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해체와 서유럽의 통합
by 처사21소련의 해체
1939년 8월 23일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이 이루어진 지 바로 50년이 지난 1989년 8월 23일 그에 항의하여 발트 3국에서 100만 명에 의한 620km의 인간 사슬이 만들어졌다. 1940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은 차례차례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어 소련에 가입했는데, 이것은 최근에 알려진 '조약부속 비밀 의정서'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같은 조약 체결이 당시의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은 좀처럼 승복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인간 사슬'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 후 1990년 1월에는 소련군에 의해 아제르바이젠의 수도 바쿠가 진압되고 1991년 1월에는 리투아니아의 의회가 포위되었다. 이런 소련의 행동은 몇몇 공화국의 민족적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마침내 1994년 6월에 주권을 선언한 러시아 공화국의 최고 회의도 항의 규탄을 결의했다. 그러나 연방 지도부가 1991년 3월에 각 공화국의 권한을 강화한 내용으로 발표한 '주권 공화국 연방에 관한 조약' 안에 대한 국민 투표 결과는 투표율 80% 가운데 연방의 존속에 대한 찬성표가 70%이었다. 이후 러시아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옐친이 4,555만 표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득표로 당선되면서 러시아와 소련 지도부 사이의 균열은 결정적으로 커졌다.
고르바쵸프를 위시한 소련 지도부는 1991년 8월과 3월에 발표한 주권 공화국 연방안을 더욱 공화국에 편중되도록 수정한 연방 조약안으로 발표하여 소련의 유지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때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야나예프 부통령이 고르바쵸프의 건강 상태 때문에 대통령 직무를 인수한 사실과 비상 상태 국가 위원회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사실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대통령 옐친은 이에 대해 즉시 항의 총 파업을 호소했다. 그 결과로 비상 사태 국가 위원회는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해 해산하고, 22일 고르바쵸프가 크리미아로부터 모스크바로 돌아 왔으며, 야냐예프는 체포되고 푸고 내무 장관은 자살하여 쿠데타는 실패로 막을 내렸다.
이 혼란 속에서 발트 3국은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고 8월 24일 고르바쵸프는 쿠데타에 공산당이 관여했다고 하여 당의 해산과 서기장 사임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많은 도시에서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 지도자의 동상이 파괴되었다. 옐친은 11월 대통령령으로 소련 공산당 활동을 정지하고 당 조직을 해산했다. 쿠데타는 8월에 발표된 새 연방안에 위기를 품은 그룹들이 그 채택을 저지하려 일으킨 것이었으나 오히려 공화국들의 연방 이탈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9월 발표된 '주권 연방 국가에 관한 조약'은 12월 1일 우쿠라이나가 국민 투표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에 실현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8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등 슬라브 계 3공화국이 '독립 국가 연합' 결성을 표명하고 11일에는 알마아타를 제외한 11개 공화국이 '독립 국가 연합(CIS)' 창설 의정서에 조인했다. 그 뒤 25일 고르바쵸프가 대통령 사임을 발표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은 창설된 지 69년만에 해체되었다.
서유럽의 통합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먼저 '국가'를 형성한 서유럽에서 그것을 초월하려고 하는 통합이 추진되어 왔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963년대 드골의 프랑스와 아데나워의 서독 사이에 맺어진 협력조약으로, 이것이 1967년에는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및 베네룩스 3국이 참가한 유럽 공동체(EC)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유럽 통합'의 이념은 1923년 오스트리아의 칼레르기가 주장한 '범유럽 강령'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그것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대전 후 1952년의 유럽 석탄․강철공동체, 1958년의 유럽 원자력공동체, 일종의 관세동맹인 유럽 경제공동체(EEC)의 결성이며, 이것이 다시 EC라는 형태로 결집된 것이다. EC는 유럽 대륙의 움직임에 소극적이던 영국이 북․중부유럽 국가들과 같이 유럽 자유무역연합(EFTA)을 구성하고 있던 중인 1972년, 아일랜드, 덴마크와 더불어 새로 가입함으로써 9개국이 되었고 이후 1981년에 그리스, 1986년에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가입하여 12개국이 되었다.
1979년 독일, 프랑스 국경지대인 알사스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에 유럽의회가 설치되고, EC의 헌법 '로마 조약'을 개정, 완전시장 통합을 지향한 '단일 유럽 의정서'가 1987년 발효된 뒤, 1992년 말에 단일 시장이 태어났다. 그러는 동안 1990년 동․서독의 통일은 통합을 한층 촉진시켜 유럽 중앙은행 설립과 유럽 공통통화 도입 및 정치통합의 움직임을 가속화하게 되었다. 곧 1991년 말에는 통화통합 실현의 일정을 포함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체결하고, 1993년 11월에 발효하여 유럽연합(EU)이 발족했다.
1995년 1월에는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의 3개국이 새로 EU에 가입했다. EU는 또한 동유럽국가들과는 '연합(준가맹)협정'을, 발트 3국과는 '자유무역 협정'을, 러시아와는 '우호 협정'을 각각 체결하고, 1995년 3월에는 터키와 관세동맹에 조인했다.
EU 가맹국 내부에는 본디부터 바스크 및 카탈루니아 등 민족 문제가 있었고 EU통합의 진전과 더불어 내부에 거주하는 비 EU가맹국 국민, 새로 유입된 외국인, 비 유럽인, 이슬람 교도 문제가 등장했다. 또한 '국민 국가' 형성이나 시민 사회 형성, 민주주의, 토착 자본주의화를 그대로 실행하지 못한 동유럽은 '시장화'와 '민주화'에 의한 '유럽으로의 복귀'를 통해 '서유럽형 근대'에 조직적으로 편입되었으며 새로이 민족 문제를 빚어내고 있다.
1995년에는 GOTT를 대신하여 보다 포괄적인 세계 무역 기구(WTO)가 발족되어 자유 무역은 세계적으로 촉진되었는데, 이로써 경제적인 통합은 세계적인 규모로 현격하게 진전될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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