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여러 표정
by 처사21말의 여러 표정
심재기
존재와 이름
기독교의 하느님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의 이름은 성부이고, 두 번째의 이름은 성자이며, 세 번째의 이름은 성신이라고 한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높은 조물주는 바로 성부로서 피조물 가운데서 인간을 가장 사랑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점점 죄악에 물들자, 성부 바로 당신 자신이면서 또한 그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이 세상에 보내어 인류를 구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라 불린다. 그 뒤에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셨듯이 성자께서 성신을 보내어 하느님은 인류 구원의 사업을 완성하려 하신다.
이 이야기는 소위 기독교의 삼위 일체설로 우리가 잘 아는 중요한 기독교 교리의 하나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갖는 여러 개의 기능에 대하여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된다. 즉 김아무개, 이아무개라고 불리는 한 사나이가 있을 때, 그 존재는 하나이지만 그는 나라를 위하여서는 충성스런 국민이요, 부모를 위하여서는 효성스런 아들이며, 친구들에게는 믿음직한 벗이요, 형제 간에는 우애 있는 동기가 되어, 경우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 다른 표정을 가진다.
그러면 `언어'라고 하는 존재는 몇 가지 일을 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지금까지 많은 언어학자들에 의해 궁리되어 왔다. 많은 논의가 있었고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해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로만 야콥슨(Roman Jacobson)이란 학자가 제시한 여섯 가지의 기능이다. 이제 이 여섯 가지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언어, 그 여섯 가지의 표정
언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능을 이해하려면 먼저 언어 행위가 이루어지는 (즉, 우리가 말을 하게 되고 듣게 될) 때에 필요로 하는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언어의 표정이란 언어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표정이기 때문이다.
이때에 우리는 말하는 사람, 말을 듣는 사람, 쓰여진 말, 무엇에 대하여 말하게 되었는가 [말이 관계를 맺고 있는 관련 상황], 어떤 환경에서 말하게 되었는가 [말이 쓰여진 분위기나 경로], 어떤 말을 사용하였는가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용되었는가] 등을 생각하게 된다. 여섯 가지의 요소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언어 행위는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여섯 가지의 요소들은 각각 언어의 여섯 가지 표정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미리 주의해 두어야 할 점은 어떤 말이 쓰였다고 했을 때 여섯 가지의 기능 가운데 어느 하나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발언의 다양한 특성은 이 여섯 가지의 기능, 즉 표정들이 각기 무엇을 강조했느냐에 따라 순서를 정하여 자리를 잡는 것이다.
(1) 정보적 기능
맨 먼저 언어의 정보적 기능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것은 번에 관련되는 기능이다. 즉, 관련 상황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내용을 알려 주는 기능이다. 대상을 지시한다고 지시적 기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기능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에 대하여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다.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을 나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한 그것은 나무로서 행세를 못한다. 퀴리(Curie)부인이 라듐이라는 원소를 발견하여 그것을 라듐이라고 이름 붙이기 전까지는 라듐은 인류에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라듐은 천지가 창조된 태초부터 있었을 것이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그것은 인류에게 무의미한 것이요 없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이라는 것은 인류가 깨달아 알게 되는 모든 대상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는 작업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어떤 사물이건 거기에 이름이 붙으면 그 사물의 개념이 형성된다. 다시 말하면, 그 사물의 의미가 확정된다. 그러나 사물이 지닌 의미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요, 사물 자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름이 사물과 맺고 있는 관계는 그 사물의 의미 (또는 개념)와 맺고 있는 관계보다는 강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름과 사물과 의미의 삼각 관계는 다음 도표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왜 사물과 이름은 점선으로 표시되어야 하는가를 다음 예로 생각해 보자. 가령 `철수'라는 사람(사물)이 나에게 친절하면 그는 나에게는 좋은 사람(의미 1)이어서 나는 그를 친구로 생각하고 다정하게 "철수야!"(이름 1)하고 부르지만, 만일 그가 나에게 해를 끼쳤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나쁜 사람(의미 2)이 되었으므로 `그놈'(이름 2)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다. 따라서, 이름은 사물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 반드시 의미를 통하여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름'이라고 하니까 고유 명사만 생각해서는 물론 안 된다.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꽃이라든가 여인이라든가 경치가 지닌 상태를 대상으로 삼았을 때에 그것이 갖고 있는 어떤 상태에 대한 `이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는 모두가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의 기능이 이러한 지시나 정보 제공에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언어는 세계를 그리는 그림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정보적 기능은 언어의 중요한 하나의 기능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기능은 아니다.
(2) 표출적 기능
번, 즉 말하는 사람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능을 표출적 기능이라고 한다. 이것은 표현적 또는 정서적 기능이라고 하는데, 어떤 표현, 즉 쓰여진 말이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내 준다. 우리 속담에 "`에'해 다르고, `애'해 다르다"는 말이 있거니와 말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발음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오천 년의 장구한 역사'라는 구절에서 `장구한'을 강조하여 `자앙구한'이라고 `장'을 아무리 길게 발음하여도 `오천 년의 역사'가 육천 년이나 칠천 년으로 더 길게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만 말하는 사람이 오천 년을 대단히 길게 느끼고 있다는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때에는 정상적인 발음 이외의 특이한 발음이 나타나는 수가 있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칠 때, `쯧쯧' 하고 혀를 차며 안타까워할 때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소월의 시구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를 낭송할 때에는 누구든지 그 내용에 자기 감정이 감염되어 `사뿐히'를 롬고 경쾌하게 발음한다. 이러한 것이 모두 언어의 표출적 기능의 모습들이다.
(3) 명령적 기능
말이란 말을 듣는 상대방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은 반드시 듣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이와 같이 말을 듣는 사람( 번)에게 초점이 맞춰진 기능을 `명령적 기능' 또는 `욕구적 기능'이라고 한다. 명령문은 이 기능을 극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이 없는 독백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듣는 사람으로 삼는 일인 이역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가끔 자기 혼자만 기억하고 싶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일기에 적는다. 그리고 절대로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러 해가 지난 뒤, 그 일기장을 우연히 펼쳐 들었을 때, 그 비밀스런 이야기 속에서 슬며시 얼굴을 붉혀 본 경험들을 갖고 있다 이 경우에도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행동하도록 바라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처럼 언어의 명령적 기능은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저녁 늦게 책을 읽다가 혼잣소리로 "목이 컬컬한데..."라고 중얼거렸다고 하자. 이때에 만일 그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반드시 따끈한 차 한 잔을 받쳐들고 나타날 것이다. "목이 컬컬한데..."라는 한 마디 말이 결국 듣는 사람에게는 "차 한잔 가져다 주시겠소?" 하는 명령적 기능을 수행한 셈이다.
(4) 친교적 기능
말은 반드시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사무적인 목적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언제고 필요하기만 한다면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전제의 인식과도 같은 언어 행위가 있다. 이웃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사말이나, 여행 중에 차 안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과 나누는 날씨 이야기, 경치 이야기 따위는 말을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간에 말이 전달하는 의미를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때에는 다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사실만을 귀중하게 여긴다. 이러한 언어적 기능은 말을 주고받는 사람끼리의 환경( 번), 즉 의사 소통의 경로 (라디오나 TV 채널 같은 것)를 열어 놓고 있는 셈이다.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생각해 보자.
"아저씨, 안녕하셔요? 어디 가셔요?"
"응, 철수로구나. 학교 갔다 오니?"
이 대화는 철수라는 학생이 이웃집 아저씨를 만나 인사하는 장면이다. `어디 가시느냐'는 물음에 대답도 않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냐'고 반문을 던지지만 아마 이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면서 길을 엇갈려 지나갔을 것이다. 이때의 대화는 단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람이라는 확인과 정을 교환한 것뿐이다. `저 말이죠, 거시기 있잖아요?' 하는 말에는 말을 듣는 이에게 이제 앞으로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겠으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예비적 기능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마치 라디오나 TV를 듣고 싶은 번호에 맞추는 작업과도 같다. 상대방이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오늘은요, 우리가요, 해방이 된 지 말이지요, 꼭 서른여섯 해거든요." 하면서 `요'를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을 모두 언어의 친교적 기능이라고 한다.
(5) 관어적 기능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말을 통하여 새로운 말을 배운다. 이때에 말( 번)은 말에 대하여 말한다. 즉, A계열에 속하는 B계열에 속하는 언어에 대하여 설명한다.
"춘부장은 남의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말에서 `춘부장'은 한자어이고 `남의 아버지'는 고유어이다. "영어의 Father는 우리말의 아버지라는 말이다"라고 했을 경우에는 영어와 한국어가 서로 관계하고 있다. 이처럼 언어가 언어끼리 관계하고 있다고 해서 이것을 관어적 기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기능을 통해서 지식을 증진시키고 또 지식을 체계화한다. `물'이라는 것은 일상의 언어지만 `H2O'는 과학의 언어다.
자연 과학 분야에서는 어떤 물질 간의 결합과 변화를 화학 방정식으로 표현한다. 그것을 일상의 말로 표현하면 번거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새로운 어휘를 습득하고 외국어를 배우며 어떤 특정한 지식을 체계화하려 할 때 언어의 관어적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대단히 큰 불편을 겪어야 한다.
(6) 미학적 기능
끝으로 전언(message, 번) 자체에 초점을 맞추려는 언어의 표정에 대하여 생각할 차례가 되었다. 화자에 의하여 씌어진 말은 그 말하는 사람의 의식적 · 무의식적 노력에 의해서 되도록 듣기 좋은 짜임새를 가지려 한다. 즉, 전언은 아름다운 구조를 가지려고 한다. 말도 화장을 하고 싶어한다고나 할까? 가령 `순이와 바둑이'라고 말하는 경우와 `바둑이와 순이'라고 말하는 경우에서 어느 것이 우리 귀에 부드럽게 들리는가를 생각해 보자. 보통 우리는 음절 수가 적은 단어부터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은 그 말 자체 속에 더 듣기 좋은 표현을 가지려는 본능적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시적 기능이라고도 부른다. 언어를 예술적 재료로 삼는 문학에서는 이 미학적 기능을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문학이 아닌 일상의 언어 생활에서 쓰이는 말이라고 이러한 미학적 기능을 소홀히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상의 대화에서도 시나 소설처럼 말을 짜임새 있게 신경을 써서 꾸미지는 못하지만 늘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은 숨길 수 없다. 자주 쓰이는 속담이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은연중 전언의 미학적 기능을 의식하였다는 반증이 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님은 품어야 맛이다."
이러한 속담은 관용 어구에 나타나는 미학적 기능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언어와 인간 이해
이상으로 우리는 언어가 지닌 여섯 가지의 기능을 살펴 보았다. 언어의 기능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아마 국어 공부의 전제 조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글을 배워 많이 알고자 하는 데에는 남이 하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초보적인 목적이 숨겨져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하겠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의 맨 끝말에서 다음과 같이 언어에 대한 이해가 인간을 이해하는 지름길임을 역설하였다.
자왈(子曰), 부지명(不知命)이면 무이위군자(無二僞君子)요,
부지례(不知禮)면 무이입야(無以立也)요.
부지언(不知言)이면 무이지인야(無以知人也)니라.
[공자님께서 이르시기를, 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모르면 사람 노릇을 못하게 되며,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느니라.]
심재기/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과에서 국어학을 가르치고 저서로는 '국어어휘론', '의미론 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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