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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습사전 / 수필, 희곡

by 처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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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날의 행복(幸福) : 김소운(金素雲) 수필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歡迎)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回想)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感動)을 안겨다 주는 실화(實話)들이다. ( 서두부분 )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新婚夫婦)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失職)으로 집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테니 그 때까지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 다가 문득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王侯)의 밤, 걸인(乞人)의 찬······. 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두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행복했다. 만금(萬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 하략 )

 

* 성격 : 희곡적 수필

* 주제 : 가난 속에서 피는 인간애

---  문학이론 <수필> ‘수필의 종류’


 

●거룩한 본능 : 김규련 수필

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첩첩 산중의 마을이다.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뜻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꿩이나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 있게 훨훨 흔들며 노송(老松)의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 다니는 품이 정말 대견스럽다. 붉은 주둥이와 긴목, 새하얀 털로 덮인 날개 밑으로 쭉 뻗어 내린 검붉은 두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의 오후, 마을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황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이들은 그 황새가 길조(吉鳥)라고 믿고,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금년엔 찻길이 뚫리겠지, 올해는 꼭 전기가 들어오겠지 하고 .

 

그런데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이 마을을 지나가던 밀렵군이 그 황새를 보고 총(銃)을 쏜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지가 있는 노송 숲으로 뛰어 모였다. 밀렵꾼은 도망을 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 며칠 뒤였다. 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창(紙窓)에 갈잎이 날려와 부딪혔다. 그런데 조금은 귀에 익은 황새의 울음소리. 탁탁탁 타르르 탁탁. 사랑방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을 도리는 듯한 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 말없이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 밤, 밤 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앗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지 않은가. 총 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새는 인제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의 짝한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려고 저마다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부리가 멍들어 부서지도록 울어댔다. 탁탁탁 타르르 탁탁 그날 밤엔 늦도록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질 않았다.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 날 아침, 기이(奇異)하고 처참한 변이 또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靈物)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鳥類)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愛情)이 별스러운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생태요, 본능(本能)이라 했다. 그러나 하찮은 그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감상 : 밀렵꾼에게 희생된 짝을 못잊어 떠나지 않고 돌아온 황새의 동물적인 본능적 행동을 통해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다운 본능을 생각해 보고 있다.

* 주제 : 거룩한 본능


 

●경설(鏡說) : 이규보 수필

어떤 거사(居士)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구름에 가리운 달빛과 같았다. 그러나 그 거사는 아침 저녁으로 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다듬곤 했다.

 

한 나그네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군자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거사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항상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맑고 아른아른한 거울을 좋아하겠지만, 얼굴이 못 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맑은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기 때문에 만일 맑은 거울속에 비친 추한 얼굴을 보기 싫어할 것인즉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깨쳐 버릴 바에야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겉뿐이지 거울의 맑은 바탕은 속에 그냥 남아 있는 것입니다.만일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으니 그대는 어찌 나를 이상스럽게 생각합니까?”

하니 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감상 : 먼지가 낀 거울을 그대로 사용하는 한 거사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처세에 관한 관조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글이다. 거울의 본성은 원래 맑은 것이지만, 먼지가 끼면 흐려진다는 현상을 말하면서 인간에게도 본성이 흐린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통찰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거울’이 주는 교훈은 유연한 체세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성격 : 관조적

* 주제 : 사물의 심층을 이해하는 통찰력. 삶에 대한 관조적 자세.

* 출전 : [동문선]

---  문학이론 <설(說)>


 

●구두 : 계용묵 수필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고의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 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써 공포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拍車)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더 재어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 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한참 석양 놀이 내려퍼지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 위에서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하는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2,3보만 더 내어디디면 앞으로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 갈래 : 경수필. 희곡적 수필

* 구성 :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구조

* 주제 : 세심한 곳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인생살이

 

󰃚 윗글에 대한 감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❷

①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제재에 대한 참신한 시각이 돋보인다.

❷ 객관적 입장을 유지하며 중심 화제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③ 극적인 사건이 중심이 되어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④ 의성어의 적절한 사용으로 긴박감을 느끼게 한다.

⑤ 인물의 내면 심리가 섬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권태(倦怠) : 이상 수필

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 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西)를 보아도 벌판, 남(南)을 보아도 벌판, 북(北)을 보아도 벌판, 아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 감상 : 이 작품의 핵심은 상황과 의식의 갈등에 있다. 모든 것이 일상적인 관습으로가라 앉아 있는 세계 안에 홀로 서서 작자는 자신이 접하는 하나하나의 사물과 행위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그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참다운 의미의 확인없이 되풀이 되는 관습의 반복일 뿐이다. 여기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권태는 자각적 선택과 행동에 의한 삶을 희구하면서 그러한 이상 과는 동떨어진 상황 속에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는 한 지식인의 심리적 자화상에 해당된다.


 

●그믐달 : 나도향 수필

나는 그믐달을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린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도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客窓)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 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이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흩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匕首)와 같이 푸른 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 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누러 나온 사람도 혹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있는 사람이 보는 동시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독부(毒婦) : 성질과 행동이 몹시 악독한 부인 ( 󰃚 <물레방아>의 방원의 아내 )

· 원부(怨婦) : 원한 품고 있는 부인 ( 󰃚 <벙어리 삼룡이>의 오서방네 며느리, 오생원 아내 )

 

* 종류 : 경수필

* 성격 : 낭만적, 감상적

* 문체 : 우유체

* 표현

· 대비적 표현으로 그믐달의 특성을 드러냄

· 달을 여인에 비유, 필자의 감정을 적절히 이입(감정이입)

* 주제 : 외롭고 한스러워 보이는 그믐달을 사랑하는 마음.


 

●기예론(技藝論) : 정약용 논설

하늘이 날짐승과 길짐승에게는 발톱과 뿔을 주고, 단단한 발굽과 예리한 이빨을 주었으며 여러 가지 독(毒)을 주어서 각기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얻게 하고 외부로부터의 습격을 막아낼 수 있게 하였는데, 사람에게는 벌거숭이로 유약(柔弱)하여 제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니, 어찌하여 하늘은 천하게 하여야 할 금수(禽獸)에게는 후하게 하고, 귀하게 하여야 할 인간에게는 박하게 하였는가. 이는 인간에게는 지혜로운 생각과 교묘한 연구력이 있으므로 기예(技藝)를 익혀서 제 힘으로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생각으로 미루어 아는 것도 한계가 있고, 교묘한 연구력으로 깊이 탐구하는 것도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모두 아름답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예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더욱 정묘(精妙)하게 마련이고 세대가 흘러갈수록 더욱 발전하는 바, 이는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공장의 솜씨만 못하고, 읍에 있는 공장의 솜씨만 못하며, 유명한 성터나 큰 도시의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최신식의 묘한 기계 제작만은 못하다.

 

저 궁벽한 시골 마을에 사는 자가 오래 전에 서울에 왔다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아직 완전하지 못한 방법을 우연히 얻어 듣고는 기쁘게 돌아가서 시험을 본 다음, 속으로 자신만만하여 말하기를,

“천하에 이 방법보다 더 우수한 것이 없다.”

하면서 아들과 손자들을 모아 놓고 경계하기를,

“서울에서 말하는 소위 기예라는 것을 내가 모두 배워 가지고 왔으니, 지금부터는 서울에서도 다시 더 배울 것이 없다.”

한다. 이런 사람이 하는 짓이란 거칠고 나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나라에 있는 백공(百工)들의 기예는 모두 옛날 중국에서 배워 온 방식인데, 수백 년 이래 칼로 벤 것처럼 딱 잘라 다시는 중국에 가서 새로운 중국에는 새로운 방식과 교묘한 제도가 나날이 증가하고 다달이 불어나서 수백 년 이전의 옛날 중국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막연하게 서로 묻지도 않고 오직 옛날의 방식만을 편케 여기고 있으니 어찌 그리 게으르단 말인가.

* 주제 : 중국의 새 기술 도입에 게으른 현실 비판


 

●나의 길, 나의 삶 : 박이문 수필

내가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이게 다 뭔가?”,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처럼 근본적이고 총괄적(總括的)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가 찾아 낼 수 없음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다. 아마도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생각한 끝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극히 단편적이며 극히 피상적(皮相的)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이나마 더 배우고, 생각해 보고, 더 알고 싶다. 나는 눈을 감는 날까지 더 배우고 더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믿게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투명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철학적 저서를 통해서, 혹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혹은 잡문(雜文)의 형식으로라도 표현하고 남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만일, 내 자신을 위한 지적, 정신적 추구(追求)의 결과가 혹시 남의 사고에 다소나마 자극(刺戟)이 되고 사회에 티끌만큼이라도 공헌(貢獻)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막히게 기적적인 요행(僥倖)으로, 나에게는 한없는 기쁨이 될 것이다.

 

논두렁길에서 시작된 나의 길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길고도 짧았다. 어느덧 내 삶의 오후가 왔음을 의식한다. 약간은 아쉽고 초조해진다. 갈 길은 더욱 아득해 보이는데, 근본적 문제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어렸을 때 초연(超然)했던 종달새, 우아했던 방울새, 정이 두터웠던 개가 생각난다. 엄격한 승원(僧院)이나 깊은 절간의 고요 속에서 이런 짐승들을 생각하면서 더 자유롭게, 더 조용히, 또 생각하고 또 쓰고 싶다. (결말부)

 

* 갈래 : 수필, 자서전

* 문체 : 간결체

* 성격 : 회고적, 고백적

* 주제 : 나의 걸어온 길과 걸어갈 삶의 길


 

●달밤 : 윤오영 수필

내가 잠시 낙향(落鄕)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웃마을 김군을 찾아 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 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고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 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 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하늘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잠겨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 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 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農酒) 두 사발이 남았더니······.”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마셔 본 적이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하고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오다 돌아 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 표현상의 특징 : 향토적 서정미와 간결한 서정적 분위기

* 물아일체된 경지 :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 주제 : 자연 속의 인간의 아름다운 정

---  문학이론 <달을 소재로 한 작품>

 

󰏐 해설

윤오영의 ‘달밤’은 수필이다. 수필은 흔히 사실적 체험의 감동적 기록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이 수필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 체험 내용의 구체적 사실이나 지식이나 정보 그 자체는 아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달빛이 주는 감동이라고 볼 때, 여기에 인용된 모든 대화나 행동은 사실 그 자체의 묘사적 재현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딸깍발이 : 이희승 수필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南山)골 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가 생겼는가 하면, 남산골 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혀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서두부분)

 

현대인은 너무 약다.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 자기 본위로만 약다.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하여 영리한 것이 아니라, 당장 눈 앞의 일, 코 앞의 일에만 아름아름하는 고식지계(姑息之計)에 현명하다. 염결(廉潔)에 밝은 것이 아니라, 극단(極端)의 이기주의에 밝다. 이것은 실상(實相)은 현명한 것이 아니오, 우매(愚昧)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제 꾀에 제가 빠져서 속아 넘어갈 현명이라고나 할까. 우리 현대인도 ‘딸깍발이’의 정신을 좀 배우자.

 

첫째, 그 의기(義氣)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을 배우자. 그 지나치게 청렴(淸廉)한 미덕(美德)은 오히려 분간을 하여 가며 배워야 할 것이다. (결말부분)

 

* 감상 : 이 글의 남산골 샌님은 실생활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청렴과 결백, 지조를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인물이다. 작자의 인생관, 사회관, 역사관이 표출되어 있는 중수필이다

* 주제 : 딸깍발이 정신의 현대적 계승


 

●마고자 : 윤오영 수필

나는 마고자를 입을 때마다 한국 여성의 바느질 솜씨를 칭찬한다. 남자(男子)의 의복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호사(豪奢)가 마고자다.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같은 다른 옷보다 더 값진 천을 사용한다. 또, 남자 옷에 패물(佩物)이라면 마고자의 단추다. (중략)

 

마고자는 원래 중국의 마괘자(馬褂子)에서 왔다 한다. 귀한 사람은 호사스러운 비단 마괘자를 입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청(靑)마괘자를 걸치고 다녔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 와서 마고자가 됐다는 것이다. (중략)

 

귤(橘)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남의 문물이 해동(海東)에 들어 오면 해동문물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탱자가 아니라 진주(眞珠)였다. 그런데 근래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의 것이 들어오면 탱자가 될 뿐 아니라, 내 귤까지 탱자가 되고 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

* 주제 : 문화의 주체적 수용 자세 촉구


 

●만선(滿船) : 천승세 희곡

어부A : 곰치! 크 큰일났네!

곰치 : 아니, 믓이 큰일나?

어부A : 배가 떴어~

두 사람 : (영문을 몰라) 배가 떠?

어부A : 자네 안사람이 우실이네 배를 띄웠단 마시!

곰치 : 믓이라고?

어부A : 벌써 한가운데 만큼이나 떠밀리고 있을 것이여! (중략)

 

구포댁이 뭐라 중얼대며 들어온다. 그네네 등엔 아기가 없다.

곰치 : (와락 달려들어) 아니, 어쨌다고 남의 배를 띄웠나? 엉?

구포댁 : (실실 웃으며) 나 배 안 띄웠어! 참말!

곰치 : (목을 움켜 쥐고) 말을 햇! 엇! (구포댁의 등을 보곤 기겁해서) 아니, 애기는? 애기는 으따 뒀어? 엉?

구포댁 : (손을 내저으며) 몰라! 나는 몰라! 숨줄이 끊어져도 참말로 몰라!

곰치 : 믓이? 말을 안 해? (목을 바싹 졸라 대며) 이래도? 이래도?

성삼 : (황급히 곰치의 손을 떼어 놓으며) 이라먼 못써! 물어 봐사제, 이라먼 못써! (구포댁에게) 아짐씨 나 성삼인디 나 알지라우?

구포댁 : (연방 고개를 내저으며) 애기는 몰라! 나는 몰라!

곰치 : (다시 구포댁의 목을 졸라 잡고) 이것을 나 죽이고 말 거여? 말 안 할래? 애기 으따가 뒀 어? 응? 어서 말을 해!

구포댁 : 갔다! 가 부렀어!

곰치 : 믓이? 가?

구포댁 : 쩌그 뭍으로 갔다! 가 부렀어!

곰치 : 배에다 실어 보냈구나! 응.

구포댁 : 아문? 뭍으로 가야 안 죽어! 지 명대로 살라먼 뭍으로 가야 해! 좋은 사람 좋은 부모 만 나서

호강하고 크라고! 그래사 지 명대로 살텡께! 쩌그 뭍으로 배타고 갔다.

곰치 : 이런 육실헐(戮屍-육시를 할)! (살기 등등한 눈으로 사정없이 목을 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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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전3막 6장의 비극인 이 작품은 어민들의 삶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부서 고기떼의 출 현에 만선의 꿈으로 가득차 있던 곰치는 빚을 지고 있던 선주(임제순)이 배를 빌려 주면 고기 를 많이 잡아 빚도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난 뒤 배를 빌리나, 폭풍과 풍랑에 아들(도삼이)을 잃고 자신만 간신히 구조되어 돌아온다.

 

이에 충격을 받은 곰치의 아내(구포댁)는 실성하게 되고, 마지막 남은 곰치의 희망(어부를 만 들겠다고 마음먹고 있던)인 업둥이를 빌린 남의 배에 실어 육지로 보낸다. 이에 곰치는 구포댁 과 참담한 싸움을 벌인다.

* 제목의 상징성 : 주인공 곰치의 삶의 목표와 가치

 

* 갈등 구도

-인간과 자연의 대결 구도

-빈부 간의 갈등(어민의 비참한 삶)

-운명과 의지와의 갈등

-곰치와 구포댁의 운명을 대하는 태도 차이로 인한 갈등

* 주제 : 어민들의 생활 의지(만선에 대한 집념)와 좌절

* 1964년 발표작 (명동 국립극장 공연)


●맹진사 댁 경사 : 희곡작가 오영진(1916-1974)의 처녀작인 풍자극(전 2막 5장)

등장인물

맹진사 (태량)

맹효원 (그의 숙부)

한씨 (그의 아내)

갑분 (그의 딸)

참봉, 유모, 입분, 삼돌(머슴), 길보(머슴), 김명정, 김미언, 근친(갑.을.병.정)

소작인 및 작인 1.2.3.4.5, 교군(가마메는 사람), 기타

 

제2막 제2장

무대 : 맹진사 태량의 안사랑. 가풍 있는 구가. 하수(下手)는 안방. 집 뒤로 재실이 있는 모양. 나무가 울창하고 그 중 한 그루 전나무가 상수 한 구석에 높이 섰다.

막이 열리면 마루와 방에는 초례 치를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참봉이 일단 높은 데 서서 뜰 안에 그득 모인 작인들에게 일장 훈시다.

 

참봉 : 이를테면 그럴 사정이 있어서 자네들이 익히 잘 아는 입분이가 갑분 아가씨가 됐단 말이야. 그러니까 즉 일테면 입분이가 갑분 아가씨이고 갑분 아가씬 ········ 갑분 아가씨대루 있게 됐단 말이야.

작인 1 : (일어서며) 그럼 시집 가는 건 누구예요?

참봉 : 그야 물론 갑분 아가씨가 김판서댁 며느님에 되는 세음이지.

작인 1 : 그럼 갑분 아가씨가 시집 가는구먼요.

참봉 : 아 아니다. 아니 어. 어느 갑분 아가씨 말인고?

작인 2 : 저 그럼 입분이가 갑분 아가씨구 갑분 아가씨가 입분이가 됐단 말씀인갑슈.

참봉 : 뭐, 뭤이?

작인 3 : 그 으째 셈이 잘 맞지 않는뎁쇼. 왜 그런고 하니 참봉님 말씀에 의지할진대 도대체 시집가는 아가씨가 갑분 아가씬데 실인즉은 시집가는 아가씨는 입분이니 시집 안 가는 갑분 아가씬 ····도데체 뭔갑쇼?

참봉 : 가, 가만 있어. 채근채근히·····.

작인 4 : 일이 좀 복잡해서 깨치기 곤란한뎁쇼.

작인 5 : (꾸부리고 앉아서 지푸라기 셋을 놓고 가장 논리적으로 작인 4에게 설명한다.) 복잡헐 께 없지. 내 산술로 풀어볼게. 이게 입분이렷다. 이 입분이가 갑분 아가씨가 됐단 말이지. (짚을 둘 합친다.) 그러니 둘이 하나가 됐지? 승했단(곱했단) 말이야. 그런데 말야 이 둘 중에서 하나는 시집을 가야거든 ······ 자, 갔다. (짚 하나를 멀리 떼어놓는다.) 그런데 시집 가는 이 물건이 뭐냐 할 것 같으면 즉 이게 갑분 아가씨란 말이야. 알아 들었어?

작인 4 : 그래서 ······ 그럼 남은 건 뭐야?

(중략)

맹진사 : 참봉 저리 좀 비키게. (올라서서) 너희들 참새 대가리로 궁리할 것도 없구 생각헐 것도 없다. 다시 한번 일러 둔다믄서두 이제 곧 초례를 이룰 테지만 그 당장에 나타난 신부가 누구이건 아랑곳할 게 아니란 말이다. 알아 들었어. 만일에 신랑댁에서 들오신 뒤에 너희들이 혹시 얼낌에라두 “익크! 저 신부가 입분이 아니야.” 또는 “익크! 이게 어떻게 된 판국이야.‘ 이런 소리라도 사돈댁 양반들의 귀에 들렸단 큰일 저질 테이니, 그런 줄이나 미리 짐작하구 아예 함구불언하란 말이야 알아 들었어.

일동 : 네.

소작인 : 옛날부터 상전께서들 허시는 일일랑 저희들이 아랑곳했습니까, 원.

맹진사 : 그럼 어서들 돌아가. 일 거들 사람은 일 거들구.

* 감상 : 전래 민담인 ‘뱀신랑’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이다. 인간의 진면목을 보기보다 외모, 배경, 가문, 권세 등에 욕심을 내는 맹진사를 통해 인간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주제로 하고 있다.

* 갈래 : 창작 희곡, 희극(전2막 5장)

 

* 줄거리

① 맹진사는 ‘진사進士)’란 벼슬을 돈으로 사서 양반 행세를 하는 인물로서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고,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다.

② 무남독녀 갑분이를 김판서댁에 청혼하여 승낙을 받으나 지체높은 김판서댁과 사돈이 된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사위의 선을 보지 않는다.(복선이 깔림)

③ 갑분이의 혼사준비에 바쁜 중에, 과객으로 가장한 신랑의 당숙이 찾아와, 신랑이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라고 넌지시 일러주자 집안은 발칵 뒤집힌다.

④ 이에 맹진사는 멀리 숙부 집으로 갑분이를 빼돌리고, 하녀인 입분이를 분장시켜 시집보낼 계획을 세워 놓고 흐뭇해 한다.

⑤ 혼례 당일 신랑이 나타나는데 절름발이는 커녕 훤칠한 대장부였다.

⑥ 때는 이미 늦어 하녀인 입분이가 김판서댁 도령 ’미언‘과 혼인하게 됨

⑦ 맹진사는 결국 허욕과 우매함으로 해서 하녀를 판서댁으로 시집 보냄

 

* 주제 : 인간의 허욕과 우매함 풍자. 권선징악.

 

이 작품은 시나리오 <시집가는 날>(오영진)로 각색되기도 했음

--- 희곡 <시집가는 날>


●면학(勉學)의 서(書) : 양주동 수필

독서(讀書)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東西) 전배(前輩)들의 무수(無數)한 언급(言及)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課長)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孟子)의 인생 삼락(人生三樂)에 무름지기 '독서(讀書), 면학(勉學)'의 제 4일락(第四一樂)을 추가(追加)할 것이다. 진부(陳腐)한 인문(引文)이나 만인(萬人) 주지(周知)의 평범(平凡)한 일화(逸話)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端的)으로 나의 실감(實感) 하나를 피력(披瀝)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운운(云云)이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失望)은 그 밑의 정자(程子)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度)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이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程氏)의 주(註)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當初) 소박(素朴)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現世)와 같은 명리(名利)와 허화(虛華)의 와중(渦中)을 될 수 있는 한 초탈(超脫)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求道)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백년(浮生百年),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亂後) 수복(收復)의 구차(苟且)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 안두(三尺案頭)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一穗)의 청등(靑燈)이 의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日前) 어느 문생(門生)이 내 저서(著書)에 제자(題字)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實感)으로 서증(書贈)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持說)이다. 세상에는 실제적(實際的)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實利實得)을 위한 독서를 주장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實效)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이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養成)함이다.

 

선천적(先天的)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敏感)한 이야 그야말로 다생(多生)의 숙인(宿因)으로 다복(多福)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族屬)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現實派)에게나 이상가(理想家)에게나, 다 공통(共通)히 발견의 기쁨에 있다. 콜럼버스적인 새로운 사실(事實)과 지식의 영역(領域)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로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 식의 워즈워스적인 영감(靈感), 경건(敬虔)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天才)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自我)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不斷)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驚異感)'에서 발원(發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代辯)하였다.

 

그 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天體)의 감시자(監視者)가 시계(視界) 안에 한 새 유성(遊星)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壯大)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太平洋)을 응시(凝視)하고―모든 그의 부하(部下)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定評)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知識人)으로서 동서(東西)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畢竟)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文化人)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敎養)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規定)할 것은 못된다. 누구는 '고칠 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對象)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요,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畢竟) '다(多)'와 '정(精)'을 겸(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 '박(博)'과 '정(精)'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송인(宋人)의 다음 시구는 면학(勉學)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境界)이다.

 

벌판 다한 곳이 청산인데, (平蕪盡處是靑山)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行人更在靑山外)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終始) 역설(力說)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汪洋)한 심충(深衷)의 바다에 도달(到達)하기 전에, 우선 기구(崎嶇), 간난(艱難), 칠전팔도(七顚八倒)의 괴로움의 협곡(峽谷)을 수없이 경과(經過)함을 요함이 무론(毋論)이다. 깊디 깊은 진리의 탐구(探究)나 구도적(求道的)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尋常)한 학습(學習)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倍加)된다. 비근(卑近)한 일례(一例)로,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書籍)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初步的)인 애로(隘路)는 적으니, 학생 제군(學生諸君)은 나의 소년 시절(少年時節)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漢籍)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어다기 철야(徹夜), 종일(終日) 베껴서 읽었고, 한문(漢文)은 워낙 무사독학(無師獨學), 수학(數學)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硏眞)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率直)이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笑話一片)―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距今) 50년 전의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 학교(普通學校)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杏馬勃)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 피력(披瀝) : 평소에 숨겨 둔 생각을 모두 털어 말함

- 모두(冒頭) : 글의 머리말 또는 첫부분

- 현학적(衒學的) : 학문과 지식을 자랑하는 모양.

- 부생백년(浮生百年) : 덧없이 떠돌다 가는 일평생.

- 삼척안두(三尺案頭) : 작은 책상 머리.

- 일수(一穗) : 한 가닥. 한 이삭. 여기서는 흐린 빛을 말함.

- 지설(持說) : 늘 간직하고 있는 의견. 지론(持論).

- 남아수독오거서(男兒杏讀五車書) :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의 책을 읽어야 함

- 박이부정(博而不精) : 널리 알지만 자세하지는 못함.

-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 : 눈빛이 종이를 뚫을 정도로 정독함.

- 염독(念讀) : 생각하며 외듯 읽음.

- 우수마발(牛杏馬勃) : 쇠오줌과 말똥. 가치 없는 모든 것

* 감상 : 필자는 자신의 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학문(독서)에 힘쓰는 일의 즐거움을 역설하고 있 다. 항상 무엇인가를 알아 내기 위해 땀 흘리는 것의 소중함과 애쓴 뒤에 얻는 희열이 어떠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 주제 : 독서하는 일의 즐거움(면학하는 자세)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 변영로 수필집

역시 혜화동 우거(寓居)에서 지낼 때이었다. 어느 하룻밤 바커스(Bacchus)의 후예(後裔)들인지, 유명의 직손들인지는 몰라도 주도의 명인들인 공초, 성제, 횡보 주 삼선(三仙)이 내방하였다. 설사 주인이 불주객이란 대도 이런 경우를 당하여서는 별도리가 없었을 것은 거의 상식 문제인데, 주인이랍시고 나역시 술마시기로는 결코 그들에게 낙후되지 않는 처지로, 그야말로 불가무(不可無)일배주(一杯酒)이었다.

 

하나, 딱한 노릇은 네 사람이 주머니를 다 털어도 불과 수삼원, 그때 수삼원이면 보통 주객인 경우에는 삼, 사인이 해갈(解渴)함직하였으나 오배 사인에 한하여서는 그런 금액쯤은 유불여무(有不如無)였다. 나는 아무리 하여도 별로 시원한 책략이 없어 ‘궁(窮)하면 통한다’는 원리와는 다르다 해도 일개의 악지혜(惡智慧)-그실 악은 없지만 안출하였다. 동내에서 모인집 사동(使童) 하나를 불러다가 몇 자 적어 화동 납작집에 있던 동아일보사로 보내었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은 고(故) 고하였는데, 편지 사연은 물을 것도 없이 술값 때문이었다. - 좋은 기고를하여 줄 터이니 오십원을 보내 달라는 - 우리는 아이를 보내 놓고도 마음이 여간 조이지를 않았다. 혹, 거절을 당한다든지 하면 어찌나 함이었다. 십분, 이십분, 삼십분, 한시간, 참으로 지리한 시간의 경과이었다.


 

●무소유(無所有)

󰊱 무소유 : 법정 스님 수필집 [무소유]의 표제 수필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뿐이었다. 그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중략) 지난 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중략)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중략)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 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중략)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  문학이론 <역설>

 

󰏐 [맹자] <진심장구(盡心章句)> (上)

久假而不歸惡知其非有也(구가이불귀오지기비유야)

: 오래도록 빌리고 돌아가지 않았으니 어찌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겠는가?

󰃜 인의(仁義)의 이름을 빌려 그 사적(私的)인 탐욕을 이루기를 구하는 것을 경계한 말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 : 안재홍 수필

‘天池(천지) 가’에서

병사봉이 최고봉으로서 2,744미터(9,055척 2촌)에 상당하니 안부는 넉넉 이천 수백 미터에 달할 것이오. 걸음을 옮기어 그 영상(嶺上)에 다다르매 감벽(紺碧-푸르고 푸름)한 빛을 진하게 드린 천지의 물이 그야말로 고요히 담겨 파면(派面)의 깨끗함이 거울같이 고운데, 창고(蒼古)하고 유흑한 외륜산의 천인단애(千仞斷崖)가 화구(火口)의 본색대로 사위에 치솟아서~

* 필자가 1930년 7월부터 8월 초순에 걸쳐 백두 산에 오른 체험을 기록한 수필

--- 관련단원 최익현 한문수필 <유한라산기>


●백설부(白雪賦) : 김진섭 경수필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닐 것이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릴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緣由)인지, 부지중(不知中) 온화하게 된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目禮)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抒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가면 최초의 강설(降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뜩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 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 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고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 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 애애(白雪楙楙)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이 아름다운 밤을 헛되어 자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의 정이요, 그래서 가령 우리는 어젯밤에 잘 적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최후의 단안을 내린 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조망하는 이 순간에만은 생(生)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악을 아울러 맛볼지니, 소리없이 온 눈이 소리없이 곧 가버리지 않고 마치 그것은 하늘이 내리어 주신 선물인거나 같이 순결하고 반가운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또 순화(純化)시켜 주기 위해서 아직도 얼마 사이까지는 남아 있어 준다는 것은, 흡사 우리의 애인이 우리를 가만히 몰래 습격함으로 의해서 우리의 경탄과 우리의 열락(悅樂)을 더 한층 고조하려는 그것과도 같다고나 할는지!

 

우리의 온 밤을 해복스럽게 만들어 주기는 하나,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감미한 꿈과 같이 그렇게 민속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한 번 내린 눈은, 그러나 그다지 오랫동안은 남아 있어 주지는 않는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短命)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편연(便姸) 백설이 경쾌한 윤무(輪舞)를 가지고 공중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때, 이 순치(馴致)할 수 없는 고공(高空)무용이 원거리에 뻗친 과감한 분란(紛亂)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한 심사를 가지게까지 하는데, 대체 이들 흰 생명들은 이렇게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이는 자유의 도취 속에 부유(浮遊)함을 말함인가? 혹은 그는 우리의 참여하기 어려운 열락(悅樂)에 탐닉하고 있음을 말함인가?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 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 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여,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이를 통제할 수 있으랴? 너희들은 우리들 사람까지를 너희의 혼란 속에 휩쓸어 넣을 작정인 줄을 알 수 없으되 그리고 또 사실상 그 속에 혹은 기꺼이, 혹은 할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가느 자도 많이 있으리라마는 그러나 사람이 과연 그러한 혼탁한 와중(渦中)에서 능히 결딜 수 있으리라고 너희는 생각하느냐?

 

백설의 이 같은 난무(亂舞)는 물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강설(降雪)의 상태가 정지되면, 눈은 지상에 쌓여 실로 놀랄 만한 통일체를 현출(現出)시키는 것이니, 이와 같은 완전한 질서, 이와 같은 화려한 장식을 우리는 백설이 아니면 어디서 또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주위에는 또한 하나의 신성한 정밀(靜謐)이 진좌(鎭座)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엿듣도록 명령하는 것이니, 이 때 모든 사람은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백설의 계시(啓示)에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라! 우리가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는 참으로 여기 우리 앞에 와서 있지는 않는가? 어제까지도 침울한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恩寵)에 의하여 문뜩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풀 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百花)를 달고 있음을 물론이요, 괴벗은 전야(田野)는 성자의 영지(領地)가 되고, 공허한 정원은 아름다운 선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聖化)되어 새롭고 정결하고 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諧調)에 대하여 말한다.

 

이 때 우리의 회의(懷疑)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

 

눈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줌으로 의해서 하나같이 희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만, 특히 그 중에도 눈에 덮인 공원, 눈에 안긴 성사(城舍), 눈 밑에 누운 무너진 고적(古蹟), 눈 속에 높이 선 동상(銅像) 등을 봄은 일단으로 더 흥취의 깊은 곳이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우울한 옛 시를 읽은 것과도 같이, 그 눈이 내리는 배후에는 알 수 없는 신비가 숨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공원에는 아마도 늙을 줄을 모르는 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뛰어다닐지도 모르는 것이고, 저 성사(城舍) 안 심원(深園)에는 이상한 향기를 가진 알라바스터의 꽃이 한 송이 눈 속에 외로이 피어 있는 지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저 동상(銅像)은 아마도 이 모든 비밀을 저 혼자 알게 되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참된 눈은 도회에 속할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산중 깊이 천인 만장(千?萬丈)의 계곡에서 맹수를 잡는 자의 체험할 물건이 아니면 아니된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 있는 눈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니, 가령 열대의 뜨거운 태양에 쪼임을 받는 저 킬리만자로의 눈, 멀고 먼 옛날부터 아직껏 녹지 않고 안타르크리스에 잔존(殘存)해 있다는 눈, 우랄과 알래스카의 고원에 보이는 적설(積雪), 또는 오자마자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는 상부 이탈리아의 눈 등.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눈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눈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그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서울 거리를 술집이나 몇 집 들어가며 배회하는 정도에 국한되는 것이니,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白雪賦)란 것도 근거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밖에 없다.

* 성격 : 낭만적, 예찬적

* 주제 : 백설에 대한 예찬


●보리 : 한흑구(韓黑鷗) 경수필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 들인,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정성껏 묻어 놓았었다.

 

 

크고 작은 흙덩이를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 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땅속에 곱게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묻히면, 싹이 나기 힘든다.”

고 하는 옛 사람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었다.

이제 늦은 가을의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까마귀들이 날개를 자주 저어 깃을 찾아간다.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를 펴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부지런한 꿀벌과 개미들은 물론, 그 밖의 온갖 벌레들까지도 다 제 집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란 억새풀이 풀솜 같은 꽃만을 싸느란 하늘에 날리고 있다.

다 말라 붙은 갯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도 푸른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어 찌푸리고 있는데, 너,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모든 화초는 대지의 품안에 고이 잠들었을 때,너, 보리만은 그 야무진 팔을 내뻗고, 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세차게 자라 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꼼짝도 아니 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 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다. (중략)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끝)

 

* (중략) 부분 내용 : 보리의 인고(忍苦)의 삶과 고난 극복과 환희 / 결실의 단계 / 수확

* 성격 : 예찬적, 서정적 성격

* 주제 : 고난을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가는 보리의 강한 생명력 예찬.

 

 ‘보리’의 상징적 의미

보리는 다른 작물과 달리 가을에 파종하여 추운 겨울, 눈 밑에서 그 생명력을 키운다. 그리하여 봄이 되면 온 들판을 푸른 물결로 덮어 버린다. 그 끈질긴 생명력과 순박성은 묵묵히 이 땅의 역사를 지켜온 “농부”들의 모습과 일치한다 하겠다.

---  이성부 <벼>


●산정무한(山情無限) : 정비석 수필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峯)들을 대면(對面)하려고 새댁 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 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氣稟)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朝飯)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삼아 탐승(探勝)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遠近) 산악이 열병식(閱兵式)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은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登)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색(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痒)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장안사(長安寺)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 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二等邊三角形)으러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千萬不當)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찾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 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하여 천지에 참괴(慙愧)함이 없는 공명(公明)한 심경을 명경지수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루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 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그대로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有無)를 이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 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신라조(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 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明鏡)에 영조(暎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를 감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처럼 막아 서는 웅자(雄姿)가 석가봉(釋迦峯)! 뒤로 맹호(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이 천진봉(天眞峯)! 전후 좌우를 살펴봐야 협착(狹窄)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狹谷)!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由來談)을 길잡이에게 들어 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도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樹木)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 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이요, 벽공(碧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봉봉(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不意)의 신화(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珠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海綿)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金兄)은 몇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畵幅)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 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琓賞)하며, 몇십 굽이의 석계(石階)와 목잔(木棧)과 철삭(鐵索)을 답파(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 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 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 척의 망군대(望軍隊)―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峯)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峯)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보니, 발 밑은 천인단애(千?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계곡(黃泉溪谷)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詞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알같이 고왔다.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함(摩詞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러 30명은 됨직하다. 이런 심산(深山)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은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淸山行欲盡]

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 글 그대로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동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 듯 새로워졌다.

"남포동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해서, 나도 장난 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 송이 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 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 소린가 했더니 물 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 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苔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陋名) 쓴 장화(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伯爵)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갔다.

 

자꾸 깊은 산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峯)이 발 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陰散)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가, 돌연 일진 광풍(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 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이랑으로 섞바꾸어가며 짜 놓은 비단결 같이 봉에서 골짜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 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峯)을 영송(迎送)하는 것도 과히 장관(壯觀)이엇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海)로 변해 보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 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絶頂)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던 선착개(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주낟.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는 몰아치는 빗발이 뒤집히는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노(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지, 이렇게 만상(萬象)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졌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最古點)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眺望)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었다. 내 외 해(內外海) 삼 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쑤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척을 가하고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萬壑千峯)을 발 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일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 장군(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던―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 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 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하략)

 

- 준봉(峻峰) : 높고 험한 봉우리

- 탐승(探勝) : 경치 좋은 곳을 찾아 구경함

- 스탬프 북 : 명승지 탐방을 기념하기 위해 도장을 찍도록 만든 공책

- 외연(巍然) : 높고 우뚝함

- 염마(閻魔) : 염라 대왕

- 신용(神容) : 신과 같이 거룩한 모습

- 협착(狹窄) : 매우 좁음

- 요원 : 불이 번진 벌판

 

* 감상 : 금강산을 여행하며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문체로 그 견문과 감상을 기록한 수필이다. 금강산 장안사로부터 명경대를 거쳐 황천계곡과 망군대, 마하연과 비로봉, 그리고 마의태자 묘 지에 이르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서경과 서정이 잘 어우러져 있다.

* 갈래 : 경수필

* 문체 : 만연체, 화려체

* 주제 : 금강산의 장관과 탐승의 정취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 오영진 희곡

이중건 쉬잇, 누가 나온다.

이중생 이크! (황급히 옆방으로 가다가 책상에 걸려 넘어진다. 옆방으로 가서 병풍(屛風) 뒤에 숨는다. 맹인, 안방에서 나오며 중얼중얼 경문을 외치며 다다미방을 거쳐 사라진다.)

용석아범 (왼쪽에서 황급히 나오며) 관가 손님이 오십니다.

이중건 응, 벌써 와? 아범은 어서 들어가 주안상을 탐탁히 봐 내오게. 술은 저 뭐라구 했지? 양인들이 먹는 거 그게 상등이라니 그걸 내오구, 안주도 성벽해서 입맛에 당기는 거 루 챙기라구 쥔 마나님 보구 여쭤.

용석아범 네, 네, 걱정 마세요. 아침부터 채려 놓구 기다리는걸요.

(안으로 들어가자 최 변호사, 임표운, 김 의원 등장. 이중건, 버선발로 마중 나간다.)

이중건 공사간 분망허신데 이처럼 오시니 황송합니다.

최변호사 어서 올라가십시다. 돌아가신 분두 퍽 영광으로 생각허실 겝니다. 아 참, 소개하죠. 이분 이 바루 고인의 친형이신 이중건 씨, 이분은 국회 특별 조사 위원회의 김 선생님. 이분 이 상주(喪主) 되시는 송달지 씨.

이중건 잘 보시구 잘 처분해 주십시오. 온, 이 일 때문에 늙은 게 잠도 잘 못 잔답니다.

(인사를 바꾼다.)

김의원 망극(罔極)합니다.

송달지 뭐…… 괜찮습니다.

김의원 영구 모신 데가……?

송달지 저 방이올시다.

이중건 그리 급할 게 있습니까? 우리 술이나 한 잔 나누시구……. 게 누구 없느냐?

김의원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소향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송달지 네, 이리 들어오시죠.

김의원 그럼 잠깐……. (2인 옆방으로 들어간다. 우씨 뛰쳐나오며)

우 씨 임 선생이 왔다지, 응? 관가에서 나왔다지? 어서 우리들 얘기를 좀 그럴듯하게 해요. 과 히 억울치나 않게 돼야 할 게 아니오? 영감두 돌아가신 거루됐구.

최변호사 쉿.

우 씨 에그 참, 정신두 없어라. 염감일랑 완전히 돌아가셨으니 남은 식구들일랑 어떻게 굶주리 지나 않게 돼야 할 게 아니오?

임표운 마님께선 들어가 계십쇼. 최 선생님이 요량해서 잘 처리허실 테이니.

최변호사 쓸데없는 걱정일랑 덮어 노십쇼, 헛헛. 모두가 수완 나름이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 회를 만만히 놓치겠어요, 헛헛.

우 씨 그럼 꼭 믿습니다. 술일랑 얼마든지 있으니 애들에게 일르슈. 삐루두 있구 영감 자시 는 양국 술두 아직 몇 상자 남았다우

임표운 어서 들어가십쇼, 나오십시다.

우 씨 그럼 최 선생님, 꼭 믿구 있습니다. (우씨 들어가자 송과 김, 다시 나온다.)

최변호사 이리 앉으시죠. 주안상이 나왔으니 목이나 축이시구.

김의원 아니올시다. 곧, 실례허겠습니다.

최변호사 상가에 오셨다 그냥 가시는 법이 어딨습니까?

김의원 그럼 잔칫집처럼 뛰다니구 놀아야 합니까?

최변호사 헛, 헛, 그런 게 아니와요. 저, 어서 한 잔 드십쇼.

김의원 (마지못해 술잔을 든다.) 고인의 아들두 광복 전에 학도 지원병 간 이가 있었죠?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최변호사 그러니 말씀입니다. 영감두 삼대 독자루 눈에 넣어두 아프지 않을 귀여운 자식인데 십 년 동안이나 화태에서 억류되었다가 오늘에야 돌아온다는 소식이 어제서 왔습죠. 며 칠만 더 참으셨던들 이런 변이 없었을 지도 모를게 아닙니까?

이중건 죽는 순간까지 ‘우리 하식이, 우리 하식이’허문설랑 차마 눈을 못 감더군요.

김의원 그럼 영감께서는 운명하시는 걸 보셨구먼요?

이중건 그럼요, 내가 눈을 감겼죠. 경동맥으로 면도칼을 싹둑 잘러 버렸는걸.

김의원 경동맥으로 면도칼을 잘러요?

최변호사 헛, 헛…… 취하셨군. 면도칼로 경동맥을 끊었지.

이중건 어, 참…….

최변호사 그래서 여기가 왼통 피바다가 됐더랍니다. 유설랑 고시란히 책탁 위에 놓여 있었죠. 송 선생……. 유서는 벌써 전에 꾸며 놓으셨죠, 네?

김의원 유언엔 전 재산을 송 선생께 양도하기루 됐다죠?

최변호사 글쎄, 이 점이 또 고인이 대범하시구 출중허신 점이죠. 보통 인간 같구볼 지경이면 제 아무리 열 사위 미운 데가 없다구 한들 아들 딸을 한 구들두구 어떻다구 사위에게 전 재산을 양도헌답니까? 들어 보십쇼. 돌아가신 어른의 의견이……. 돈이란 건, 그걸 잘 이용할 줄 알구 나라에 유익되게 쓸 줄 아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법이다. 저 혼자 잘 먹구 흥청거리구 놀라구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국가적인 사업을 하자구 귀하기두 하 구 필요두 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깐 돈이란 벌기보담 쓰기가 힘든 물거닝라……. 하 식 군으로 볼 지경이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아직 입에 젖비린내 나는 삼십 살 풋내기 야 나라를 위해 적당히 쓸 줄 알 리 없을 터이구, 백씨 영감이야 실례의 말씀이지만 시 골 양반이니 세상 물계를 아실리 없으니 이루 두말할 필요조차 없구 보니, 예라 모르겠 다, 그래두 믿을 만한 위인은 문중을 둘러봐두 여기 계신 송 선생밖엔 없으려 니……. 그래서 유서두 그렇게 쓰셨죠. 그렇습죠? 고인의 유지가……. 송선생……?

 

* 감상 : 이 작품은 3막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49년 5월 극예술협의회에서 초연되었으나 별 주목을 끌지 못했고, 1957년 국던 ‘신협(新協)’이 ‘인생차압’으로 개명하여 공연하면서 인끼를 끈 작품이다.

이 작품은 광복과 더불어 마땅히 청산되었어야 할 친일세력이 광복 후에도 새롭게 밀려드는 외세에 아첨해서, 권력과 부를 누리며 여전히 건재하는 병든 사회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 다. 더 나아가 한 시대의 종언과 함께 새 시대의 등장을 암시하고 있다.

* 갈래 : 희곡(희극 혹은 비희극, 풍자극, 사회극)

* 성격 : 극적, 풍자적, 비판적

* 배경 : 1940년대 말, 서울

* 표현상의 특징

· 주인공의 희화화 - 냉소적, 비판적 태도 유도

· 극적 긴박감과 희극적 분위기를 함께 공존시킴으로써 긴장과 이완의 효과

* 주제 : 친일 잔재 세력의 청산과 새 시대의 개막 염원


 

●생활인(生活人)의 철학(哲學) : 김진섭 수필집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專有物)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니, 왜냐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 - 사람에게 인생의 의의와 인생의 지식을 교시하려는 의도를 거의 방기(放棄)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俗世)와 절연(絶緣)하고 관외(關外)에 은둔하여 고일(高逸, 높고 현실과 동뜬 )한 고독경(孤獨境)에서 자기의 담론(談論)에만 오로지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知覺)을 완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의 철학자 임어당이 일찍이 "내가 임마누엘 칸트를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석 장 이상 더 읽을 수 있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논리적 사고가 과도(過度, 지나친 정도)의 발달을 성수(成遂)하고 전문적 어법이 극도로 분화한 필연의 결과로서, 철학이 정치, 경제보다도 훨씬 후면에 퇴거(退去)되어, 평상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측면을 통과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기묘한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서, 사실상 오늘에 있어서는 교육이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철학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이 없는 대표적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철학자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과 같이 속인에게도 철학은 필요하다. 왜 그러냐 하면 한가지 물건을 사는 데에 그 사람의 취미가 나타나는 것 같이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세계관, 즉 철학은 개재되어야 할 것이요, 자기의 직업을 결정하는 경우에도 그 근본적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인생관이 아니어서는 아니되겠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들이 결혼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볼 때, 한 남자로서 혹은 한 여자로서 상대자를 물색함에 제(際, 즈음)하여 실로 철학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지배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우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을 설계하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들이 부지중에 채택한 철학에 의거하여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활권 내에서 취하게 되는 모든 행동의 근저에는 일반적으로 미학적 내지 윤리적 가치 의식이 횡재(橫在, 가로 놓여)하여 있는 것이니, 생활인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어떤 종류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소위 이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이상이 각인의 행동과 운명의 척도가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상이란 요컨대 그 사람의 철학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일반적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온 규범의 파생체(派生體)를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선택의 주인공이 된 이래 그것이 그대를 천 사람 속에서 추려 내었다'고 햄릿은 그의 우인(友人) 호레이쇼우에게 말하였다. 확실히 우인의 선택은 임의로운 의지적 행동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인생 철학에 기초를 두는 한, 이상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햄릿은 그에 대하여 가치가 있는 인격체이며, 천지지간 만물에 대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 인생 생활을 저 천재적이나 극히 불운한 정말(丁抹)의 공자보다도 그 근본에 있어서 보다 잘 통어(統御)할 줄을 아는 까닭으로 호레이쇼우를 우인으로 택한 것이다. (중략)

 

나는 흔히 철학자에게서 생활에 대한 예지의 부족을 인식하고 크게 놀라는 반면에는, 농산어촌의 백성 또는 일개의 부녀자에게 철학적인 달관을 발견하여 깊이 머리를 숙이는 일이 불소(不少, 적지 않음)함을 알고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나에게는 필부필부의 생활 체험에서 우러난 소박, 진실한 안식(眼識)이 고명(高名)한 철학자의 난해한 칠봉인(七封印, 일곱 번이나 봉해 놓은)의 서(書)보다는 훨씬 맛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현실적 정세를 파악하고 투시하는 예민한 감감과 명확한 사고력은, 혹종의 여자에 있어서 보다 더 발견되어 있으므로, 나는 흔히 현실을 말하고 생활을 하소연하는 부녀자의 아름다운 음성에 경청하여, 그 가운데서 또한 많은 가지가지의 생활 철학을 발견하는 열락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좋은 경구(警句)는 한 권의 담론서보다 나은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인생의 지식인 철학의 진의를 전승하는 현철(賢哲)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무명의 현철은 사실상 많은 생활인의 머릿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생활의 예지 --- 이것이 곧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다. (결말부)

 

* 감상 : 오늘날의 철학이 고답적, 전문적, 사변적(경험의 도움이 없는 순이론적 경향), 현학적인 경향으로 흘러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무명의 생활인이 가 지고 있는 예지가 진실로 가치있는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 표현 : 만연체의 중후한 문체, 한자어(투)를 많이 사용한 현학적 표현

* 성격 : 교훈적, 사색적

* 갈래 : 중수필

* 주제 : 철학과 현실과의 거리감과 생활인의 예지


 

●수필(隨筆) : 피천득 수필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女人)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平坦)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버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靑春)의 글은 아니요, 서른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情熱)이나 심오(深奧)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頹落)하여 추(醜)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懶怠)하지 아니하고, 속박(束縛)을 벗어나고서도 산만(散漫)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優雅)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인간성이나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막스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저자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도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 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스러나 수필가 햄은 언제나 차알스 램(C. Lamb)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분지일까지도 숫제 초조(焦燥)와 번잡(煩雜)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전문)

* 감상 : 피천득의 수필은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겪는 작고 아름다운 일들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들에는 단순한 감각적인 기쁨에 속하는 작은 일도 있고, 어린 시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도 있으며, 인간 행복의 원형을 보여 주는 일면도 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위암 장지연 사설(논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고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전문)

* 출전 : [황성신문] 2,101호(1905. 11. 20)


●신록예찬 : 이양하 수필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萬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푸른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延專)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命名)하여 주고, 또 나 자신도 하룻동안에 가장 기쁜 시간을 이 자리에서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群俗)을 떠나 고고(孤高)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仙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甲男乙女)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활(恍惚)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 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授受)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라도 우렁차게 터져 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 칠정(五欲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寧日)을 가지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汚點) 또는 한 잡음(雜音)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서,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마찬가지로 숨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의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나의 모든 욕망(欲望)과 굴욕(屈辱)과 고통(苦痛)과 곤란(困難)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볕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마음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의 흉중(胸中)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眼前)에도 신록이다. 주객 일체(主客一體), 물심 일여(物心一如)라 할까, 현요(眩耀)하다 할까. 무념 무상(無念無想), 무장 무애(無障無礙),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混亂)도 없고, 심정의 고갈(枯渴)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의 유열(愉悅)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汚辱)과 모든 우울(憂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相剋)과 갈등(葛藤)을 극복하고 고양(高揚)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하략)

 

* 감상 : 신록이 우리에게 주는 이로움과 아름다움, 풍요함 등을 최대한 찬사의 태도로 표현한 수 필이다.

* 주제 : 신록의 아름다움 예찬

* 출전 : [이양하수필집](1947)


●심춘순례 서(尋春巡禮 序) : 최남선 기행 수필 서문(1925)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문학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서 어떠한 풍우(風雨)라도 마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한 작은 학도(學徒)요, 우리 정신의 한 어설픈 탐구자(探究者)로서, 진실로 남다른 애모(哀慕)와 탄미(歎美)와 함께 무한한 궁금스러움을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에 가지는 것입니다. 자갯돌 하나와 마른나무 한 밑동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흥미(興味)와 또 연상(聯想)을 자아냅니다. 이것을 조금씩 색독(色讀)이나마 하게 된 뒤부터 우리 나라가 위대한 시의 나라, 철학의 나라임을 알게 되고 또 완전, 상세한 실물적(實物的) 오랜 역사의 소유자임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쳐다볼수록 거룩한 우리 정신의 불기둥에 약한 시막(視膜)이 퍽 많이 아득해졌습니다.

 

곰팡내나는 서적(書籍)만이 이미 내 지견(知見)의 웅덩이가 아니며 한 조각 책상만이 내 마음의 밭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서적과 책상에서 불구(不具)가 된 내 소견(所見)을 진여(眞女)한 상태로 있는 활문자(活文字), 대궤안(大軌案)에서 교정(矯正)받고 보양(補養)을 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통절히 느꼈습니다. 묵은 심신(心身)을 시원히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공기를 국토 여래(國土如來)의 상적토(常寂土)에서 호흡하리라 하는 열망은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나의 가슴을 태웠습니다. 힘 자라는 대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국토 예찬(國土禮讚)을 근수(勤修)하기는, 나로서는 진실로 숭고한 종교적 충동에 끌린 바로서, 부득불연(不得不然)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큰 재와 힘을 여기서 얻었고, 얻고, 얻을 것이니, 생활의 긴장미로만 해도 나의 이 수행(修行)은 오래도록 계속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토에 대한 나의 신앙은 일종의 애니미즘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보는 그것은 분명히 감정이 있으며 웃음으로 나를 대합니다. 이르는 곳마다 꿀 같은 속삭임과 은근한 이야기와 느꺼운 하소연을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심장은 최고조(最高潮)의 출렁거림을 일으키고 실신(失神)할 지경까지 들어가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그런 때의 나는 분명한 한 예지자(叡智者)의 몸이요, 일대 시인(一大詩人)의 마음을 가지지만, 입으로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운율(韻律) 있는 문자로 그대로 재현치 못할 때, 나는 의연(依然)한 일범부(一凡夫)며, 일복눌한(一撲訥漢)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섭섭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작은 재주는 저 큰 운의(韻意)를 뒤슬러 놓기에는 너무도 현격(懸隔)스러운 것이니까, 워낙 애닯고 서운해 할 염치(廉恥)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혹은 유적(遺蹟), 혹은 전설(傳說)에 내일을 기다리기 어려운 것도 있고, 혹은 자연의 신광(神光), 혹은 역사의 밀의(密意)에 모르는 체할수 없어서, 변변치 않은 대로, 간 곳마다 견문고검(見聞考檢)의 일반(一斑)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진실로 문장으로 보거나 논고(論考)로 볼 것이 아니요, 또 천 년의 숨은 자취를 헤쳤거나 만인의 심금(心琴)을 울릴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대로 우리 국토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넘쳐 나온 것이니, 내게는 휴지(休紙)로 버리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아니합니다. 이러므로, 다만 한 가지 또 어슴푸레하게라도, 우리 정신(精神)의 숨었던 일면이 나타난다면 물론 분외(分外)의 다행입니다. 그렇진 못할지라도, 우리 청전구물(靑氈舊物)에 대한 나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정리(情理)를 담은 것이 혹시나 강호(江湖)의 동정을 산다면, 이 또한 큰 소득입니다. 아무튼 우리 국토의 큰 정신을 노래해 내는 이의 어릿광대로 작은 끄적거림을 차차 책을 모아 갈까 합니다.

 

이제 그 첫권으로 내는 [심춘 순례(尋春巡禮)]는, 작년 삼월 하순부터 수미(首尾) 50여 일간,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한 순례기(巡禮記)의 전반을 이루는 것이니, 마한(馬韓) 내지 백제인(百濟人)의 정신적 지주였던 신악(神岳)의 여훈(餘薰)을 더듬은 것이요, 장차 해변(海邊)을 끼고 내려가는 부분을 합하여 서한(書翰)의 기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진인(震人)의 고신앙(古信仰)은 천(天)의 표상(表象)이라하여 산악(山岳)으로써 그 대상을 삼았으며, 또 그들의 영장(靈場)은 뒤에 대개 불교에 전승되니, 이 글이 산악 예찬(山岳禮讚), 불도량 역참(佛道場歷參)의 관(觀)을 주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적을 것도 많고 적을 방법도 있겠지만, 매일 적잖은 산정(山程)을 발섭(跋涉)하고 가쁜 몸이 침침한 촛불과 대하여 적는데는 이것도 큰 노력이었습니다. 선재(選材)와 행문(行文)이 다 거침을 극(極)한 것은 부재(不材) 이외에도 까닭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고치자니 새로 짓는 편이 도리어 손쉽고, 새로 짓자니 그만 여가가 없으므로 숙소에서 주필(走筆)하여 날마다 신문사로 우송(郵送)하였던 원고를 그대로 배열하게 되었습니다. 후안(厚顔)의 꾸지람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행중(行中)에 여러 가지 편의를 주신 연로(沿路)의 여러 대방가(大方家), 특히 각 산(各山)의 법승(法僧)들에게 이 기회에 심대(甚大)한 사의를 드립니다. 또, 남순 소편(南巡小篇)에 다소라도 보람 있는 구절이 있다면, 이는 시종 일관(始終一貫)하게 구책 유액(驅策誘掖)의 노(勞)를 취해 주신 여러분의 현교(顯敎)와 암시에서 나온 것임을 아울러 표백(表白)해 둡니다.

 

* 감상 : 최남선이 조선의 국토를 순례하며 느낀 국토에 대한 예찬적 사랑을 적어 놓은 수필이다. 그 첫권으로 낸 [심춘 순례(尋春巡禮)]는, 50여 일간,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한 순례기(巡禮 記)의 전반부로서 책상에서 얻는 지식을 떠나 산 지식을 얻는 소중한 경험을 담아 놓고 있다.

* 성격 : 예찬적, 감격적

* 주제 : 조선 국토에 대한 사랑


●양잠설(養蠶說) : 윤오영 수필

 

어느 촌(村)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었다. 달은 환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뽕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퉁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다.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며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된다. 이것을 최면기(催眠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념을 해 버린다. 그러고는 실을 토해서 제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 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脫皮)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뽕을 먹기 시작한다. 초잠 때와 같다.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 해서 최면, 탈피, 기잠이 된다. 이것을 일령이령(一齡二齡) 혹은 한 잠 두 잠을 잤다고 한다. 오령(五齡)이 되면 집을 짓고 집 속에 들어 앉는다. 성가(成家)된 것을 고치라고 한다. 이것이 공판장에 가서 특등, 일등, 이등, 삼등, 등외품으로 평가된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것과 꼭 같다고 생각했다.

 

* 특징 : 평범한 구체적 사실로부터 추상적인 진실을 발견하는 예리한 관찰력과 직관적 사고

* 제재 : 누에의 성장 과정

* 주제 : 문학 수업의 단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함


●우덕송(牛德頌) : 이광수 수필

그런데 소는 어떠한가. 그는 말의 못 믿음성도 없고, 여우의 간교함, 사자의 교만(驕慢)함, 호랑이의 엉큼스럼, 곰의 우직(愚直)하기는 하지마는 무지(無知)한 것, 코끼리의 추(醜)하고 능글능글함, 기린의 외입장이 같음, 하마의 못생기고 제 몸 잘 못 거둠, 이런 것이 다 없고, 어디로 보더라도 덕성(德性)스럽고 복성스럽다. ‘음메’하고 송아지를 부르는 모양도 좋고, 우두커니 서서 시름없이 꼬리를 휘휘 둘러 “파리야 달아나거라. 내 꼬리에 맞아 죽지는 말아라.”하는 모양도 인자(仁慈)하고, 외양간에 홀로 누워서 밤새도록 슬근슬근 새김질을 하는 양은 성인이 천하사(天下事)를 근심하는 듯하여 좋고, 장난꾼 아니놈의 손에 고삐를 끌리어서 순순히 걸어가는 모양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 같아서 거룩하고, 그가 한 번 성을 낼 때에 ‘으앙’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뜨고 뿔이 불거지는지 머리가 바수어지는지 모르는 양은 영웅(英雄)이 천하를 위하여 대노(大怒)하는 듯하여 좋고, 풀판에 나무 그늘에 등을 꾸부리고 누워서 한가히 낮잠을 자는 양은 천하를 다스리기에 피곤한 대인(大人)이 쉬는 것 같아서 좋고, 그가 사람을 위하여 무거운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아 넘기는 것이나 짐을 지고 가는 양이 거룩한 애국자나 종교가가 창생(蒼生)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치는 것과 같아서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상을 위하여 일하기에 등이 벗어지고 기운이 지칠 때에, 마침내 푸줏간으로 끌려 들어가 피를 쏟고 목숨을 버려 사랑하던 자에게 내 살과 피를 먹이는 것은 더욱 성인(聖人)의 극치인 듯하여 기쁘다. (계속)

 

* 감상 : 소의 행동들에 각기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덕성을 작자의 풍부한 상 상력을 통해 여러 유형의 인물에 비유하고 있다.

* 주제 : 소의 덕성 예찬

---  안국선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금수’


●원고지 : 이근삼 희곡

장남 : 전 이 집 장남입니다. 이 쪽 높은 방은 저하고 누이가 함께 생활하는 곳입니다. 아버지를 소개하기 전에,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을 말씀 드리겠어요.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 는 자식들에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밥 세 끼도 제대로 못 먹이고, 학비도 제대로 못 주는 부모들이, 아들 딸이 결혼할 때가 되면 아주 귀찮게 간섭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 런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집이 비교적 행복한 것도 우리 부모의 열렬한 책임감 때문입 니다. (자기 팔뚝 시계를 보며) 지금이 저녁 일곱 시 반이니, 아마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겁니 다. 아버지는 늘 쾌활한 얼굴에다 발걸음은 참새처럼 가볍지요.

 

(졸음이 오는 지루한 음악과 더불어 철문(鐵門) 도어가 무겁게 열리며 교수 등장. 아래 위 양 복이 원고지를 덧붙여 만든 것처럼 이것도 원고지 칸 투성이다. 손에는 큼직한 낡은 가방을 들고 있다. 허리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는데, 허리를 돌고 남은 줄이 마루에 줄줄 끌려 다닌다. 쇠사슬이 도어 밖까지 나가 있어 끝이 없다. 도어를 닫고 소파에 힘들게 앉는다. 여전히 쇠사 슬을 끌고 다니면서, 가방은 자기 옆에 놓고 처음으로 전면을 바라본다. 중년에 퍽 마른 얼굴.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고, 찌푸린 얼굴은 돌모양 변화가 없다. 잠시 후, 피곤하다는 듯이 두 손 을 옆으로 뻗치면서 크게 기지개를 한다. ‘아아’하고 토하는 큰 하품은 무엇에 두드려맞아 죽는 비명같이 비참하게 들려, 오히려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장녀가 플랫폼에 나타난다.)

(발단부)

 

* 감상 :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잊어버린 채 기계적인 일상 생활에 얽매여 살아가는 한 가정 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린 단막 희극이다. 희극적 효과를 위해 지문과 대사에도 속어를 사용 하고, 인물과 소도구의 표현을 비현실적으로 과장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 갈래 : 반극, 부조리극, 상황극, 단막극

* 배경 : 어느 교수의 집, 현대(구체적 시간은 없음)

* 등장인물

· 교수 : 한 때의 꿈과 이상이 지금의 현실과 아버지로서의 의무감에 짓눌려 의지를 상실한 인 물

· 처 : 교수와 비슷한 부류. 교수와 자식의 중간 역할

· 장남·장녀 : 신체 건강하나 세속적이고 현실적 욕구에 가득한 인물

· 감독관, 천사 : 관념적 인물. 감독관은 현실의 압력을, 천사는 꿈과 이상을 상징함

* 구성 : 발단·상승·절정·하강·결말

* 주제 :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풍자

* 출전 : [사상계](1959, 5월호), 희곡집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 면암 최익현(崔益鉉) 기행수필

수단화(水團花)와 철쭉꽃이 좌우로 나란히 심어져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어, 이 또한 비길데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이런 풍경에 취해 한참 동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상춘곡>의 '物我一體' 경지와 비슷함)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 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즐비(櫛比)한 인가가 대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날이 저물어 어느 큰 집에 숙소를 정했다. 하늘이 컴컴하고 바람이 자는게 비가 올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짐꾼에게 날씨를 물었더니,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더 심하다는 대답이었다. 또, 바로 돌아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그러나 나는 술 한잔과 국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일행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돌길은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나타나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로 바꾸어 타는 곳이었다.

 

바다와 산들이 차례로 자태를 드러내기에, 짐꾼을 시켜 말을 돌려 보내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고서 올라갔다. (중략)

 

"이 산 구경을 중도에서 그만두자고 한 것이 모두 그대들이었는데,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않는가 ?"

(안도감,반가움,기쁨이 내포-이랬다 저랬다 하는 데 대한 훈계로 정말 화를 낸 것은 아님)

 

* 감상 : 이 글은 최익현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풀려나던 해 봄에 한라산을 유람하 고 그 진면목을 적은 기행적인 글이다.

 

* 특징

1) 필자의 강인한 정신, 치밀한 관찰력, 비판적 안목이 담긴 글

2) 변화와 흥취를 대화(對話), 명시(名詩), 명구(名句)를 인용하여 효과적으로 표현

* 주제 : 한라산 탐승과 그 견문, 한라산 등반의 권유.

* 출전 : 면암집(勉庵集)(1931)

---  <한라산등척기>(이은상), <백두산등척기>(안재홍)


●은전(銀錢) 한 닢 : 피천득 수필

내가 상해에서 본 일이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錢莊)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 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 놓으면서,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 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하고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좋소’하고 내어 준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 넣고 절을 몇 번이나 하며 간다. 그는 뒤를 자꾸 돌아다 보며 얼마를 가더니,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 속에 손을 넣고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하고 묻는다. 전장 주인도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다보더니,

“이 돈을 어디서 훔쳤어?”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 아니예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좋소’하고 던져 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난다. 뒤를 흘끔 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선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나 않았나 만져보는 것이다. 거치른 손바닥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는다. 그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쭈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들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나 열중해 있었는지 내가 가까이 간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 줍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는 내 말소리에 움칠하면서 손을 가슴에 숨겼다. 그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아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원짜리를 줍니까? 각전(角錢)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으로 몇 닢씩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 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大洋) 한 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가지고 싶었습니다.”  (전문)

 

· 전장(錢莊) : 돈을 바꾸는 집

· 각전(角錢) : 잔돈

· 대양(大洋) : ① 대륙을 둘러싼 큰 바다, ② 중국 화폐인 은전(銀錢)의 이름

* 갈래 : 경수필, 서사적(소설적) 수필

* 주제 : 소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그 성취의 기쁨

 

󰏐 콩트(conte, 프)의 특징과 그 기법의 도입

지금까지 우리 수필이 사용한 시점은 대부분이 1인칭 시점, 그것도 글 속의 ‘나’가 ‘남’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이 주류였다. 물론, 이런 시점의 글이라고 해서 콩트의 기법을 도입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만 고집한다면, 시점의 선택이 자유롭다는 콩트(소설)의 특징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수필의 시점이 이렇게 고정된 것은, 수필은 자기 고백의 글이라고 믿는 데서 온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남’의 이야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콩트의 정의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콩트가 ‘인생의 순간적 한 단면’을 다룬다는 점이다. 비유컨대 콩트는 인생의 비디오 필름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콩트의 기법을 도입한다고 할 때, 그것은 가령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와 같은 포괄적 질문에 답하려는 수필이 아니라, 인생에는 이런 ‘한 단면’도 있다와 같은, 어떤 한 순간을 보여 주려는 수필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물론 인생에 대한 어떤 포괄적 질문에 답하려는 수필도 써야 한다. 그러나 그런 수필은 굳이 콩트 기법의 도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콩트의 정의에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그 종차(種差)의 또 한 부분인 ‘예각적’, ‘포착’이라는 용어이다. 인생의 순간적 한 단면에 대한 예각적 포착, 이것이야말로 콩트의 생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콩트의 한 특성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작가들에게 마치 섬광 같은 위트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위트는 인생의 순간적인 한 단면에 대한 예각적 포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일 뿐만 아니라, 독자가 예상치 못한 결말을 깜짝 놀라게 빚어 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산뜻한 공감을 체험케 하는 작가의 역량이다. ···(중략)···

 

피천득의「은전 한 닢」은 서사 수필이다. 즉, 인물과 배경과 사건으로 구성된 이야기 수필이다. 이 글은 또 1인칭 시점이기는 하나, ‘나’가 ‘남(거지)’의 이야기를 하는 시점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가 ‘나’를 이야기하는 우리 수필의 주된 시점에서 해방된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다룬 것은 인생에 대한 포괄적인 문제가 아니라 무목적의 순진한 소유욕이라고나 할 그 한 단면이다. 필자는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라는 거지의 말(이 글의 결말)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참으로 놀라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일관성(一貫性)에 대하여 : 김광섭 수필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린 나를 감시하던 그 일본 헌병, 소곤소곤 들리던 독립군 이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 삼일 운동, 이 일들은 모두 나의 어린 가슴 속에 민족사의 한 목표(目標), 내가 향해서 걸어가야할 목표를 설정해 준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지만, 그런대로 이 한 목표를 향하여 일관(一貫)하게 가는 길이라 별다른 후회(後悔)가 없다. (중략)

 

인생, 나는 이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관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방황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남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은 우리의 인생은 이것이 첫째 자기 구제(自己救濟)인 것이다. (끝)


●조국(祖國)

 

󰊱 유치진 희곡 <조국>

□ 전 1막 2장

때 : 1919년(기미년) 3월 1일 아침

곳 : 서울

나오는 사람들

박정도 ········ 고학하는 어느 전문 학교 학생

어머니 ········ 과부

혁 ············ 정도의 동료

장 서방 ······· 40여 세의 황아장수

구한국 시대 군인 일본 헌병

그 밖에 학생 및 군중 다수

무대 : 박 정도 모자가 외롭게 사는, 한길에 면한 방 한 간과 부엌 한 간의 가난한 집

󰊲 ---  정완영 구별배행 시조 <조국>


●지조론(志操論) : 조지훈

지조한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정당운동을 통한 정치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정책을 통해서의 정상(政商)인 이상, 백성을 버리고 백성이 지지하는 공동전선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부동(浮動)은 무지조로 규탄되어 마땅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현실과 이 난국을 수습할 지도자의 자격으로 대망하는 정치가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 능한 직업정치인보다 지사적 품격의 정치 지도자를 더 대망하는 것이 국민전체의 충정인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염결(廉潔), 공정(公正), 청백(淸白), 강의(剛毅)한 지사정치만이 이 국운을 만회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모든 정치 지도자에 대하여 지조의 깊이를 요청하고 변절의 악풍을 타매(唾罵)하는 것은 백성의 눈물겨운 호소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조는 다같이 절개에 속한다. 지조는 정신적인 것이고, 정조는 육체적인 것이라고들 하지만, 알고 보면 지조의 변절도 육체생활의 이욕(利慾)에 매수된 것이요, 정조의 부정도 정신의 쾌락에 대한 방종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정치인의 무절제를 장사꾼의 이욕과 계교와 음부적 환락의 탐혹(眈惑)이 합쳐서 놀아난 것이라면 과연 극언(極言)이 될 것인가.

하기는 지조와 정조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오늘에 와선 이미 시대착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하긴 그렇다. 왜 그러냐 하면 지조와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부자연한 일이요, 시세를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과부나 홀아비가 개가(改嫁)하고 재취(再娶)하는 것은 생리적으로나 가정 생활로나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고 또 그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가와 재취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면서도 어떤 과부(寡婦)나 환부(鰥夫)가 사랑하는 옛짝을 위하여 또는 그 자녀를 위하여 개가나 속현(續絃)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마치는 그 절제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능히 어려운 일을 했대서만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본능고(本能苦)를 이성과 의지로써 초극(超克)한 그 정신의 높이를 보기 때문이다.

 

정조와 고위성이 여기에 있다. 지조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떡거리는 것이 자연한 일이지 못나게 쪼를 뿌린다고 굶주리고 얻어 맞고 짓밟히는 것처럼 부자연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 얼핏 들어 우선 말은 되는 것 같다.

 

여름에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하다가 가을 바람만 불면 단팥죽 장사로 간판을 남 먼저 바꾸는 것을 누가 욕하겠는가. 장사꾼, 기술자, 사무원의 생활 방도는 이 길이 오히려 정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변절자도 자기를 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자처한다면 별문제이다. 그러나 더러운 변절의 정당화를 위한 엄청난 공언을 늘어 놓는 것은 분반(噴飯)할 일이다. 백성들이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먼 줄 알아서는 안 된다. 백주대로에 돌아앉아 볼기짝을 까고 대변을 보는 격이라면 점잖지 못한 표현이라 할 것인가.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고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 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존자시(自尊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켜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조의 매운 향기를 지닌 분들은 심한 고집과 기벽(奇癖)까지도 지녔던 것이다.

 

신단제 선생은 망명 생활 중 추운 겨울에 세수를 하는데 꼿꼿이 앉아서 두 손으로 물을 움켜다 얼굴을 씻기 때문에 찬물이 모두 소매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떤 제자가 그 까닭을 물으매, 내 동서남북 어느 곳에도 머리 숙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무서운 지조를 지킨 분의 한 분인 한용운 선생의 지조가 낳은 기벽의 일화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가 지도자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지조는 이토록 삼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신들 뒤에는 당신들을 주시하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위의와 정치적 생명을 위하여 좀더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는 충고 정도이다. 한 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는 [채근담(菜根譚)]의 구절을 보내고 싶은 심정이란 것이다. 끝까지 참고 견딜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야당의 투사를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미끼를 기다리다가 후딱 넘어가는 교지(狡智)를 버리라는 말이다. 욕인(辱人)으로 출세의 바탕을 삼고, 항거로써 최대의 아첨을 일삼는 본색을 탄로(綻露)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충언의 근원을 캐면 그 바닥에는 변절하지 말라, 지조의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變節)이라 한다.

 

일제 때 경찰에 관계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바꾼 이가 있거니와 그런 분을 변절이라고 욕하진 않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파로 전향한 이는 변절자로 욕하였다. 권력에 붙어 벼슬하다가 야당이 된 이도 있다. 지조에 있어 완전히 깨끗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이들에게도 변절자의 비난은 돌아가지 않는다.

 

나머지 하나 협의의 변절자로서 불신의 대상이 되는 변절자는 야당전선에서 이탈하여 권력에 몸을 파는 변절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이름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다.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降書)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士)가 아니요, 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전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唾棄)되기는 했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을 위하여 몸소 치욕을 무릅쓴 업적이 있을 때는 변절자로 욕하지 않는다. 앞에 든 최명길도 그런 범주에 들거니와, 일제 말기 말살되는 국어의 명맥을 붙들고 살렸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민족 해방의 날을 위한 유일한 준비가 되었던 <맞춤법 통일안>, <표준말모음>, <큰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가 국민총력연맹 조선어학회지부의 간판을 붙인 것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하는 일도 없었다면 그 간판은 변절의 비난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좌옹(佐翁), 고우(古愚), 육당, 춘원 등 잊을 수 없는 업적을 지닌 이들의 일제말의 대일 협력의 이름은 그 변신을 통한 아무런 성과도 없기 때문에 애석하나마 변절의 누명을 씻을 수 없었다. 그분들의 이름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을 우리의 기억이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이분들은 반민특위에 불리었고, 거기서 그들의 허물을 벋겨주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명만 쓸 바에는 무위(無爲)한 채로 민족정기의 사표가 됨만 같지 못한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숙제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이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 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 다거나, 바람이 났거나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못해 봤다면 그건 변절의 낙인밖에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어떤 선비도 변절하여 권력에 영합해서 들어갔다가 더러운 물을 뒤집어 쓰지 않고 깨끗이 물러나온 예를 역사상에서 보지 못했다. 연산주의 황음(荒淫)에 어떤 고관의 부인이 궁중에 불리어 갈 때 온몸을 명주로 동여매고 들어 가면서, 만일 욕을 보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밀실에 들어가서는 그 황홀한 장치와 향기에 취하여 제 손으로 그 명주를 풀고 눕더라는 야담이 있다. 어떤 강간도 나중에는 화간이 된다는 이치와 같지 않은가.

 

만근(輓近) 30년래에 우리 나라는 변절자가 많은 나라였다. 일제 말의 친일 전향, 해방 후 남로당의 탈당, 또 최근의 민주당의 탈당, 이것은 20년이 넘은, 사상적으로 철이 난 사람들의 주착 없는 변절임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궤이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제 자신도 율(律)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민족이니 사회니 하고 나섰더라는 말인가. 지성인의 변절은 그것이 개과천선이든, 무엇이든 인간적으로는 일단 모욕을 자취(自取)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우리가 지조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다음의 한 구절이다. 기녀라도 늘그막에 남편을 쫓으면 한 평생 분냄새가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정부(貞婦)라도 머리털 센 다음에 정조를 잃고 보면 반생의 깨끗한 고절(苦節)이 아랑곳 없으리라.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 쓸 것이니,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든 탓으로 바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히 깨우치라. 한일합방 때 자결한 지사시인 황매천(黃梅泉)은 정탈(定奪)이 매운 분으로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평을 듣거니와 그 [매천야록]을 보면 민충정공, 이용익 두 분의 초년 행적을 헐떧은 곳이 있다. 오늘에 누가 민충정공, 이용익 선생을 욕하는 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분들의 초년을 모른다. 역사에 남은 것은 그분의 후반이요, 따라서 그분들의 생명은 마지막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도도히 밀려오는 망국의 탁류 - 이 금력과 권력, 사악 앞에 목숨으로써 방파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지조의 함성을 높이 외치라. 그 지성 앞에는 사나운 물결도 물러서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천하의 대세가 바른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때에 변절이란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어도 자기를 위한 36년의 선견지명(?)은 가졌었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형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소인기(小忍飢)하라.’ 이 말에는 뼈아픈 고사가 있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때 깨끗한 선비들은 나아가서 벼슬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들이 모여 바둑과 청담으로 소일하는데, 그 집 주인은 적빈(赤貧)이 여세(如洗)라, 그 부인이 남편의 친구들을 위하여 점심에 수제비국이라도 끓여 드리려 하니 땔나무가 없었다. 궤짝을 뜯어 도마 위에 놓고 식칼로 쪼개다가 잘못되어 젖을 찍고 말았다.

 

바둑 두던 선비들은 갑자기 안에서 나는 비명을 들었다. 주인이 들어갔다가 나와서 사실 얘기를 하고 초연히 하는 말이, 가난이 죄라고 탄식하였다. 그 탄식을 듣고 선비 하나가 일어서며, 가난이 원순 줄 이제 처음 알았느냐고 야유하고 간 뒤고 그 선비는 다시 그 집에 오지 않았다. 몇 해 뒤 그 주인은 첫뜻을 바꾸어 나아가 벼슬하다가 반정 때 몰리어 죽게 되었다.

 

수레에 실려서 형장(刑場)으로 가는데 길가 숲속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 수레를 잠시 멈추게 한 다음, 가지고 온 닭 한 마리와 술병을 내 놓고 같이 나누며 영결(永訣)하였다. 그때 그 친구의 말이, 자네가 새삼스레 가난을 탄식할 때 나는 자네가 마음이 변한 줄 이미 알고 발을 끊었다고 했다. 고기 밥맛에 끌리어 절개를 팔고 이쏠이 되었으니, 죽으면 고기맛을 못 잊어서 어쩌겠느냐는 야유가 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찾은 것은 우정이었다.

 

죄인은 수레에 다시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탄식하였다.

‘소인기, 소인기(小忍飢)하라.’고-

 

변절자에게도 양심이 있다. 야당에서 권력으로 팔린 뒤 거드럭거리다 이내 실세(失勢)한 사람도 있고, 지금 요추(要樞)에 앉은 사람도 있으며, 갓 들어가서 애교를 떠는 축도 있다. 그들은 대개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표면으로 성명은 버젓하나 뜻 있는 사람을 대하는 그 얼굴에는 수치의 감정이 역연하다. 그것이 바로 양심(良心)이란 것이다.

 

구복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 자기 변명은 도리어 자기를 깎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핑계는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왜 아기를 배개 됐느냐 하는 그 이야기 자체가 창피하지 않는가.

 

양가(良家)의 부녀가 놀아나고, 학자·문인까지 지조를 헌신짝같이 아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으니 변절하는 정치가들도 우리쯤이야 괜찮다고 자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시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 (全文)

 

󰏐 민족문학과 외국문학 (1) 조지훈의 <지조론>

세칭 청록파의 한 사람이며 일찍이 자연파로 규정된 이 시인(조지훈)의 사상 발전과정에서 6·25는 그로 하여금 <역사 앞에서>라는 시를 쓰게 했다. 그러나 이 시인은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보이는 마지막 ‘선비정신’을 조선어학회에서부터 지켜왔고, 만해의 유해를 수습한 이 선비 기질은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대문장인 <지조론>이 결코 우연일 수가 없으며, 이 지사적 품격은 그의 모든 시작보다 우위에 놓이는 정신의 높이며, 문자행위의 정도이다. 이러한 거의 단정적 표현에 어폐가 있다면 그의 시론 <시의 원리>를 펼쳐 볼 수 있다. 그 이론의 핵심은 생명의식에 놓여 있고, 시 이전의 시정신(詩精神, Poēsie)의 구명으로 일관된다. 따라서 반생명적인 모든 불합리가 시인에겐 가장 확실한 적이다.


●청춘예찬 : 민태원(1894-1935) 중수필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얼음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 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랑의 풀이 돋고, 이상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다. 오아이스도 없는 사막이다. 보이는 끝까지 찾아다녀도, 목숨이 있는 때까지 방황하여도, 보이는 것은 거친 모래뿐일 것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 남는 것은 영락(零落)과 부패(腐敗)뿐이다. 낙원을 장식하는 천자만홍(千紫萬紅)이 어디 있으며,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과실이 어디 있으랴?

 

이상! 우리의 청춘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크고 작고 간에 이상이 있음으로써 용감하고 굳세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석가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광야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轍環)하였는가 ? 밥을 위하여서. 옷을 위하여서, 미인을 구하기 위하여서 그리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커다란 이상, 곧 만천하의 대중을 품에 안고, 그들에게 밝은 길을 찾아 주며, 그들을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곳으로 인도하겠다는 커다란 이상을 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지 아니한 목숨을 사는가 싶이 살았으며, 그들의 그림자는 천고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현저하게 일월과 같은 예가 되려니와, 그와 같지 못하다 할지라도 창공에 반짝이는 뭇 별과 같이, 산야에 피어나는 군영(群英)과 같이, 이상은 실로 인간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라 할지니, 인생에 가치를 주는 원질(原質)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앞이 긴지라 착목(着目)한는 곳이 원대하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실현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보라, 청춘을 ! 그들의 몸이 얼마나 튼튼하며, 그들의 피부가 얼마나 생생하며, 그들의 눈에 무엇이 타오르고 있는가? 우리 눈이 그것을 보는 때에, 우리의 귀는 생의 찬미(讚美)를 듣는다. 그것은 웅대한 관현악(管絃樂)이며, 미묘(微妙)한 교향악(交響樂)이다. 뼈 끝에 스며들어 가는 열락의 소리다.

 

이것은 피어나기 전인 유소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시들어 가는 노년에게서 구하지 못할 바이며, 오직 우리 청춘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다. 우리는 이 황금시대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기 위하여, 이 황금시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하여, 힘차게 노래하며 힘차게 약동하다. (全文)

* 갈래 : 중수필, 서정적 수필

* 성격 : 관념적, 예찬적, 남성적, 웅변적

* 문체 : 강건체, 화려체

* 구성 : 병렬적 구성

· 청춘의 정열 찬미

· 청춘의 이상 찬미

· 청춘의 육체 찬미

· 청춘에 대한 당부

* 주제 : 청춘에 대한 찬미

* 출전 : [한국명수필선](1930)


●최만리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上訴文)

󰏐 요지

 

경자(庚子)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최만리 등(崔萬理 等) 상소 왈

 

󰆲 우리 나라는 조종 이래로 지성(至誠)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화제(華制)해 왔는데 동문동궤(同文東軌)할 이 때에 언문(諺文)을 제작한 것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다 하나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위배되어 전혀 근거가 없고 오히려 사대 모화에 수치가 된다.

 

󰆳 중국 이외의 문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이 있으나 이는 새로 언문(諺文)을 지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소합(蘇合)의 향(香)을 버리고, 당랑(螳螂)의 환(丸)을 취하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문명의 큰 누(累)가 되는 것이다.

 

󰆴 이두(吏讀)는 원래 한자와 떠날 수 없고, 이두로 인하여 한자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흥학(興學)에 도움이 된다.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사용하였기에 불편하지 않은데 이를 버리고 무익한 언문을 제작할 필요가 없다. 만일 언문을 제작한다면 모두 언문을 배우려 하기에 성현의 학(學)은 소홀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언문은 한자와는 다른 하등의 간섭이 없고 이를 사용하는 것은 학(學)에 손(損)이 있고 치(治)에 무익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

 

󰆵 언문을 사용함으로써 형옥(刑獄)이 잘 다스려진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중국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가 행해지고 있지만 형옥의 사이에 원왕(원통히 여김)이 지극히 많다. 형옥의 평, 불평(不平)은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옥리(獄吏)의 잘잘못에 있다. 따라서 언문으로써 옥사(獄辭)를 평이하게 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 언문을 실행하는 것은 국가의 풍속을 변하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므로 반드시 재상과 군신에게 문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행하지 않고서 이배(吏輩)공장들을 시켜 추진함은 천하후세에 누가된다. 언문 같은 것은 국가 완급(緩急)에 부득이한 일이 아닌데도 언문제작에 급급하는 일은 성궁의 쇠약을 부채질하니 신등(臣等)은 옳은 바를 모르겠다.

 

󰆷 동궁(東宮)은 덕성이 성취(成就)하였다 할지라도 계속 성학(成學)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하는데 문사(文士)의 육례(六禮)에 불과한 언문을 배워서는 안 된다. 이러한 언문은 만가지 치도에 하나도 이익됨이 없다.

 

상(上)이 상소를 보시고,

“너희들은 언문이 용음(用音), 합자(合字)가 옛 전자(篆字)와 반대된다고 하나 설총의 이두 또한 이두 제작의 본의는 백성을 편하게 하려 함인데, 언문 제작은 그 뜻이 아닌가? 너희들은 운서(韻書)를 알며, 사성칠음(四聲七音), 자모(字母)를 아느냐?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 하겠는가?

 

또한 상소 중에 신기(新奇)의 일예(一藝)라 했으나 그렇지 않고 노래(老來)하여 무료하여 다만 글을 가까이 할 뿐이다. 어찌 새 것을 좋아해서 만들었겠는가? 나는 연로하여 모든 업무는 세자가 전적으로 참가하는데 언문제작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세자가 동궁에만 있다면 어찌 환관이 어찌 일을 맡을 수가 있는가? 너희들은 신으로서 나의 뜻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 이 때에 의금부에 갇혔던 사람은,

󰋪 최만리(崔萬理) - 부제학(副提學)

󰋪 신석조(辛碩租) - 직제학(直提學)

󰋪 김 문(金 汶) - 직전(直殿)

󰋪 정창손(鄭昌孫) - 응교(應敎)

󰋪 하위지(河緯地) - 부교리(副敎理)

󰋪 송처억(宋處億) - 부수찬(副修撰)

󰋪 조 근( * ) - 저작랑(著作郞)

 


●탈고(脫稿) 안 될 전설(傳說) : 유주현(柳周鉉) 수필

벌써 여러 해 전 이야기다.

 

도회 생활에 심신이 피로해서 여름 한 달을 향리에 가서 지낸 일이 있다.

나는 그 때 우연히 만난 젊은 남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마 나는 생애를 두고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며, 필시 그들은 내 메말라 가는 서정에다 물을 주는 역할을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수행해 줄 것이다.

 

향리에는 내 형이 농사를 지어가며 살고 있다. 서울서 멀지 않은 곳으로서 물이 맑고 산이 높아 여름 한철은 도회 사람으로 하여금 선경(仙境)에 비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나는 그 여름 한 달을 원두막에서 살았다. 마침 형이 참외와 수박을 꽤 많이 심어 놓고, 밭두렁에다 높직한 원두막을 지어 놓았던 것이다. 그 원두막에서 낮이나 밤이나 혼자 뒹그르며 시장하면 참외를 따먹고 졸리면 잠을 자고 잠에 지치면 공상을 하고 그것도 시들하면 원고지에다 낙서를 하고, 역시 권태를 느끼면 풀 베는 아이들을 불러 익은 참외 따기를 해서, 잘 익은 놈을 고른 녀석에게는 잘 익은 놈을, 안 익은 놈을 고른 녀석에게는 선 참외를 한 개씩 상으로 안겨 주며 희희낙락하였던 것이다. (중략)

 

나는 경이의 눈으로 자연 앞에 외로이 서 있는 하나의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태연할 수가 없었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걸음이 그대로 산책이다. 잠시 후 여승은 발길을 돌려 내가 있는 원두막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숙인 이마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유난히 흰 살결을 한 원만한 턱을 가졌다. (중략)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우연하게도 역시 소낙비가 퍼붓는 어느 아침 나절 내가 있는 그 원두막을 찾아든 나그네 하나가 있었다. 서울서 왔다는 삼십 전후의 얼굴이 해사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아깝게도 팔이 하나 없었다.

“이 근처에 절이 없습니까?” (중략)

 

황혼이 넓은 들을 뒤덮었을 무렵이었다. 참외 밭머리에 사람 둘이 나타난 것을 보고 나는 가슴을 울렁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승복을 입은 여인은 합장(合掌)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석상이 되어 있었다. 이별 - 청춘의 이별인지 인생의 이별인지, 아니면 죄악과의 이별인지 하여튼 그것은 참회의 성스러운 자태로 보였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 남녀의 서글픈 전설을 뇌리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완전히 구상되지 않은 그 전설을 영원히 탈고시키지 않은 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 감상 : 이 수필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던져 준다. 소재적인 측면과 아울러 작가의 간결한 문체가 그리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일상 생활에 더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 속에 서 얻을 수 있는 심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토막(土幕) : 동랑 유치진 희곡(처녀작, 1932)

제2막

무대 : 읍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명서의 집. 외양간처럼 음습(陰濕)한 토막집의 내부. 온돌방과 그 에 접한 부엌. 방과 부엌 사이에는 벽도 없이 통했다. 천정과 벽이 시커멓게 그을은 것은 부엌 연기 때문이다. 온돌방의 후면에는 골방으로 통하는 방문이 보인다.

왼편에는 한길로 통한 출입구. 오른편에는 문 없는 창 하나. ······ 대체로 토막 안은 어둠컴컴하 다.

무대에는 명서 홀로 움직이지 않고 앉았다.

적막(寂寞)!, 바람 소리!

명서 : (혼잣말로) 집 안이 허퉁한 것 같구나. 초상난 집같이 ······.

(금녀와 그 어머니, 다시 나타나서 조용히 마루 끝에 앉는다. 금녀는 말없이 일을 시작한다. 명서는 골방으로 기어들어간다.)

명서 처 : (먹을 것을 끓이려고 불을 피우며) 오늘은 이래저래 일이 많이 밀렸지?

금녀 : 예.

명서 처 : 내일 장을 봐 먹으려문, 오늘 저녁은 또 밤샘을 해야겠구나.

(이웃 여자 등장)

이웃 여자 : 금녀네, 순돌네가 금방 떠났다메?

명서 처 : 왜?

이웃 여자 : 어이구, 저 망할 년 봐, 아무 말 없이! 내 돈 꾸어 간 것 속절없이 떼었구나. 앨 써 달걀 팔아 모은 돈을 ······.

명서 처 : 노자 보태 준 셈 치게나. (하략)

* 줄거리

① 제1막 : 이 열리면 문자 그대로 오두막집이 나오고 거기에 명서의 처가 남편을 나무라는 장면 이 나타난다. 그녀의 남편 명서는 일본에 건너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다. 마침, 삼조라 는 동리 청년이 일본에 건너간다. 그 인편에 역시 일본에 건너가 있는 아들에게 사연을 전하 도록 하기위해서다. 그 편지가 며칠 걸려도 완성되지 못했다. 이에 명서의 처가 남편에게 닦달 질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꾸물댄다. 그러는 동안에 삼조는 길떠난 채비를 다한 차림으로 나타난다. 이제 아들에게 쓰는 편지를 다써서 보내기에는 틀린셈이다. 부득이 명서 일가는 아들에게 전할 사연을 말로 한다. 그 내용은 대충 아들한테 곧 고향으로 나오라는 말 들이다. 그러지 못하면 돈이라도 부치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가난에 찌들대로 찌들었 다. 그 숨통을 아들을 통해 열어보자는 속셈들이 뚜렷이 나타난다.

 

삼조를 떠나보내고 또, 이웃 사람들이 쪼들리는 살림에 다투는 모양들이 나타나면서 구장이 등장한다. 그의 손에는 신문지가 들려 있다. 구장은 명수가 잡혀들어갔다고 말한다. 영서와 명서의 처는 물론 그 까닭을 묻는다. 구장은 그 죄목이 해방운동을 했다는 것이라고 알린다. 명서일가는 물론 그걸 믿지 않는다. 세상에는 같은 이름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서는 구장에게 불길한 소식을 가져 왔다고 화를 낸다. 구장도 화가 나고 어처구니가 없어 하면서 퇴장해버린다. 명서도 불길한 생각에 넋을 잃는다.

 

② 제2막 : 명서네 이웃에 사는 경선과 경선의 처가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전에 경선이는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부부 싸움을 하고 떠돌이를 한사람이다. 그가 나간동안에 그들을 집까 지 남의 손에 넘겼다. 그리하여 밤에 몰래 일가족이 도망치기 위해 잠깐 나타난것이다. 그들을 보내는 명서네의 심정도 참담하다.

 

경선네를 보낸 다음 명서의 처는 별안간 정신이상의 증상을 보인다. 오랜 가난에 아들명수의 소식을 듣지못한 긴장이 겹친 탓이다. 그 때 밖에서 우체부가 나타난다. 우체부는 소포를 전한 다. 그 소포는 명수네 일가가 목이 빠져라고 기다린 아들 명수가 보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삼 조가 보낸것이다. 내용을 펴보는 그들은 크게 놀란다. 거기에는 백골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야 궤짝에 쓰인 글자가 눈에 띈다. ‘최명수의 백골’ 결국 명수는 그들을 하늘 같이 믿는 명서네 일가 앞에 백골로 나타난 것이다.

 

* 시대배경 : 1920년대 일제 식민지하 빈한한 농 촌마을

· 제1막 : 192×년 가을

· 제2막 : 192×년 이른 봄 어느 날 초저녁부터 밤까지

* 내용 : 1920년대 절망적인 농촌을 배경, 일제의 악랄한 수탈상, 이에 대한 삶의 몸부림과 저항을 담고 있다. ‘토막’이라는 어둡고 숨막힐 듯한 분위기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서 삶의 기반을 상 실하고 철저하게 파멸해 가는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일제 하의 참담한 민족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 등장인물

· 최명서 : 병들고 가난한 늙은이. 생활능력이 없으나 가장으로서의 체통과 위엄은 가지고 있 다. 억압과 수탈을 당하면서도 농민 특유의 무지와 순종심으로 인해 역사의식도, 민족적 저항 감도 없이 살아가는 인물형.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울분과 저항의식의 절규를 터뜨린다.

· 명서의 아내 :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희망을 가지고 있는 생활력이 강한 아낙네. 그 러나 아들의 불행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변해가자 정신이상을 일으킨다.

· 금녀 : 명서의 딸로서, 병약한 처녀. 그러나 여러 인물 중 유일하게 예지를 가진 인물로서 오 빠위 행위에 대해 역사적, 민족적 의미를 부여한다. 나이가 어리면서도 부모와 달리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인내, 현실 극복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 강경선(별명 빵보, 술주정꾼, 허풍선이, 겁쟁이) : 명서 내외의 친구. 자신의 무능함을알고 있 음.

· 경선의 아내

· 삼조 : 허황된 꿈을 안고 일본으로 돈 벌러 떠나는 청년

 

* 구성 : 전2막( 사실주의적 수법의 희곡 )

① 제1막 : 발단, 전개

② 제2막 : 위기, 결망(파국)

· 명서의 집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행동이 집중됨

· 외양간처럼 음습한 분위기를 통해 빈곤이 제시됨

  ‘무대의 고정’이라는 것의 또 다른 의미

: 암담한 상황의 불가피성과 조여드는 느낌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암시

* 의의 : 이 작품은 극예술연구회에 의해 초연된 작품이다. 1920~30년대는 신파극(대중연극)의 전 성기였는데, 이것이 예술적 감동을 주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자 이에 새로운 연극, 혹은 정통 연극을 갈망하게 되었고, 극예술연구회는 이에 부응하여 상업주의적 대중극에 반기를 들고 서 구의 사실주의 연극을 수용, 공연했다. 이 작품은 ‘한국 근대극의 출발’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 다.

* 주제 : 일제의 수탈 속에서 황폐화해가는 농촌의 참상


●페이터의 산문 : 이양하 수필

(전략) 다음에 번역해 본 것은 직접 명상록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요, 윌터 페이터가 그의 [쾌락주의자 메어리어스]의 일장에 있어서, 황제의 연설이라하여, 명상록에서 임의로 취재한 데다 자신의 상상과 문식을 가하여 써 놓은 몇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 페이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세기말의 영국의 유명한 심리 비평가로, 아름다운 것을 관조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는 그의 ‘문예부흥’의 찬란한 문체도 좋아하니, 이 몇 구절의 간소하고 장중한 문체도, 거기 못지 아니하게 좋아한다. 그리고, 황제의 생각도 페이터의 붓을 빌어 잃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한층 아름다운 표현을 얻었다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한다.

 

사람의 칭찬받기를 원하거든, 깊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들이 어떠한 판관인가, 또 그들이 그들 자신에 관한 일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가를 보라. 사후의 칭찬받기를 원하거든, 후세에 나서 너의 위대한 명성을 전할 사람들도 오늘 같이 살기에 곤란을 느끼는 너와 다름 없는 것을 생각하라. 진실로 사후의 명성에 연연해 하는 자는 그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의 하나하나가 얼마 아니하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기억 자체도 한동안 사람의 마음의 날개에 오르내리나,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네가 장차 볼 일 없는 사람들의 칭찬에 그렇게도 마음을 두는 것은 무슨 이유인고? 그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참다운 지혜로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호머의 싯구 하나로도 이 세상의 비애와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나뭇잎과도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하략)


●한라산등척기(漢拏山登陟記) : 이은상 기행수필.

한라의 정상 !

최후의 돌뿌다귀를 밟고 올라서자 나는 두 팔을 뽑아 높이 들고 만세 만세 한라산 만세를 외치고 또 부르짖었다. (중략)

아느냐, 여기는 최고의 정상 ! 영혼아 잠을 깨라. ‘가위’에 눌린 듯한 인지(人智)를 벗어나라. 안예를 걷지 못하여 지금껏 흐릿한 세계에서 헤매고 허우적 거리던 모든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뛰쳐 나와 이 천지 대자연의 승언과 신비를 노래하므로 이 영원한 행복 속에 지금 네 몸을 잠그라.


 

●햄릿(Hamlet) : 세익스피어 비극

제3막

제1장 궁정 안의 한 방

왕, 왕비,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로젠크랜츠, 길든스턴 등장

왕 : 그러면, 아무리 돌려서 물어 보아도 알아 낼 수 없었단 말이오? 왕자가 어찌하여 이처럼 상 심하고 조용해야 할 나날을 소란케 하며, 난폭한 미치광이 짓을 하는지.

로젠크랜츠 : 왕자께서도 이상해지셨다는 말씀은 솔직이 시인하오나, 어째서 그렇게 되셨다는 이 유에 대해서 일체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길든스턴 : 게다가 탐지를 당하시는 게 싫으신 듯 저희들이 좀 캐물어 보려 해도 슬쩍 실성한 듯 하시면서 슬쩍 피해버리십니다.

왕비 : 기분 좋게 맞아 주던가?

(중략)

왕과 폴로니어스는 방장 뒤에 숨는다. 햄릿 등장

햄릿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쪽이 더 사나이다울까?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받아 도 참고 견딜 것인가? 아니면 밀려드는 재앙을 힘으로 막아 싸 워 없앨 것인가? 죽는다는 것 은 잠드는 일, 다만 그것 뿐이다. 잠들어 만사가 끝나 가슴쓰린 온갖 심뇌와 육체가 받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심으로 바라는 극치다. 죽음은 잠드는 일! 잠이 들면 꿈을 꿀 테지. 이승 의 번뇌를 벗어나 영원의 잠이 들었을 때, 그 때 어떤 꿈을 꿀 것인지 여기서 망 설이게 된다. 그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이 고해(苦海) 같은 인생을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그 렇지 않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의 사나운 비난의 채찍을 견디며, 폭군의 횡포와 세도가의 멸시, 버림받은 사랑의 고민, 끝없는 소송 사태, 관리들의 오만, 고귀한 인사에 가하는 저 소인배들의 불손, 이 모든 것을 참고 지낼 것인가? 한 자루의 단도면 쉽게 끝낼 수 있는 일. 그 누가 이 지리한 인 생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진땀을 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죽은 뒤의 불안이 남아 있으니까 탈이로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저 미지의 세계의 공포가 결심을 망설이게 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지. 알지도 못하는 저승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재의 재앙을 받는 게 낫다는 결론. 이러한 조심 때문에 우리는 더 겁장이가 되고, 결의의 저 생생한 혈색도 우울 의 파리한 병색이 그늘져 의기충천하던 대망도 흐름을 잘못 타 마침내는 실행의 힘을 잃고 마 는 것이 고작 아닌가? - 쉿, 아름다운 오필리어! 숲 속의 요정이여, 그대의 기도 속에 나의 모 든 죄를 빌어 주오.

오필리어 : 햄릿 왕자님, 요즘은 어떠하시온지요?

햄릿 : 고마운 말씀. 태평무사, 무사태평요.

(하략)

* 등장인물

· 클로디어스 : 덴마크의 왕

· 거어트루드 : 덴마크의 왕비. 햄릿의 어머니

· 햄릿 : 덴마크의 왕자. 선왕(先王)의 아들. 現王의 조카

· 폴로니어스 : 재상(宰相)

· 호레이쇼 : 햄릿의 친구

· 레어티즈 : 폴로니어스의 아들

· 오필리어 : 폴로니어스의 딸

· 볼티먼드, 코닐리어스, 로젠크랜츠, 길든스턴, 오즈릭 : 궁정 신하들

 

* 감상 : 엘리자베드 시대의 대표적 비극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이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사악함, 그리고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전 5막 20장의 이 작품은 수많은 아이러니를 제시한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어머니를 미워해야 하는 인간적 갈등(햄릿), 아버지의 원수이자 사랑하는 연인인 햄릿 때문에 절망하는 여인(오필리어), 권력을 쥐기 위해 형인 왕을 죽이는 인간의 탐욕(클로디어스) 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이 뛰어난 이유는 구성과 인물 성격 묘사의 탁월함 때문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나선 햄릿이 다시 복수의 대상이 되는 사전의 반전(反轉). 인간 심리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 등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햄릿의 죽음을 통해 운명의 아이러니 속에서도 인간이 지켜야 할 최고 가치가 곧 선(도덕심)임을 제시하고 있다.

 

* 줄거리

-제1막 : 동생 클로디어스의 음모로 생명과 왕관과 아내를 빼앗긴 덴마크의 왕이 망령으로 나타나 아들 햄릿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발단)

-제2막 : 햄릿은 망령에게서 들은 사실을 연극으로 꾸며 클로디어스 왕 앞에 공연함으로써 사건의 진위를 밝히고자 한다. (전개)

-제3막 : 햄릿은 연극을 보며 당황하는 왕을 보고 망령의 계시가 틀림없다는 심증을 굳히지만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복수를 못한다. (전개)

-제4막 : 햄릿은 영국으로 추방되나, 왕의 계략을 알고 덴마크로 돌아온다. 오필리어는 햄릿의 추방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성하여 죽는다. 위험을 느낀 왕은 레어티즈를 이용해 햄릿을 죽이려 한다. (위기)

-제5막 : 레어티즈와 햄릿은 왕이 독약을 묻혀 둔 칼에 상처를 입고, 왕비는 왕이 햄릿에게 주려고 준비하였던 독약이 든 술을 마시게 된다. 이 사실을 안 햄릿은 독약이 묻은 칼로 왕을 찌름으로써 결국 햄릿, 레어티즈, 왕, 왕비가 모두 죽게 된다. (절정, 대단원)

 

* 갈래 : 창작 희곡, 비극. 성격비극

* 배경 : 12세기 경 덴마크

* 주제 : 인간의 탐욕과 사악함으로 인한 갈등과 그 비극

 

󰏐 [문학과 영화]「햄릿」··········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 감독 프랑코 제피렐리.

 

셰익스피어의 시적 재능에 경탄하는 사람들은 그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원작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통탄한다. 예컨대 수필가 <찰스 램>은 셰익스피어 극의 공연불가론을 펴기도 했고, 윌리엄 해즐릿 같은 사람도 「햄릿」의 공연에 공공연한반대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희곡의 공연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극의 공연은 원작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좋은 수단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그동안 많이 영화화되었지만 아직까지 원작을 버려놓았다는 평을 받은 영화는 없다. 오히려 영국 BBC에서 텔레비전용으로 제작한 셰익스피어 전작 영화 시리즈는 세계 각국의 셰익스피어 애호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 첫번째 이유는 아마도 영화와 연극의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영화와 연극은 둘 다 대사와 연기를 필요로 하며, 공연을 전제로 해서 제작된다. 따라서 희곡을 영화화하는 경우에는 별도로 대본을 쓸 필요 없이 바로 원작의 대사를 갖다 쓰면 된다. 특히셰익스피어 극 영화에서는 셰익스피어 특유의 유려한 문장과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원작의 대사가 그대로 사용된다. 두번째 이유는 셰익스피어 극의 영화화 목적이 상업적이 아니라는 데 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 가장 잘 알려진 「햄릿」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1948년에 나온 흑백영화 「햄릿」(로렌스 올리비에 감독 주연)은 『셰익스피어도 자랑스러워할 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영국 연예계에 끼친 뛰어난 공헌으로 인해 후에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까지 받은 <로렌스 올리비에>는 이 영화에서 우울하고 사색적인 덴마크의 왕자 햄릿 역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 비평가들의 극찬과 함께 그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특히 올리비에가 멋지게 해낸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되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은 이 영화의 압권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형을 사색형과 행동형으로 나누어 전자를 햄릿형, 후자를 돈키호테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인간이 그렇게 단순하게 두 가지로만 분류되는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이론이 대두되었고 「햄릿」에 대한 이론 역시 A C브래들리나 도버 윌슨 등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90년에 리바이벌된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컬러영화 「햄릿」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는 한 좋은 예가 된다. 이 영화는 우선 현대의 속도감각에 맞게 빠른 진행을 보여주기 위해 원작의 많은 부분을 잘라냈으며 그 박진감있는 속도를 햄릿의 고뇌가 아니라 그의 복수로 귀결시키고 있다. 햄릿역을 맡은 멜 깁슨 역시 사색형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행동형 햄릿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그가기도하는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않을 때, 그것은 연약한 망설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지옥으로 보내려는 냉혹한 계산으로 그려진다.

 

제피렐리는 햄릿을 철저하게 복수를 계획하고 실천하는 행동인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또 햄릿의 애인 오필리어(진 시몬즈扮)에 비중을 두었던 올리비에와는 달리 제피렐리는 왕비(글렌 클로스扮)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제피렐리의 이와 같은 현대적 감각과 해석은 궁극적으로 셰익스피어 극 감상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화초(花草) : 이효석 경수필

꽃가게에서 꽃을 사들고 거리를 걸으면 길 가던 사람들이 누구나 다 그 꽃묶음을 부럽게 바라본다. 나는 사람들의 그 눈치를 아는 까닭에 꽃을 살 때에는 반드시 넓은 종이에 묶음을 몽땅 깊게 싸도록 꽃주인에게 몇 번이고 거듭 청한다. 그러나 요사이는 종이가 귀해서 길거리의 꽃장수는 물론이요, 큼직한 꽃가게에서도 전에는 파라핀지 그렇지 않으면 특비 포장지에다 싸주던 가게에서도 신문지를 쓰게 되었고 그것조차 넓은 것을 아껴서 좁은 토막 종이로 대신하게 되었다.

(서두부분)

 

· 파라핀지 : 파라핀 납을 먹인 종이

· 특비(特費) : 특별히 따로 내야 하는 가격

 

* 감상 : 이 수필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인식을 서정적으로 진술한 글. 이효석은 도시적 분열과 자연적 화해를 추구한 작가로 평가된다. 이 글에서도 그는 꽃을 대상으로 아름다움을 훼손하 지 않으려는 서정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지은이가 꽃을 사들고 갈 때 사람들의 시선이 번거럽고 귀찮기까지 하나 그 시선은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된다. **씨의 꽃선물에 대한 감상에서도 이효석 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 문체 : 간결체, 우유체

* 성격 : 사실적, 서정적

* 구성 : 3단계

* 주제 : 자연(꽃)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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