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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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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헌팅턴,『문명의 충돌』

 

 

이 책의 핵심적인 명제는 가장 폭넓은 차원에서, 문명 정체성에 다름 아닌 문화 또는 문화 정체성이 탈냉전 세계에서 전개되는 결집, 분열, 갈등의 양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다섯 부분은 이러한 중심명 제에서 정교하게 도출된 귀결물이다.

 

 

1: 사상 최초로 세계 정치가 다극화, 다문명화되었다. 경제와 사회의 현대화는 의미를 지닌 보편 문명을 낳지 못하고 비서구 사회를 서구화하는 데도 실패했다.

 

2: 서구의 상대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아시아 문명의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이 확대되고 이슬람권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슬람 국가들과 그 인접 국가들의 세력 균형이 위협받게 되면서, 비서구 문명들은 전반적으로 자기 고유 문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3: 문명에 기반을 둔 세계 질서가 태동하고 있다. 문화적 친화력을 갖는 사회들은 서로 협조한다. 한 사회를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이전시키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국가들은 자기 문명권의 주도국 혹은 핵심국(core state)을 중심으로 뭉친다.

 

4: 보편성을 자처하는 서구의 자세는 다른 문명, 특히 이슬람,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국지적 차원에서는 주로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 사이의 단층선 분쟁에서 '형제국들의 규합'을 통해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상존한다. 분쟁을 저지하려는 핵심국의 노력도 두드러진다.

 

5: 서구의 생존은 미국이 사진의 서구적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자기 문명을 보편이 아닌 특수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비서구 사회로부터 오는 위협에 맞서 힘을 합쳐 자신의 문명을 혁신하고 수호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문명간의 대규모 전쟁을 피하려면 전 세계 지도자들이 세계 정치의 다문명적 본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협조해야 한다.

 

 

세계 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 종족 전쟁이나 민족 분쟁은 한 문명 안에서도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나 집단 사이의 폭력은 이들 문명에 소속된 여타 국가나 집단이 자기네 '친족국(kin country)'을 돕기 위해 결집하면서 확전으로 치달을 수 있는 잠재력을 늘 지니고 있다.

 

서구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당분간은 가장 강력한 문명의 위치를 고수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명들과 비교했을 때 서구 문명의 상대적 힘은 줄어들고 있다. 서구가 자신의 가치관을 주장하고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나설 때 비서구 사회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떤 나라들은 서구를 모방하여 서구에 합류하거나 '편승(bandwagon)'하려고 한다. 유교와 이슬람 국가들은 자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대하여 서구에 맞서고 서구를 '견제(balance)'하려고 한다.

탈냉전 세계 정치의 중심축은 따라서 힘과 문화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서구 문명과 비서구 문명 이슬람, 힌두, 중화, 라틴 아메리카, 일본, 정교, 아프리카 의 상호 작용이라는 다극화, 다문명화의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문명의 본질

 

문명의 본질, 주체, 변동 양태에 관한 중심적 명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단일(singular) 문명과 복수 (plural)문명의 구분이다. '야만'의 개념과 반대되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던 단일 문명 개념은 문명의 복수성을 주장하는 발언들에 의해 그 위세가 좀 꺾였다. 브로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이상, 아니 유일 무이의 이상으로 정의되는 문명을 폐기하고 소수의 특권적 개인이나 집단, 인류의 엘리트에게만 국한된 문명화의 단일한 기준이 있다는 전제와 결별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복수적 의미의 문명은 단일 의미의 문명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대단히 비문명적으로 보일 수 있다.

 

둘째, 문명은 문화적 실체로 파악된다. 문화와 문명을 구분지으려는 노력은 폭넓은 동의를 얻지 못하였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 방식을 가리키고 있다. 문명은 크게 쓰여진 문화다. 셋째, 문명은 포괄적이다. 다시 말해 문명을 이루고 있는 구성 단위는 전체로서의 문명과 관련 짓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문명은 다른 문명들에 포섭당하지 않는 포괄성을 갖는다.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다. 한 개인이 속해있는 문명은 그가 강렬한 귀속감을 느끼는 가장 광범위한 수준의 공동체다. 문명은 우리가 저 밖에 있는 '그들'과는 구별되게 그 안에 있으면 문화적으로 친숙감을 느끼는 가장 큰 '우리'.

 

넷째, 문명은 유한하긴 하지만 아주 오래간다. 문명은 진화하고 적응하며, 인간의 결속체 중에서도 유독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문명은 역동적이다. 발흥하고 쇠멸하며 융합하고 분열한다. 문명 발전에 관한 모든 이론들은 문명이 시련과 갈등의 시기를 거쳐 보편 국가로 발전했다가 쇠락과 분열로 치닫는다고 본다.

 

다섯째, 문명은 정치적 실체와 구분된다. 문명을 구성하는 정치적 요소는 문명마다 다르고 한 문명 안에서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현재 세계에 있는 주요 문명은 중화, 일본, 힌두, 이슬람, 정교, 서구,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문명과 문명의 관계

 

(1)조우 문명이 처음 등장하고 3천년이라는 기간동안 문명들 사이의 접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혀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제한적이거나 간헐적이었다. 문명들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접촉의 성격은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조우(encounter)'라는 표현에 잘 반영되어 있다.

 

(2) 격돌 : 서구의 부상 문명과 문명사이의 제한적, 간헐적 접촉은 다른 모든 문명들에 대한 서구의 지속적, 일방적, 압도적 영향력 행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대체로 400년 동안 문명과 문명의 관계는 서구 문명에 대한 다른 문명들의 종속으로 나타났다.

 

(3) 교섭 : 다문명 체제 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와 문명간의 관계는 한 문명이 나머지 다른 모든 문명들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던 단계에서 벗어나 모든 문명들 사이에서 다각적인 교섭이 강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전 시대의 문명관계에서 뚜렷이 드러나던 두 가지 특징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첫째,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대로 '서구의 팽창'은 끝나고 '서구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었다. 둘째, 이러한 발전의 결과로 국제 체제는 서구를 넘어서 다문명 체제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서구 국가들 사이의 분쟁 몇 세기 동안 그 체제를 지배해 온 도 시들해졌다. 문명 발전의 단계로 보아 20세기 후반의 서구는 '전투 국가'의 단계를 벗어나 '보편 국가'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20세기의 거대한 정치 이념으로 우리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협동 조합주의, 마르크시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기독교 민주주의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서구 문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정치 이념은 한결같이 서구에서 나왔다. 반면에 서구는 주요한 종교를 낳지 못하였다. 서구가 잉태한 정치 이념 사이의 문명 내적 충돌은 사구가 주도하던 단계를 세계가 벗어나면서 후기 서구 문명의 쇠락과 함께 문화와 종교의 문명간 충돌로 대체되고 있다.

 

 

근대화와 서구화

 

18세기 이후 전개되고 있는 광범위한 근대화는 곧 산업화요, 도시화다. 그러나 '근대 사회는 단일한 형태, 곧 서구적 형태로 접근하고 근대 문명은 서구 문명이며 서구 문명은 근대 문명'이라는 전제는 전혀 타당성이 없다. 서구 문명은 8세기와 9세기에 출현하여 그 후 몇 세기 동안 자신의 뚜렷한 개성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서구 문명은 17세기와 18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지 못한 아득한 옛날에도 서구는 서구였다. 서구를 다른 문명들과 구분 짓는 중요한 특징들은 서구의 근대화 이전에도 벌써 존재하고 있었다. 비서구 사회는 자기의 고유 문화를 포기하지 않고도, 서구의 가치, 제도, 관습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지 않고도 근대화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발전해왔다. 서구 문화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구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문화 요소에 비하면, 근대화를 가로막는 비서구 사회의 요소는 극히 작은 양이다. 브로델의 지적대로 근대화 혹은 '단일 문명의 승리'가 세계의 거대 문명들에서 유구한 역사와 함께 형성된 문화의 다양성을 종식시키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대중국과 공영권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한반도, 베트남, 때로는 일본을 포함하는 '중화 지대', 비중국계가 거주하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중국이 지배하는 만주, 몽골, 위구르, 튀르크, 티베트로 이루어진 '아시아 내곽지대,' 야만족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것으로 기대되었던 '외곽 지대'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로 이해하였다. 현재의 중화 문명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중심부에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이 있으며, 중국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그 바깥의 지역들, 법적으로 중국의 영토이지만 다른 문명에 속한 비중국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들(티베트, 신장), 일정한 조건 아래 베이징이 주도하는 중국의 일원이 될 의사가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중국계 사회(홍콩, 대만), 점점 베이징에 접근해 가는 중국계가 주도하는 국가(싱가포르), 화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계는 아니지만 중국의 유교 문화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 나라들(북한, 한국, 베트남)이 있다.

 

중국은 냉전이 끝난 후 두 가지 목표를 정하였다. 하나는 다른 모든 중국 공동체를 결집시킬 수 있는 중국 문화의 기수, 문명의 핵심국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19세기에 상실한 자신의 역사적 지위, 곧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새로운 중국의 역할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첫째, 그것은 중국이 국제 문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둘째, 해외 화교와 중국의 경제적 결속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셋째, 중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국적 색채가 강한 세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관계가 강화되고 있으며 화교가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남 아시아 각국이 중국에 점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대중국'은 그러므로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급속히 성장하는 문화적, 경제적 현실이며 이제는 정치적 현실의 성격까지 띠기 시작하였다.

 

 

아시아, 중국, 아메리카

 

경제 성장은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들 사이에서 정치 불안을 낳아 국가간, 지역간 세력 균형에 변화를 가져온다. 경제 교류는 인적 접촉을 가져올 뿐이지 화합을 낳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제 교류는 민족간의 차이점에 대한 깊은 각성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국가간의 무역은 이익만이 아니라 갈등을 낳는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타당하면, 아시아의 경제적 서광은 아시아의 정치적 그늘, 곧 아시아의 불안정과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경제 발전과 아시아 국가들의 점증하는 자신감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국제 정치를 교란시킨다. 첫째, 경제 발전은 아시아 국가들로 하여금 군사력 강화를 가능케 하여 미래 아시아 국가간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을 높이고 냉전 시대에 억눌려 있던 쟁점과 대결 의식을 전면으로 부각시키며 그 결과 이 지역의 분쟁 가능성과 불안정성을 높인다. 둘째, 경제 발전은 아시아 국가들과 서구 특히 미국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 싸움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킨다. 셋째, 아시아 최대의 강국인 중국의 경제 성장은 이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고 중국이 동아시아에 대하여 전통적 헤게모니를 재주장하고 나설 가능성을 높인다. 이 과정에서 다른 나라들은 중국에 '편승'하여 이러한 발전에 합류하거나 '견제'를 추구하여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는 국가간 분쟁이 싹 틀 만한 소지가 많다. 가장 널리 인정되는 분쟁위험 지역은 한반도와 중국이다. 그러나 이곳은 냉전의 유산이다. 이념 대립은 뚜렷한 감소 추세에 있다. 1995년까지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대폭 개선되었으며 한국과 북한의 관계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한국과 북한이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일 확률은 낮으며,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은 전자보다는 높지만 대만이 중국의 우월적 지위를 거부하고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지 않는 한 역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중국의 한 군사 문건은 '집안 식구끼리 싸우는 데는 한도가 있어야 한다'는 장성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한반도와 중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문화적 동질성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남긴 갈등은 오랜 반목과 새로운 경제 관계가 반영된 다른 성격의 갈등으로 바뀌거나 보완되고 있다. 서유럽과는 달리 1990년대의 동아시아에는 해결되지 않은 영토 분쟁이 남아있는데, 그중 가장 굵직한 것이 일본과 러시아의 북방도서 반환문제,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 베트남, 필리핀을 비롯한 여러 동남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대립이다. 중국과 러시아, 중국과 인도의 국경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와 한결 누르러지기는 하였지만 중국이 몽골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설 경우 언제든지 표면으로 부각될 수 있다.

 

아시아와 미국의 냉전

 

냉전의 종식, 아시아와 미국의 늘어나는 접촉, 미국의 상대적인 국력 감퇴로 일본을 비롯한 여타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의 문화적 충돌이 표면으로 부각되었고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능력도 커졌다. 중국의 부상은 미국에게 더욱 난제로 다가온다. 인권, 무역, 티베트, 대만, 남중국해, 무기 확산 등 미국과 중국의 마찰은 미국과 일본의 마찰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미국과 중국이 중요한 정책 목표에서 입장을 공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의 차이점은 전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마찰은 두 나라의 상이한 문화에서 주로 기인한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근본적 패권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 또는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미국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 또는 중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미국은 200년이 넘도록 유럽에서 막강한 패권 국가가 못 나오도록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중국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 100년 가까이 미국은 아시아에서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미국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렀으며, 독일 제국주의, 나치 독일, 일본 제국주의,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와 싸웠다. 미국의 이런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레이건, 부시는 그 점을 재확인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새로운 패권 국가로 부상하는 것은 미국의 중요한 정책 목표와 상충된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밑바닥에는 향후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둘러싼 근본적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헤게모니 : 견제와 편승

 

분석가들은 중국의 등장을 19세기 후반 유럽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빌헬름 치하의 독일에 비유한다. 새로운 패권국의 출현은 늘 고도의 불안을 야기하지만, 중국이 패권국으로 떠오를 경우 그것은 1500년 이후 세계 역사에 등장한 모든 패권국들을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중국의 부상은 일본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며, 일본이 어떤 전략을 추구해야 하는 가를 놓고 일본 내부에서 열띤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할 수 있는 의미있는 노력의 핵심은 미일 군사 동맹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확고 부동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한 일본은 중국에 순응할 가능성이 높은데, 미국이 그런 의지를 보일 확률은 낮은 편이다. 동아시아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면서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 1930년대와 1940년대를 제외하고, 일본은 역사적으로 자신이 패권국으로 간주한 나라에 결탁함으로써 안보를 지켜왔다. 결국 일본의 동맹 성향은 '근본적으로 견제가 아닌 편승' 이었고 '패권국과의 결탁'이었다. 이상론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지도자와 국민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기본틀에 매력을 느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미국의 보호 아래 있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아시아 개입이 점차 줄어들면 일본 내에서 '재아시아화'를 주장하는 세력의 발언권이 강해질 것이고,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다시 패권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중국의 헤게모니 장악은 동아시아의 불안정과 갈등을 감소시킬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미국과 서구의 영향력도 줄어들 것이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의 주요 지역을 다른 강대국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그러한 지배를 현실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시아는 갈등을 감수하면서 견제를 추구할 것인지 패권을 수용하면서 평화를 추구할 것인지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서구 국가들 같으면 갈등과 견제를 추구할 것이다. 역사, 문화, 현실적 세력 판도는 아시아가 평화와 패권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서구의 중국 침탈과 함께 시작되었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중국이 지역 패권국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으면서 동아시아는 자주성을 모색하고 있다.

 

 

문명 전쟁과 질서

 

주요 문명의 강대국들이 대거 개입하는 세계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알아보았듯이 그런 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단층선 전쟁, 그 중에서도 특히 이슬람권과 비이슬람권의 분쟁에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 강국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분쟁에 휩싸인 이슬람 동포들을 돕겠다고 너도나도 나설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 있다. 그러나 2순위, 3순위 국가들은 전쟁에 깊숙이 개입해야 할 절박할 이유가 없으므로 어느 정도 선에서는 자제를 할 것이다. 세계적 규모의 문명 전쟁을 낳을 수 있는 좀더 위험한 원천은 문명과 문명 사이에서, 그리고 핵심국과 핵심국 사이에서 나타나는 세력 판도의 변화이다. 중국의 부상이 지금처럼 지속될 경우 중국은 '인류사의 가장 덩치 큰 주역'답게 21세기 초반의 국제 안전에 막대한 압박을 가할 것이다. 중국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미국이 이제까지 추구하여 온 국익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앞으로 대규모의 문명 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핵심국들이 다른 문명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국가들, 특히 미국 같은 나라들은 이 엄연한 진실을 받아들이는데 남다른 어려움을 겪는 듯하다. 핵심국이 다른 문명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제의 원칙은 다문명, 다극 세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으뜸가는 전제 조건이다.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은 핵심국끼리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이나 국가간의 단층선 전쟁을 억제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하여 타협을 해야 한다고 하는 공동 중재의 원칙이다. 다가오는 세계에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은 세계 평화의 가장 큰 위협이 되며,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 질서만이 세계 대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어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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