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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일상의 발견"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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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일상의 발견"

 

"일상의 발견"은 표지에서부터 최근 잇단 베스트셀러를 내었던 출판사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책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갈색 제본에 흰색 글씨, 게다가 코팅이 안된 거친 표지. 서가에 다른 󰡐경쟁 도서󰡑들과 함께 꽂혀 있으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거기다가 맥도날드 봉투 수준의 종이 재질에다 겉면에는 친절하게도 빨간 글씨로 이 책의 저자가 철학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이 정도만으로도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아 수필코너를 찾은 독자들은 이 책을 사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출판사는 여기서도 한참을 더 나간다. 무거워 보이는 철학 단상들을 한두 장 남짓 짧은 분량의 글들 속에 몰아넣는 󰡐획기적인󰡑 시도를 한 것이다. 이 지경이 되면 유일한 구매층이라고 할 수 있을 철학도들의 구입 의지도 충분히 꺾어 버릴 수 있다. 철학은 정치(精緻)한 논리를 생명으로 한다. 때문에 의미 있는 철학이론은 간명하기 어렵다. 논증하고 설명해야 할 것이 많아서 길어지기 때문이다. 짧은 철학 글, 별 것 없으리라는 선입견을 전공자들에게 심어주기 충분하다. 결국 󰡐정석󰡑대로라면 이 책을 돈 주고 사볼 사람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푸른숲󰡑이 잇단 베스트셀러로 고무되어 󰡐간이 부어오르지 않았다면󰡑 이처럼 황당한 출판은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한 패러다임을 뒤집는 위대한 작품은 예견된 실패에도 거꾸로 성공을 의심치 않는 소수의 󰡐간이 부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결과적으로 출판사의 무모함은 패러다임을 뒤집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일상의 발견"은 매우 완성도가 높은 책이다. 어설퍼 보이는 앞서의 요소들은 하나로 합쳐지면서 묘한 매력을 풍긴다. 제본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신간들 사이에서 이 책의 소박함은 오히려 은은하게 뒤통수를 붙잡는 데가 있다. 자신감이 없었다면 결코 시도할 수 없었을, 단순 질박함이 󰡐일상󰡑을 소재로 한 이 책의 메시지를 오히려 강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이다.

 

시중에는 일반인들을 위한 철학책들이 매우 많다. 거개는 대중의 지적 열등감을 긁으면서 철학개론을 󰡐알기 쉽게󰡑 해설하거나 철학사를 간편하게 요약 제시하는 류 들이다. 이런 책들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는 점을 논외로 하고서라도 일단 책을 사본 사람을 철학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한다는 특성이 있다.

 

"일상의 발견"은 이런 책들과는 아주 다르다.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일상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는 인생훈(人生訓)도 없고 독자가 어려운 논증을 좇아가기 위해 머리 쓸 일도 없다.

 

김용석은 뛰어나고도 가벼운 붓끝으로 서치라이트같이 일상을 하나하나 조명(照明) 한다. 그리고 드러난 일상은 하나같이 깊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화두(話頭)로 탈바꿈되어 독자의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철학의 유용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는데 있다. 이렇게 볼 때 김용석은 참으로 뛰어난 철학자이다. 머리 아픈 긴 논증 없이도 사람들을 반성하게 하고 일상을 깊게 곱씹어 보게 하기 때문이다. 21세기 대중을 위한 철학서의 전범(典範)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일상의 발견"을 권하고 싶을 정도다.

 

김용석의 눈에 일상의 사소해 보이는 모든 것들은 세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들이다. 그는 언제나 닫혀있는 회전문을 통해 열림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폐쇄를 추구하는 문화 경향을 분석해 내기도 하고, 󰡐()가위󰡑를 통하여 위험과 절차의 단순성을 강요하는 문명의 야만성을 꼬집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김용석은 20세기에 교육 받은 철학자답게 일상에서 쓰는 말들 속에서 철학적 사색거리를 찾아낸다. 󰡐뜨다󰡑󰡐날다󰡑의 대비를 통해, 온통 󰡐튀고󰡑 󰡐뜨는 데󰡑 만 집중한 나머지 부단히 상승과 추락만을 반복할 뿐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화를 비판하고, 󰡐안티(Anti-)'는 반드시 대상이 되는 명사가 있어야만 단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반대는 상대의 제거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서기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일상에서 다양한 사색거리를 찾는 짧은 글들 속에서도 김용석은 철학자답게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일상의 발견"의 주요 테마는 󰡐다름과 다양성에 관한 존중󰡑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이것은 섬세한 배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짧은 단상 수십 편을 모은 책이다 보니 게 중에는 익지 않은 과일을 성급하게 딴 듯한 완성도가 높지 않은 글들도 눈에 띈다. 그리고 󰡒내가 외국에 있을 때는 이랬는데, 한국은 아직도...󰡓 식의 70년대 국비유학생 같은 말투와 비교 설정은 OECD 가입국 국민인 우리 독자들에게 상당히 거북하게 느껴진다. 그가 공부했던 이탈리아가 우리보다 문명도나 도덕성에 있어 별로 높지 않은 국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발견"의 가치가 이러한 면모 때문에 완전히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해 사색하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 가는 것, 이 책은 일상에서 철학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더러, 독자로 하여금 철학할 수 있는 화두(話頭)들을 자연스럽게 던져주기까지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대중을 위한 철학서󰡑이라고 할 만하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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