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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주제별 특강 2 - 삶과 가치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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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특강 2 - 삶과 가치

 

아래의 글은 무위당(無爲堂) 장일순의 창작자세에 대한 평이다. 무위당이 지닌 예술창작의 기본자세를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대중문화의 창작 자세를 비판적으로 논술해 보라.

 

무위당(장일순)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아가면서 글씨를 배웠다. 밖에 나가 무작정 뛰노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던 5, 6세 어린 시절에 붓을 잡고 신문지 전체를 먹으로 가득 차도록 획을 긋고 또 그어야 했던 호된 훈련과정이 훗날 그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가는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붓을 잡는 것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다.

 

할아버지 여운 장경호(旅雲 張慶浩)는 그 자신이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당시 관동지방의 이름난 서화가인 차강 박기정(此江 朴基正)과 절친한 사이였다. 차강은 오늘날에도 그 이름이 잊혀진 채 그저 강릉의 묵객(墨客)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당대의 문사이자 지사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의병에 참여했고 끝내 서화협회’(書畵協會)에조차 참여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뜻을 지켰던 분이다. 무위당의 서화는 이러한 차강의 훈도 아래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위당이 처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낙관을 할 때 사용한 칭호가 청강(淸江)이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맑은 강물이란 얼마나 뜻깊고 아름다운가 하는 마음에서 붙인 자호(自號)라 한다. 힘겹게 살아가면서 맑은 강을 만나면 거기서 잠시 앉아 쉬어보자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주로 원주에서, 한번은 춘천에서 열었으니 모두 강원도를 떠난 것이 아니다. 선생은 원주 봉산동 키 큰 측백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 뜻을 같이하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선물로 주곤 하였다. 거기에 반드시 그 인물이 지펴야 할 경구와 또는 시구를 적어주곤 하였다.

 

깊은 골 난초는 사람 없다하여 그 향기를 그치지 않는다.

넓고 활달한 이 나라 이 강산

맑게 비운 마음

 

그리고 그림을 받는 사람의 이름 뒤에는 아형(雅兄), 학형(學兄)이라는 표현보다는 도반(道伴)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벗이라는 뜻이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 자세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80년대 말 수 많은 재야단체들이 기금마련전을 너나없이 열다시피 했을 때마다 무위당은 한번도 출품을 거절한 일 없이, 오히려 부탁한 것보다도 더 많은 작품을 보내주곤 했다. 그리고는 사례비를 받은 일이 없다. 그때 그가 필자에게 했던 말은 만약 이 그림을 그리면 얼마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그 날로 나는 붓을 꺾을 것이라고 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은 한살림운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무위당의 이런 창작자세를 나는 무한대로 존경한다. 지금 세상에 이런 분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그 옛날이라고 몇이나 있었겠는가 싶다. 청나라 문인 정판교의 다음의 구절은 무위당의 창작자세와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세상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쓰이고자 함이지, 그것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즐기고자 함이 아니다.”

 

- 유홍준,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중에서

 

 

<유의 사항>

1. 논제와 성명을 쓰지 말 것.

2. 빈칸을 포함하여 자수는 1,600자 내외(±200)를 엄격히 준수할 것.

3. 제시문의 문장을 인용할 때는 인용부호(따옴표)를 붙여서 인용할 것.

 

 

【논제 분석】

 

1. 출제 의도를 파악해 보자.

 

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이며,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의 차이가 점차 소멸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엘리트 문화의 후퇴와 함께 도래한 대중문화의 과잉은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모두 지닌 양상을 띠고 있다. 문화의 대중화로 인해 일상적인 시민들 또한 문화적 소양을 넓히게 되었고 전반적인 삶의 질 또한 몰라보게 증진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술창작의 자세와 관련하여서만 보아도, 대중문화는 어떤 창작의 자세를 지니기보다 시장에서의 상품성을 제 일의 목표로 하고 있으며, 문화적 창작을 통한 동시대인들의 삶과의 대화에는 아무래도 관심이 떨어진다. 문제의 출제자는 바로 이런 문화창작의 현실 속에서,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무위당의 창작 자세를 통해 현대의 대중문화 속의 창작의 태도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2. 논제를 정리해 보자.

 

먼저 무위당의 창작 자세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제시문을 통해 간략히 정리한다. 그리고 현재 일반화된 대중문화에서의 창작과정과 상업성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하며, 창작자세와 관련한 삶의 태도를 논술한다.

 

3. 제시문에 나타난 무위당의 창작 자세를 간략히 정리해 보자.

 

예술은 일상적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술행위는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이룩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의 창작 태도와 일상적 삶이 결코 구분되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문인화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무위당은 바로 그런 삶의 태도라는 점에서 하나의 전형을 보여 준다.

 

무위당의 기예는 어린 시절부터 받았던 차강 박기정의 훈육에 기초하고 있다. 비록 엄격한 훈육이 기본이었으나 차강이 무위당에 가르침이 된 것은 단지 기예가 아니라 지조있는 삶이었으며, 이는 청강이라는 무위당의 자호에 잘 담겨져 있다. 혼탁한 세상 속에 맑은 물이 되고 또한 지친 이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쉼터가 된다는 뜻은, 무위당 스스로 기()인 이기에 앞서 의()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무위당은 자기의 창작이 돈벌이로 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지인(知人)들에게 주거나 정의로운 사회활동의 촉매가 되도록 자선하는 것을 기본 목표로 했다.

 

4. 현대의 대중문화의 흐름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자.

 

현대의 주류문화는 대중 문화와 고급문화에 상관없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첫째, 문화가 창작 활동이기에 앞서 하나의 상품이라는 것. 즉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문화창작이 전 문화 영역을 휩쓸고 있다.

둘째, 대중적 인기를 목표로 한 창작활동이라는 점. 단 한번 시장(미디어)에서 뜨는 것을 목적으로 한 활동이 대세이다.

셋째, 현실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보다 가벼움의도적 깊이 없음을 구호로 한 창작활동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5. 앞으로 지향해야 할 창작활동의 자세와 삶의 태도에 대한 입장 정리

문화가 대중화되고 누구나 다양한 예술적 활동에 참여하고 소비할 수 있는 사회로 진전된 것은 그 자체로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문화의 대중화를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으며, 현실적이지도 않다. 다만 문화가 단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라고 한다면, 문화의 창작 활동에도 그런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창작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의 핵심은 상업적 목적과 대중적 인기를 위해 창작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 대한 반성을 목적으로 한 창작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6. 개요의 작성

서론 : 문화의 대중화가 가져온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성의 필요성을 제기.

본론

무위당의 창작 자세 정리

현대 문화 창작 활동의 문제점 지적

양자의 긍정적인 측면의 종합.

결론 : 앞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간단한 방향의 제시.

 

 

◈ 읽기 자료 1 - 예술의 목적과 가치

 

◎ 예술의 본질과 목적 : 아름다움의 추구

 

인간의 예술 활동은 아름다움, 즉 미적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게 된 최초의 동기는 다분히 직접적인 삶과 연관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인류가 남긴 벽화들의 흔적은 대부분 풍요를 기원하거나 다산을 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초기의 예술 활동의 내용이 주로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자연은 인간에게 경외의 대상이었고 종교적인 대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자연만이 아름다운 존재였다. 아름다움은 숭고하고 범접할 수 없을만큼 위용이 있는 대상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 활동의 의미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에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대와 중세의 서양인들에게 예술은 보다 넓은 의미로 여겨진다. 그들은 예술 활동을 기술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술 활동은 생산과 관련된 행위까지도 포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령 목수의 일이나 옷을 만드는 사람의 일까지도 넓은 의미의 예술 활동이다. 다만 시를 쓰거나 노래를 만드는 행위와 같은 사유의 비중이 높은 예술은 인문학적 예술이라고 불렀고, 조각과 같은 신체적 작업을 동반하는 것을 통속적 예술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중세인들은 후자를 장인적 예술이라고 구분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분을 오늘날의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로 분류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예술 행위에 대한 고대 서양인들의 시각은 어떤 분야에서든지 기능을 잘 발휘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다름 아닌 덕과 선을 잘 실현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 이들에게 덕과 선이란 자신의 본분을 잘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덕과 선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참된 것이나 선한 것과 연결시키는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 예술은 이러한 고전적인 아름다움만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현대에는 추상적이면서도 기괴한 모양의 회화가 등장하거나 전위적인 음악으로 인간을 전율케 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이제까지 감추어졌던 인간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보려는 데 예술 활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정직하거나 비열한 수단을 동원한 예술 활동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름다움을 포기했다고 해서는 안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작품이나 예술 활동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평가는 우선 독창성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고대 그리이스인들에게는 예술 활동이 모방이라고 이해되었지만, 그것은 자연에 대한 모방이지 다른 예술 작품에 대한 모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독창성이 아름다움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는 이유는 새로운 것에서 아름다움을 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베낀 것은 이미 식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있던 아름다움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연을 대상으로 한 어떠한 예술 작품도 대상이 되는 자연 그 자체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는 것과 유사하다.

 

◎ 대중 문화와 대중 예술

 

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이다. 그래서 예술도 순수 문화와 대중 문화로 나뉘어지게 된다. 과거에는 예술을 순수 예술만이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되었었다. 예술라는 것 자체가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예를 부리면서 여유롭게 살며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클래식이라 일컬어지는 고전음악도 일부 부유층 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였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들이 즐기는 음악이었기에 지금도 클래식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격식에 맞는 드레스를 입고 나와 공연을 한다. 이러한 구분은 서양의 전통이나 우리 나라의 전통에서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서민들에 이루어지는 창작 활동은 실생활과 연관된 것으로 민예나 공예 정도의 지위만을 인정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한 시민 계급의 부상과 대중 매체의 발전은 새로운 예술의 대중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산업 사회에 들어서면서 소수의 고급 문화의 자리에 다수의 대중문화가 들어서게 되어 대중 문화가 문화의 주류로 등극한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보다 이해하기 쉬운 팝에 주류의 자리를 내주었고 순수 미술은 상업미술로 분화되어 나갔다. 그런데 그 양상은 순수 예술의 대중화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창작 활동의 상업화로 나타났다.

 

대중 문화나 대중 예술의 출현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일반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의 출현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에 대한 평가 기준에 상업적인 성공 여부가 끼어 들게 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낳았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예술적 가치가 높은 예술 작품이 상업적인 성공도 거둘 수 있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래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대중 예술가들은 순수 예술가 못지 않게 사회적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상업성은 순수 예술에 몸 담고 있는 예술가들에게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상업적인 성공 여부 그 자체가 예술의 가치를 손상시킨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대중 예술의 경우에는 상업적 성공만 거두면 예술적 가치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상업주의에 지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이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소박한 창작욕에서 벗어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러한 부작용을 보여 주는 실례가 한국 대중 가요계에 끊임 없이 제기되는 표절에 관한 논란이다. 이러한 상업주의적 사고 방식은 근본적으로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경쟁이 무한 경쟁으로 이어지지만 기본적으로 정당한 방법을 통한 경쟁을 권고한다. 하지만 표절을 일삼는 대중 음악인들은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을 부도덕한 기업처럼 무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많은 연예인들은 자신들을 예술가로 불러주길 원한다. 이러한 바램은 정당하다. 왜냐 하면 연예인들도 순수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인간의 정서적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작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대중 예술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 예술인들이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중의 건전한 정서와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부정의한 수단을 통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뛰어난 사기꾼을 칭찬하게 만드는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 주는 것과 같다.

 

◎ 대중 음악에 대한 사회의 평가

 

대중 음악에서 음악에 중점을 두면 대중 음악의 예술성을 기준으로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고 대중에 중점을 두면 대중의 기호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에서 대중 음악은 대중의 사랑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기호에 맞추어 대중 음악이 만들어진다. 이 경우 대중이 원하면 일본노래를 베낄 수도 있고 팝송을 베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진다. 현실에서 대중 음악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음반이 얼마나 팔렸느냐에 따라 이루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대중의 의식을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생각하는 대중 음악가는 우리 고유의 정서를 표현해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대중 음악은 대중의 정서를 고양시킬 수도 있고 대중의 정서를 천박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대중들의 정서 수준까지 고려하는 대중 음악가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많이 팔리는 음반이 좋은 음반이라는 대중 음악계의 평가 기준은 고유한 우리의 정서를 독창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에 보다는 인기를 끌었던 대중 문화가 발달했던 나라의 가요를 베껴서 안전하게 음반 판매 기록의 수위를 차지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한다.

 

음악성이 있지만 팔리지는 않는 음반은 대중 음악으로서는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 음악은 대중에 가까이 있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대중의 정서 수준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한가? 대중 음악을 현재와 같이 대중성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한다면 그 예술성은 확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표절해서 만든 대중 음악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진정한 것인가? 표절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개입된다. 예술성이냐 대중성이냐의 문제외에도 정직함과 관련한 문제가 있다. 표절을 한 당사자도 자신의 표절 행위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음악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의 상품성과 명예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표절 행위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이것이 돈과도 얽힌 문제이기 때문이다. 외국 곡을 따온 것을 숨기지 않으면 원래 작곡가에게 저작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정직성에 대한 평가와 대중 음악으로서의 평가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특정한 대중 음악에 대한 창작의 공을 창작자가 아닌 표절자의 공로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 곡을 인기곡으로 만든 공로는 예술에 대한 공로로 인정할 수 없다. 표절이 들통나도 시장의 논리에 따라 음반이 많이 팔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도의적인 책임이나 예술가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가 포기되어져서는 안된다.

 

◎ 표절은 정직성의 문제: 정직하지 못한 예술은 예술이라고 하기 어렵다?

 

창작이라고 하려면 거기에는 독창성과 고유성이 있어야 한다. 창작자의 혼이 들어 있어야 하고 그 창작자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들어 있어야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표절 행위는 예술가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나 양식을 버린 행위이다. 예술은 그 표현으로서 예술가 자신이 행복을 느낄 때 예술이 된다. 예술가가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니면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 표절을 한다면 그는 이미 예술가가 아니라 문화상품 표절자이다. 그러므로 그 작품 역시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없고 단지 모방상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남의 창작을 소매치기 한다는 것은 도둑질이다. 현대는 정신적 창작활동의 산물이 곧 돈으로 연결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표절은 남의 주머니에 들어갈 돈뭉치를 훔쳐오는 것과 동일한 행위이다. 창의력 없는 문화는 자생력이 없는 문화이다. 제 뿌리를 내려서 살아남을 수 없는 문화이다. 대한민국을 표절공화국이라고 한다는 자조섞인 신문기사가 난 적이 있다. ‘모방을 넘어 창조로 가자는 표어와 다르게 우리는 모방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무언가 나오길 기다리며 나왔을 때 빨리 들여올 채비를 하면서 우리의 문화계가 그렇게 사대적으로 썩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가 대외종속적이면 그 사회구성원의 정신도 대외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 표절은 무죄! - 해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표절주의라는 것이 있다. 어차피 창조는 신의 영역이고 인간의 영역이 아니므로 신이 한 창조를 조금 빌려 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의 창조를 이용해서 살뿐이므로. 그러므로 이 경우 표절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지게 해서 여러 사람에게 향유토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예술가의 역할이기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냐는 변이 성립된다. 문화의 각 영역에서 신의 창작을 모방해서 만든 작품으로 재산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는 신의 것이므로 표절자가 나누어가져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대 그리이스인들의 예술관을 연상시킨다. 그들은 예술 행위는 창조를 포함하지 않으며 창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에게 예술은 기술이나 솜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예술적인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모방하고 적응력을 키워 자연의 질서에 따라 배치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대인들이 표현하는 예술과 현대의 대중 음악의 표절은 엄연히 다르다. 고대인들에게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더 아름다운 것이 탄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은 단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예술의 표현 대상도 자연에만 그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고대인들의 예술관을 오늘에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도정일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표절주의자들은 마치 표절이 자본주의 사회가 신성시하는 사유재산제도에의 정면도전이고 그 제도를 거덜내기 위한 도덕적 실천인 듯이 주장한다. 표절주의는 모든 것이 이미 그 자체로 표절이고 모두가 표절자이므로 표절이란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기술상의 문제로 인해 표절을 판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술활동을 도와주는 첨단 정보기기의 역할이 너무 커지면서 작품의 주인이 컴퓨터인지, 컴퓨터를 켠 사람인지 조차 불분명해지고 있다. 그 만큼 컴퓨터에 의존해서 예술 창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표절의 개념도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연히 같은 생각을 했거나 우연히 샘플러에서 같은 리듬을 뽑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표절의 문제는 예술 문화의 효용을 어디에 둘 것이냐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표절 가요라 하더라도 듣기에 좋고 불러보고 싶다면 가요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지 뭐가 문제될 것이냐의 입장은 표절이든 창작이든 인간에게 유희를 제공하는 것이 예술 문화라는 생각이다. 더군다나 대중문화는 예술성보다는 대중성이 더 중시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유희의 측면만 강조한다면 예술 활동의 본질적인 목표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무시될 수 있다. 예술이 단순한 오락과 구분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했던 아름다음을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대중 매체에 의한 대중 음악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공연장을 찾는 것이다. 단지 춤을 추기 위한 것이라면 오디오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러므로 표절 가요에 대한 사람들의 인기가 높다 해도 그것이 표절의 부당성에 대한 변호를 하지는 않는다. 정말 독창성이 문제가 안된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다른 사람의 곡을 표절했음을 밝히는 것이 정정 당당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 읽기 자료 2

 

◎ 예술의 비인간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현대 예술의 보편적 특성은 대중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 비통속성, 혹은 반통속성이다. 20세기 들어 예술의 변화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극심한 것이어서 예술에 대한 몰이해, 예술에 대한 일반의 무감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예술 작품들은 하나같이 관객들을 두 가지 형으로 나누는 기묘한 사회적 효과를 발생시키는데, 한 유형은 그 작품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소수파요, 다른 한 유형은 그 작품에 적의를 품는 다수파다. 즉 예술작품은 군중이라는 부정형의 인간집단을 두 개의 대립세력으로 가르는 일종의 사회적 힘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현대 예술의 특징은 새로운 예술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두 계층으로 분리하는 데 있다.

 

현대 예술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점에서 일반 대중에게 굴욕감과 소외감, 분노의 감정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현대 예술이 이런 몰이해의 발길질을 당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총괄적으로 인간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던 인간적 요소들을 되도록 제거하고자 노력하는 최근의 예술계 경향은 과거의 낡은 형식을 부수는 데 몰두함으로써, 새로이 창조될 무수한 형식과 언어를 익히고 이해하는 자만을 위해 있다.

 

새로운 예술이 지닌 몇가지 성향을 보면

1. 예술의 비인간화

2. 살아있는 형상의 배제

3. 예술작품은 예술 작품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4. 예술은 유희일 뿐이다

5. 예술의 본질 중 하나는 아이러니다

6. 예술은 초월적인 어떤 결론을 가지지 않는다 등이다.

 

20세기 예술은 인간적 포기, 삽화적 포기, 감정적 포기를 통해 대다수 인간들을 따돌리고 특수 전문가들만을 향해 열려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대 예술의 인간 기피와 현실도피 현상이다. 현대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살아 있는현실의 모습을 지워버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 세계와 연결되는 끈을 끊고 하나의 가상적 신세계로 날아가도록 권한다. 19세기 예술작품이 서민에게 사랑받았던 것은 예술이 생활의 반영, 작가의 기질을 통해 본 자연, 인간적 운명의 표현 등을 포괄함으로써였다. 그러나 새로운 모든 예술은 생활은 생활이요, 예술은 예술이며, 이 양자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본다. 인간이 끝나는 데서 시인이 탄생한다는 관점이다. 현실에서 멀어지고, 생명 있는 형체로부터 도피한 현대 예술의 무생명성은 대중의 몰이해와 직결되어 모호성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 예술은 왜 생명 형식을 그처럼 혐오하고 비인간화하려는 것일까? 쉽게 말해서 그것은 서구 전통의 현실 해석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 보인다. 특히 19세기 사실주의에 대한 뚜렷한 반감이 주원인이다. 한 가지 스타일의 단순반복이 가져온 무디고 지루한 권태가 반항의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예술의 본질 중 하나를 아이러니로 본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애매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엄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예술에 사명과 미덕을 부여하며 신성시하던 과거와 달리 예술을 하나의 笑劇으로 보는 것, 이것이 현대의 특징이다.

 

또 한가지, ‘주제의 결여가 현대 예술을 규정짓는다. 결론없는 세계를 그리는 것이다. 19새기 예술은 인간성의 가장 심오한 문제를 다룬 주제와 인류의 존엄성, 정당성을 마련하는 하나의 인간탐구로서의 의의 때문에 중요시되었다. 과거에 예술은 굉장한 구경거리이자 종교를 대신할 만한 일종의 엄숙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단지 운동경기나 유희처럼 취급되고, 늙은 세계 에 젊음을 주입시키려고 하는 하나의 노력 정도로 이해되길 바란다.

 

현대 예술의 특색은 예술이 그 자체의 중요성을 포기했다고 하는 점으로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예술가 개개인의 이해받지 못하는 하찮은 진전이, 보는 이 혹은 듣는 이의 경험세계를 확대시켜온 곳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작가들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우리가 찾는 것은 부분들이지 전체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궁극적인 힘이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민중이 우리와 같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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