당수 있다. 1983년 3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의 전략 유도탄이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에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의 개발, 즉, 전략 방위 구상(SDI)을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공상 과학 영화 '스타워즈'의 현실화가 멀지 않았음을 밝혔다.
다가올 우주 시대가 인류에게 희망과 평화를 안겨 줄 것인지, 아니면 상상할 수 없었던 전쟁과 파괴를 가져다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의 우주 개발의 역사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독점하려는 소수가 있는 한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는 우주 공간에서도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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