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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느님이다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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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느님이다

 

최 동 희

 

수운(水雲, 최제우)은 의식적으로 마음과 기운을 서로 맞세우고 있다. 사람을 마음과 기운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수운의 기본적인 태도인 듯하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옛 성인이 가르친 것이고,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修心正氣)은 내가 비로소 새로 마련한 것이다. (『동경대전』수덕문)

이렇게 수운은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잡는 것은 수운 자신이 비로소 새로 마련한 가르침이라고 잘라 말한다. 수운은 이렇게 마음과 기운을 맞세우고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로잡으라고 가르친다. 여기에는 마음과 기운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생각이 숨어 있다.

수운에 따르면 사람은 마음과 기운으로 되어 있는데 그 어느 쪽에 치우쳐도 안 된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는 것, 곧 강령은 주로 기운 쪽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이다.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적어도 마음과 기운의 어느 쪽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는 것은 하느님을 모시는 것 가운데 있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수운에 따르면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는 것은 하느님을 모시는 준비 단계인 듯하다. 스물한 자로 된 주문이 하느님의 기운이 크게 내리기를 바라는 구절로 시작된다는 것이 이것을 뒷받침해 준다.

하느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는 것은 하느님을 모시는 준비 단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기만 하면 따라서 마음에도 신기한 영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수운이 처음으로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했을 때는 안팎에서 때를 같이하여 신기한 현상이 나타난 듯하다.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 수습 못할네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집안 사람 거동 보소(『용담유사』안심가)

여기서 공중에서 외는 소리란 하느님의 말씀일 것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신기한 경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는 역시 몸과 마음에 때를 같이하여 나타난 신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처음에는 수운도 하느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따로 나누어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이럴 경우에는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는 것과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다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신령이 내리는 것과 신령을 모시는 것이 같다고 보는 우리 무속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수운이 지은 주문에 따르면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는 것과 하느님을 모시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이 구별은 그 뒤 더욱 뚜렷해지고 더욱 강조된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러한 사람에게 강령(降靈)이 됩니까?

강령은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사람에게도 될 수 있다. (『동경대전』논학문)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는 것은 하느님이 내리는 준비 단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에게도 나쁜 사람에게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는 것 자체는 그렇게 중요할 것 없다. 다만 하느님을 모시는 다른 단계를 기다려서 비로소 중요하게 될 뿐이다. 수운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동안에 이러한 사정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인들 가운데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는 경지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운은 스물한 자로 된 주문 가운데서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기를 바라는 대목을 뺀 '열석 자'를 특히 강조하게 되었다. '열석 자'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로서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가 틀림없이 얻어지고, 길이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깨달아진다'라는 뜻이다. 이 열석 자로 된 대목은 하느님을 모시라고 정말 애써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바와 같이 수운이 지은 주문이나 그 풀이에 따르면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는 것과 하느님을 모시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하느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는 것이 매우 신기하고 또 중요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느님을 모시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그것은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경지일 뿐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영감을 기다려 비로소 그 뜻이 빛나게 된다. 여기서 영감이란 사람의 마음이 하느님의 뜻과 통하는 경지일 것이다. 수운은 이것을 '하느님의 말씀을 내려 가르치는 것[降活之敎]'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이 그 뜻을 알리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기운이 내리는 것은 그의 뜻을 알리기 위한 준비 단계일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다. 마지막 목적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임에 틀림없다. 오히려 준비 단계도 마지막 목적도 다 같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수운의 본 뜻인 듯하다. 사람은 본래 기운과 마음으로 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기운이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마음은 하느님의 뜻과 서로 통하는 경지가 가장 바람직한 종교적인 경지라고 보는 것이 수운의 본 뜻인 듯하다. 여기에는 기운 좋고 마음 착한 사람을 우러러 보는 우리 민중의 인간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수운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뜻과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한다. 수운은 자기가 비로소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가장 참된 길을 찾아냈다고 믿었다. 그는 이것을 '끝없이 큰 진리[無極大道]'라고 불렀다.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사람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수운의 독특한 인간관이라고 볼 수 있다. 수운에 따르면 하느님은 무궁한 존재, 곧 무한한 절대적인 존재다. 이러한 존재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과 서로 통할 수 있는 존재, 곧 인격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람도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사람이 무궁한 존재가 도리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 글 보고 저 글 보고

무궁한 그 이치를

불연(不然) 기연(其然) 살펴 내어

부야(賦也) 흥야(興也) 비해 보면

글도 역시 무궁이오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 내어

무궁히 알았으며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용담유사』흥비가)

사람은 누구나 어떤 노력을 통해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무궁한 이치를 무궁히 살펴 알아낸다면 무궁한 이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무궁한 자기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지가 바로 수운이 바라는 마지막 목적인 듯하다. 여기서 '무궁한 나'란 곧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뜻과 서로 통하는 나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무궁한 나'가 바로 수운이 생각하고 있는 종교의 목적인 동시에 '윤리의 이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무궁한 나란 바로 앞에서 본 '사람으로서의 이상적인 경지[道成德立]'에 이른 '나'일 것이다. 이 경지를 참된 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에 반드시 행복이 따른다는 다짐은 아직 없다.

수운은 세상에서 말하는 화복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선악과는 관계없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화복이 변하여 고생 끝에 낙이 올 수도 있지만 이것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수운에 따르면 하느님은 지극히 공평하여 사심이 없으므로 선악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하느님은 지공 무사(至公無私)하신 마음 하택 선악(下擇善惡)하시나니<도덕가>]. 이러한 생각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도덕을 넘어선 종교의 경지가 전제되어 있다. 낡은 우리의 봉건적인 사회 체제가 거의 결정적으로 무너져 가는 시대에 살았던 수운은 그저 도덕의 경지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살갗으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의 선악이 사람의 화복을 결정할 수 없다면 적어도 세상의 선악을 넘어서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무렵의 '세상의 선악'은 주로 유교적·불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운은 유교나 불교와 다른 어떤 종교적인 경지를 안타까이 찾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결정적인 종교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아주 믿게 되었다. 이 하느님은 우리 겨레가 믿어오던 민족적인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서 저 중국의 천(天)이나 인도의 부처와는 좀 다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아주 믿게 된 수운은 이제 선악과 화복을 아울러 넘어서게 되었다. 세상의 선악이 화복을 결정할 수 없다면 그러한 선악을 넘어서야만 했고, 선악을 통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화복이라면 그러한 화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의 선악을 넘어선 종교의 경지에서도 선악이 문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가치 기준을 좀 달리하는 종교적인 선악의 문제일 것이다. 수운에 따르면 참된 선은 '하느님의 기운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뜻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선악의 마지막 기준을 하느님의 뜻에만 둠으로써 종래의 윤리 의식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동학은 종래의 윤리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을 좀더 유통성 있게 해석함으로써 그때그때에 새로운 윤리적인 구호를 내세웠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輔國安民], 사람을 하느님같이 섬긴다[事人如天],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人乃天]라는 구호 같은 것이 그 보기일 것이다.

그러나 수운은 한편으로 세상의 선악과 종교적인 선악의 관계를 그렇게 뚜렷이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수운에게 세상의 선악과 종교적인 선악의 관계는 좀 미묘하다. 그는 세상의 선악이 화복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밝혔지만 그 선악을 아주 무시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종교적인 선악에 대해서도 '무궁한 나'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만 말하고 죽은 뒤의 영혼의 행복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목적이 사실은 윤리적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무궁한 나'에 그쳤다. 이 '무궁한 나'는 어느의미에서는 저 '세상의 선악'의 연장선 위에 있는 극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학의 윤리는 종래의 윤리와 어느 정도 조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세상의 화복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매우 가까운 편이다. 종교적인 목적이 죽은 뒤의 행복이 아니고 바로 기운과 착한 마음을 갖춘 산 인간이기 때문에 세상의 화복과 그만큼 가까울 수 있다. 수운이 하느님만 공경하면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이 저절로 따른다고 약속한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물론 이상적인 인간인 '무궁한 나'에 따르는 '안빈 낙도(安貧樂道)'와 같은 세상의 행복과 차원이 다른 행복을 전제하고 있으면서 이러한 종교적인 행복[곧 법열(法悅) 같은 것]을 그렇게 내세우지 않고 주로 세상의 행복을 말한 다는 점에도 민중적인 종교라는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최동희/고려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고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서학에 대한 한국 실학의 반응』,『윤리, 동학·천도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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