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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카, '역사란 무엇인가'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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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Carr,『역사란 무엇인가』

 

 

역사에 있어서 반역자의 역할은 어딘가 위인의 역할과 유사한 점이 있다. 역사에 있어서 위인 학설 그 특수한 예의 하나가 '선의 여왕 엘리자베드 학파[Good Bess School]' 같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때로는 그의 괴팍스러운 머리가 쳐들어지곤 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시작된 어떤 통속적인 역사 교과서 시리즈의 편집자는 집필자들에게 "위인 전기를 쓰는 식으로 중요한 역사의 주제를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텡이러는 그의 중요치 않은 문장 가운데서 "현대의 유럽사는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레닌의 3대 거인을 통해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좀더 중요한 논문에서 이러한 무모한 계획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 역사에 있어서 위인의 역할이란 어떤 것일까? 물론 위인이란 사람도 한 사람의 개인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개인이고, 동시에 탁월한 중요성을 갖는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번(Gibbon)"그 시대의 환경은 비범한 인물에 적합해야만 한다. 크롬웰이나 레츠 같은 천재들도 오늘날에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프랑스의 계급 전쟁은 형편없는 소인배들이 여우의 탈을 쓰고 활보할 수 있는 환경과 관계해서 만들어진 산물이다"라고 반대되는 현상으로 진단했다.

 

만일 비스마르크가 18세기에 태어났더라면 물론 이것은 어리석은 가설이지만, 그 경우에는 결코 비스마르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독일을 통일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위대한 인물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처럼 위인이란 '사건에 이름을 달아 주는 꼬리표'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다. 물론 위인을 숭배하는 의도에는 불길한 의도가 있을 때도 있다.

 

니체가 만들어 낸 초인(超人)은 위압적인 인물이었다. 히틀러의 경우라든가 소련에서 실행했던 '인물 숭배'의 무서운 결과 같은 것도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위인들의 위대성을 깎아내려는 것이 나의 본 뜻은 아니고, '위인이란 거의 예외 없이 악인'이라는 주장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도 업다. 다만 내가 공격하고 싶은 것은 위인을 역사밖에 앉혀 놓고 위인 자신의 위대성 때문에 역사가 그들을 강요한다는 식으로 보는 견해이다. 마치 "요술 상자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곳에서 위인이 기적처럼 튀어나와서 역사의 진정한 연속성을 중단하게 된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여기서 헤겔의 설명을 볼 필요가 있는데, 그에 의하면 한 시대의 위인이란 그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시대의 의지를 그 시대에 전해 주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그의 행위는 그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이로써 그는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위대한 저술가는 "인간의 자각을 북돋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리비스 박사는 말했지만 이 말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언제나 위대한 인물은 항상 현존하는 세력의 대표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존 권위에 도전해서 새로운 권위의 창조를 도우려는 제세력의 대표자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나 비스마르크와 같이 기존 세력에 얹혀서 위대하게 된 인물들과 비교해서 크롬웰이나 레닌과 같이 자기를 위대하게 만든 세력을 형성하도록 도움을 준 위인들에게 더욱 높은 창조성이 인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들은 위인 자신이 활약하던 시대보다 너무 앞서나갔기 때문에 그 위대성이 후대에 가서나 겨우 인정받게 되는 위인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위인이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고, 생산자이며, 동시에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사회 세력을 대표하는 자이며, 또한 창조자인 아주 뛰어난 개인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가 갖는 두 가지 의미에서, 즉 역사가가 행하는 연구라는 의미에서나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의 사실이라는 의미에서나, 역사 하나의 사회적 과정이며, 개인은 사회적 존재로서 이 과정에 들어오는 것이다 사회와 개인간의 가상학적 대립이란 것은, 우리들의 서고를 혼란시키기 위한 함정에 불과하다. 역사와 사실과의 상호 과정은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와의 대화인 것이다.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린다면,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의해 비춰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와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하게 하고 현재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이 제도나 사상에 관해 관심을 갖는 경우, 그들은 단순히 제도나 사상 그 자체의 내적 발전이나 상호 관계만을 논리적으로 고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와 같은 고찰과 함께 그들은 그 제도가 '누구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그 사상이 '누구의' 착상이었는가 하는 문제를 고려한다. 왜냐하면, 한 정책의 역사, 한 전쟁의 역사, 한 조약의 역사, 또는 한 사상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입안하고 수립하고 수행하고 체결하고 사고한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당연히 제기되는 문제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무슨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났는가? 그들이 무엇을 계승하였으며 무엇을 후세에 남겼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생각하고 행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개별성과 발전성을 역시 변화의 기본이라고 보는 19세기 역사주의 사관은 개별적인 사건이나 사실, 정치적 우여곡절에 치우치고, 시시각각 바뀌는 현상적 변화를 지나치게 중시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역사주의에 비판을 가한 사상가들은 현상 밑에 있을 수 있는 좀더 심층적인 관계와, 시간적 변화를 덜 받는 구조에 초점을 맞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E. P. 톰슨의 사회사, 마르크스의 경제사 및 블로크이 아날학파적 신역사(新歷史) 등이 오늘날 세계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들의 역사 사상에 의하면 개별적인 사람들의 노력이나 창의성보다도 좀더 조직적인 사회 세력 내지 비인적(非人的) 요인들이 역사 형성 과정을 지배하고 또한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 통념들과는 달리, 이러한 사관을 대변하는 사상가들도 역사 형성력으로서 인간 또는 개인의 역할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마르크스는, 비록 역사에 있어서 일차적 중요성이 있는 형성력이 경제적 요소라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결코 인간이라는 주체적 요인을 무시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역사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소유한 것이 없는, 투쟁도 하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라고 보는 동시에 "모든 것을 행하고 소유하고 투쟁하는 것은 차라리 인간이요, 참다운 살아 있는 인간이다"라고 강조하여 인간이 없는 역사, 사람들이 사라진 무대는 진정한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고 간주하였다.

 

만일 역사가 사람들에 의한 역사, 즉 역사의 주요 형성력이 제도에 있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있다면, 그러한 역사는 영웅, 천재, 위대한 정치가나 탁월한 군사 전략가와 같은 선택된 소수의 '개인들'의 역사인가? 혹은 귀족이나 영주와 같은 지배층이나, 시민 계급과 같은 제한된 수의 '집단'의 역사인가? 아니면 농민이나 하층 시민 또는 노동자와 같은 무명의 많은 '민중'의 역사라 할 것인가?

 

우리가 먼저 검토해야할 문제는 역사의 주역이 군주, 정치가 또는 위인이나 영웅이라고 보는 이른바 위인 중심 사관이다. 이 사관에 의하면, 역사를 주도하고 대전환기를 마련하며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는 사람은 용기 있고 성실하며 창의적인 탁월한 개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은 사회 난관을 타개하고 시대를 움직인 위대한 인물이다.

 

역사에서 위인의 역할을 중시한 가장 두드러진 사상가는 19세기 영국의 로만주의적 역사가였던 칼라일이었다. 그는 유명한 저서 <영웅 및 영웅 숭배론>에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룩해 놓은 성취의 역사인 세계사는 근본적으로 보면 거기에서 애써 일한 위인들의 역사이다"라고 잘라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영웅이란 '특히 무엇보다도 사상과 정신에서의 영웅'이라고 강조하였다. 칼라일이 추구한 인간상은 환경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 자유를 향유하는 인간,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인 인간, 기계나 외부적인 영향에 좌우되지 않는 인간에 관한 이미지였다.

 

물론, 칼라일도 역시 외적 환경 조건, 즉 제도, 금전, 여론 등 이른바 기계적, 물질적 영역에 속한 영향력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탁월한 개인은 이러한 외부적 여건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와 목적에 따라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탁월한 개인과 그의 시대적 환경과의 관계에 관해서는 각도를 달리 한 견해가 있다. , 설사 우리가 특별한 개인, 탁월한 인물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러한 위인의 의지나 목적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사회적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도 역시 몇 가지 다른 관점이 있으므로 차례차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 결정론에는 형이상학적 결정론(헤겔, 슈펭글러), 생물학적 결정론(스펜서), 유물 사관적 결정론(마르크스, 엥겔스)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결정론이 지닌 공통점은 '소수의 선택된 탁월한 개인들은 역사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힘이나 필연적 법칙의 산물이며, 따라서 그들의 창의성이나 위대성도 시대와 환경에 크게 제한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의 시대적 과제를 완수할 사명을 띤 위인을 나오게 한 것은 여러 가지의 사회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공통된 명제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세 가지들 결정론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형이상학적 결정론을 주장한 헤겔에 따르면, 위인은 일차적으로 시대 정신의 표현이며, 사회나 시대의 요청에 의해 출현하도록 되어 있다. 모든 시대는 응분의 위인을 가지게 되는 법인데, 예를 들면 19세기 초 유럽의 위인은 나폴레옹이었다. 헤겔의 표현을 따르면, 나폴레옹은 '세계 정신의 필연적인 구현자'였던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헤겔의 위인관에 의하면 위대성이 그 인물 자신의 창의성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역사를 만드는 주인공이 영웅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위대한 시대' 내지 '시대의 위대성'이 그를 불러내어 소명(召命)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한편, 생물학적 또는 사회 진화론적 결정론에 의하면 개인은 생물학적으로 이미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 진화론을 대표하는 영국의 사회학자인 스펜서의 위인관은, 간단히 말하면 위인이 자신의 사회를 만들기에 앞서 사회가 그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펜서에 의하면, 어떤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은 위인의 탓으로 돌려질 것이 아니라, 그 위인 자신과 그의 환경이 함께 발생하게 된 복합적인 조건에 귀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끝으로, 마르크스적 결정론을 보자. 주로 엥겔스, 플레하노프, 레닌 등에 의해 주장된 이 결정론은 두 가지 점에서 언급된 두 형태의 결정론과 상이하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논리적 원리보다는 역사적 경험이나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이른바 '과학적으로' 결정론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상대적으로 영웅이나 위인의 주체적인 역할을 인정하였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결정론의 핵심은 변증법적 필연성과 역사적 불가피성이라는 관념이다. 모든 역사는 변증법적 필연성, 특히 경제적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사회의 경제적 발전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생산력이 확장되어야 하는데, 생산력의 증가에는 항상 커다란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장애물은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제거 작업이 많을수록, 개혁에 대한 욕구가 크면 클수록 '변화를 위한 투쟁을 주도하는 영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출현하게 되는 위대한 인물'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대한 사상가는 혁명적 변화를 위한 사상적 준비를 하게 되고 위대한 행동가는 혁명적 계급 투쟁을 조직하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인들의 출현은 전적으로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언제, 어디서, 누가 그러한 '위대한' 위치에 서게 될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든지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그러므로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이 등장하게 된 것도 역사적 필연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한 마디로 마르크스적 결정론에 의하면, 위인이란 전적으로 사회 필요에 따라 나오는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대중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지니는 약점은,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회적 필요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노출된다. 마르크스적 결정론의 대변자인 엥겔스는 이 문제에 관해 분명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위인에 관한 그의 결정론은 일종의 사후 약방문(死後藥方文)격이라는 비판, 즉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그 당시의 위인에 대한 사회적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보통인, 평범한 시민, 이름 없는 개인은 어떠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인가? 탁월한 개인이나 위대한 인물에게 자의든 필연이든 역사적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면, 그들의 지시에 따르고 그들의 사상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 농민과 노동자 또는 대중에게는 역사적 역할이 부여되지 않는 것일까?

 

역사 과정을 면밀히 검토해 볼 때 우리는 특출한 개인들의 성취가 기록되어 있음과 동시에 일반적인 대중 운동도 서술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무수한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과 수많은 평범한 남녀들, 압박과 고통을 받은 대중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다.

 

서양사의 경우, 대중의 힘이 작용하여 커다란 전환을 이룬 두드러진 사건들은 고대사 이래로 여러 차례 지적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의 로마 시민법의 성립과 관련된 성산(聖山) 사건, 16세기 독일의 농민 전쟁, 19세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대표적인 민중 운동은 1789년부터 10년 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프랑스 혁명일 것이다. 민중은 혁명의 시작에서부터 커다란 역사적 변화와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므로 민중의 조직과 선동, 대중적 집회와 시위 등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는 프랑스 혁명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발단은 파리 군중이 17897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뒤부터 혁명의 중대한 국면마다 민중이 개입하였다. 178984일과 5일의 봉건제 폐지 선언에 대해서는 7월 말부터 격화된 프랑스 농민 전쟁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10월의 부녀자 대행진은 결국 왕 루이 16세를 베르사이유로부터 파리로 옮겨오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제1단계를 마무리짓게 하는 대사건이 되었다. 그 뒤 1790년부터 1795년에 걸쳐 자주 있었던 파리의 군중 집회와 하층 시민의 적극적인 전치 참여는 프랑스 왕정을 폐지하고 그 대신 공화정을 수립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과격화 내지 공포 정치가 나타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민중은 역사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군주나 지배층 중심의 역사 서술도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근래에 이르러 사회사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집단이나 사회 계층에 대한 고찰도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 형성에 작용하는 탁월한 개인 및 다수 민중의 영향력에 관해 살펴보았다. 우리는 역사에서 개인과 민중이라는 요인들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 있어서는 위인이나 영웅의 역할이 두드러진 경우가 있지만, 어떤 사건에 있어서는 민중 운동이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결과적으로 위인 사관이든 대중 사관이든 간에 영도적 힘을 발휘하는 탁월한 개인의 리더십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리더십이라면 강력한 국가 체제 아래의 독단, 독선적이며 전제적인 지배자의 자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개방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리더십은 크게 요청되고 있다. 레닌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선택된 소수의 혁명 집단의 역할을 강조하는 리더십 이론을 내놓았고, 영국의 처칠이라든지 미국의 루스벨트 등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민주 국가 진영이 필요로 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어떠한 역사 전환을 가져온 민중의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주도하고 조직하며 선동하는 적극적인 지도자는 반드시 있었다. 1789714일 바스티유 감옥으로 달려간 군중은 괄레르와얄 광장에서 열변을 토해 선동하는 전직 신문 기자 데물랭의 리더십을 따랐던 것이다. 데물랭이 없는 바스티유 사건은 있을 수 없다. 모든 대열에는 선두에 선 사람이 있고, 또 구령을 내리는 지휘관이 있는 법이다.

 

리더십이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설명해 주는 적절한 개념이다. 그것이 비단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만 적용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적, 사상적 영역에까지 적용된다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더 깊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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