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를 통한 글쓰기
by 처사21[노래] 소수문화 : 패닉의 왼손잡이
■ 논제
패닉의 [왼손잡이]라는 노래의 노래말을 참고로 하여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라
먼저 다 함께 노래를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패닉의 노래를 먼저 들어보는 것이 좋겠지요? 물론 패닉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패닉의 노래를 잘 들어보고 비판을 해 보세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는 바로 이래서 패닉이 싫다.” 라고 말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로 하면 되겠지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함께 토론 속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밝혀가면서 논쟁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다원주의고 민주주의입니다. 물론 논술공부에도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이구요.
어쩌면 여러분들은 그 토론의 과정속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토론방식을 배울지도 모릅니다. 자, 그러면 일단 패닉의 노래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다음은 패닉의 노래 “왼손잡이”의 가사 전부입니다.
< 왼손잡이 >
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너라도 날 보고 한 번쯤
그냥 모른척 해줄 수 없겠니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 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 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가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하필이면 패닉?
학생 여러분들은 패닉이라는 가수를 좋아합니까?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선생님이 패닉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패닉 노래의 가사가 참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패닉의 가사를 들어보면 정말 심상치가 않습니다. 뭔가 의미있고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강렬한 멧시지가 가사속에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대중가요 속에서 다루어지는 그 흔한 사랑타령도 페닉의 노랫말 속에는 통속적이지 않게 담겨 있습니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도,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긴 사람의 슬픈 시련도, 친구인지 애인이지 구분할 수 없어서 가슴이 아팠다는 이야기도 패닉의 노랫말에는 없습니다.
패닉의 노래 중에 “다시 처음부터 다시”라는 곡이 있습니다. 강렬한 랩으로 읊어지는 이 노래는 마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연상시킵니다. 그 가사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와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는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시들어가는 우리 사회 청소년들의 비참한 모습을 고발한 노래입니다. 반면에 패닉의 다시 처음부터 다시는 그 주입식 교육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상실해 버린 청소년들의 고민과 좌절의 심정을 노래한 것 같습니다. 똑같은 상황속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교육적인 현실을, 패닉은 그 교육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구체적인 심리상태를 노래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함께 토론해야 할 곡은 “왼손잡이”입니다. 이제 선생님이 여러분들에게 이 노래말에 대한 여러 가지 느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 하겠습니다.
질문 일곱가지
첫째, 패닉의 노래를 들으면 가사의 내용이 평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패닉의 노랫말에서 어떤 멧시지를 전달 받았습니까? 솔직하게 느낀대로 한번 말해보세요. 그리고 그 페닉의 멧시지에 동의합니까? 동의한다면 왜 동의하는 것이죠? 동의하지 않는다면 왜 동의하지 않는 것이죠?
둘째, 패닉의 노래는 수많은 상징과 비유와 은유로 가득차 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직설적인 어법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이지요. 여러분들은 왜 그런 어법을 구사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어법이 구체적이고 직설적인 어법보다 더 좋습니까? 아니면 나쁩니까? 좋다면 왜 좋은 것이고, 나쁘다면 왜 나쁜 것이죠?
둘째로 제기한 이 문제제기는 국어 공부도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겠죠. 시와 소설 등의 문학에 있어서 직설적인 어법과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어법으로 사용된 다른 작품들을 함께 놓고 공부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셋째, 학생 여러분들은 모두 고등학교에서 공적인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주입식, 획일화교육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육을 바꾸기 위해 정부에서는 소위 21세기를 위한 교육대개혁안이라는 것을 발표했고, 지금 그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주입식, 획일화 교육에서 개개인의 개성을 강조하는 창의성 교육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죠.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교육대개혁안이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현실성이 있나요?
넷째, 패닉의 노래 중 “왼손잡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기에 이 노래에 담긴 멧시지가 정치적 민주주의와는 달리 문화적 민주주의, 말하자면 생활양식의 민주주의가 없는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르고, 독특하고, 톡톡 튄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왼손잡이가 놀림을 당하고, 말을 더듬는 사람이 놀림을 당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자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을 문제가 있다고 봅니까? 획일화된 통일적인 교육이 바로 여러분들이 받은 교육입니다. 여러분들은 다향하고 다원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왜 정당한 것이죠?
다섯째, 우리 사회의 교육이 다원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 우선 어떤 것들이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여섯째, 입시제도를 관장하는 정부와 대학은 이제 여러분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그 시점에서는 무시험 입학을 원칙으로 한다는 교육 개혁안을 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까?
일곱째, 여러분들의 삶의 대부분들 보내는 학교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다가오는 21세기 정보화 시대, 문화산업시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교육이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합니까?
일상적인 삶으로서의 논술
이상으로 질문을 다 했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요 서둘지 마세요. 우리, 이번 한 번의 토론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하지는 맙시다. 다만 오늘의 토론의 의미는 앞서서 확인했듯이 대중가요의 노랫말로도 이처럼 의미있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선 알고 넘어가는 것으로 합시다. 그리고 앞의 여러가지 문제제기들을 해결하는 방법과 과정을 알아두는 것으로 합시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가끔 대중가수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이런식으로 노래를 듣는 것보다는 뭔가 의미있고, 뭔가 생각있이 노래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선생님이 제기한 문제들을 꺼내서 생각해 보는 것으로 합시다. 그러면 생활속의 논술이 가능하겠지요?
어쨌든 대중가수들이 부르는 대중음악은 단순히 스쳐지나가면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가벼운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깊이 있게 그 노랫말의 본질과 멧시지를 파고들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더 잘 알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논술을 준비하는데 아주 훌륭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말입니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니까요. 날카로운 분석력과 예리한 추리력을 길러주니까요.
이 노랫말에 들어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가수는 어떤 멧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싶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 자체가 생각하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논술은 이미 반은 해결된 것이지요. 일상적으로 사고하는 생활양식이 자신에게 자리잡은 것이니까요. 아셨습니까? 대중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도 바로 논술입니다.
생각을 합시다. 패닉의 왼손잡이라는 노래가 꼭 다원주의만을 노래한 것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왼손잡이는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 패닉이 좋아하는 친구들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패닉의 노래를 듣는다면 일석이조겠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동시에 논술공부도 하는 것이니까요. 만일 패닉을 싫어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다른 가수의 노랫말을 위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분석해 보세요. 그들이 사용하는 상징과 은유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멧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왜 이런식으로 표현한 것이지? 따위의 질문들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선생님이 말한대로 실천한다면 여러분들의 사고력이 아마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될 것을 선생님은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만 남았네요. 그래요, 원고지를 꺼내고 연필을 꺼내서 맨 앞에 제기되 논제에 대한 논술문을 작성하는 일. 정답은 없습니다. 그냥 마음대로, 그대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 말고, 적어도 말은 되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보시기 바랍니다.
[문학] 공동체 문화 : 안도현의 관계
<논제> 다음 동화를 읽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쓰라.
톡, 톡톡, 하고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지더니 톡톡도독, 토토토토토토톡토토토토톡톡톡톡토토토토톡토토토톡 갑자기 소나기 빗방울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도토리들이 떨어져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노인이 와서 장대를 휘두르며 갈참나무의 도토리를 마구 털어대고 있었습니다. 한바탕 장대를 휘두른 다음 노인은 가지고 온 자루에다 도토리들을 주워 담았습니다. 낙엽들은 그들이 감싸고 있는 도토리가 노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낙엽들은 노인이 어서 산을 내려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홀쭉한 노인의 자루는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금세 빵빵해졌고, 노인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갔습니다.
찍, 찍찍, 날이 어두워지자 이번에는 쥐들이 먹이를 찾아 찍찍거리며 돌아다녔습니다. 찍찍찌찌찌찌직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 낙엽들은 그들이 감싸고 있는 도토리가 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무진 애를 썼습니다. 도토리도 들키지 않으려고 땅으로 고개를 숙인 채 쥐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굳이 이렇게 숨어서 살아야 하나?” 도토리는 갑갑해서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너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돼.” 낙엽들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삶을 도토리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낙엽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는 자기의 존재를 되는 대로 내팽개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인간의 눈에 발견되어 마을로 가거나, 쥐들의 먹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된다면 하루하루를 긴장과 불안에 휩싸여 살지 않아도 되잖아.” “도토리야,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래서 이 세상하고 다시 관계를 맺어야 해.” “.....관계를 맺는다는 게 뭐지?” “그건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던 꿈을 실현한다는 뜻이야. 너는 너 자신의 꿈뿐만이 아니라, 우리 낙엽들의 꿈까지도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나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안하지만, 나는 꿈 같은 것은 없어. 어서 이 지루한 시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는.” 낙엽들이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토리를 에워쌌습니다. “도토리야, 네 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 아니?” “글쎄.” 낙엽들이 바스락거리며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도토리야. 네 몸 속에는 갈참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어.” 그것은 도토리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내 몸 속에 갈참나무가?” “그래, 그래.” 낙엽들이 하는 말을 도토리는 정말 믿기 어려웠습니다. 도토리는 그저 도토리일 뿐인데 어떻게 몸 속에 큰 갈참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말인가?
겨울이 되었습니다. 앙상한 갈참나무 가지 사이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한두 송이 띄엄띄엄 내리던 눈은 마침내 폭설로 변해 온 세상을 뒤덮으려는 듯이 퍼부어댔습니다. 힘없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뚝,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눈이 내려 쌓일수록 도토리는 몸이 자꾸 아늑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달콤한 잠에 빠져 있다가 깨어나면 또다시 달콤하고 따뜻한 잠이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도토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낙엽 위에 쌓였던 눈이 사르륵사르륵 녹는 소리가 났습니다. 도토리의 몸도 눈 녹은 물에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도토리는 거무튀튀해진 낙엽들이 썩는 냄새를 맡고는 마음이 울적해졌습니다. “나는 낙엽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한 게 없어. 낙엽들이 썩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야. 어서 꿈에서 깨어나야지. 그리고 무엇인가를 해야지.” “도토리야, 우리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걸.” 낙엽들이 도토리를 꼭 껴안으며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기운이 도토리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도토리의 작은 몸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점점 뜨거워졌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도토리를 집어삼킬 듯하였습니다. 도토리는 한시 바삐 꿈속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견뎌야 해. 이제 우리들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거야.” 낙엽들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도토리를 껴안았습니다. 이미 부서져 가루가 다 된 낙엽들까지도 도토리를 껴안았습니다. 도토리도 이를 악물었습니다. 낙엽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도토리는 자신의 단단한 껍질을 찢으며 껍질 밖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고는 몸을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갈참나무 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질 때와는 전혀 다른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도토리는 생각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생생한 현실이었습니다. 도토리는 햇볕이 내려오는 쪽으로 힘껏 손을 뻗었습니다. 그랬더니 도토리의 손 끝에 연초록 싹들이 보란 듯이 돋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예쁜 연초록, 그것은 바로 낙엽들의 꿈이었으며 또한 도토리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 수없는, 어린 갈참나무들이 숲 속에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안도현, 관계, 문학동네, 11-18쪽
[1단계] 문제조건 확인하기
중딩어야. 어떠니 참 아름다운 동화지. 우리가 사회 시간에 개인과 공동체에 대해 배우지만 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는 그리 쉽지 않단다. 개인은 공동체에 무조건 종속되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개인이 더 소중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과 공동체가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하는 건지. 그럼 먼저 중딩어가 주어진 동화를 간단히 줄여 보렴.
네. 동화는 처음에는 낙엽이 도토리를 도와주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결국 낙엽과 도토리가 서로 힘을 합쳐 훌륭한 숲을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둘이 힘을 합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없었니.
있었습니다. 쥐와 도토리를 깡그리 집어가려는 할아버지는 좋은 숲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중딩어는 이제 개인(도토리, 낙엽)과 공동체(숲)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감을 잡았겠구나.
[2단계] 문제설정, 주장잡기
먼저 동화의 문제설정은 무엇일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동화는 도토리나 낙엽같은 개인들이 서로 힘을 합치면 건강한 숲(공동체)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지 않니. 그렇다고 도토리나 낙엽이 숲에 완전히 종속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쥐나 할아버지는 무엇을 뜻할까. 그래 쥐와 할아버지는 마구잡이로 자연을 개발하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나쁜 사람들을 뜻한다고 볼 수 있지.
물론 동화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할 수도 있다. 아무리 훌륭한 숲이라도 숲 이전에 도토리와 낙엽이 있었기게 그러한 숲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보다 개인이 더 중요하다고. 아니면 그 반대로 숲이 있었기에 낙엽이나 도토리가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3단계] 논증 분석하기
먼저 서로의 개성도 존중하면서 제대로 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좋은 비유가 있단다. 고슴도치 가족은 추운 겨울에 서로 껴안고 자는데 서로의 몸을 찌르지 않으면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면서 서로 껴안고 추운 겨울을 이긴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서로 한 몸이 되는 것이지. 중딩어야 혹시 학교에서 그런 경험을 해 보지는 않았니. 학급에서 공부 못하거나 몸이 약한 친구를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같이 힘을 합쳐서 멋진 학급을 만들어 보았다든가 하는 경험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공동체는 굳이 사회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친구 공동체 다양한 공동체를 들 수 있지.
그리고 공동체 하면 전체가 부분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지향하는 공동체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다. 아무리 공동체가 좋을지라도 개인이 전체에 희생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 그럼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틀을 짜보자.
[4단계] 틀짜기
1. 문제제기 : 왜 공동체인가
2. 공동체에 부정적인 요소들
3. 공동체에 긍정적인 요소들
4. 긍정적 공동체를 위한 방법
5. 마무리 : 공동체의 참의미
[5단계] 써보기 - 교사가 쓴 예시 답안
흔히 숲과 나무는 전체와 부분, 사회와 개인을 가리키는 비유어로 자주 쓰인다. 이런 경우 숲이 있기에 나무가 있는 것인지 나무가 있기에 숲이 있는 것인지 헷갈린다. 이런 면에서 동화가 주는 교훈과 의미는 각별하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사람이 한 데 모여 서로 힘을 합쳐 제대로 잘 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쥐나 할아버지처럼 남(자연)을 파괴하거나 괴롭혀서는 곤란하다. 그런 잘못된 측면을 막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실제 놀러가서 쓰레기를 마구 벌이는 내 친구들과 돈벌이를 위해 산림을 파헤치는 사람들은 쥐요 표독스런 할아버지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 모두가 감시자가 될 때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도토리와 낙엽처럼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도와주는 상호작용이 중요하며 이러한 상호작용은 서로 부추겨야 한다. 음지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돕거나 아파트 주민들이 서로 연대하여 아파트의 새로운 문화를 가꾸는 것 따위가 이런 노력들이다.
문제는 이런 상호작용을 구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서로의 고민에 대해 서로 토론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처벌 위주로 할 때 많았던 문제학생도 이런 식으로 하니까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공동체는 어떤 힘센 사람이 획일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서로가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되 서로 연대해서 이룰 수 있는 문제를 찾고 그래서 뭔가를 해결해 나갈 때 참된 공동체는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도토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던진 낙엽, 낙엽의 희생을 생명으로 바꾼 도토리, 우리 모두가 이런 도토리 이런 낙엽이 될 때 우리 사회는 숲이 될 것이다.
다섯째 마당. 역사
[영화] 노동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논제
효율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는 그렇게 좋은 제도가 아닐 수도 있다. 여러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면 좀더 현명한 결정이 나올 수도 있지만, 중구난방 의견이 갈리면서 집단의 단결성을 저해하고, 무엇보다 하나하나의 사안을 결정할 때 너무 많은 시간이 허비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3공화국을 유지하였던 유신헌법은 바로 그러한 논리적인 배경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의 위협속에서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론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고 당시의 정책입안자들은 주장했었다. 유신헌법에서는 이러한 논리에 따라 국민의 민주주의적인 여러가지 권리들을 유보시키거나 폐지시켰다.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선출되었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등의 조항이 바로 그것이었다. 특정한 상황에서 효율성을 이유로 민주주의는 희생될 수도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나라 근대사를 예로들어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라.
숙제, 꼭 합시다
자, 이제 선생님이 여러분께 숙제를 하나 내 주겠습니다. 꼭 했으면 좋겠는데... 어던 학생은 이렇게 묻겠군요. “왜 처음부터 내 주지 않고 이제와서 숙제를 내 주죠? 만일 필요한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내 주시든지, 아니면 그냥 끝까지 그냥 이렇게 하지... 사실 숙제하기 싫은데...”
왜 선생님은 처음부터 여러분께 숙제를 내주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논술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내 주려는 숙제는 영화를 보고나, 만화를 본 뒤에는 반드시 줄거리를 요약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처음부터 그런 숙제를 여러분들께 내 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줄거리 요약이 눈앞에 어른거려 영화가 재미없으면 안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편한마음으로 영화를 보라고 숙제를 내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전태일이라는 영화는 이 논술책에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영화입니다. 이제는 숙제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군요. 지금쯤은 여러분들도 영화를 보면서 의미있는 토론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테니까요. 그래서 줄거리 요약 숙제를 낸다고 지겨워하지도 않을테니까요. 어쩌면 - 이것은 정말 어쩌며이지만 - 어쩌면 더 의미있고, 더 재미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꼭 숙제하셔야 합니다?
영화를 보건 만화를 보건 반드시 줄거리를 요약하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신도 모르게 논술실력과 국어실력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영어실력이 쑥쑥 늘어날 것입니다. 만화본다고, 영화본다고 눈치주는 부모님께도 떳떳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은 아주 여러가지면에서 의미가 있거든요.
우선 첫 번째로는 어떤 이야기나, 책의 핵심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이 길러지지요. 두 번째로는 자신의 느낌을 정리된 모습으로 말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요. 세 번째로는 영화나 만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다시한번 그 내용을 떠올릴 수 있고, 그렇게되면 미쳐 아무생각없이 지나갔던 장면이나 내용들에서 새로은 영감을 얻을 수 있지요. 등등...
아예 이러면 어떨까요. 공식적으로 줄거리 요약 노트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이 논술책과 관련된 영화나 만화 이외에 여러분들이 평소에 보는 모든 영화, 만화, 소설 등의 줄거리를 일상적으로 요약하는 습관을 갖는 겁니다. 이미 선생님이 말했다시피, 무엇보다도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떳떳하게 만화나 영화나 소설을 볼 수 있잖아요. 만일 그 분들이 반대하신다면 선생님이 쓴 이 책을 보여주세요.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이 책을 보여드리면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은 이해하실 겁니다. 어쨌든 따지고 보니까 여러가지 의미에서 줄거리 요약 숙제는 의미가 있네요. 숙제, 반드시 합시다!
선생님도 줄거리 요약 노트가 있거든요. 선생님도 항상 영화나, 만화나, 소설을 보면 반드시 그 줄거리를 요약하고, 덧붙혀서 선생님이 느낀 점을 써 놓습니다. 선생님의 영화노트, 만화노트, 독서노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아래의 줄거리는 선생님이 전태일을 보았을 때 써 놓은 줄거리입니다. 참고로 여러분들게 보여드릴께요. 알았죠? 숙제, 꼭 합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줄거리
운동권 출신의 수배중인 김영수. 그는 긴급조치 - 당시 대통령이 발휘했던 민주적 제권리를 제약하는 임시조치법입니다. 만일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주변의 어른들께 물어보세요. - 가 발표되자, 골방에 숨어서 멀리있는 봄을 기다리 듯,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한 청년, 전태일의 삶을 쓰고자 골몰하고 있다.
청년 전태일은 청계천에 있는 삼일사 재단 보조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작업 환경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 일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나이 어린 여공들이 각성제 주사를 맞으면서 이틀밤을 새워 일하는 모습과,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 한다.
그리고, 노동법이라는 책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뭔가 나은 세상을 꿈꾸기 시작한다. 어린 시다 - ‘시다란 미싱사 옆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본제 보조공을 일컫는 속어입니다. - 들 대신 밤늦게 남아 뒷정리를 하고, 점심을 거르는 여공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는 ‘바보회’를 만들어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뜻을 모은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싶은 그들의 순수한 바램들이 하나로 모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동청에 가서 청계천에 소재한 피복공장들의 실정을 알리고자 하던 전태일의 행동은 외면 당한다. 또한, 그와 동료들의 일자리마저 윗사람들로 인해 위태와진다.
좌절된 꿈으로 괴로운 전태일은 청계천을 떠나, 채석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 뜨거운 열정은 그를 ‘내마음의 고향 청계천’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다시 ‘불쌍한 내 형제들이 있는 청계천’으로 돌아온 전태일.
그는 동료들과 다시 뜻을 모은다. 그러던 중, 신문기자를 만난 전태일은 청계피복공장의 실상을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얻게 된다. 다시 ‘삼동회’가 조직되고, 힘을 얻은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은 열심히 청계피복공장 공원들의 설문조사에 나선다.
드디어, 그들의 꿈이 실현되어 신문에 그들의 기사가 소개된다.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은 한없이 기뻐한다. 그들은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고, 그 돈으로 신문을 사서 사람들에게 돌린다. 의욕에 찬 그들은 청계피복공장의 환경 개선을 윗사람들에게 건의한다.
그러나, 그들의 삼동회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윗사람과 노동청 사람들은 약속을 어긴다. 실의에 빠진 전태일과 동료들. 그들이 다시 힘을 모아 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한 날, 전태일은 노동법 책과 함께 그의 몸을 태운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전태일은 지켜지지 않는 노동법 - 근로기준법 - 책을 태운다.
온몸에 불이 붙은 전태일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도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90년대, 자유의 햇빛을 맞으며 김영수는 청계천 피복공장 골목 모퉁이에 서 있다. 그곳에서 그는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 그가 희망으로 붙잡고 있었던 전태일을 추억한다. 그리고, 그는 90년대 햇살 속을 걸어가고 있는 전태일을 본다.
민주주의 국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민주주의란 국민들 개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지켜지고, 그것을 국가가 보증하는 제도입니다. 또한 국가와 정부의 권리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지금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꽤나 험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이 민주주의적인 자유는 우리들 선배들의 많은 피와 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풍요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나름대로의 풍요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밥을 굶거나, 옷을 기워 입거나, 연탄까스를 마시고 죽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분명히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신흥공업국으로 아시아와 세계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비록 지금은 IMF로 인해서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지만, 그래도 과거 즉 60년대나 70년대에 지금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토론하고자 하는 것은 비로 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이면엔 무엇이 있는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가능성과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형 경제발전 모델, 즉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 유교적인 권위주의 통치; 그리고 빈부의 격차; 등과 같은 특성들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효용과 한계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와, 노동자들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바로 이나라 경제발전의 주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과거
영화를 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 꽤 나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이면엔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바로 영화에서 여러분들이 보았던 것 처럼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그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초라한 흑백사진처럼 말입니다.
8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선성장 후분배론에 의해서 이끌려졌습니다. 말하자면 일단 빵을 크게 만든 후에 나누어 먹자는 것이지요. 박정희장군이 대통령이 된 후,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원과 자본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외국의 돈을 빌여와서 공장을 짖고 거기서 물건을 만들어서 수출을 하는 수출 드라이브 위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7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만들면서 국민들에게 10년 안에 수출 100억불, 일인당 국민소득 1000불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러한 경제성장, 즉 지긋지긋한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고 그 때의 정부지도자들은 말했습니다. 북한으로부터의 안전과, 눈부신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안정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단행된 것이 유신헌법입니다.
유신헌법은 오늘날 법학자들에 의해 독소조항이 많은 법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통령의 선출방식입니다. 그 전까지 대통령은 국민들의 손에 의해 직접선출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국가의 혼란과, 낭비와, 수출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폐기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신해서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만들고 그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서 대통령을 뽑도록 했습니다. 이른바 체육관선거가 시작된 것입니다.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할 때 모이는 장소가 바로 장충체육관에서 유래된 별칭입니다.
찬성 99% 무효 1% 반대 없음. 이것이 체육관에서 벌어진 대통령 선거의 결과였습니다. 마치 공산주의에서나 볼수 있을 법한 선거였습니다. 그리고 87년 노태우 당시 민자당 대표위원이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할 때까지 17년 동안 그 방식은 지속되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문성근은 바로 그 유신헌법에 반대해서 데모를 주동했던 말하자면 그 때 당시의 학생 운동권이었습니다. 경제성장을 이유로 권위주의 통치가 통용되고 있는 동안 생산현장에서도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수출을 위해서라면 무슨짓을 해도 되는 시대였습니다. 영화에는 어린 여공들이 잠오지 말라고 주사를 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수출 기일을 무리하게 촉박하게 잡고 나서, 그 기일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일시키는 장면입니다. 즉 그때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한 수출품목이었던 가발, 섬유업종에 종사하는 여공들은 72시간 철야를 밥먹듯이 했다고 합니다. 72시간 철야라는 것은 글짜 그대로 삼일 밤낮을 꼬박일하는 것입니다. 잠이 오면 약이나 각성제 주사를 맞아가면서 일하는 것이죠.
이런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배경위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우리나라의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4.19정신을 계승하는 국가라고 명시되었습니다. 또한 얼마전까지 광주사태라 불리던 80년대의 광주사건도,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그 표현이 바뀌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비자금사건과, 광주에서의 무고한 시민에 대한 과잉진압으로, 또한 군사반란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전태일이라는 그 때 당시의 한 노동자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이 쓰여져 있는 근로기준법은 당시에는 휴지조각이었습니다. 수출이라면 모든 것이 통했습니다. 수출을 위해서라면 법을 안지켜도 되었습니다. 청계천의 옷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기업과 정부에게 요구하다가 자신의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을 하면서 자신의 몸도 함께 불살라버린 사건을 영화는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로서는 믿기 어렵겠지만, 영화의 모든 내용은 단 하나도 과장됨 없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도.
70년대, 한 청년 노동자의 의분에 찬 죽음에 의해서 비로소 그 때 당시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사회와 지식층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복지와 노동조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효율성과 민주주의
선생님이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풍요 뒤에 어떤 것이 있었는지,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지켜진 것인지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IMF의 상황이 우리나라에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당해서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접합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효율성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난국을 헤쳐가는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과거 60년대와 70년대 처럼 말입니다.
한명의 똑똑하고 위대한 지도자의 지휘아래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민주주의는 확실히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제도가 아닙니까? 자,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에서 위의 논제가 나왔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이 선택할 순서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민주주의는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 처럼 위기의 상황에서는 효율성을 위해서 민주주의는 유보되어도 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이 나라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의해서 우리나라 미래의 정치제도가 결정될 것입니다.
[만화] 속담의 긍정성과 부정성 : 박광수의 광수생각
* 다음 그림을 참고로 속담의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라.
- 조선일보 1998년 6월 6일
[1단계] 문제조건 파악하기
중딩어야. 아직 사춘기, 아니면 제2 사춘기. 혹시 뽀리 같은 아픔을 겪지는 안았는지. 설령 아직 겪지 않았어도 언제가는 겪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살다보면 속담이 삶의 지혜로 다가올 때가 많을 것이다. 속담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혜가 웅축된 말이니까 말야. 그런데 삶이라는 것이 늘 변화하는 것이고 보면 오히려 속담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도 있을 것이야. 그러니까 속담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적절한 맥락에서 응용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야. 이런 측면에서 만화는 속담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던져주고 있구나.
[2단계] 문제설정, 주장설정
그렇다면 중딩어는 어떻게 문제를 설정하겠니. 속담의 양면적 기능을 인정하고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잘 쓰자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속담의 부정적 기능이나 긍정적 기능 어느 하나에 대해 문제를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긍정적 관점 : 속담은 삶의 지혜다. 뽀리가 열번 찍어 안넘어 갔으면 그 여자는 뽀리 여자가 아니다. 누군가 한 번 찍어 넘어갔다면 그 여자는 그 남자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열 한번 찍어 넘어간다 한들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부정적 관점 : 속담이 고정관념이 되어 적극적인 행동을 막게 하는 경우가 많다. 뽀리가 그여자를 열 한 번 찍었으면 넘어갈 수 있었을텐데 속담대로 생각하다 보니까 결국 놓쳤다.
제3의 관점 : 속담은 그저 속담일 뿐이다. 똑같은 속담일지라도 쓰는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 될 뿐이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3단계] 논증 분석하기
먼저 속담의 양면적 기능에 대해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먼저 다음 토론 보도 내용을 보자.
"여자가 나가서 돈을 버는 경우도 많은데 남자가 부엌에 얼씬도 해서는 안된다는 말에는 반대합니다.
" "남녀가 평등한데 꼭 남자가 결혼신청을 해야 한다는데는 동의할 수 없어요. " 24일 오후3시 서울 중동중학교 2학년3반 교실. 책상에는 딱딱한 수학책과 영어책 대신 청소년 성교육교재 '우리들의 멋진 사춘기'가 펼쳐져 있다.
분단별로 질서정연했던 책상들도 9명씩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하기 좋도록 바뀌어 있다.
매주 금요일 마지막 수업은 청소년정신건강시간. 오늘의 주제는 '매력적인 남자가 되려면' 이다.
벌써 3학기째 계속되고 있어 토론자세도 제법 의젓하고 진지하다. 오늘 주로 도마에 오른 얘기는 남녀 성역할 차이에 관한 것.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는 속담이 등장하자 의견이 분분하다.
"여자는 말이 많아서 밖으로 나가면 안돼요. 가정의 기밀이 새고 그러잖아요. " 한 남학생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우 - ' 하고 쏟아지는 야유 소리. 뒤이어 "여자의 주장도 귀담아 들을게 많은데 그 속담은 잘못된 거 아닌가요" 하는 반론이 나오자 이번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진다.
사실 45분의 토론 시간은 너무 짧다.
지난 주 '성적충동이 생기면'에 대해 얘기할 때도 그랬다. '사랑. 성 그리고 결혼' 을 토론할 다음주도 아마 그럴 것이다. 상기된 얼굴로 격론을 벌였던 신규섭 (13) 군은 "교과서에 안 나오는 것들을 배울 수 있어 좋아요. 지난 학기동안 학교폭력 및 약물에 관한 것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그 후론 정말 학교에서 싸우는 얘들이 거의 없어졌어요" 라고 들려준다. 이 토론의 정식명칭은 '청소년 정신건강 프로그램' .삼성생명 사회정신건강연구소와 중동중 인성교육연구위원회가 공동으로 실시하는 것으로 지난해 9월 당시 1학년학생들을 대상으로 첫선을 보였다.
프로그램을 개발한 사회정신건강연구소에서 파견된 연구원이 토론을 주도하고 중동중 교사들도 함께 참여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2명의 교사가 한 반의 토론을 이끄는 셈. "실시후 학교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는 교사들의 말마따나 실제 2학년 학생중에는 올해 무기.유기정학등의 징계를 받은 이는 한 명도 없다.
"학생들의 정서를 높여 건강한 청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게 하자는게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 서서히 달성되는 것 같아요. 학생들이 대화문화를 즐기게 된 것도 보람이구요. "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정현희박사의 자랑은 끝이 없다. 신용호 기자, 1997년10월27일 중앙일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라고 언급했다. 분분했는 것은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부정적 속담으로 보는데 우리 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구나. 이 속담은 남자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들이 말이 많거나 주제넘게 나서면 집안이 망한다는 뜻이니 요즘같은 남녀평등 사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속담 아니겠니. 물론 아직도 남녀평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남녀평등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겠니. 남녀평등이라는 것은 여자를 남자와 똑같이 대하고 똑같은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녀 차이를 존중하되 서로의 개성과 권리를 존중하자는 것이지. 잘못된 말은 남자도 할 수 있고 여자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여자만 문제삼으면 안되는 것이지. 열번 찍는다는 속담도 남녀 사이에 쓰면 성차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왜 꼭 찍는 것은 남자이고 찍히는 것은 여자일까. 여자가 찍으면 안되는가 우리는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암탉 속담은 양면적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라 부정적 가치만을 가진 속담으로 분류할 수 있단다. 열번 찍는 속담은 맥락에 따라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지. 쉽게 포기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심어줄 때는 긍정적으로 여자들에게만 쓰는 맥락에서는 부정적으로 말야. 우리 중딩어들이 이런 속담의 사례를 스스로 많아 찾아보기 바란다.
[4단계]
1. 문제제기 - 속담의 양면적 기능이 왜 문제인가
2. 만화 분석 :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의 진정한 의미
3. 속담의 맥락적 의미와 올바른 수용 자세
4. 마무리 : 속담의 창조적 사용
[5단계] 써보기 - 교사가 쓴 예시답안
속담은 삶의 지혜가 되어 삶의 나침반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안될뿐만 아니라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것은 좀더 신중히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인생의 지혜를 심어주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봉건 시대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담긴 말로 백해무익하다. 그러나 보통 속담은 대개 다양한 효과를 지닌다.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만화에서는 뽀리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을 따랐다가 낭패를 당한 것으로 나온다. 속담의 부정적 기능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속담에서 ‘열 번’은 단순한 횟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면 좋은 성과가 있다는 것이니 이 속담의 의도를 그림처럼 나쁘게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여자를 나무로 비유한 것은 여자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를 대상으로 이런 속담을 쓸 수 있다 할지라도 한 번 찍어 넘어가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백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도 있다. 남자가 열 번 찍을 의지가 있다면 여자는 안 넘어갈 의지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속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속담을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있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속담은 신중한 선택을 할 때는 유용하지만 그것을 무조건 따른다면 별로 쓸모가 없을 것이다. 속담은 복합적인 삶의 경험이 웅축된 말이다. 그러므로 단지 사전적 의미만을 가지고 속담을 부려쓴다면 그것은 단순한 언어나 일반 낱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속담은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삶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속담의 맥락을 살펴 그것이 우리들의 삶을 위한 창조적 잣대가 되도록 해야 한다.
[평론] 홍길동전
* 다음 두 글은 홍길동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담고 있고 핵심적인 차이를 지적한 뒤 자신의 견해를 쓰시오.(1000자-1200자)
주장 1 홍길동은 사회개혁을 시도한 혁명가였다!
절대왕권이 지배하던 조선사회에 왕권에 대항하는 인물이 영웅으로 그려지거나 긍정적으로 다루어진 소설작품은 거의 없다. 특히 홍길동전은 신분제도를 비롯, 봉건관료의 부패 등 조선사회의 문제점과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그려져 있다.
홍길동전은 시작부터 조선조 사회의 현실 문제가 거론된다. 양반과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홍길동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천한 노비라는 이유로 사회에 진출하여 뜻을 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영웅적 능력과 신분제약이라는 현실적 한계사이에서 고민하는데, 독자 역시 작품 첫머리에서부터 길동의 입장에서 그의 고민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호부호형도 못하고 노복까지 천대하는 신세를 고민하다가 가출하여 도적떼의 우두머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도적도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활빈당(活貧黨:가난한 자를 살리는 무리)이라 이름하고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탈취 말고 각읍 수령과 방백의 준민고택하는 재물을 노략하여 혹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는 의적이다.
또한 작가는 적서차별이나 관리들의 부패 및 빈민 문제 등의 현실문제를 제기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도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함경감영에서 무기와 곡식을 잃고 우리에 대해서는 모르니 애매한 사람이 허다히 상할」 것을 염려하여, 습격한 무리가 활빈당이고 그 우두머리는 홍길동임을 써 붙이게 한다. 여기서도 길동이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자신을 가지고 이 힘을 백성들을 위해 정당하게 사용하려고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길동이 여덟 명의 허수아비를 각처로 보내어 불의한 재물을 빼앗고 수령의 뇌물을 탈취하며 창고를 열어 불쌍한 백성을 돕는 행위를 계속하는 이야기의 전개는 이러한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다음을 보자.
㈎ 내가 하늘의 명을 받아 팔도를 다니며 탐관오리와 비리로 취하는 놈의 재물을 뺴앗아 불쌍한 백성을 구휼(救恤)하거늘 너희놈이 나라를 속이고 임금에게 무고하여 사람을 해하고자 하매
㈏ 각 절이 혹세무민(惑世誣民 : 세상사람들을 그럴듯한 말로 속임)하는 중놈을 일제히 잡아오고 또한 장안 재상가의 자식이 세를 끼고 고단한 백성을 속여 재물을 취하고 불의한 일이 많으므로 마음이 교만하되··· 신장이 명을 듣고 공중으로 날아가더니 이시한 후의 중놈 백여명과 경화자제 20명을 잡아들이는지라
㈎부분은 길동을 체포하기 위해 잠입한 포도대장을 유인하여 잡은 후 홍길동이 대면하여 질책하는 부분이다. 길동은 법을 집행하기 위해 나타난 포도대장에게 자신의 행위가 국법보다 위에 있는 천명(天命)의 뒷받침을 받고 있음을 선언하고 오히려 포도대장의 죄를 추궁하고 있다. ㈏에서는 길동이 조선을 떠나기 전에 백성의 눈을 속이거나 부당한 힘으로 재물을 빼앗은 중과 권력충의 자제들을 잡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장(神將)을 시켜 이들을 잡아 오도록 한 것은 갈동의 위력을 한층 더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길동이 현실적인 문제를 비현실적으로 처리한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그가 현실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은 하늘의 도리와 합치하는 떳떳한 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함이 마땅하다. 결국 길동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과 하늘의 도리에 힘입는 윤리적 정당성까지 획득하게 됨을 보여준다.
길동은 이를 왕과의 대결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길동은 아버지와 형을 이용하여 자신을 잡으려는 조정과 왕의 기도를 몇 번이나 좌절시키고 자진해서 왕 앞에 나타나 적서차별이 원인이 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당당히 도적 활동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일찍이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취한 바 없고 수령의 뇌물과 불의한 놈의 재물을 빼앗아 먹었고 혹간 나라의 곳간을 도적하였으나 군부일체이오니 자식이 아비 것 먹었다고 도적이라 하오리까」
길동은 왕 앞에서도 소극적인 변명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밑줄 친 부분을 보자. 나라의 소유물이 백성의 것이라는 생각을 나타낸 것으로서, 나라의 곡식은 곧 백성의 곡식이라는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대담하고 이를 도적질하는 것이 부모의 것을 가져다 먹는 자식의 행위처럼 자연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놀랍다. 물론 여기에는 나라의 소유물은 모두 백성이 생산한 것인데 이의 분배가 잘못되어 있다는 전제가 길동의 말 뒤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왕과 길동의 대결에서 겉으로는 왕이 상위에 있는 것 같으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길동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길동은 병조판서 벼슬을 내리겠노라고 하면서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알고 신장을 부른다. 그러자 신장이 나타나 황금단을 삼층으로 쌓아 길동을 모신다. 또 하직인사를 할 때에 왕에게 엎드려 절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공중에서 내려와 왕을 만나는 방식으로 왕보다 우위에 있음을 암시한다. 더구나 그의 빛나는 눈빛이 왕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하여 눈을 뜨지 않는 것은 홍길동은 빛나는 존재로 높이면서 상대적으로 왕을 낮추는 언동이 아닐 수 없다.
논란이 되는 것은 결말 부분인데 조선을 떠나 율도국을 정복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과정이다. 길동은 왕과의 대결에서 여러 가지로 우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한다. 길동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신분제약과 영웅적 능력 사이의 갈등은 조선조 사회 체제의 전면적인 붕괴와 새로운 사회의 구현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기는 힘들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 길동이 왕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획득한 채 조선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 독자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길동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땅은 중국을 섬기지 않고 수십대를 내려온 나라였다. 또한 길동이 부친의 묘소를 왕릉 같이 꾸미고 「이곳은 조선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은 중국의 지배질서에서도 벗어나고 조선과도 격리된 독자적인 세계임을 밝히는 부분이다.
또 율도국을 빼앗기 위해 왕과 싸우는 과정에서 율도국왕을 자결하게 만들 정도로 철저한 승리를 얻게 된다. 이는 왕의 존재는 어떤 경우에도 부인할 수 없다는 의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동기를 촉발시키게 한다.
홍길동전은 기존 사회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감안해 볼 때 가히 혁명적인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주장 2. 홍길동은 혁명가가 아니다!
홍길동은 흔히 이야기 되듯 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해 헌신하면서 사회개혁을 위해 싸운 영웅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출생문제로서 길동은 천한 출신이지만 사실은 홍판서가 귀한 아들을 얻을 꿈을 꾸고 나서 본부인에게 잠자리를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어쩌다가 천비 춘섬이 눈에 띄어 춘섬의 몸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는 응당 본부인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어쩌다가 천비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는 천한 출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홍길동은 출생부터 일반 민중과는 다르다.
둘째, 출가(出家)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직접적 원인으로는 홍길동에 대한 초란의 음모 때문에 집안에서 살인을 하게 된 홍길동이 그대로 머물러 있기 어려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간접적인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동안 집에서 받은 멸시와 천대를 생각할 수 있다. 떳떳한 대장부로서 출장입상하여 포부를 크게 펴고 싶었으나, 천생이라는 조건 때문에 호부호형도 못하고 출세의 길 또한 막혀서 억울함을 금치 못하고 있는 그였다. 아버지 대감에서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심한 꾸중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보아도 신분제도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남달리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천생이라는 약점 때문에 출세의 기회가 봉쇄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였으나 그것을 사회제도를 개혁함으로써 해결하기보다는 「남달리 뛰어난 자신의 능력」이라는 개인적 조건에 의존하여 「개인의 문제」로서 풀어가려고 하였다. 길동이 「개인 문제」로서 문제를 바라보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셋째, 활빈당(活貧黨:가난한 자를 살리는 무리)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그가 왜 산중도적의 괴수가 되었는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그는 병법과 도술을 익혔으며 또 타고난 성격으로 보아서도 산중에서 조용히 지내지는 못할 것이고, 어쨌든 도둑의 괴수가 되어 스스로 활빈당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리하여 나라 각처에서 갖은 작란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해인사, 함경감영을 비롯한 각읍 수령방백의 부정한 재물을 빼앗아 혹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기도 했다. 부하 도둑에게는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탈취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심은 활빈당 활동에 있던 것이 아니다. 그 역시 봉건 사회의 선비들이 갖는 포부와 야심,- 즉 출세하여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을 가졌으며 천비소생이 아니었다면 활빈당 활동이란 생각도 못할 사람이었다.
「길동이 혹 쌍교를 타고 다니며 수령을 임의로 출척하고 혹 창고를 통과하여 백성을 진휼하며 죄인을 다스리며 옥문을 열고 무죄한 사람을 풀어주며 다니되 각 읍이 그 종적을 모르고 도리여 분주하여 일국이 흉흉한지라」
이렇게 그는 사회의 기본질서를 흔들어 놓고 다녔던 것이다. 본심은 도둑의 괴수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사회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그게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또 이왕 이리된 바에는 도둑의 괴수로서 이름을 남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 욕구불만이 정당하게 충족되지 못하면서 반사회적 행위로나마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활빈당의 성격은 길동 자신의 말을 빌어보면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탈취말고 각읍수령과 방백의 준민고택하는 재물을 노략하여 불쌍한 백성을 구제할지니」하고 있다. 또 활빈당이라는 이름을 보아 의적(義賊)을 자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길동은 편한대로 논리를 여기저기 이중적으로 들이대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길동이 여러 도적을 불러 의논하기를 “우리 비록 녹림에 몸을 부쳐 있으나 다 나라백성이라 세대로 이 나라 수토를 먹으니 만일 위태한 시절을 당하면 마땅히 시색을 무릅쓰고 임금을 도울지니 어찌 병법을 힘쓰지 않으리요?”」
표면상의 문맥이라면 길동의 활빈당은 국가 위난에 대비하여 병법을 익히는 충의의 군단이다. 그러나 위의 논리를 펴서 함경감영의 군기고를 털기 위한 구실을 삼는다. 아전인수격으로 이중논리를 펴는 일은 이 외에도 많다. 여덟 길동으로 변하여 왕 앞에서 하는 말 가운데서도 그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일직이 백성의 재물을 추호도 취한 바 없고 수령의 뇌물이나 불의한 놈의 재물을 앗아 먹었고 혹간 나라 곡식을 도적하였으나 군부일체이오니 자식이 아비 것 먹기로 도적이라 하오리까? 어린 자식 어미 것 먹는 것과 같소이다.」
이를 두고 「나라의 소유물은 모두 백성이 생산한 것인데, 이의 분배가 잘못되어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앞의 군기고 탈취의 경우와 같이 자기 합리화를 위한 구차한 궤변으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분배에 대한 투철한 논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계속 추구했어야 옳은 일인데 그는 나중에 병조판서를 제수받고는 그런 문제에 대해 무심해져 버린다.
해인사의 재물 탈취와 관련하여 불교에 관한 홍길동의 견해를 보면
「불도라 하는 것이 세상을 속이고 백성을 혹하게 하여 갈지 아니하고 백성의 곡식을 취하며, 짜지 아니하고 백성의 의복을 속여, 부모의 발부를 상하여 오랑캐모양을 숭상하며 군부를 버리고 부세를 도망하오니 이에 더한 불의지사 없사오며」
홍길동의 불교에 관한 견해는 숭유척불의 조선선비들의 일반적 견해와 거의 일치한다. 천비소생으로 온갖 천대와 사회적 차별을 당한 홍길동이 하필 불교에 대하여 이렇듯 비판의식을 갖게 되기까지의 경위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홍길동은 내내 유교적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임이 드러나고 있다. 즉
① 봉건적 인륜 관계를 존중하고 있다. 초란을 죽이지 않은 이유도 그렇고 모친이 자기 때문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는 말에 자수해서 잡히는 것도 그렇다.
② 임금을 봉건적으로 받들어 모신다. 난동을 하면서도 「나라가 위태한 일을 만나면 마땅히 시색을 무릅쓰고 임금을 도와야」한다고 한다.
③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를 알 수 있다. 율도국은 중국을 섬기지 않던 나라인데 그를 정복하고 중국을 섬기는 조선에 충성을 표시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중국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홍길동은 기본적으로 유교적 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한 봉건적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항거에는 한계가 있다.
홍길동은 평생소원이 병조판서가 되는 것이었다. 평생소원인 병조판서 벼슬을 받은 홍길동은 왕께 사은하고 돌아가 다시는 난리를 부리지 아니하였다. 왕이 내려준 벼 3000석을 배에 싣고 고국을 떠났다. 길동은 자신의 소원인 신분개선과 출세가 충족되자 더 이상 조선사회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리하여 해외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조선의 상태에 대해서 비판적이기는커녕 오히려 긍정하고 협조하는 태도를 나타냈다.
넷째, 율도국 경영에 대한 문제이다. 조선을 떠난 길동은 해외로 나갔으며, 요괴에게서 구해낸 백룡의 딸과 정·통 두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길동은 자신이 율도국 왕이 되자 백녀는 중전왕비, 정·통녀는 각각 정·숙비로 봉한다. 이로써 적서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시금 차별적 신분제도가 홍길동의 새 왕국에서 구현되게 되었다. 따라서 홍길동은 당초의 자기 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다. 또한 조선사회의 문제점이었던 여러 문제점들이 율도국에서는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그 증거도 없다.
이로서 홍길동이 적서차별에서 비롯된 신분상의 문제를 사회를 개혁함으로써 해결하지 않고 자기 개인 문제로서 이해하고 해결(출세)한 뒤 사회적 개혁에는 무관심해졌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기대했던 것만큼 혁명적인 사회개혁가는 못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전국국어교사모임, 함께여는 국어수업3-2. 재인용
[1단계] 문제조건 확인하기
중딩어야.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홍길동 이야기를 가지고 역사적 인물 평가에 대한 글을 써보도록 하자. 홍길동이 소설 속의 인물이긴 하지만 실제 인물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니. 또한 최근에는 허균이 실제 인물을 모델로 썼다는 학계 주장도 있고 말야. 먼저 그럼 두 주장의 차이를 분석해 볼까.
|
홍길동은 혁명가였다 |
홍길동은 혁명가가 아니다 |
근거 |
(1) 홍길동은 의적이다. (2) 홍길동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과 하늘의 도리에 힘입는 윤리적 정당성까지 획득한다. (3) 나라의 소유물은 모두 백성의 것인데 분배가 잘못됐다. (4) 홍길동은 율도국을 정벌할 때 왕을 죽게 만든다. (5) 기존 사회체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확립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현실로 볼 때 가히 혁명적이었다. |
(1) 홍길동은 양반의 아들로 일반 민중과 다르다. (2) 출가 동기가 사회적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였다. (3) 활빈당 활동은 근본적으로 출세를 위해서였다. (4) 분배를 위해서였다는 논리는 합리화일뿐이고 실제는 철저하게 추구하지 않았다. (5) 홍길동은 유교적 의식을 버리지 못한 봉건적 인물이다. (6) 율도국 왕이 되어 실시한 정책에 개혁적인 면이 부족하다. |
그렇다면 위의 차이를 간단하게 줄이고 우리 중딩어의 생각을 쓰면 되겠다.
[2단계] 문제 설정 / 주장 설정
그럼 중딩어는 어떤 쪽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싶니.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먼저 왜 우리가 홍길동이 혁명가였는지 그렇게 볼 수 없는지를 따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 ‘혁명’이란 말은 기존의 잘못된 체제를 확 바꿀 때 쓰는 말인데 홍길동의 생각이나 행적이 과연 그러했는지 따지면서 우리는 그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서 역사 감각을 키우는 것 아니겠니. 아무튼 홍길동의 행적이 혁명적이냐 아니냐 문제 된 것 자체가 홍길동전의 혁신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혁명성을 부정하느냐 긍정하느냐 모두 왜 혁명이 필요한지를 공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긍정 관점 : 홍길동은 혁명가이다.
부정 관점 : 홍길동은 혁명가로 볼 수 없다.
제3의 관점 : 그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는 혁명가로 볼 수 있지만 여러 한계가 있어 완전한 혁명가로 보기 어렵다.
[3단계] 논증 분석
우리가 다 잘 알다시피 홍길동은 서자였다. 서자는 지배 계급이면서 그 역할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첩을 마음대로 얻게 해놓고 그 자식을 인정하지 않은 양반들의 이중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홍길동이 지배 계급으로서의 특권을 못 누리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혁명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서자로서의 설움을 민중의 설움으로 옮겨올 때 진정한 혁명가로 자리잡을 수 있다.
그를 혁명가로 보는 관점은 일단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과 저항에서 찾고 있다. 곧 적서차별, 관리부패, 빈민 문제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저항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나라의 곳간을 도적하였으나 군부일체이오니 자식이 아비 것 먹었다고 도적이라 하오리까’라는 구절에서 재물에 대한 분배 정신까지 볼 수 있으며 왕과의 대결에서 왕 위에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율도국 정벌 때는 왕을 죽게까지 하니 이것이 곧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이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반론은 그가 서자로서의 차별에 대한 불만에서 출가한 것이지 민중을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활빈당이 되어 의적행위를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출세하려는 야심에서 한 것이라는 것이다. 곧 기존 사회질서에 참여하고자 하는 변칙 행위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율도국 왕이 되어서도 왕비와 첩을 두는 등 기존 왕과 비슷한 행위를 보여주고 있어 봉건 질서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사회 문제 해결에서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한 해결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비상한 능력 곧 도술, 둔갑술 따위의 초인적 능력에 의해 해결하므로 진정한 혁명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홍길동은 혁명가로 보는 사람들도 인정하듯이 반론과 같이 완전하게 기존 질서를 뒤엎는 혁명가로서의 모습은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반론에서 지적한 대로 홍길동을 그렸다면 아마 홍길동전은 온전히 전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당시 사회상황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완전한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로 보면 혁명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반론 쪽에서는 활빈당이라는 의적으로서의 행위조차도 의심하고 있지만 의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존 질서를 전제로 한 말이다. 의적은 어쨌거나 도적이다. 다시 말해 좋은 도적이라는 뜻이고 결국은 그 당시 지배 계층은 도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실상 따져보면 그 당시 지배층은 더 악날한 도적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활빈당이라는 큰 의적 단체를 만든 것 자체가 기존 질서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었다. 다만 개인의 타고난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그가 양반보다 더 훌륭한 재주를 타고 났는데도 전혀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소설적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민중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효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봉건제도에 대한 철저한 저항이 없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나 일본에 당한 억압이 자체적으로 철저한 개혁을 이루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면 우리가 홍길동을 오랜 세월 읽어온 보람은 무엇인가. 홍길동이 진정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우리 민중들도 단지 홍길동을 소설 속의 허구적 인물로 보지 않고 그 길을 따랐다면 우리의 역사는 확 바뀌었을 터인데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아엠에프 시대에 우리는 홍길동전을 좀더 진지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뭔가 개혁을 해야 아이엠에프의 고통을 빨리 벗어날 수 있을 터인데 수구보수 세력의 반항이 완강해 제대로 된 개혁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국민 모두가 홍길동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4단계] 틀짜기
* 이제 중딩어들이 직접 개요를 짜 보자.
[예시 개요]
1. 문제제기
홍길동은 과연 혁명가였는가
2. 혁명가의 관점과 근거
3. 혁명가가 아니라는 관점과 근거
4. 두 주장에 대한 평가
5. 혁명가로 볼 수밖에 없는 점
[5단계] 쓰기
[교사가 쓴 예시 답안]
홍길동은 서자였지만 서자로서의 차별과 억압을 참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러한 모순된 현실을 타파하고 추구한 변혁의 길이 진정 모든 백성을 위한 혁명이었는가 아닌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혁명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혁명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글은 몇 가지 근거를 그가 사회개혁을 시도한 혁명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살리는 활빈당이라는 의적이 되어 불쌍한 백성들을 도왔다. 둘째는 탐관오리와 같은 부패한 지배층을 응징하였다. 셋째는 나라의 곡식은 백성의 곡식이라는 평등 사상까지 보이고 율도국을 정벌할 때는 왕을 죽게한다. 이런 면은 그 당시로 보면 혁명적인 생각이요 행위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글은 그가 비록 서자였지만 결국 양반의 아들이어서 한계가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출가 동기나 활빈당으로서의 활동 또한 근본적으로 출세를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분배 논리도 철저히 추구하지 않아 합리화에 지나지 않았고 율도국 왕이 되어 실시한 정책도 미흡해 그는 유교적 의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봉건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두 주장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일단 프랑스 혁명과 같은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엎는 혁명사상을 지닌 혁명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적이라든가 탐관오리 응징 등은 혁명가가 아니더라도 가능한 행위이고 문제는 유교적 봉건 질서를 얼마나 부정했고 그를 위해 노력했느냐인데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가는 생각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은 옛날 사람들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의 목을 자르려고 노력한 사람은 거의 없다.
홍길동은 그런 측면에서 완전한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맥락으로 보면 기존 질서에 지속적으로 저항한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아 혁명가가 아니라고 하기보다는 그 당시 관점에서 혁명가로 보는 것이 그의 개혁 정신을 뒤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만일 홍길동전이 완전한 혁명의 길을 담았다면 우리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보강 문제]
* 다음은 홍길동전 가운데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부분이다. 홍길동의 살인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쓰라.
이때의 길동은 나이 십일세라.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절륜하며, 시서백가어를 무불통지하나, 대감 분부에 바깥 출입을 막으시매, 홀로 별당에 처하여 손오의 병서를 통리하여 귀신도 측량치 못하는 술법이며 천지조화를 품어 풍운을 임의로 부리며, 육정육갑이 신장을 부려 신출귀몰지술을 통달하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더라. 이날 밤 삼경이 된 후에 장차 서안을 물리치고 취침하려 하더니, 문득 창 밖에서 까마귀 세 번 울고 서로 날아가거늘, 마음에 놀래 해혹하니, “까마귀 세 번 ‘객자와 객자와’ 하고 서로 날아가니 분명 자객이 오는지라. 어떤 사람이 나를 해코자 하는고? 암커나 방신지계를 하리라.” 하고, 방중에 팔진을 치고 각각 방위를 바꾸어, 남방의 이허중은 북방의 감중련에 옮기고, 동방 진하련은 서방 태상절에 옮기고, 건방의 건삼련은 손방 손하절에 옮기고, 곤방의 곤삼절은 간방 간상련에 옮겨, 그 가운데 풍운을 넣어 조화무궁케 벌리고 때를 기다리니라.
이때에 특자 비수를 들고 길동 거처하는 별당에 가서 몸을 숨기고 그 잠들기를 기다리더니, 난데없는 까마귀 창 밖에 와 울고 가거늘 마음에 크게 의심하여 왈,
“이 짐승이 무슨 앎이 있어 천기를 누설하는고? 길동은 실로 범상한 사람이 아니로다. 필연 타일에 크게 쓰리라.”
하고, 돌아가고자 하다가 은자의 욕심이 몸을 생각지 못하여 이시한 후에 몸을 날려 방중에 들어가니, 길동은 간 데 없고, 일진광풍이 일어나 뇌성벽력이 천지 진동하며 운무 자욱하여 동서를 분별치 못하며 좌우를 살펴보니 천봉만학이 중중첩첩하고, 대해 창일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는지라. 특자 내념에 헤아리되, “내 아까 분명 방중에 들어왔거늘 산은 어인 산이며, 물은 어인 물인고?” 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더니, 문득 옥적소리 들리거늘, 살펴보니 청의동자 백학을 타고 공중에 다니며 불러 왈,
“너는 어떠한 사람이관대 이 깊은 밤에 비수를 들고 누구를 해코자 하느냐?”
특자 대왈,
“네 분명 길동이로다. 나는 너의 부형의 명령을 받아 너를 취하러 왔노라.”
하고, 비수를 들어 던지니, 문득 길동은 간 데 없고, 음풍이 대작하고 벽력이 진동하며, 중천에 살기 뿐이로다. 중심에 대겁하여 칼을 찾으며 왈,
“내 남의 재물을 욕심하다가 사지에 빠졌으니 수원수구하리요.”
하며, 길게 탄식하더니, 문득 이윽고 길동이 비수를 들고 공중에서 외쳐 왈,
“필부는 들으라. 네 재물을 탐하여 무죄한 인명을 살해코자 하니 이제 너를 살려두면 일후에 무죄한 사람이 허다히 상할지라. 어찌 살려 보내리요.”
한대, 특자 애걸 왈,
“과연 소인의 죄 아니오라 공잣댁 초낭자의 소위오니, 바라옵건대 가련한 인명을 구제하셔서 일후에 개과하게 하옵소서.”
길동이 더욱 분을 이기지 못하여 왈,
“너의 약관이 하늘에 사무쳐 오늘날 나의 손을 빌어 악한 유를 없애게 함이라.”
하고, 언파에 특자의 목을 쳐버리고, 신장을 호령하여 동대문 밖의 상녀를 잡아다가 수죄하여 왈,
“네 요망한 년으로 재상가에 출입하며 인명을 상해하니 네 죄를 네 아느냐?”
관상녀 제 집에서 자다가 풍운에 쌓이어 호호탕탕이 아무 데로 가는 줄 모르더니, 문득 길동의 꾸짖는 소리를 듣고 애걸 왈,
“이는 다 소녀의 죄가 아니오라 초낭자의 가르침이오니 바라건대 인후하신 마음에 죄를 관서하옵소서.”
하거늘, 길동이 가로되,
“초낭자는 나의 의모라 의논치 못하려니와 너같은 악종을 내 어찌 살려 두리요. 후 사람을 징계하리라.”
하고, 칼을 들어 머리를 베어 특자의 주검한테 던지고, 분한 마음을 것잡지 못하여 바로 대감전에 나아가 이 변괴를 아뢰고 초낭을 베려하다가, 홀연 생각 왈, “영인부아언정 무아부인이라.” 하고,또 “내 일시 분으로 어찌 인륜을 끊으리요.” 하고, 바로 대감 침소에 나아가 정하에 엎드렸더니, 이때 대감이 잠을 깨어 문 밖에 인적 있음을 괴히 여겨 창을 열고 보시니, 길동이 정하에 엎드렸거늘, 분부 왈,
“이제 밤이 이미 깊었거늘 네 어찌 자지 아니하고 무슨 연고로 이러하느냐?”
길동이 체읍 대왈,
“가내에 흉한 변이 있사와 목숨을 도망하여 나가오니 대감전에 하직차로 왔나이다.”
대감이 상량하시되, “필연 무슨 곡절이 있도다.” 하시고 가로되,
“무슨 일인지 날이 새면 알려니와 급히 돌아가 자고 분부를 기다리라.”
하시니, 길동이 복지 주왈,
“소인이 이제로 집을 떠나가오니 대감 체후만복하옵소서. 소인이 다시 뵈올 기약이 망연하오이다.”
◉토론 수업을 위한 자료--홍길동은 악인인가 희생자인가(허병두, 1996, 문제는 창조적 사고다, 한겨레신문사, 240-245쪽)
□비판의 입장: ‘홍길동은 악인이다.’
홍길동은 악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살인자이기 때문입니다. (* 토론시 발언은 ‘주장과 근거’의 형태로 합리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곡산모 초란의 흉계로 말미암아 위기에 빠졌을 때를,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탁월했던 능력을 충분히 과시하며 자신을 해치러 혼 자객 특재를 죽입니다. 자, 홍길동, 그는 특재를 꼭 죽여야 했을 까요? (*설의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강조한다. 적절한 표현 기교는 효과적이다.)
그는 특재를 죽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재물을 탐하여 사람 죽임을 좋이 여기니, 너 같은 무도한 놈은 죽여 후환을 없이 하리라.”(*근거는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특재를 죽이는 것이 앞으로 자신에게 해될 것을 막는 길이라는 홍길동의 말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홍길동은 이미 특재를 두려워할 아무런 사실상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는 특재가 올 것을 이미 예견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으며, 둔갑법은 물론 각종 병법과 도술에 능한 초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가 특재를 죽이면서 후환을 없앤다는 말을 하는 것은 교묘한 변명일 뿐입니다. 반면에 특재는 홍길동을 죽이려 하기 전 길동에게 자신을 너무 원망하지 말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간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토론의 초점을 특재에게로 옮기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특재가 나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재물을 탐하여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누가 뭐라도 용서하기 어려운 큰 죄입니다.(*예견되는 상대의 주장을 미리 반박하는 것도 유용한 토론 방법입니다.) 그러나 특재가 죄인이라고 해서 그를 마구 죽여도 좋다는 것은 정당한 행동이 못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길동의 행위는 자신의 분노를 못 이겨 그저 파리 죽이듯 인명을 살해한 것에 불과합니다. 당시에도 법이 있었을 테고, 저지른 죄에 마땅한 벌을 받게 했어야 옳음에도, 길동은 법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의 감정대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보편적인 기준을 토대로 비판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강하다.)
많은 사람들이 길동을 무슨 의적이나 영웅처럼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약간의 칭송할 점이 있다고 해서 그를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감정에 못 이겨 관상녀를 그 날밤으로 잡아죽이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홍길동은 ‘분기를 참지 못하여 또 초란을 죽이고자 하다가, 상공이 사랑하심을 깨닫고’ 초란을 죽이려다가 포기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죽이려면 초란을 구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여러 가지 경우들을 상정하며 말하면 좀더 설득력이 강해진다.) 문제의 주모자는 초란이니 초란을 죽여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겨우 돈 받고 행하는 하수인에 불과한 특재나 관상녀를 그 자리에서 죽인 다음, 자신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죽일 것을 포기하는 길동의 행위는 그가 얼마나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사람을 죽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홍길동은 다시 평가되어야 마땅합니다. 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그가 서자로 차별 받는 것을 한탄했으면서도 자신이 율도국의 왕이 되었을 때는 주저 없이 몇 명의 후궁들을 거느려 자식, 즉 서자를 둔 이율배반은 문제삼지 않겠습니다.(*이미 제시한 것 말고도 이유가 더 많이 있음을 암시하며 상대의 반박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는 법이 아닌,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사람을 죽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벌써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악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영웅이나 의적으로 칭송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린 나이에 사람을 무차별로 죽인 살인마이기 때문입니다.(*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제시하며 끝맺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옹호의 입장: ‘홍길동은 희생자이다.’
홍길동을 악인이라고 하신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아주 예리한 지적에 박수를 보냅니다.(*상대방을 토론의 맞수로 충분히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라면 역시 그는 선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결론입니다.(*자신의 주장을 처음부터 미리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추선, 홍길동이 특재를 죽인 것은 정당방위일 뿐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부득이하게 방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행동을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벌 주고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홍길동이 특재와 관상녀를 죽인 것은 초란과 차별하여 죽였다고 해서 악인이라고 주장하셨는데 이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상대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반박은 토론을 할 때 매우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죽음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꽤 나기 때문입니다. 즉, 특재, 관상녀의 죽음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꽤 나기 때문입니다. 즉 특재, 관상녀를 차례로 죽인 다음 곡산모 초란을 죽이려 하다가 그만 둔 것은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묻습니다. 솔직하게, 아주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길동의 입장이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죽이러 혼자를 그냥 가만 내버려 둘 수가 있겠습니까? 무조건 인명이 중요하니까 살려주마고 자비를 베푸시겠습니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눈 앞에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장말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목숨의 달린 싸움을 치러 감정이 격해질 대로 격해져 있는 상태에서 과연 그럴 수 있겠습니까?(*상대방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비논리적이긴 하지만 한 방법이다.)
홍길동, 그는 어린아이입니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남다른 능력을 가졌지만 홍길동은 분명 이름 그대로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아이에 불과한 그에게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제심이 유별나게 강한 성인에게서나 나로 자기 절제를 요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서자라는 굴레를 쓰고 온갖 서러움을 경험한 것은 어린 나이의 길동에게 너무나 힘들었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길동이 오죽 힘들었겠습니까. 오죽 마음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자기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을 당한다면 성인이라도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큰일을 당한 길동에게는 더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법률은 미성년자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년과는 다른 미숙한 상태, 나이가 어림에서 오는 미숙한 상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법률에서는 어떤 행위에 대해 성년과 미성년을 차별하여 판단한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길동은 성인입니까, 미성년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미성년자입니다.(*법과 같은 객관적인 기준에 입각하여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면 설득력이 강하다.) 이름도 아이 동(童)자를 쓰는 아이일 뿐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길동은 재수 있는 아이, 럭키 보이(lucky boy) 아닙니까?(*쓸데없는 요설은 토론의 실패를 자초한다.)
따라서 그의 행동을 성인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잘못된 발상입니다. 그가 특재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성년자인 그를 살인자로 모는 것은 잘못입니다.
실제로 그는 그후 그날 밤과 같이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서자 제도의 희생자일 뿐 살인자가 아닙니다. 살인자를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 민족 대다수가 의적과 영웅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까? 선악의 판단은 그 사회의 사람들이 내리는 것입니까. 단지 누구를 죽였다는 사리만 가지고 도덕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비논리적인 부분이다)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건대 그는 악인이 아닙니다. 그는 희생자일 따름입니다.
[전기] 고난 시대의 삶 : 신채호에 대한 청문회
[논제] 다음 가상 인물 청문회를 읽고 신채호의 생각 가운데 밑줄 그은 부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사회자: 오늘은 일제 시대에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많은 논술로 역사 연구에 일생을 바쳤던 단재 신채호 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청문회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 앉으신 학생들은 엄숙한 자세로 질문해 주시고, 단재께서는 성실하게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증인 나와 주십시오. 오른 손을 드시고 선서하여 주십시오.
단재 : 나는 이 청문회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합니다.
사회자 : 예. 선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준비하신 질문을 해 주시는데, 질문의 내용을 명확하 게 말씀해 주시고, 다른 분들은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해 주십시오.
학생 1 : 예. 저는 단재님의 전기를 읽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O O O 입니다. 단재 선생님께서는 어린 시절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고 읽었는데, 부모님을 원망해 보신 적은 없었습니까?
단재 : 한 때 원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너무나 충격이 컸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 잘 보살펴 주시고, 힘이 돼 주셔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자 : 다른 학생 질문하여 주십시오.
학생 2 : 선생님께서는 왜 중국으로 망명을 했습니까 ?
단재 : 1910 년 일본이 우리 민족의 모든 살 권리를 빼앗고, 너무 간섭하였기 때문에 독립 운동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간 것입니다.
사회자 : 다른 학생 질문하여 주십시오.
학생 3 : 선생님께서는 서서 세수를 하였다고 했는데, 왜 그랬습니까 ?
단재 : 그것은 처음부터 나의 버릇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아침에 일본 놈이 우리집 앞을 지나갈 때 내가 세수를 하려고 마당에 물을 떠 놓았는데, 세수를 하려고 몸을 굽혔으나, 갑자기 일본놈에게 절을 하려고 머리를 숙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서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이 일을 본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일을 말해 소문이 그렇게 난 것 같습니다.
사회자 : 다른 학생 질문하여 주십시오.
학생 4 : 중국 망명 후에 한 일은 무엇입니까 ?
단재 : 우선 중국의 옛고구려 땅을 둘러보고, 광개토 대왕비를 둘러 보았습니다. 많이 훼손되었더군요. 그리고, 많은 책을 읽고, 우리 민족의 살 길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사회자 : 다른 학생 질문하여 주십시오.
학생 5 : 선생께서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인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단재 : 민족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 놓고, 적을 죽이는 것은 의롭고도 어려운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으로 민족 독립을 위해 계획적으로 군사력을 기르고, 무장을 통해 민족 광복을 되찾을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6 : 그렇다면, 당신은 중국에서 다른 열사들과 같이, 일본놈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
단재 : 단지 몇 명을 죽이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광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회자 : 다른 학생 질문하여 주십시오.
학생 7 : 선생이 쓴 논술에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에게 했던 일을 적어 놓았는데, 그것이 모두 사실입니까 ?
단재 : 사실입니다. 정말 잔인하게 죽인 사건이 많은데, 이것을 올바로 알리는 신문이 별로 없고 해서 ..... 반드시 온 민족이 분노하여 막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 8 : 그렇다면, 선생은 일본을 어떻게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단재 : 독립 운동을 위한 자본을 준비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본을 물리치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다른 학생 질문하여 주십시오.
학생 9 : 선생은 3 . 1 운동에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아는데, 3. 1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단재 : 민족 모두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광복을 얻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본 처럼 잔악한 놈들은 그냥 독립을 외치는 것 만으로는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기를 갖고 모두 나서야 합니다.
학생 10 : 선생님께서 지금의 청소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
단재 : 민족의 앞날을 책임지고 나가는 젊은이가 되길 바라고, 일본 문화에 물들어 제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자 : 질문에 잘 답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으로써 청문회를 마치겠습니다. - 전국국어교사모임, 함께여는 국어수업 1-1 지도안에서
중딩어야. 학생들은 보통 인물 청문회라고 하면 잘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와 같이 좋은 사람도 할 수 있단다. 우리 중딩어는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는 신채호 전기를 읽어보았겠지.
우리 학생들은 보통 외고집의 상징으로 보통 기억하고 있는데 그렇게만 이해하면 안되는 분이시지. 일단 우리가 그를 외고집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싫어하는 친일파의 기록에 이해서다. 춘원 이광수는 36년 <조광(朝光)> 이라는 잡지에 적기를 “대한 매일 신보 논설을 담당했던 단재는 외모가 초라하고 보잘것없으나, 이상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 바닥, 소매와 바지 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면, ‘그러면 어때요’ 라며 여전했다. 남 말을 듣고 소신을 고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웃고 이야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고 했기 때문이다.
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이런 에피소드 위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신채호의 인물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쓴 이광수와 같은 사람과 나라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다. 이들은 먼저 산업을 발전시키고 인재를 키운 다음 독립무장투쟁을 하자는 생각이었으나 단재는 오히려 이런 방법이 조선인민 해방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 독립군을 빨리 키워 무장독립투쟁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실천에 옮기던 중 옥사하고 만 것이지.
신채호의 그런 강인한 행동은 그의 철저했던 역사의식에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는데 특히 ‘통감’ 따위의 역사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버리고서는 민족이 없고, 민족을 버리고서는 역사가 없다.”고까지 했다.
그는 역사가이면서 문학가이기도 한데 그 둘은 그에게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이를테면 을지문덕, 이순신 등의 역사적 영웅을 소재로 한 전기를 쓴 것은 역사의식과 민족독립에 대한 열정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기보다 더 유명한 것은 그가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에 발표한 논설이었지. 또한 독립협회 등에서 애국문화운동을 하면서 한문을 폐지하고 한글을 전용하는 것이 민족운동을 하거나 나라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단다.
단재가 만주로 망명하게 된 것은 1910년 경술국치로 주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 국내에서 활동하기 힘들어지자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 회원등과 함께 망명하게 된 것이다. 망명 후에 그는 ‘민족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기를 가지고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주장하고 ‘광복회’와 ‘동창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우는 데 온몸을 바쳤다.
그러고 보니까 단재는 학자로서 문필가로서, 또 무장독립투쟁을 이끈 실용적인 실천가로서 독립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총칼보다 더 매서웠던 그의 논설을 보자.
“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지푸라기같이 보아 을사(乙巳) 이후에 십삼 도(道)의 의병 나던 각 지방에 일본이 한 폭행도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최근 3. 1 운동 이후에 국내 모든 지역과 북간도, 서간도, 노령 연해주 각곳에 사는 우리 민족의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고, 산 사람을 묻고, 몸을 두 쪽 내어 죽이는 등, 참혹한 수단으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을 산송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상의 사실을 보아, 일본 강도 정치가 우리 민족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혁명 수단으로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일임을 선언하노라.” (조선 혁명 선언 중에서)
자 이제 밑줄 그은 신채호의 생각의 참뜻을 알 수 있겠지. 우리 중딩어어는 어떠니. 신채호에 생각에 동의하니.
김다온 : 동의합니다. 안중근이 이또오 히로부미를 죽였다고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한가운 : 동의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이 분명 있습니다.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많은 한국인을 비롯하여 중국인들에게까지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김다온 :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안의사가 좀더 조직적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추진했다면 더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겁니다.
한가운 : 아닙니다. 효과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안의사의 쾌거는 무장독립군의 몇 개 사단의 업적과 맘먹는 것입니다.
현나라 : 두 분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나는 동의하지도 안하지도 않습니다. 안중근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신채호 같은 사람도 필요한 것 아닙니까.
한가운 : 그런 어중간한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쪽이 좋은지를 분명히 하십시오.
현나라 : 어중간하다니요. 어차피 독립운동은 다양한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안의사와 같은 독립운동도 필요하고 신채호같은 독립운동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가운 : 다양한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 방법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현나라 : 그러니까 그 효율성이라는 것이 수학처럼 이것보다 저것 하는 식으로 딱히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김다운 : 아무튼 저항 운동은 조직이 중요합니다. 이차세계 대전 당시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보십시오. 프랑스인 누군가가 나찌 대장 중의 누구 하나를 죽이는 데만 매달렸다면 그런 자랑스런 전통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요.
한가운 : 차라리 누군가가 히틀러를 죽였다면 그렇게 힘든 운동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현나라 : 그러니까 두 방법 모두 필요하다니까요. 누군가가 히틀러도 죽이고 또 조직적인 레지스탕스 운동도 하고 하면 효과와 가치가 몇 배 느는 것 아닙니까.
이은별 : 내가 토론을 가만히 지켜보니까 너무 자기 주장만을 내세워 토론이 겉도는 것 같습니다. 현나라님 생각은 지금은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당시로 보면 어느 방법이 좋은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야 할 문제로 무조건 다양한 게 좋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세 분 다 안중근식 방법과 신채호식 방법 모두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모두 : 네.
이은별 : 그리고 세 분 모두 지나친 것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나 이봉창 의사의 개인적 테러는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이끄는 산하 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김다온 : 네, 그렇군요. 그렇다 하더라도 단재 선생은 너무 우직해 안타까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1928년 위조지폐를 찍어 폭탄을 제조하기 위한 자금조달을 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아 7년쯤 감옥에서 있었는데 이 때 중병에 걸려 감옥을 나올 수도 있었으나 그는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감옥 속에서 자연 그대로 죽어감이 소망이라고 하여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너무 숭고한 죽음이긴 하지만 전략상 후퇴라는 말도 있듯이 일단 나왔다가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싸웠으면 더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한가운 : 그런 맥락이라면 안중근 의사와 통하는 데가 있는데요. 안의사도 먼 훗날을 위해 죽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리고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이또오 히로부미를 죽인 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당당하게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도망가서 또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지라도 당당한 길을 택해 동양 식민지국가들의 귀감이 되었고 심지어 일제국주의자들까지도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나머지 : 그렇군요.
그래 각자가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잘 얘기해 주었구나. 내가 굳이 정리해 주지 않아도 자기 생각과 남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잘 알았겠지. 물론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도 더 잘 알았겠구.
그렇다면 각자의 생각을 한 편의 논설문으로 정리해오기 바란다. 통신을 하는 학생은 되는대로 전자우편으로 보내기 바란다. 네 개 통신망 ‘또물또’나 하이텔 ‘songna’로 보내면 된다.
지은이 소개
송재희 : 문화평론가, 교육평론가, 작가(개같은 날의 오후 원작자), 저서와 논문: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 외 다수
김슬옹 : 연세대/목원대 강사, 한겨레 문화센터 독서논술 지도자 과정 대표강사. 저서와 논문 : 발가벗은 언어는 눈부시다 외 다수
블로그의 정보
국어독서창고
처사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